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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일 [연중 제8주일]
루카 6,39-45
눈먼 인도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운명
어느 나라건, 어느 회사건 눈먼 인도자를 가진 시민이나 직원들의 운명은 그 인도자의 운명과
같게 됩니다.
아무리 잘 나가더라도 잘못된 인도자를 뽑아 망하고 마는 나라의 예는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라고 하십니다.
부모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도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눈먼 인도자를 알아보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우리가 인도자를 정할 때 그러면 말에서 어떤 내용이 나오는 것에 유념하면 될까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잘못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타인에게 돌리며 타인의 눈의 티에만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잘한 것 자기 덕, 못 한 건 다른 사람 탓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분명 좋은 인도자일 수 없습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이런 인물이 많지만, 오늘은 미국에서 아직도 잘못된 인도자였다고 비판받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소개합니다.
리처드 닉슨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큰 정치적 스캔들인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하버드에 합격하였지만, 집이 가난한 이유로 지방대 나온 열등감의 소유자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맞붙은 사람은 존 F. 케네디입니다.
케네디가는 미국에서도 재력과 정치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가문입니다.
1960년 미국 역사상 첫 TV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잘 준비된 케네디에 비해 닉슨은 마치 병 걸린 사람처럼 비쳤습니다.
이 TV 토론에서 케네디는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닉슨의 정책을 비판하며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닉슨은 경험 부족을 비판하면서 케네디를 공격했지만, 그의 공격은 관객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습니다.
사람을 공격하는 이유는 열등감 때문입니다. 케네디는 오히려 자신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며,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비방하는 대신 정책의 차이를 부각시킨 점이 중요한 사항입니다.
몇 년 뒤 1968년 인기가 없는 민주당 허버트 험프리와 붙었음에도 간신히 극미한 차이로
승리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처음부터 재선을 준비하였습니다.
돈을 모으기 위해 많은 로비자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재선을 위해 민주당 선거캠프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큰 위기에 몰립니다.
이때 그는 자신을 도왔던 법률 고문 존 딘(John Dean)에게 이런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려
했습니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존 딘이 법정에서 닉슨의 모든 악한 면을 폭로함으로써 닉슨은 재선이 되었음에도 스스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닉슨은 끝까지 대통령이 하는 모든 행위는 위법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며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함은 말을 들어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반대의 경우입니다.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한 3조 재산을 가진 억만장자 글렌 스턴스가 90일 동안 100불로 100만 달러를 버는 도전이 TV에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차를 사고팔고 집을 수리해서 팔며 1억이라는 종잣돈을 모아 그것으로 바비큐 대회에 나가 1위를 함으로써 자기 브랜드를 만들고 90일 만에 75만 달러의 가치를 받았습니다.
도전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도전에 너무 감사하며 특히 자신과 함께 이 도전을 한 이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했습니다.
실패한 것은 자기 탓이고 이만큼 한 것은 핑계 대지 않고 일해준 직원들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보며 상대의 눈의 티를 보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 자신의 죄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될 자격도 없다고 여겨 부제품까지만 받았습니다.
자기가 수도회의 장상이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얼마나 많은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이 있습니까?
그저 자기 들보만 보려고 해도 이렇게 훌륭한 리더가 됩니다.
하물며 우리가 장차 우리나라를 맡길 인도자를 뽑는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고도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인도자가 될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면
우리 자신들이 눈먼 이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일 [연중 제8주일]
복음: 루카 6,39-45
사실 내 흠결이 가장 큰 것이 분명한데...
젊은 수도자들의 수련장 역할을 할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수련장은 수도회의 미래를 책임질 후배 수도자들의 전반적인 양성을 책임져야 하니 어깨가 많이 무겁습니다.
수련장은 이태리어로 Maestro, 영어로는 Master, 그러니 말마디 그대로 스승이요, 바꿔 말하면 수도자들을 만드는 장인(匠人)입니다.
주로 주어지는 일은 미우나 고우나 늘 수련자들 곁에 붙어있으면서 제발 인간 되라고 잔소리하는 일입니다.
목표치를 설정해주고 밀어붙이면서 자극도 줘야 합니다.
그러나 마냥 그래서는 어린 수사님들이 견뎌낼 재간이 없습니다.
때로 상담가가 되어 위로도 해줘야 하고, 격려도 해줘야 하고 박수도 쳐 줘야 합니다.
당근과 채찍을 바꿔가며 사용하면서 수도자로서의 틀을 만들어주는 3D 업종 종사자가 수련장입니다.
정기적으로 수련자들을 집합시켜놓고 불러 모아놓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도 많이 했습니다.
“수도자 될 사람이 이래도 되냐? 저래도 되냐?
기도시간 적어도 10분 전에는 딱 나타나 있어야 된다.
묵상 시간에 졸면 어떡하냐?
나중에 사목자요 공인이 될 사람이 밥 먹을 때 그렇게 소리를 내냐?”
그래놓고 나중에는 제가 자충수에 빠지곤 했습니다.
어떤 때 수련자들은 다들 기도시간에 일찌감치 나와 있는데 제가 제일 늦기도 했습니다.
다들 진지하게 묵상에 전념하고 있는데, 저만 묵상 시간에 쿨쿨 잘 때도 많았습니다.
예리한 수련자들은 그런 순간을 또 놓치지 않습니다.
딱 기억해놓았다가 자기들끼리 두고두고 수군거립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기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아보니 제일 미안했던 부분입니다.
내가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을 형제들에게 강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내 흠결이 가장 큰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형제들의 작은 흠결에 연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름 스승이라고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던 사람들의 그런 이중적인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가 봅니다.
특별히 속에 든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잔뜩 폼만 있는 대로 잡고 다니던 스승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스승들을 향해 날리는 예수님의 직격탄은 속이 다 시원할 정도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들보라는 표현을 통해 꽤 센 과장법을 사용하십니다.
들보란 건물의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른 나무(crossbeam)를 의미합니다.
꽤 무겁고 큰 나무토막이겠지요.
아무리 우리 눈이 왕방울만큼 크다 하여도 길이가 몇 미터나 되는 들보가 우리 눈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들보입니다.
몇 미터뿐만 아니라 수십 미터나 되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허물들, 결점들, 잘못들, 죄악들, 오류들, 언행의 불일치, 그릇된 지향, 하늘을 찌르는 위선, 극도의 이기심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을 현미경으로 바라보기에 앞서 내 발밑을 먼저 자세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나란 모순덩어리의 존재를 알아가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상대방 입장에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늘 겸손한 태도로 이웃들의 의견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참 인간이요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현실과 상황을 세밀히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특히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8주일 강론>
(2025. 3. 2.)(루카 6,39-45)
<나부터 회개해야 하고, 형제를 타이르는 일도 해야 하고.>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39-45).”
1) ‘티’와 ‘들보’에 관한 말씀은, “하느님 행세를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단죄’와 ‘심판’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단죄하고 심판할 권한이 없습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마태오복음 18장에 있는 말씀과 모순된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내 눈에 있는 들보’부터 빼내려면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겨를이 없을 텐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짓는 형제를 타이르라는 예수님 말씀을,
“너, 회개하여라.” 라고 명령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 라고 권고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형제를 타이르는 일은, ‘죄인이 아닌’ 사람이
죄인을 꾸짖는 일이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회개해서 함께 구원받자고 권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즉 “너부터
회개하여라.”는, 모든 신앙인을 가르치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타이르거나 꾸짖는 일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부터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자기부터 먼저 회개하는 것은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부터 먼저 회개하고, 그다음에는 형제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여라.”입니다.
자기 자신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서
형제의 회개와 구원을 외면한다면, 즉 형제의 죄를 모른 척 한다면, 그것은 ‘사랑 없는’ 일이고, 잘못하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타이르는 말과 꾸짖는 말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부터 잘해라.”, 또는 “너나 잘해라.” 라는 말을 하면 안 되고, 함께 회개하자는 ‘형제의 권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에 형제가 와서 나의 죄를 꾸짖고 타이를 때,
반성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너부터 잘해라.”, 또는 “너나 잘해라.” 라는 반응을 보이고 화를 낸다면, 사랑을 거부하는 ‘더 큰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좋은 나무일 수가 없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나쁜 나무일 수가 없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처음에는 좋은 나무였지만 마지막에는 나쁜 나무로 변질되었고, 그냥 그렇게 끝나버렸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박해자 시절에는 나쁜 나무였지만,
회심한 다음에는 좋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과 중간 과정에서는 남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최종적으로)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서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4) 야고보서에 있는 다음 말을,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야고 3,9-10).”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온다면, 그 찬미는 거짓 찬미이고, 위선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는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하는 말을 하십시오.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에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티토 2,1.7-8).”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