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 원 제: Responsibility for Justice
● 지은이: 아이리스 M. 영Iris Marion Young / 허라금·김양희·천수정 옮김
● 체 제: 국판변형 / 무선 / 320쪽 / 값 18,000원
● ISBN: 978―89―6157―070―1 93100
● 발행일: 2013년 6월 21일
|시대의 쟁점과 함께 호흡하는 철학의 풍경|
아이리스 M. 영은 추상적인 철학 이론을 구체적인 정책 연구에 접목시키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정치철학자로, 후기 마르크스주의 비판 이론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면서도 하나의 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인 학술 성과들을 제시했다. 특히 대표작인 『정의와 차이의 정치학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에서 사회정의란 롤스식의 자유주의 정치학에서 이야기하는 ‘재화의 공정한 분배’만으로 실현될 수 없으며, 그러한 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억압과 지배의 문제를 직접 다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후속 작업에서도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가운데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이질적인 공론장으로서 민주주의의 이상을 심화시켜 왔다.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는 아이리스 영이 자기 이론의 실천적인 면모를 최대한으로 이끌어 낸 야심찬 기획이다. 지금껏 차이의 정치학과 급진 민주주의의 이상을 통해 구조적 밑그림을 제시했다면 이 책에서는 그 밑그림 안에서 살아 숨쉬는 ‘행위’를 문제시하고 ‘행위자’에 직접 말을 건다. 자신의 이론적 성과를 통합하면서도 거기에 더할 수 없는 생명력을 불어넣은 이 책이 아이리스 영의 유고작이 되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빈곤의 원인에서 과거 청산까지|
1. 복지정책의 후퇴와 개인적 책임의 승리
영에 따르면 1980년대 초반, 사람들이 빈곤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식에 엄청난 전환이 있었다. 빈곤의 원인을 빈곤한 사람들 개인과 그들의 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보수주의 학계와 정책 집단에서부터 시작되어 자유주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유행할 정도로 확대된 것이다. 빈곤에 대한 ‘개인적 책임’ 담론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이해는 찰스 머리와 로렌스 미드의 저작에서 그 정수를 발견할 수 있다. 영은 이들 두 사람의 이론이 오직 개인적 책임만을 강조하고,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배경 구조를 무시하며, 부유한 사람들의 책임은 거론하지 않은 채 오직 빈곤한 사람만이 무책임하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개인적 책임 담론은 사람들에게 모든 선택의 책임은 개인이 홀로 져야 하며, 그로 인한 어떤 불이익에도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은 개인의 선택이나 불운의 문제로 축소할 수 없는 빈곤의 사례를 제시하며 미드와 머리의 가정을 비판한다.
2. 누가 샌디를 노숙자로 만들었나?
아이리스 영은 살던 아파트가 용도 변경에 들어가 새 집을 구하려다 결국에는 노숙자가 된 샌디라는 한부모 가장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샌디는 머리와 미드가 말하는 ‘게으르고 일탈적인’ 빈곤층과는 거리가 멀다. 아파트를 팔기로 한 집주인의 결정, 대학 학위나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한 여성에게는 저임금의 서비스 직종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되는 성차별적인 노동시장, 그런 일자리와 주거 공간이 분리된 공간적 불일치 등의 상황이 맞물려 노숙자가 되고 말았다. 영은 이러한 샌디의 상황을 ‘사회-구조적 과정’이 야기한 부정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회-구조적 과정을 자기 행동을 제약하는 객관적인 사실로 경험한다.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위치의 사람들이 행위를 통해 그러한 구조에 참여함으로써, 특정한 결과의 지속적 재생산에 기여하게 된다. 여기서 아이리스 영은 “정의의 주제로서 사회의 기본 구조”를 제시했던 롤스의 설명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3. 아이히만의 죄 VS 독일인의 책임
3장과 4장은 이 책의 핵심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드러난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책임’ 개념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3장에서 아이리스 영은 아렌트를 따라 ‘죄’와 ‘정치적 책임’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 강제 호송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아이히만은 명백히 유죄다. 그리고 샌디가 단지 한부모 여성이라는 이유로 임대를 거부한 집주인이 있었다면, 그는 그에 합당한 비난을 받아도 싸다. 그러나 유대인 대학살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나치에 수동적인 지지를 보낸 사람들, 혹은 더 좋은 주거 환경에 투자함으로써 소득에 따른 거주지 분리를 심화시키는 데 자신도 모르게 기여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영은 후자의 경우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도덕적‧법적 책임과 구분되는 ‘정치적 책임’이라고 말한다.
4장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책임을 설명하기 위한 ‘사회적 연결 모델’을 제시해 죄를 묻거나 비난을 하는 게 목적인 법적 책임 모델과 대비시킨다. 법적 책임 모델은 특정인을 고발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은 책임을 면제받는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사회적 연결 모델은 잘못을 행한 제3자를 찾았다고 해서 결과에 기여한 다른 사람들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밖에도 사회적 연결 모델은 법적 책임 모델과 달리 행위자의 행위를 이끌어 낸 배경 조건을 함께 고려한다. 또한 책임을 부여하는 목적은 과거의 죄를 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미래의 변화를 지향하기 위해서며, 부정의를 생산하는 구조적 과정에 기여한 모든 이들이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을 나눈다는 특징이 있다.
4. 정치적 책임과 강한 민주주의
영은 “구조적 부정의를 생산하는 다양한 제도적 과정에 참여한다는 사실”에서 정치적 책임의 근거를 찾는다.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건 각자가 부정의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바뀌지 않으면 부정의는 계속될 것이다. 여기서 정치적 책임은 ‘공유되며’, ‘미래 지향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공유된 책임은 그 책임을 함께 나눠 진 사람들이 함께 집단행동을 통해 자신들이 참여한 사회-구조적 과정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면제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책임 개념에서 흥미로운 것은 부정의의 희생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부정의를 생산하는 과정에 연루되어 있는 한 예외 없이 그 구조를 변화시킬 책임을 짊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집단적 책임과 관련해 개인이 얼마큼의 책임과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5장에서 권련과 특권, 이익과 집단 역량이라는 네 가지 추론의 매개변수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경계 없는 정치적 연대의 꿈|
같은 일터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서로 다른 임금 체계를 적용받을 때,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미등록 노동자라서 학교에 공식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할 때, 그리고 대도시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송전탑을 뒷마당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통보를 받을 때, 우리는 무언가 세상이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의 첫 번째 미덕은 이러한 ‘잘못’에 ‘구조적 부정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가시화했다는 데 있다. 더 나아가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설명을 통해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보여 준다. 그러면서 각자가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자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다는 것 또한 확신한다. 영은 사회적 연결 모델의 윤리적 근거와 정치적 이상을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와 데리다의 ‘우정의 정치’에서 찾는다. 책임은 자유에 앞선 것이며 자유의 토대다. 미드와 머리의 개인적 책임 개념은 딱 그만큼, 우리의 존재론적 현실을 왜곡하고 정치적 상상력을 제약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영은 자칫 딱딱하고 분석적으로 끝날 수 있는 학술서에 경계 없는 사회적 연결과 정치적 연대라는 이상을 아름답게 녹여 낸다.
|차 례|
■ 감사의 글_데이비드 알렉산더
■ 여는 글_마사 C. 누스바움
1장 개인적 책임에서 정치적 책임으로
2장 정의의 주제로서의 구조
3장 죄 대 책임
4장 사회적 연결 모델
5장 국경을 가로지르는 책임
6장 책임 회피하기
7장 책임과 역사적 부정의
• 지은이: 아이리스 M. 영Iris Marion Young은 2000년부터 시카고 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정의론과 민주주의 이론, 그리고 여성주의 이론에 헌신했다. 영은 추상적이고 정교한 철학적 논의를 현실의 정치적 쟁점, 특히 사회 부정의의 문제에 결합시키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대표작 『정의와 차이의 정치학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1990)이 2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이 책에서 영은 기존 정의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차이를 인정하는 새로운 정의론을 발전시켰다. 그해 <미국정치학회>에서 수여하는 “빅토리아 슈크 상”을 수상했으며, 분배적 정의를 넘어 지배와 억압에 문제 제기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정의론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이리스 M. 영은 2006년 8월, 1년 6개월간의 암 투병 끝에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피츠버그 대학의 <여성학 연구소>와 공공 정책과 국제 문제 대학원은 영을 기리는 뜻으로 2008년부터 “아이리스 M. 영 상”을 공동 제정해 해마다 공동체 발전에 기여한 학자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다.
저서로 Intersecting Voices: Dilemmas of Gender, Political Philosophy and Policy, Inclusion and Democracy, On Female Body Experience 등이 있다.
• 옮긴이: 허라금은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과 교수다. 전공은 여성 철학으로, 여성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생명·사회·정의 등의 주제를 다룬다. 저서로 『원칙의 윤리에서 여성주의 윤리로』(2004) 등이 있다. 김양희는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 여성학과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아시아여성학센터> 연구원을 거쳐 현재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젠더 전문관으로 일하고 있다. 천수정은 이화여자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 여성학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