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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인가?
● 율법에 대한 가르침의 결론 - 완전!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가장 크고 어려운 장애물은 마음속에 있는 정욕과 욕심이며 성인들의 완전한 길로 들어서려는 노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옳은 말이지요. 우리는 완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완전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완전을 요구하셨습니다.
창세기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또, 하나님은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완전을 요구하셨습니다.
신명기 18: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또한, 예수님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전을 요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완전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도 완전이 불가능하다고 거짓 교리에 속아 거의 모든 목회자와 신자들이 완전을 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저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진리가 다시 회복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완전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했는데, 그것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ㄱ) 과연 완전은 이생에서 불가능한가?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이 땅에서 완전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역시 거의 모든 목회자들이 그렇게 설교하고 있고, 그래서 신자들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저도 비교적 최근에 잠시 그런 착각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9:16-17, 20-21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깨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것은 예수님과 부자 청년 사이에 오간 대화입니다. 그런데 양용의 교수님은 완전을 이 구절과 연결시켰습니다. 즉 완전을 구원에 필요한 조건으로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9:16-21에 따르면 '제자가 되는 것'(21절) '완전하여지는 것'을 요구한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 곧 5:20의 '더 큰 의'는 다름 아닌 5:48에서 진술된 '완전함' 그 자체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동일한 완전함이 영생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즉, 제자가 되고자 하는) 부자 청년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설명을 처음 읽을 때 저에게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주님은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야 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설명하고 계십니다(20절). 문맥상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의 완전입니다. 때문에 저는 본문이 궁극적인 구원의 조건(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이지 그리스도의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완전의 교리를 내려놓고 '설사 완전이 가능하다고 해도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거의 없지 않을까? 그런데 큰 의미가 있을까?'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완전에 대해 관심을 끄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이 요구한 것은 비록 온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특이한 사항이 있기는 하지만 이웃사랑에서 끝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거나 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명령이 없습니다. 또, 궁극적인 구원의 조건으로 우리에게 온전한 수준의 원수 사랑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여섯 번째 반제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저는 이 깨달음을 통해 본문이 존 웨슬리가 주장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오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본문은 궁극적인 구원에 필요한 완전일 뿐 완전성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완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정 수준 궁극적인 구원에 필요한 '범위에 있어서의 완전'(사랑의 범위)과 온전 성화가 이생에서 가능함을 알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수준에 있어서의 완전'입니다. 그런데 48절은 둘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 웨슬리가 주장한 완전성화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완전이 존재하며 이생에서 도달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완전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완전이 실제로 존재하며 도달 가능하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확실히 증명해드리고자 합니다.
A)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이것은 찰스 피니가 자주 한 말입니다만, 로이드 존즈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불가능한 것을 하나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산상설교의 어떤 가르침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해석은 거짓됨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에게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이 불공평하실 것인데,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매우 기초적이고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이 원리를 어렴풋이 완전에 적용했습니다.
"자녀를 보고 너희 부모만치 되라고 하지 못하겠는가. 초목은 재배하고 가축은 길들이고 인간은 수양을 한다고 하나 그 근본 종자를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보리를 아무리 가꾸어도 벼가 되지 못하고, 개를 아무리 길들여도 사람이 못됩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치 않고는 아무리 해도 죄악의 자식입니다.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은 아무리 수양하더라도 공자와 석가만치 될는지 모르나, 하나님만큼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를 가르칠 때 불가능한 일을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결코 부모가 불가능한 일을 그 자녀에게 명하지 않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열 살 된 아들더러 쌀 한 섬을 지고 오라고 하겠는가! 신명(神命)은 성신 받으면 가능하게 명하십니다."
그리고 곽선희 목사님은 확실하게 이 원리를 완전에 적용했습니다.
"필자는 강의를 할 때, 가끔 성도들에게 '사람이 완전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전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저는 다시 묻기를 예수님께서 너희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래도 완전할 수 없습니까? 하면, 몇 명은 완전할 수 있다고 별로 자신 없는 대답을 하지만 아직도 많은 수가 완전할 수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저는 또다시 이 본문을 읽으며 '너희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는데 왜 완전할 수 없습니까? 하고 재촉을 하면 조금씩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사람이 완전할 수 있다고 긍정하게 됩니다. ...
역사상 지금까지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 없었다 해도 하나님께서 완전하라고 하셨으면 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완전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하라고 하셨으면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완전하라고 하셨으면 분명히 완전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완전할 수 있음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완전하지 못한 것은 우리의 잘못이요, 그 책임 역시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잠재적인 완전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기본적인 신앙입니다. 사람은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있으므로, 온전하지 못한 모든 잘못은 나의 잘못입니다. 분명히 할 수 있었는데 내가 하지 않았습니다.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입니다."
속이 시원하지요! 옳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명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온전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 자체가 온전이 가능하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믿어야 합니다.
B) 성경이 거듭 완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경에 보면, 완전에 대한 성구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다 소개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중 결정적인 두 가지만 소개하려 합니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성경 자체가 우리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성경은 단계적으로 세 가지 목적을 위해 주어진 책입니다. 먼저, "구원에 이르는 지혜"(15절)를 주어 구원하고, 다음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성장시키고,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성도들을 온전케 하려고 주어진 책입니다.
골로새서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또한, "우리"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바울뿐 아니라 모든 목회자의 설교와 권면의 목적이 성도들을 완전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케 하기 위해 주어진 성경을,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르쳐야 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완전케 하기 위해 설교하고, 성도들은 완전을 목표로 삼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완전이 존재하지 않고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C) 성경이 거듭 완전한 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완전에 대한 더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완전을 명령할 뿐 아니라 완전한 자들(완전해진 자들)에 관하여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욥기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기 9:21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욥기 12: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욥기 27:5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욥기 31:6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사무엘하 22:21-27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온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시편 18편 20-26절에도 이와 똑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26: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시편 37:37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시편 64:4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시편 119:1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잠언 2: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잠언 2:21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잠언 11:5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
잠언 11:20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잠언 20:7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잠언 29:10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누가복음 1:5-6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을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고린도전서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빌립보서 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어떻습니까?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때문에 저는 먼저 완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 완전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추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존 웨슬리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완전론이란 술어는 당신들이 반대할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적인 술어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의미를 결정짓는 것이다."
옳습니다! 완전은 성경적인 술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면 완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한편, 주석깨나 읽은 목사들은 마지막에 인용한 두 구절이 완전이 아니라 다른 것을 뜻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구절들도 완전을 뜻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잠시 후 따로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D) 성경뿐 아니라 교회사에도 완전한 자들이 있었다!
완전이 존재하고 도달 가능하다는 마지막 증거는, 교회 역사상 완전에 도달한 많은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읽은 책에도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그중 다섯 가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기 원합니다.
먼저, 레오날드 레이븐힐의 『기도로 부흥하라』라는 책에 보면 존 플레처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영국, 마델리의 존 플래처(John Fletcher)는 성인이었다. 그 마을에 있는 술주정뱅이들이 그들의 모자를 벗어서 경의를 표하며 '저기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로버트 사우디(Robert Southry)는 플래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보기 드물게 재능과 덕성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어떤 시대나 어떤 나라에도 그보다 더 열렬한 신앙을 갖고, 완전한 자비심을 가진 사람을 낳은 적이 없다. ... ' 이삭 테일러(Isaac Taylor)는 '플래처는 전혀 땅을 밟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비세속적인 성인이었다'라고 말했다. ... 로버트 홀(Robert Hall)의 증거는 다음과 같다. '플래처는 신적인 사랑의 열정으로 타오르던 천사이다. ... 그는 거의 습관적으로 휴거의 축복된 희망을 기대해 왔던 것처럼 보인다.' 딕슨(Dixon) 박사는 존 플래처는, 사도시대 이래 지상에 존재한 사람들 중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웨슬리는 천사 같은 존 플래처의 유능한 손에 번창 일로에 있는, 아직은 소년과 같은 감리교를 남기고 자신은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웨슬리 자신이 플래처의 임종 예배를 인도했으며 ... 웨슬리는 이 훌륭한 사람의 장례식에서 설교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과 생활이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플래처처럼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하나님께 헌신적인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렇게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며, 영원의 이편에서 이러한 사람을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습니다.'"
또, 찰스 피니의 책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에 보면 이런 놀라운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젊은 시절에 나는 경건하고 기도를 아주 많이 하는 어떤 나이 많은 할머니를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깊이 느끼게 해주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그녀와 만나서 성화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찰스, 자네가 하는 행동을 조심하게! 나중에 후회할 일을 하지 말게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아들 중에 한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의 경건함을 눈으로 보면서 아주 놀랐습니다. 그녀는 그를 위해 오랫동안 아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그 아들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내가 경험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정죄라고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어. 지금까지 나는 인식할 만한 죄를 지어본 적이 없단다. 내 영혼은 하나님과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 교제를 누리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나는 기도로 하나님의 자비의 보좌에 끊임없이 나갔단다."
또, 로버츠 리어든의 『아주사 부흥』이라는 책에 보면 포우비 팔머(~1874)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포우비 팔머는 1807년에 태어났으며 '성결운동의 어머니'로 불린다. ...
그녀는 기독교인의 완전에 대한 웨슬리의 교리에 관심이 있었으며 남편과 함께 '완전한 성화'를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
팔머는 결코 자신을 설교자로 주장하지 않았다. ... 그녀는 강단 뒤에 서서 성경적 주제들을 강해했으며 남자 설교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군중을 끌어 모았다. ... 한 동료 설교가는 다음처럼 적었다. '그녀는 독특하고 그녀가 너무나 흠모했던 웨슬리의 스타일을 생각나게 했다. 나는 머리와 가슴 모두에서 솟아나는 그 감동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 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으려고 숨을 죽이고 경청했다.'"
또, 바실 밀러가 쓴 『기도로 매일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라는 책에 보면 기도의 사도 존 하이드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야, 신이라고 신!
존 하이드는 하나님 곁에서 가까이 걸으며 수많은 힌두교 신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힌두교도 의사 한 사람이 존의 사생활을 낱낱이 조사하여 약점을 폭로하기로 계략을 세웠다. 그는 힌두교 신자 한 사람을 사주하여 그리스도인인 척 위장하고 하이드에게 접근하게 했다. 그렇게 접근한 사람을 하이드는 진심으로 환대하였고 더욱이 그가 기독교 신앙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자 며칠 더 머물다 가라고 청하였다. 그 의사가 노리던 대로 되었던 것이다. 이에 그 원주민은 의사 친구가 부탁한 대로 하이드의 사생활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나흘쯤 지났을 때, 그 원주민이 하이드 곁에서 몰래 달아나 의사 친구에게 말했다.
'그는 흠이 없는 사람이야. 트집 잡을 데가 없어. 그는 사람이 아니야, 신(神)이라고 신!'
인도인 의사가 하이드의 사생활을 염탐하여 얻은 답이 그것이었다. 존 하이드가 그를 아는 인도인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진한 자국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렇게 '흠이 없어 보이는' 신령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존 하이드가 인도 땅에서 죽었다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인도인들이 그의 무덤 옆에 사당을 지어 '신'으로 섬기려 했을 것이라는 어떤 선교사의 말은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었다."
또한, 알프레드 자이어가 썬다 싱에게 직접 들은 것을 썼다는 『천국과 영의 세계』라는 책에 보면 마하리쉬의 간증이 나옵니다. 솔직히 저는 이 간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완전 성화의 실례라 그대로 소개해드립니다.
"지금으로부터 318년 전에 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회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30살 되던 해에 나는 세상을 단념하고 밤에는 철야기도하고 낮에는 명상하며 신의 신비를 통찰하고 신령한 일에 관한 지식을 얻을까 하여 수행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고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나의 영혼은 점점 쉼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영혼의 평강을 갈망하게 되었다.
영적 고통의 와중에 몸부림치던 어느 날 인도에서 온 기독교 성자라는 사람의 소식을 들었다. 그가 전하던 구세주가 나의 혼란을 도울 수가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내 마음 가운데 그 성자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어느 날 그분이 나를 찾아오셨다. 그분은 슬픔과 낙담으로 허우적거리는 내 영혼을 격려하기 위해 예수님에 대하여 많이 말해 주었는데 예수님의 지상생활의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에 관해서, 죄인 구원의 능력에 관해서, 또 타락한 자들에게 보이시는 그의 사랑과 보호하심에 관해 주로 설명하셨다. 그 말들은 이상하게 나의 심령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내적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 성자는 몇 날이고 계속 예수님에 대한 것을 들려주었고 그럴수록 내 심령은 구주께 완전히 정복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기쁨과 평안을 가지고 그 스승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새로운 기쁨이 내 영혼에 흘러 들어옴과 동시에 다른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이 나를 감싸 안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그 스승이 바로 유명한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조카인 제르나우스였다.
여기 이 양피지 신약성경은 그가 선물해 준 것으로 내게는 보물이 되었다. 이 성경은 콘스탄틴 황제 때 필사된 불과 몇 권 가운데 하나이다. 프란시스 자비에르 신부가 오랫동안 사용하다가 나의 스승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그 후 스승과 헤어져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75년간 내 나이 105살 때까지 전도하였다. 그 결과 21개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때는 더 이상 활동적인 일을 할 수 없어서 은거하여 쉬면서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중부기도로 주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인생을 마치기로 결심하였다.
이곳은 평화와 안식을 위한 완전한 천국이다. 내 주위에는 수천 가지 열매와 향료식물들이 천지에 널려있어 자연 동산을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나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다. 그중 어떤 것은 갖가지 질병에 특효를 내는 것도 있고 활력을 주는 즙을 내주는 것도 있고 먹으면 기력을 회복시키는 것도 있다. 겨울이 되어 밤이나 낮이나 눈이 오면 곰들이 굴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한데 어울려 누워 있으면서 서로를 따뜻하게 하고 포근하게 해주었다. 동굴 속에서 몇 년을 지낸 후 육신의 장막을 거두어야 되겠다는 것을 깨닫고 천국의 본향에 갈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비록 내 나이가 많이 먹었어도 육신이나 정신의 기능이 아주 쇠퇴했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어느 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앉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를 본향의 집으로 불러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갑자기 동굴 안에서 윙윙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기도했다. 오, 하나님 이런 일 뒤에는 어떤 숨겨진 신비가 있는지 당신의 종에게 나타내주소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소서. 그때 누군가 나의 눈을 만져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손이 옮겨지는 순간 나의 영안이 열렸다. 내가 보니 동굴 안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가득하였다.
천군 천사들이 천국으로부터 내려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뒤에는 그들의 왕, 그리스도께서 천국에서 내려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얼른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경배를 드렸다. 주님께서 나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시며 '충성스런 나의 종아 지금 너에게 결단코 죽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주노라. 너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육체 가운데 살리라. 때가 가까웠다. 이후부터 너는 지상의 나의 교회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낼지니라. 이것은 너의 특별한 봉사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나는 새로운 심령 곧 죄와 모든 오염에서 깨끗하게 된 심령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독특한 특권이 있는데 그것은 영으로써 세계 여러 지역을 심방하는 것이다. 그들만의 필요와 약함을 알지 않고서는 내가 여러 다른 교회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날의 남은 시간들은 영으로써 여러 사람과 여러 지역을 방문하는 일로 소일하게 된다. 또한 영으로써 행하는 중 나의 육신은 동굴 안에 그대로 누워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고인이긴 하나 우리와 동시대 사람인 피터 와그너 박사의 고백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생전에 완전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했습니다.
"거룩(성결)에 대한 개혁파와 웨슬리적 접근법
내가 보기에는, 거룩(성결, 성화) 분야에서 우리의 형편없는 실행을 유발시키는 중요한 요소는 기독교 전반에 걸쳐 개혁파의 성화론의 편만한 영향력이었다. ... 나는 거룩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내 일생을 그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또 나는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성화의 여정을 이루어 내지 못할 것이라고 배웠다. ...
이제 나는 성화에 대한 웨슬리 교단의 교리(온전한 성화)가 성경이 거룩(성결)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정확한 방식이라는 의견을 개진한다. ... 나는 우리가 거룩하기를 사모하고 거룩하기를 힘써야할 뿐만 아니라 거룩해지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 않고 온 종일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거룩함이 어느 하루에 일어날 수 있다면 그 날 이후 그 거룩함은 하루하루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야 한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를 지을 가능성 없이 하루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우리는 매일 '시험에 들지 말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지라도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일 돌아다니고 시험은 닥쳐올 것이다. 그러나 시험은 죄가 아니며, 따라서 우리는 시험이 올 때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저녁에 하루를 돌이켜보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주님 제가 당신에게 거스르거나 다른 사람들을 거스려 죄를 짓는 것 없이 하루를 살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또 『거룩한 자가 되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참고로 이 책의 원제는 "혁명적인 삶을 위한 혁명적인 성결"입니다.
"신학적인 거침돌
만약 내가 틀리지 않다면,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성결한 삶을 살도록 하는 데 방해가 되는 중요한 장애물 중의 하나는 소위 신학자들이 말하는 성화에 대한 개혁 장로교 교리의 만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의 개인적인 신학적 성향은 개혁 장로교입니다. 초창기에 나는 풀러 신학교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장로교 신학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 성화에 대한 장로교 교리가 성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사렛 교회나 구세군, 또는 다양한 감리교회 등에서 나타나는 성화에 대한 웨슬리적 관점은 성화에 대해 더 적절한 접근을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
이전에 나는 거룩함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결코 성화를 이룰 수는 없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내가 만약 훌륭한 기독교적 삶을 산다면, 성화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진보를 이룰 수 있지만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나는 결코 거룩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틴 루터, 존 칼빈, 존 낙스 등과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에 뿌리박은 개혁 장로교 신학은 하나님의 위대한 거룩하심의 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 나의 주제는 개인적인 거룩함인데, 장로교들은 이러한 영역에서 많은 도움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성화에 대한 장로교 교리를 잘 반영하는 구절 중의 하나는 '주님만이 거룩하시다'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만이 거룩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이것은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의 거룩함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을 일순간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지만, 나와 여러분 도한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은 이 두 가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이것은 도달할 수 없는 꿈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내 삶에 있어서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담한 고백이 나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나는 저녁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죄를 지을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죄를 지을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실은, 어제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어제 죄를 지을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오늘 밤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가지는 좋습니다. ...
거룩함은 뭔가 비현실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해지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룩함은 가능합니까? 예, 가능합니다.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 해 전 당시 김선도 목사님이 담임하셨던 광림교회에서 열린 전국목회자세미나에서 피터 와그너 박사가 수천 명의 목회자 앞에서 "저는 어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아직까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오늘도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하루를 끝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가능하다고 역설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또, 오륜교회에서도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옳습니다. 완전은 실제로 존재하고 이 땅에서 도달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완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거룩의 목표를 상향조정하십시오. 완전성화를 목표로 추구하고 살아가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더욱 크고 놀랍게 쓰임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