어쩐지 김일수교수님의 교과서를 보다 보면
다름 교과서와 다르게 형법이 부드럽게 다가온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바로 그런거 때문이었군요
(그렇다고 논리적으로 약하다는건 아니지만요 ^^*)
제가 형법을 보면서 때론 이 교수님의 의견으로 보고 무릎을 탁 친적도
많았는데 그 분의 삶을 보면서 저의 이 안일한 삶에 대해서
반성을 하게됩니다.
다시 그리스도의 품으로.............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받아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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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입니다.
매우 길지만, 김일수 교수의 사상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하고 알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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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60도 넘기지 않고 지난 세월을 반추하자니 쑥스럽고 송구스럽다.이 땅에는 사회적으로 내로라 하는 이도 많고,그늘진 곳에서 남몰래 덕을 쌓는 분들도 많다.나는 고려대 법대 교수로서 그저 평범한 자연인이다.이처럼 인간적으로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하지만 신앙생활만큼은 과히 남부끄럽지 않게 꾸려왔다고 나는 자부한다.현재 나의 신앙이 도화선이 돼 내 가족은 물론, 형제간인 7남매 모두 예수님을 영접했고,사촌들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이번 연재를 통해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싶다.
나는 1946년 8월 강원도 강릉 인근 시골에서 아버지 김병문과 어머니 함성녀의 2남5녀중 아들로는 첫째로 태어났다.농사를 지었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와 자식 교육에 남달랐던 어머니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보릿고개로 허덕이던 50,60년대 국민 대다수가 그랬듯 내 집안도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다.내가 처음으로 ‘예수님’의 존재를 알게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바로 손위 누이인 정순이 어느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당시 가풍은 조상을 극진히 모시는 유교집안이었다.누이는 교회에 나가면서 집안 제사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조상님께 절도 하지 않으려 했다.심지어 제사때면 신나하던 유기그릇 닦기도 거부했다.
집안의 유교적 분위기에 따라 당시 우리 집은 1년에 9차례나 제사를 지냈다.나는 갑자기 변한 누이의 태도를 곱지 않게 바라봤고 오히려 기독교에 반감을 키웠다.뒷날 알게 됐지만 당시 누이에게 기독교를 전한 이는 한국기독교협의회(KNCC) 총무 김동완 목사의 어머니였다.
62년 강릉고로 진학한 나는 넉넉지 못한 살림탓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다.가정교사로 머물던 집은 불교를 받들고 있었다.집주인은 오대산 월정사로 가 수시로 법회에 참가했으며 신도회장으로 각종 사업을 벌였다.이 때문인지 그집에는 당시 동양철학으로 이름 높던 탄허 승려가 자주 드나들었다.
집주인의 영향으로 나도 불교에 호감을 가졌다.방학이면 월정사에서 공부를 했고 실제로 탱화 등 불교문화나 불교철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되돌아보건대 고교시절 나는 참으로 어려웠다.초등학교 4학년때 아버지께서 갑자기 소천함에 따라 집안의 대들보 역할을 해야 했다.중고교시절 급우들 대다수는 쉬는 시간이면 공놀이 등에 여념이 없었지만 나는 영어나 독어 단어를 외었다.어린 나이에도 어렴풋이나마 내가 집안을 일으켜야 함을 깨달았다.
어렵게 공부한 끝에 나는 65년 고려대법대에 차석으로 입학했다.고려대를 노린 것은 장학금때문이었다.가세가 기울어 집에서는 등록금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4년간 장학금 지급을 약속받은 나는 입학후에도 공부벌레로 불릴 정도로 학업에 매달렸다.그 시절 일부 대학생들은 ‘하이칼라’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다녔지만 나는 삭발에 가깝게 짧게 깎았다.그 흔한 구두도 신지 않고 고무신을 신었다.겉치장에 들이는 비용이나 시간 모두 너무도 아까웠다.지금도 동창생들은 나의 이같은 학창시절을 지적하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물론 남에게 다소 혐오감을 줄 수도 있다고 여겼으나 그 당시로서는 그 것이 나에게 최선이었다.나는 대학 4년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반드시 성공을해 기운 가세을 일으켜야 한다는 장남으로서 책무를 느꼈기 때문이다.입학후 반년 정도 지나자 내가 즐겨앉던 도서관 한켠의 자리는 누구도 앉지 않는 지정석이 돼버렸다.
그렇다고 공부밖에 모른 것은 아니었다.나른한 봄이면 급우들과 우이동으로 놀러가는 낭만도 알았고 중고교 시절에는 백일장에서 수차례나 입상할 정도로 글짓기도 곧잘 했다.대학을 마칠때까지도 나는 오히려 불교와 친숙했다.
예수님을 본격 영접하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던 69년이었다.1969년 2월25일 나는 사법시험을 봤다.마침 그날은 4년간의 대학생활을 마감하는 졸업식이 치러지던 날이었다.지금처럼 응시자도 많지않고 워낙 뽑는 인원도 적어서인지 최종합격자는 한달뒤인 3월말에 발표됐다.결과는 의외로 쓴 잔이었다.이미 3학년때 1차시험을 통과했고 나름대로 준비도 충실히 해왔기에 이토록 쉽게 떨어지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강릉고교 재학시절 수학여행도 가지않고 학업에만 매달렸는데…,노는 것에 대한 도덕적 불안감으로 항상 긴장하고 살아왔는데…”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세상에서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칠동안 방에 틀어박혀 바깥 출입을 삼갔다.눈물로 지샌 밤이었다.
상심에 젖은 내게 정순누이가 다가와 “고시에 떨어진 것을 감사히 생각해라”고 조용히 말을 건넸다.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했다.지금의 시련은 너를 좀 더 크게 쓰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누이의 위로였다.눈물이 왈칵 솟구쳤고 그토록 귓둥으로 흘려보냈던 하나님 말씀이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귀에 쏟아져 들어왔다.현재 안암제일교회 당회장인 장성춘 목사 역시 당시 전도사 신분으로 나를 달래준 고마운 분중 하나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4월 첫째 주일에 스스로 교회에 나갔다.정신적 공황상태에서 신앙이 생기자 스스로 놀랄 정도로 몰입하게 됐다.다음날 부터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했고 다시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학교로 나가던 첫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만나는 후배들마다 “저토록 열심히 공부해도 떨어지는 구나”라며 수근대는 듯했다.주위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귀를 틀어막고 다시 학업에 매달렸다.졸업뒤 고시공부는 나를 때로 지치고 흔들리게 했다.
이때 같은 교회를 다니던 박초선 전도사의 도움이 컸다.박전도사는 틈날 때마다 주옥같은 신앙서적을 건넸다.금쪽같은 수험기간이었지만 시간을 쪼개 신앙서를 한장씩 넘겼다.하루 13시간 가량 각종 법률서를 보는 생활속에서도 가급적 하루에 한번은 신앙서를 펼쳐보려고 노력했다.
당시 박전도사가 넘겨준 워치만니의 로마서주석,성경핸드북 등은 말씀에 대한 지평을 넓혀주었다.그중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이 특히 나를 감동시켰다.참다운 마음의 평화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에 동행하는 자세로 살라는 게 구안록의 골자였다.기독교 사상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 것이다.그때까지 시험실패에 따른 상처를 말씀을 통해 치유하려했던 나는 더욱 적극적 신앙생활을 하며 나누는 삶을 살기로 작정했다.
이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고 교회행사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그해 5월 신앙을 한단계 더욱 성숙시키는 계기가 왔다.
교회 출석 한달여만에 동성감리교회에서 부흥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고시공부를 제쳐놓고 집회에 참석,필동교회 목사인 김성남 목사로부터 평생 가슴 깊이 새길만한 말씀을 들었다.김목사는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며 예수 위주의 생활을 강조했다.
‘그래 믿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자.고시합격을 위한 신앙생활은 저차원의 기복신앙일 뿐이다.예수님을 위한 것이라면 막노동도 마다하지 말자’
신록이 짙어만가던 5월의 한 토요일 나는 ‘예수님께 몸바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말씀에 심,끊임없이 신앙서적을 독파했고 그 결과 1년쯤 되자 기독교에 대한 의문점을 거의 해소하게 됐다.기독교에 대해 무엇을 묻더라도 거침없이 말할 정도가 되자 전도에 나섰다.바쁜 수험생활이었지만 체험한 그 귀한 말씀을 혼자 나누기가 아까웠다. 교내에서 마주치는 선후배들에게 열심히 진리를 전파했다.
사실 전도의 첫 열매는 부흥회 직후인 그해 6월 맺었다.학교에서 심심치 않게 마주치던 2년 후배 채이식씨를 전도하는 데 성공했다.채씨는 지금 고려대법대 교수며 할렐루야 교회 성도로서 믿음의 동반자로 지내고 있다.초기 전도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또 한 분은 김사일 변호사다.당시 김변호사는 나의 전도를 완강히 거부했다.김변호사는 뒷날 독실한 크리스천 동급생과 결혼해 지금은 누구 못지않은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신앙과 학업을 병행하던 나는 그해 겨울 공부에 전력을 다했다.사법시험날이 코 앞에 닥쳤기 때문이다.본격적 시험준비에 임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실패로 합력해 선을 이룰 것”이라고 다짐했다.곰곰이 따져본 뒤 공부방식도 바꿨다.우선 두서없이 모았던 요약정리집을 버리고 다시 요점정리를 간단하게 했다.수험기간중 보고 들은 내용들이 중요해 보여 모두 요약했으나 정작 마무리 정리에는 큰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체득했다.나름대로 학습계획을 짜 꾸준히 공부하고 이를 아는 범위 내에서 충실하게 써내기로 작전을 바꿨다.
해를 넘기던 1969년 12월31일도 도서관으로 향했다.그날은 폭설로 표현할 만큼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통행금지가 있던 그 시절 연말은 젊은이들에게 ‘해방의 날’이었다.이날만큼은 통금이 해제됐기 때문이다.통금도 없는 연말인데다 때마침 눈도 퍼부어 도서관은 한낮부터 텅 비었다.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공부를 했다.
책을 보다 지치면 소담스럽게 쏟아지는 눈발을 쳐다보고 다시 책에 얼굴을 묻곤 했다.공부를 마치고 도서관을 나서던 밤 11시30분쯤,도서관에는 나 혼자뿐이었다.책가방을 들고 눈쌓인 운동장으로 발길을 돌렸다.연말에다 서설도 탐스럽게 내려서인지 산책을 하고 싶었다.운동장을 한바퀴씩 돌면서 한해를 정리했다.되돌아보면 예수님을 알고 거듭 태어난 원년이었다.
“올해는 하나님을 알게 된 뜻깊은 한 해였습니다.앞으로는 주님안에서 생활하고 매사 말씀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법시험 합격에 대해서도 기도했다.합격 뒤 법과대에서 복음을 전하는 교수로 써달라고 간구했다.
“하나님,수석합격을 허락하면 법률가보다는 학생들을 복음으로 돌보는 교수가 될 것이고,평범한 성적으로 합격한다면 사람낚는 어부가 되겠습니다”
눈쌓인 운동장에 주님을 향한 사랑을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써넣었다.30분 후면 70년대가 시작되던 날 밤,목숨처럼 매달려온 사법시험이 채 두달이 남지 않은 60년대 마지막 날 밤이었다.
1970년 2월 마지막주에 제11회 사법시험이 있었다.대학 4년과 졸업후 1년간의 수험생활이 이 시험으로 판가름나는 것이었다.시험은 나름대로 자신있게 치렀으나 결과는 또 낙방이었다.이번에는 지난해처럼 괴롭거나 슬프지 않았다.하나님께서 무언가 깊은 계획을 숨겨놓고 그 계획에 따라 나를 탈락시킨 것이라고 마음 먹었다.
불합격이 확정된 바로 다음날 등교했다.법대 학장이던 박재섭 교수님은 “전혀 떨어지리라 생각하지 못했다”며 다시 시작하라고 다독였다.불합격 사실이 창피하지 않았지만 후배들 보기가 민망했다.후배들마다 나를 보고 수근대는 듯했다.형법 강의를 맡고 있던 남흥우 교수님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교수 연구실 이용을 부탁했다.교수님의 허락으로 연구실에서 차근차근 수험준비를 다시 했다.무엇보다 이 곳에서는 성경도 볼 수 있었고 틈날 때마다 기도도 할 수 있어 좋았다.
수험생활에 다시 돌입한 지 3개월만에 뜻밖의 낭보가 날아 들었다.그해 5월 사법시험령이 전면 개정된 것이다.당시 시험을 주관하던 총무처에서 법조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합격자 정원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히고 그해 7월 바뀐 제도로 첫 시험을 치르겠다고 공고했다.
지금도 사법시험 합격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때는 하늘의 별따기였다.시험령 개정 전까지 총점 평균 60점 이상,과목당 40점이 넘어야 합격할 수 있었다.번듯한 직장으로 은행이 고작이던 그 시절 사법시험은 전국의 내로라 하는 수재들의 각축장이자 꿈의 무대였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주신 기회구나.이 배려를 놓치지 말고 꼭 합격하자”
나는 쾌재를 부르며 감사기도를 올렸다.2월 시험 뒤 느슨하게 생활해온 대다수 수험생과는 달리 나는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이번 시험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시험은 나흘동안 치러졌다.시험 마지막 날은 아무 것도 입에도 대지 못할 만큼 지칠대로 지쳤다.이런 나를 보고 어머니는 꿀에 재운 수삼과 사과 등을 건넸다.시험은 만족스럽게 치렀다.
시험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겸 고향으로 내려갔다.고향 집에서 보는 여름 밤하늘은 참으로 황홀했다.고향집에서 그동안 읽고 싶던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했다.시험 한달후쯤 사법시험 합격자가 발표됐다.고향에 머물던 나는 라디오를 켜고 뉴스를 들었다.뉴스 진행자가 수석 및 최연소 최고령 합격자 명단을 차례로 읽어 나갔다.합격은 했지만 수석은 아니었다.총무처에 문의해본 친구들이 7위 합격이라고 알려주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교수보다는 사람을 낚는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시는 구나”
내심 수석합격도 기대했던 나는 교수직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70년8월26일 합격증을 받았다.그날은 마침 내 24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71년 1월 사법연수원에 입학했다.2년 가까이 동료들과 각종 실무를 익힌 나는 졸업을 앞두고 진로문제로 고심했다.검사나 판사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내 성품과 행동거지를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은 판사를 권했다.그러나 나는 검사를 희망했다.현장에서 숱한 피의자를 만나는 검사야말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에는 제격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면접에서 검사로 임용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무난히 검사가 되리라고 기대했던 나는 관보로 검사임용 결격사유를 통고받았다.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임용탈락을 통보받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사법시험 합격 점수도 높았고 연수원 성적도 좋아 이해가 가지 않았다.서정각 당시 법무부 국장에게 달려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졌다.서국장께서는 “자네 자질이나 성품으로 보아 교수가 더 어울릴 것 같네”라며 학계로 나갈 것을 권유했다.한 걸음에 모교인 고려대로 달려가 은사님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교수님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당시 법대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이종원 교정국장을 소개했다.뒷날 법무부 장관까지 오른 이국장은 연좌제로 신원조회에 걸렸다고 알려줬다.
연좌제라니….그러고보니 짚이는 게 있었다.바로 아버지였다.아버지는 광복 이후 민청 면 선전부장을 지냈고,6·25 당시 좌익에 가담해 부역했다.초등학교 4학년 때 소천한 아버지가 내 앞길을 가로 막으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이국장은 부친께서 이미 돌아가신데다 부역 정도도 가벼우니 손을 쓰면 구제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하지만 검사 세계에서 그 정도 흠이라면 인사상 불이익은 물론 공직생활 내내 불필요한 꼬리표를 달고 다닐 것이라며 포기를 종용했다.
하는 수 없이 73년 사법연수원 수료 뒤 변호사 개업을 택했다.그해 5월에는 평생 반려자인 당시 숭의여고 음악교사 이신자를 만나 결혼했다.서울 도렴동에 사무실을 냈으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좌절이 너무 깊고 상처도 너무 컸다.퇴근 후에는 TV를 보며 소일을 했다.그런 나를 보다 못한 아내가 투덜댔다.고작 이렇게 살려고 그 어려운 고시 공부를 했느냐며 실망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해 9월 고려대법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2년여의 학업 끝에 76년 2월 석사과정을 끝냈고 그해 3월 내친 김에 박사과정에 등록했다.박사과정에 입문한지 두 달이 채 못돼 은사 김형배 교수께서 독일 정부에서 장학생을 모집한다고 귀띔했다.아데나워장학재단에서 독일에서 유학할 한국 학생 2,3명을 뽑고 있다고 김교수는 일러줬다.아데나워재단이 인문 과학 예술 등 모든 학문을 총망라해 유망한 한국학생을 선발,3년간 생활비와 장학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당연히 시험은 독일어로 치른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현실에 안주해 2∼3년 더 변호사 생활을 하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이라며 유학을 적극 권유했다.유학은 탐났으나 독일어에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고민 끝에 남산 근처 독일문화원의 ‘괴테 인스티튜트’를 떠올렸다.문화원 관계자는 초급반의 경우 선착순으로 뽑는다고 했다.
초급반에 등록하기 위해 접수 시작 전날 괴테인스티튜트 인근 여인숙에 묵었다.주인에게 통금 직전에 깨워달라고 부탁했으나 긴장한 때문인지 다음날 새벽 3시30분쯤 스스로 일어났다.남산 골목길을 뛰어올라 새벽 3시50분쯤 괴테 인스티튜트 정문앞에 도착했다.접수번호는 1번이었다.문화원 초급반에 다니는 한편으로 주변에서 독일어를 잘하는 이를 수소문했다.다행히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 남편이 당시 경희대 독어 교수였다.문화원 독어수업을 하루도 빠짐없이 듣고 집에서는 그 교수로부터 독어 회화를 사사했다.하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할 수 없이 면접을 앞두고 예상질문을 외웠다.
내가 살아온 과정,장래 희망,유학목적 등을 수백번이나 독일어로 암송했다.면접일을 하루 앞둔 일요일 대전에서 셋째 처제의 결혼식이 열렸으나 참석지 않았다.정신이 흐트러질까 우려했기 때문이다.아내와 장인 장모는 다소 서운한 눈치를 보였으나 모른 체했다.
독일인 면접관은 내가 예상하고 준비한 대로 질문했다.발음 등은 형편없었지만 평소 연습한 것처럼 성의있게 답변했다.문을 나서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한 대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했다.그날 저녁 2등으로 합격했으며 출국은 77년 9월경이라는 통보를 받았다.뛸듯이 기뻤다.
일단 유학이 결정되자 사무실 문을 닫기로 했다.76년 12월31일,그동안 정들었던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짐을 정리했다.눈내린 모교 교정을 걸으며 예수영접의 기쁨을 감사드린 69년 연말에서 꼭 7년이 지난 날이었다.
짐정리로 사무실 식구 모두 바쁘던 그날,고향 친구가 찾아와 친구의 사촌형이라며 농부 차림의 노인을 소개했다.그 노인은 당시 중학교 교사인 자신의 사위가 교통사고로 숨졌는데,사고를 낸 택시회사의 협박과 우격다짐으로 원만한 보상이 어렵다고 분해 했다.
상심한 노인은 당시로는 거액인 400만원을 들고 상경해 변호사 사무실을 두어군데 전전하다 내게로 온 것이다.나는 보상받을 수 있는 금액을 산출해준 뒤 수임료 액수도 대강 말해줬다.그러나 친구에게는 사무실 문을 닫기 때문에 사건을 맡을 수 없다고 난색을 표시했다.그 노인은 수임료가 의외로 적었는지,아니면 나에게 믿음이 갔는지 사건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친구도 어차피 집에서 쉴 것이라면 한 두 사건 정도는 맡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소외된 약자를 위한 권리대변 업무가 변호사의 본연의 임무이자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맡기로 했다.만약 유학 전까지 재판이 끝나지 않으면 잘 아는 친구 변호사에게 그 사건을 맡길 심산이었다.그 무렵 우연치 않게 사건을 하나 더 맡게 됐다.당시 산업은행에 근무하던 고향 친구가 교통사고로 숨진 이모부 보상문제로 사건을 의뢰했다.
버스기사였던 친구 이모부는 승객 신분으로 근무하던 회사버스를 타고 가다 전복사고로 숨졌는데 이 또한 보상이 여의치 않았다.보험회사가 사고 버스회사의 운전기사라며 보험금을 쥐꼬리만큼 책정했기 때문이다.지금보면 어림없는 주장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국민들의 권리의식은 물론,법률서비스 이용도가 떨어져 보통 사람이라면 보험회사의 주장에 굴복하기 십상이었다.
결국 본의아니게 두 사건을 맡게 됐다.억지춘향 격으로 떠맡은 그 사건들은 다행스럽게도 출국 전인 8월에 모두 끝났다.당시 그 의뢰인들로부터 받은 수임료로 집을 30평대에서 60평대로 두 배나 넓힐 수 있었다.지금 살고 있는 대지 60여평 규모의 용두동 집이 그 때 마련한 것이다.
사무실을 정리한 뒤 학원과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독일어 학습에 매달렸다.출국 직전까지 새벽 오후 저녁반 강의를 들으며 하루 내내 학원에서 살다시피 했다.출국을 눈앞에 두고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쏟아졌다.
“이젠 변호사로 이력도 꽤 붙기 시작했고,유학을 마치고 돌아와도 강단에 선다는 보장이 없는데 꼭 가야만 하나.과연 나의 선택은 올바른 것인가”
그 순간 한동안 잠들었던 나의 꿈이 새록새록 솟아났다.그 옛날 사법고시 수험준비로 하루하루가 고단했지만 밤하늘을 보며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전파하는 교수가 되자고 맹세하지 않았던가.사람을 낚는 검사가 못 됐다면 원래 꿈꿨던 대로 교수가 돼야 하는 게 아닌가.자,떠나자.
1977년 9월,독일로 출국했다.해외 출국이 흔치 않던 시절 이국에서 마주치는 모든 풍광이 새롭기만 했다.선진국으로 알려진 독일은 국민 대다수가 검소한 생활을 했다.뮌헨대에서 법학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정식 입학이 이듬해 5월이기 때문에 독어회화와 이곳 사람들의 관습 익히기에 주력했다.
한인교회에 나가며 신앙생활을 한 것도 물론이다.신앙에 대한 열망으로 기존 한인교회에 나갔지만 다소 실망했다.이곳 한인교회는 거룩한 예배장소라기보다는 향수에 젖은 교포들의 친목모임 성격이 짙었다.예배는 다소 형식적으로 드리고 흘러간 옛 노래나 흥얼대는 교포들의 사교장이었다.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가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었다.그러나 이 문제는 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사항은 아니었다.
1978년5월 정식 유학생활이 시작되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과중한 학업부담으로 책에 파묻혀 지내야 했다.학교와 집을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의 연속이었다.독일의 법학은 신학 철학 사회 심리학이 모두 녹아든 총체적 학문이었다.
가족과 나 모두 이국생활에 차츰 적응되면서 어느새 두 해가 훌쩍 지나갔다.벌써 논문 주제를 발표해야 하는 때가 벌써 온 것이다.80년 12월까지 논문 주제를 제출하고 이를 심사받아야 했다.만약 연구실적이 수준에 미달되면 독일 정부의 지원금이 끊기고 3년 고생도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당시 담당교수는 형법으로 이름 높던 록신 교수였다.록신 교수는 학문적으로는 매우 깐깐한 교수였다.단 한번에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사실 서른 넘은 나이에 시작한 외국어는 한계가 있었다.법률용어나 학문적 개념은 자기 나라 말로도 의미 파악이 어려운데,고작 3년 배운 외국어로 감이 쉽게 잡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유학후 2년의 세월도 적응기간에 불과했다.
고민 속에서도 12월은 점점 다가왔다.내게 주어진 논문과제는 ‘인간 존엄성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인간 존엄성이라는 게 말 그대로 너무 포괄적이어서 주제를 설정하기 어려웠다.법학뿐 아니라 인접 학문을 두루 살펴보고 그 의미에 대한 정의를 명쾌하게 내려야 했다.
너무 고민하다보니 스트레스성 위염에 걸렸다.어려운 때일수록 하나님께 의지했다.학교 연구소 부근 외딴 길을 산책하며 수시로 기도했다.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지금도 그 당시 내가 붙잡고 기도하던 산책길과 나무가 아스라이 떠오른다.
록신 교수는 내가 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연구 방향을 올바로 설정했는지 궁금해했다.주제 발표를 한달 정도 앞둔 11월의 어느날.그날도 여느 때처럼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그 때까지도 ‘인간 존엄성’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답답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기도후 뭔가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인간의 존엄은 자기존재에 대한 존엄이라는 확신이 들고 그때까지 머리 속에 미로처럼 얽혀있던 언어의 의미도 말끔히 정리됐다.집을 가던 길을 멈추고 연구실로 되돌아와 이를 요약 정리하기 시작했다.인간의 자기존재의 존엄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합친 뒤 이를 바탕으로 논문의 기초를 짰다.이 기초 위에 형법의 의미를 하나씩 접목해나갔다.
일단 확신이 서자 빠르게 써나갈 수 있었다.하루 14시간씩 예비 논문작성에 매달려도 서너장 정도 밖에 쓸 수 없었다.내 나라 말이 아닌 독일어였기 때문이다.드디어 논문주제 발표날인 80년 12월23일이 왔다.
독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논문주제 발표문을 정리,A4 용지 15장 내외로 요약해 23일 오후 1시쯤 제출했다.발표시간인 오후 2시에 겨우 맞춰 낸 셈이다.발표 순간 그동안 고민하고 연구했던 내용을 찬찬히 풀어갔다.앞으로 쓸 논문의 주제를 설명하고 주제에 맞춰 앞으로의 연구진행 방향 등도 함께 제시했다.정신없이 발표하고 난 뒤 평가교수들의 반응을 살폈다.
모두 조용했다.성공 여부를 쉽사리 가늠할 수 없었다.지도교수인 록신이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매우 탁월했다”고 총평을 했다.록신 교수는 “당신이 지금까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는데 지금 들어보니 연구방향을 제대로 짚었고 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지녔음을 알게 됐다”고 추켜세웠다.록신 교수는 고민한 흔적이 많고 연구 접근방법도 훌륭하다고 덧붙였다.
독일 조교들도 다가와 축하인사를 건넸다.가슴이 뿌듯했다. 발표회때 제출했던 파일을 뒷날 록신 교수 연구실에서 찾아보니 다른 발표자 파일보다 내 것에 특정 부호나 밑줄을 많이 그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예비심사가 무사히 통과됨에 따라 앞으로는 장학금 걱정없이 연구에 매달릴 수 있었다.이제 논문만 제대로 쓰면 되는 것이다.
이 무렵 우리 부부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큰딸 문정과 작은딸 효정이 유치원에 가기 싫어 했다.당초 나와 아내는 현지 적응을 이유로 출국 당시 각각 4,3,1세인 딸과 아들을 외가에 맡겨 놓고 떠났다.유학 초기 나와 아내는 아무런 부담없이 함께 공부했다.한국에서 음악을 전공한 아내는 뮌헨 무지크호흐뮬레에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했다.아내가 2년여의 학업 끝에 석사과정을 마친 뒤 우리는 아이들을 독일로 불렀다.
어느덧 6,5,3세로 훌쩍 자란 아이들은 처음에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특히 문정과 효정은 문화적 충격 탓인지 유치원 등교를 곧잘 거부했다.나와 아내는 등교때마다 딸들의 손을 붙잡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어린 것들이 상처받지 않고 이 곳의 아이들과 사이좋게 지내도록 도와주소서.언어는 수단일 뿐입니다.하나님의 언어로 이들의 서로 교통하도록 열어주세요”
기도 덕분인지 아이들은 이내 독일생활에 적응했다.등교시간 기도는 아이들이 귀국한 후에도 고등학교 때까지 지속됐다.아들 주은 역시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 등교때마다 새벽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있다.기도하는 습관이 정말로 중요함을 독일 유학중 몸소 터득했다.
사실 유학중에는 자녀교육이 문제다.아이들 교육에는 독일인인 루디와 프리다 부부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이 부부는 유학기간 내내 우리 가족과 정을 나눴다.남편 루디는 선천성 심장질환으로 아이를 갖지 못했다.이 때문인지 어린이 사랑이 남달랐다.
60년대 선교회 소속으로 충북 보은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던 프리다는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부부는 당시 뮌헨 교외에 살면서 내 아이들을 자주 초대했다.아이들로서는 독일의 가정과 문화를 체득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아이들은 뮌헨 교외의 푸른 숲과 호수,형형색색의 꽃을 만끽할 수 있었다.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한 문정은 독일 체류시절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색채감각을 익혔다고 털어 놓았다.아이들 모두 어린 시절 보았던 독일에 대한 인상이 아직도 가슴 깊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논문 주제발표를 끝낸뒤 박사 논문을 쓰기 까지는 대략 2∼3년의 기간이 소요됐다.시간적으로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신앙생활에 주력했다.우리 부부가 유학갔을 당시 뮌헨에는 한인교회가 딱 하나 있었다.회장을 맡았던 나는 단순한 친교가 아닌 성도간의 뜨거운 신앙 교류를 원했다.
때마침 80년 가을 한국으로부터 한 분의 선교사가 오셨다.현재 녹번동 충신교회 담임 목사인 안재은 목사였다.안선교사는 국제결혼한 한·독가정을 섬기기 위해 왔다며 교회 이름도 한독교회로 지었다.이 교회로 옮기고 싶었지만 한인사회의 분열이 우려돼 선뜻 의견을 피력하지 못했다.
한독교회가 첫 예배를 올리던 80년 11월 나는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뒤 한독교회를 찾았다.두 교회의 예배시간이 달라 가능한 일이었다.단 세 가정을 앞에 놓고 안선교사는 설교하다 찬송시간이면 피아노를 치는 등 정신없이 분주했다.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인력이 남아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너는 속히 내게 오라”는 디모데후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안선교사를 찾아 교회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의외로 안선교사는 거부했다.자신은 한독가정의 사역을 띠고 왔으며,교회는 성도들의 판단으로 자리 매김되는 곳이 아니라 주님이 사역하는 사역장이라고 말했다.
갑자기 낯이 뜨거워졌다.그 사건을 통해 나의 교만을 깨달았고 겸손을 배웠다.뒷날 안선교사는 나의 교회 이적으로 교민사회가 분열될까 두려워 거절했다고 털어놓았다.하지만 결국에는 먼저 다니던 성도들의 양해로 한독교회로 자리를 옮겼다.한독교회의 초창기 성도수는 불과 13명이었다.식구가 단촐해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국제결혼으로 고국과 연을 끊고 살았던 성도들이 하나 둘 나오면서 교회도 활기를 띠었다.
독일생활이 생소한 안선교사는 나를 수시로 필요로 했고,나 역시 개척교회를 통해 신앙의 도전을 받았다.성도가 아프거나 부부싸움 등으로 출석하지 못했을 경우 안선교사는 나를 찾았다.박사논문을 준비중이었지만 흔쾌히 따라갔다.한독교회의 심방은 사실 고행이었다.성도들이 서로 떨어져 살다보니 30∼40㎞는 보통이고 심지어 100여㎞를 내달릴 때도 있었다.
신기한 것은 논문의 진도였다.한 눈 팔지 않고 하루를 꼬박 매달려 도 논문 완성량은 겨우 2,3장 정도였고 심방을 다녀와 반나절을 투입해도 2,3장을 메웠다.처음에는 스스로도 이해가 안됐으나 그만큼 집중력을 갖고 매달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로구나”며 무릎을 치기도 했다.
당시 한독교회에는 한국인과 결혼한 독일인들이 꽤 있었다.예배에서 통역을 맡았던 나는 이들과 친교시간을 통해 꽤 깊게 사귈 수 있었다.이들과의 교류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큰 도움이 됐다.독일 대학에서는 외국학생이라고 특별 대우를 하지 않는다.비교적 늦게 독일어를 배운 나로서는 어법이나 문장에 자신이 없었다.
82년 여름,2년여의 노력 끝에 논문을 500장 정도로 완성했지만 과연 제대로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논문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독일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당시 뮌헨대 법대를 졸업한 환경부 공무원과 고등학교 독일어 교수가 번갈아 교정을 봤다.법 전공자가 어색한 법률용어를 집어내고 독어학자가 맞춤법과 문장을 봐줬다.그리고 독일어 타자가 거의 완벽한 당시 뮌헨대 학생이 밤새 타자를 쳤다.내 박사학위 논문은 이렇게 탄생했다.
논문 주제발표를 끝낸뒤 박사 논문을 쓰기 까지는 대략 2∼3년의 기간이 소요됐다.시간적으로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신앙생활에 주력했다.우리 부부가 유학갔을 당시 뮌헨에는 한인교회가 딱 하나 있었다.회장을 맡았던 나는 단순한 친교가 아닌 성도간의 뜨거운 신앙 교류를 원했다.
때마침 80년 가을 한국으로부터 한 분의 선교사가 오셨다.현재 녹번동 충신교회 담임 목사인 안재은 목사였다.안선교사는 국제결혼한 한·독가정을 섬기기 위해 왔다며 교회 이름도 한독교회로 지었다.이 교회로 옮기고 싶었지만 한인사회의 분열이 우려돼 선뜻 의견을 피력하지 못했다.
한독교회가 첫 예배를 올리던 80년 11월 나는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뒤 한독교회를 찾았다.두 교회의 예배시간이 달라 가능한 일이었다.단 세 가정을 앞에 놓고 안선교사는 설교하다 찬송시간이면 피아노를 치는 등 정신없이 분주했다.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인력이 남아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너는 속히 내게 오라”는 디모데후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안선교사를 찾아 교회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의외로 안선교사는 거부했다.자신은 한독가정의 사역을 띠고 왔으며,교회는 성도들의 판단으로 자리 매김되는 곳이 아니라 주님이 사역하는 사역장이라고 말했다.
갑자기 낯이 뜨거워졌다.그 사건을 통해 나의 교만을 깨달았고 겸손을 배웠다.뒷날 안선교사는 나의 교회 이적으로 교민사회가 분열될까 두려워 거절했다고 털어놓았다.하지만 결국에는 먼저 다니던 성도들의 양해로 한독교회로 자리를 옮겼다.한독교회의 초창기 성도수는 불과 13명이었다.식구가 단촐해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국제결혼으로 고국과 연을 끊고 살았던 성도들이 하나 둘 나오면서 교회도 활기를 띠었다.
독일생활이 생소한 안선교사는 나를 수시로 필요로 했고,나 역시 개척교회를 통해 신앙의 도전을 받았다.성도가 아프거나 부부싸움 등으로 출석하지 못했을 경우 안선교사는 나를 찾았다.박사논문을 준비중이었지만 흔쾌히 따라갔다.한독교회의 심방은 사실 고행이었다.성도들이 서로 떨어져 살다보니 30∼40㎞는 보통이고 심지어 100여㎞를 내달릴 때도 있었다.
신기한 것은 논문의 진도였다.한 눈 팔지 않고 하루를 꼬박 매달려 도 논문 완성량은 겨우 2,3장 정도였고 심방을 다녀와 반나절을 투입해도 2,3장을 메웠다.처음에는 스스로도 이해가 안됐으나 그만큼 집중력을 갖고 매달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로구나”며 무릎을 치기도 했다.
당시 한독교회에는 한국인과 결혼한 독일인들이 꽤 있었다.예배에서 통역을 맡았던 나는 이들과 친교시간을 통해 꽤 깊게 사귈 수 있었다.이들과의 교류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큰 도움이 됐다.독일 대학에서는 외국학생이라고 특별 대우를 하지 않는다.비교적 늦게 독일어를 배운 나로서는 어법이나 문장에 자신이 없었다.
82년 여름,2년여의 노력 끝에 논문을 500장 정도로 완성했지만 과연 제대로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논문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독일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당시 뮌헨대 법대를 졸업한 환경부 공무원과 고등학교 독일어 교수가 번갈아 교정을 봤다.법 전공자가 어색한 법률용어를 집어내고 독어학자가 맞춤법과 문장을 봐줬다.그리고 독일어 타자가 거의 완벽한 당시 뮌헨대 학생이 밤새 타자를 쳤다.내 박사학위 논문은 이렇게 탄생했다.
83년 8월18일,모교인 고려대에서 첫 강의를 했다.69년 12월31일 복음을 전하는 교수로 써달라고 간구한지 꼭 14년만의 일이다.변호사에서 학생,그리고 교수로 변신하게 됐다.
캠퍼스로 돌아와 처음 착수한 게 학원 복음화 사역이었다.그 해 가을 한국대학생선교회 등 각종 기독단체에 속한 학생들을 한데 모아 초교파적인 기도모임을 만들었다.매주 한차례 갖는 이 기도모임에 첫해에는 90여명이 참석했으나 갈수록 학생수가 늘어나 현재는 수백명을 헤아리고 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이같은 기도모임을 계기로 교내 다른 과에서도 기도모임이 들불처럼 번졌다는 사실이다.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로 87년에는 ‘예수믿는 고대인’ 행사를 개최했으며 그 무렵 하나님과의 정기적인 만남을 위해 교내에 채플시간을 마련했다.또 고려대 기독인연합회를 통해 기독인 한마당을 이끌기도 했다.
이처럼 학원 복음화에 열중하던 나를 또 한번 변화케 한 사건이 일어났다.86년쯤으로 기억된다.당시 250여명의 학생을 앞에 놓고 강의 하던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전공강의와 함께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그 때 한 학생이 갑자기 일어나 이의를 제기했다.그 학생은 “우리는 형법 강의를 들으러 왔지 특정 종교에 대한 선전이나 전도 대상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다”라며 강력히 항의했다.나름대로 이유있는 항변이었다.나는 순간적으로 너무 당혹스러웠다.그 학생의 주장을 모두 들은 뒤 소속을 물어보니 그는 교내 ‘한국사상연구회 회장’이라고 응답했다.
이 문제를 놓고 이튿날 새벽기도에 매달렸다.“하나님,신학공부를 다시 시작해 신학교수가 되는 게 옳은지,아니면 학원 복음화를 포기해야 하는지 인도해 주십시오”
기도에 열중하던 순간 요한복음 1장4절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고,형법도 생명과 연관이 있으므로 강의를 예수의 논리와 접목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형법강의를 하되 그 내용에 생명 사랑 등 그리스도의 사상을 덧붙인다면 더욱 심오하고 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88년부터 차례로 출간된 한국형법 1,2,3,4권 시리즈였다.학원복음화가 어느 정도 결실을 맺자 이후에는 기독 교수로서 사회할동에도 나섰다.그리스도의 향기는 학원뿐만 아니라 사회로도 널리 퍼져야 한다는 게 예나 지금이나 나의 지론이다.
이에따라 처음 벌인 사업이 89년 시작한 사형폐지운동이었다.행형제도를 연구하는 기독인 형법 교수로서 당연히 벌여야 하는 사회운동이었다.95년에는 낙태반대운동을 시작했다.하나님에 뜻에 따라 잉태된 생명을 채 빛도 보기 전에 없애는 행위는 분명 죄악인 것이다.95년부터 추진해온 기독교 교도소 설립운동은 이제 결실의 단계에 접어 들었다.
자신의 삶을 공개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쑥스러운 행위일 것이다.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하지만 이번 연재를 계기로 지나온 삶을 깊게 반성할 수 있었고 신앙을 더욱 단련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크게 내세울 것도 없지만 굴곡도 많은 삶이었다.최저생활에 가까웠던 학창생활,좌절의 연속이었던 청년기,어려웠던 유학생활,그리고 후학양성과 하나님 사업에 열중하고 있는 현재….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과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게 참된 신앙인의 자세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앞으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늘 기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