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밑에 때가 꼈다고 손바닥 맞고 돌아온 저녁에 물어 보았지.
엄마 엄마, 선생님의 그 권력은 어디서 온 거냐구.
그건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란다, 얘야.
어린 제가 잘 자라도록 물도 주고 잡초도 뽑아 주는, 아암, 사랑이고말고.
사랑은 내가 깨끗하길 바라고
사랑은 내가 조용하길 바랐어
사랑 때문에 난 줄을 잘 서고
사랑 때문에 난 인사도 잘 했어
사랑 없이 살기란 얼마나 어려웠던지
너무 많은 사랑을 받은 내 손
중국 여자의 발처럼 귀여운
내 작은 손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난 울었어
그 무서운 사랑이 다시 내게 오다니
이젠 내 손톱은 항상 깨끗한데.
노혜경 프로필
저는 1958년 부산 온천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명한 58년 개띠죠.
부산에서 대학교까지 마치고,
대학 졸업하던 해 실천문학사에 취직을 했지요--이건 정말 중요한 경력^^
문학과 실천에 대한 풀기 어려운 갈등을 안고, 건강이 나빠져서 부산으로 내려와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습니다.
석사과정에 다니면서 천주교 부산교구의 교구공의회 사무국이란 곳에서 스크립터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또한 제 운명에 중요한 고비였다고 하겠습니다.
석사과정 밟는 동안 결혼을 하고, 80년대의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학업과는 무관한 일들을 좀 하게 되었습니다.
85년 부산 가톨릭센터 문화부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기획했던 행사가 80년 이후 부산에서 최초의 가투로 끝나는 바람에 해고노동자가 되고, 이후 90년까지는 실직자가 됩니다.
그 사이에 수빈이 엄마가 되는 엄청난 행운이 있었지만, 80년대 후반은 어쨌거나 어려운 시기였지요.
88년 남편의 임지인 서울로 이사와서, 90년부터 열음사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91년부터는 잎새라는 엔터테인먼트 전문 출판사 편집장을, 92년부터는 외국문학 편집장을 겸하게 되어 다방면에 잡학다식^^해지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95년, 남편이 다시 부산으로 오게 되면서 수빈이를 이산가족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왔습니다.
이후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 아직 학위논문을 못써서 헤매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부산대학교와 부산외대 국문과의 강사이고,
<양업서원>이라는 가톨릭 계통 출판사의 주간으로 있습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것은 91년도이고, <현대시사상>으로 나왔습니다.
95년에 첫시집 <새였던 것을 기억하는 새>,
99년에 두번째 시집 <뜯어먹기 좋은 빵> 을 펴냈습니다.
이상 끝.
더 궁금하신 것 없지요?
2000/03/22
이후 추가된 경력이 좀 있기는 한데요.
사느라 바빠서 정리를 못하겠네요.
몇 년 뒤에 좀 쉴만하면 다시 정리해 보렵니다.
노혜경의 문학세상 1--너무 길었던 하루
무관심이여, 너는 얼마나 거룩한가.
연탄재와 먼지와 지친 얼굴들의 행진 속에서
사랑 없이 바라보는 거리여, 너는 얼마나 아름다운가.--<상뚜스>중에서
아이들이 거리로 쏟아지고 있었다.
한 할머니가 미처 다 치우지 못한 좌판을 쓸어안고 울고 있었다. 깨어진 화분에 대궁이가 꺾인 민들레꽃이 길바닥으로 흙을 쏟고 있었다. 이 5월에 아직 민들레라니?
중앙대 입구였고, 나는 회사 일로 심부름을 가던 중이었고, 머리가 길어서 거추장스러웠고, 경찰이 나를 향해 최루탄을 쏘았다. 나는 콧물을 뚝뚝 흘리며 할머니에게서 남은 나물거리들을 다 샀다. 민들레 화분도 샀다. 나물을 가득 쑤셔넣은 가방을 경찰이 나꿔채갔다. 이게 다 웬 쓰레기야라고 저희들끼리 하는 말이 먼 나라 말처럼 들려왔다.
1981년 봄, 대학을 졸업하고, 막 태어난 병아리처럼 깃털까지 촉촉한 모습으로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실천문학사의 제1호 사원이 된 것이다. 그때까지 닭장 속에서만 꼬꼬댁거린 병아리 시인 지망생이던 나는 실천문학이 뭘 하는 곳인지, 자유실천 문인협회가 어떤 사람들의 모임인지도 구체적으로 몰랐었다. 정말 우연히, 그곳과 나는 서로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가 왔다.
조그만 몸피에 눈만 커다란 소녀였다. 광주 한빛 서점이라는 곳의 임시 사장이라 했다. 서점을 경영하던 오빠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문을 닫으려 한다고, 그동안 밀린 책대금을 갚을 수가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사무실 안에는 이상스레 침울한 분위기가 맴돌았고, 그녀는 더 이상 별다른 말이 없이 큰 눈에서 눈물만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다. 나는 내 눈앞에서 광주의 희생자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시신조차 실종되어 버린 몇 백 명의 그들 가운데 두 명의, 어린 여동생을 보았던 것이다. 진실이란 이름으로 행한 거짓말을, 역사란 이름으로 행한 날조를, 나는 보았던 것이다. 80년 5월 나의 애인은 순천 진주간 국도에서 전라도쪽을 향해 총을 겨눈 채 날밤을 새고 있었고, 멀리 부산에서 나는 "폭도들"이 경계를 넘어올까봐,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칠까봐 떠느라고 밤잠을 설쳤었다. 우리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이 상황을 꾸며낸 적 없는데, 우리는 진심으로 두려웠는데, 누가 우리에게 죄의 굴레를 씌웠단 말인가.
그날 나는 혀를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시를 쓴단 말인가? 5월의 하늘이 아름답다고? 나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 내 곁에 있으니 행복하다고? 등따시고 배부르니 세상에 바랄 것이 없다고? 아니면, 바람, 별, 구름, 솜사탕이라고?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살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더 이상의 통속은 싫었다. 나는 아무 것도 감당할 수 없었다. 숨쉬는 것도 싫었고, 누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도 싫었다. 사랑니가 부러졌고 기관지에서 피가 흘렀다. 회사 앞 상가건물 3층에 임시로 들어앉은 성당의 텅텅 빈 성전에서 이름도 모르는 신부님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나는 기절할 듯이 울었다. 세상은 쓰레기더미에 깔려 있었고,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미 죽어버렸다. 세상과 나 사이에 놓인 이 먼 거리를 나는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할까.
그리고 1981년 5월 그 길었던 날, 나는 길에서 길을 잃었다. 지금껏 나를 버려두고 저갈길을 가기 바쁘던 우주의 좌표가, 나를 향해 똑바로 꽂혀왔다. 이 시간, 이 공간에 너는 못박힌 거야, 알겠어? 지금부터 너는 진짜로 죽으러 가는 거라구.
오, 그런데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어디 있는가. 세상은 왜 이렇게 갑자기 캄캄한가.
나는 할머니에게서 산 민들레 화분을 미친 듯이 껴안고, 중앙대가 있던 흑석동에서 서초동 실천문학사까지의 먼 길을 걸어서 갔다. 무관심이여, 5월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들이여, 오, 안돼, 절대로 그럴 순 없어. 손톱 밑에 새카만 물이 들었다.
노혜경의 문학세상 2--민들레와 거울
그해 오월로부터 시간은 잘도 흘러지나갔다. 잊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아니면 나도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가 아예 죽자, 죽어버리자고 몸부림칠 수도 있었는데, 왜 나는 이도저도 아니고 말았을까.
나는 정말 오래 생각해 보았다. 생각을 더듬고 쪼개고, 내 생각의 영역을 넘어선 저 바깥의 어디까지라도, 왜 내게 그날 그 민들레가 주어졌을까, 누가 내게 이걸 주었을까 하면서 어딘지도 모를 세계를 헤매고 다녔다. 내 시인됨의 화두를 던져준 건 바로 이 풀길 없는 의문이었다. 나를 구성하고 있던 우주가, 그 완결성이 무너지면서 광활하고 무시무시한 미지의 어떤 존재가 나를 엄습해 들어왔던 것이다. 무언가가 있다! 바로 저기에, 저기에, 저기에 누가 있다는 느낌, 그 엄청난 짓눌림!
까짓 민들레 한 송이가 뭐라고 그런 생각까지 하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오히려 내 절망의 근원이 5월 광주의 참상을 인식하게 된 때문이 아니냐고 물어도 사실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정말 명확한 것은,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살아남아야만 했던 것이기 때문에, 한빛 서점의 소녀를 보는 순간 나를 엄습한 절망은 결코 인간성에 대한 실망이나 정치세력에 대한 증오감 같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차라리 그것은 삐끗함이었다. 분명히 '있'지만 '현존'하고 있지는 않다는 현기증. 존재 그 자체의 근원으로부터 돌려세워져 있다는 헛발질의 느낌. 수백 번을 반복해서 말해 보아도 똑같은 말이다. 즉, 내가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내 존재가 분실되고 없다는 것. 달걀껍질 속같은 자족적인 생으로부터 갑자기 바깥으로 끌려나와, 아니 빼앗겨나와 버렸다는 것!
그 민들레는 그러니까 나의 있음 그 자체와 맞바꾼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순간의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를 후려쳐서 거의 짓이겨지게 만든 그 손길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무관심이여, 라고 그때 나는 썼지만 그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나는 그 꽃에 대한 시를 한 편 더 썼는데, 아니 써야만 했는데, 거기서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꼭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고 손을 부르르 떨며 그 육교 위를 찾아 갔다.
(중략)
나는 전 재산을 털어 거울을 가진다.
깊이 비추는 거울을 갖기 위하여 너무 오랫동안 이 길을 걸어 왔다. 미농지 보다 얇은, 빠닥빠닥한, 손바닥만한 내 거울.
-<나의 아름다운 거울에 얽힌 복잡한 이야기> 일부
발길들이 어지러이 구르던 시장통은 육교--시간의 흐름 위에 걸쳐진 정지의 공간으로 변하고,그 위에 그 끔찍한 노파가 있고, 나는 더 이상 그 노파를 역겨워하지 않고 기꺼이 그녀가 주는 것을 산다. 민들레는 마침내 그 진짜 이름인 거울이 되고, 나는 부재인 나를 존재에로 불러내는 마술거울인 민들레를 내 전 재산을 다 털어 다시 산다. 사실 그렇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우리는 가야 할 곳이 있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울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전 재산을 털어야만 하는 도박이 거기 있다.
판돈을 걸어야 할 패가 무엇인지 처음부터 아는 사람은 정말 축복받은 자들이고, 나도 젊어 한때는 내가 바로 그 축복받은 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길을 잃고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데 발디딜 곳이 없어 울던 그 기억들이 진짜 축복임을 알 만큼은 익은 것 같다.
명심하자, 존재에는 망가짐이란 없다는 것을.
부재는 더 큰 존재 속에서 잠시 길잃음이고, 부패는 발효를 위한 잠깐의 악취이며 마침내 향기로운 시로 익기까지 이리저리 헤매는 말의 씨앗들이 바로 내 아기들이란 것을. http://urimodu.com/bird/
노혜경의 문학세상 3--퍼즐,몹쓸 추억, 그리고 나
가끔 내게 묻곤 한다. 나는 시인이 되고 싶어했을까.
답은 물론 그렇다가 되어야겠지만, 과연 언제적부터 나는 시인이 되고 싶어했을까? 시인이었을까?
기억나는 한의 가장 오래된 것. 우리 집은 냇가에 있었다. 그날따라 비가 억수로 퍼부었댔는데, 방안에서도 우리 식구는 그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집이 떠내려갈 걱정, 새는 지붕에 대한 걱정, 이불을 걷고 크고 작은 물받이 그릇들을 비새는 구멍의 크기에 맞게 잽싸게 대지 못할까봐 걱정, 그런 걱정의 와중에, 부모님께서 디즈니 그림으로 만든 퍼즐을 내어 오셨다. 삼백 조각으로 나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지금은 저 세상 사람이 된 꼬마를 포함한 다섯 식구는 비 떨어지는 자리를 용케 피해가며 퍼즐 맞추기에 열을 올렸다. 그러다가 한 명씩 잠이 들고, 나혼자 밤새도록 그 퍼즐 조각을 다 맞추었다. 물받던 그릇이 넘칠 것 같으면 마당으로 쏟아버리고 동생이 잠결에 걷어차면 그 물을 닦아가면서.
그날밤이 내게는 행복의 원형이다. 세상이란 게, 우주란 게 알고 보면 퍼즐 맞추기라는 것, 내가 아무리 쓰잘데기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할지라도, 나 없이는 이 세상은 이빨 빠진 그림이 된다는 것을 나는 그날 밤 알았다. 네가 없어도 마찬가지로 세상은 망가진 그림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 뿐.
그 밤의 기억은 길고도 길다. 시간은 절대로 계량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나는 그때 여덟살이었지만, 나는 내 나이가 우리 할머니하고도 맞먹는다고 생각했고, 개울 건너편 초가집에 사는 구십살 먹은 뱀키우는 할머니보다도 더 내가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다. 비바람에 쓸려 우는 소리를 내는 뒷산의 대숲 귀신들 만큼은, 최소 그만큼은 내가 산 모양이라고도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날밤, 퍼즐조각에서 시작해 엄마의 재산목록 1호에 해당하는 새카만 호마이카 장롱 표면으로 옮아간 내 조각맞추기의 상념은, 보이지도 않던 점에서 시작한 내 존재를 상상 속에서 부풀리고 부풀려 마침내 온 장롱을 다 차지하고 형체의 외곽, 우주의 끝, 그 어떤 시간의 절벽에 나를 세우는 데까지 길고도 길게 흘렀기 때문이다. 한뼘어치의 그 캄캄한 표면을 내 마음이 더 차지했다고 믿기 위해 나는 내 지각, 내 의식과 싸웠고, 이긴다는 것, 지배한다는 것의 지독한 희열을 느꼈다.
나는 비새는 지붕이 더 이상 화가 안 났다. 빗물새는 소리가 조화롭게 느껴지고 대숲 우는 소리가 어떤 하소연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음, 우물이 넘치겠군, 뚜껑 닫는 걸 잊었네. 그 비를 맞고 나는 대숲에 둘러싸인 뒤안의 우물에 가서 뚜껑을 덮고 왔다.
사람들이 잠이 든 때에도 세상은 깨어 있고, 깨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명징해서 넘칠 지경으로 환하고, 아, 그리고 나혼자 이 틈에서 이 모든 것을 본다! 이 모든 것은 다 내것, 그 어떤 알지 못할 이유로 해서 내가 차지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 까닭을 탐구하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았고 다만 내것이라는 증거로 은밀히 이름들을 지어주었다. 명명(命名)을 했던 것이다. 세상 위에 빈틈없이 겹쳐서 나만의 우주가 창조된 그날밤이 어찌 길지 않을 수 있으랴. 이 순간, 아마 내 속에서 어떤 시인의 싹이 태어난 것 같다.
하룻밤새 일어난 일이었을까? 사실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내 기억은 이 시기의 모든 상념들을 그 하룻밤에 모아가지고 내게 준다. 이 완전성--또는 통전(通全)이라고 부르고 싶은--의 경험은, 성장하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내가 지나와야만 했던 삶의 폐허가 언제라도 토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흐느낌들을 위로하고 쓰다듬어준다.
어쩌면, 나는 도무지 끼워맞출 길 없이 잘못 오려진 내 삶에 지쳐서, 누더기 같고 잡동사니 꽃다발 같은 그것들에 어떤 환한 기억을 부여하고 싶어서 그날밤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래도 상관없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들, 즉 생성되기 이전의 우주까지도 나는 기억하므로, 이미 없거나 미리 없어버린 것들, 그 어떤 부재도 내겐 불멸이니까. 그 없는 것들과 내가 아직 관계맺지 못하는 동안만 그것들은 없을 뿐이니까. 다만, 그런 결의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오랫동안 몹쓸 추억일 뿐이었으나……
저녁이 올 때마다 나는 두려워/서쪽 산으로 가고 싶거든//높은 산에 살 때였어/발 아래로/도시 하나가 어항에 잠긴 듯 불 켜기 시작하면/나는 점점 떠올라 해지는 곳으로 갔어//골짜기였어/갑자기 끊어진 길, 벼랑/서쪽 산과 나 사이에는/심연,//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나를 부르는 소리였을까/그곳에 살지 않는 사람들의 그림자가/벼랑 아래를 나무처럼 꽂히고 있었어//누구세요, 하고 부르면 사라지는 그림자들/침묵의 말을 배울 때까지/눈 뜨면 사라지는 그림자들
행복한 날들은 언제나 짧다. 더 불행했던 것은, 내 방식으로 행복하기 위해 내가 얻었던 그 길고 긴 밤의 완전성에 대한 경험이, 그당시 어린 내가 먹어서 소화하기엔 너무 크고 뻑뻑한 무엇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날의 경험을 모르는 문자로 쓰여진 두꺼운 책이나 백만 조각짜리 퍼즐이 든 상자처럼 소유하고만 있었을 뿐이어서, 내가 나 자신에게 미지요 수수께끼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납득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어떤 괴물을 배고 삼만 년쯤 살아온 늙은 여자처럼.
그리고 연이어, 죽음들이 찾아왔다. 그 완벽한 버림받음의 기억들.
난 겨우 아홉 살이었고, 가족과 헤어져 외갓집에서 살았는데, 학교엘 가면 담임선생님이 없었다. 선생님은 암에 걸려 집에 계셨고, 나는 한 주일에 한 번씩 선생님 댁에 가서 그 주일의 우리 학급 일을 이야기했다. 학교에서 한없이 걸어 산중턱에 있는 선생님의 집으로 들어가면, 유난히 납작한 채송화들이 뜰에 가득 피어 있었다. 어쩌구저쩌구 재잘재잘 내가 한참을 떠들고 나면 선생님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없이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아이들은 우리 선생님은 죽을 거라고 수군대곤 했다. 마음 속에 구김살들이 생겨나 잘 다려지질 않았다.
그 즈음 어린 동생이 죽었다. 습기찬 방에서 시작된 기침이 멎질 않아서였다고 했다.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나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장롱 위를 기고 또 기었지만, 아무리해도 세상 밖으로 나가지질 않아서 울고 또 울었다. 죽는 게 뭘까? 죽은 아우의 영혼은 내 수호천사가 되었을 거라고 수녀님이 말씀하셨지만, 부드럽고 따뜻하던 내 어린 아우가 아무리 찾아도, 아무리 더듬어도 만져지질 않아서 나는 울었다.
눈먼 손을 더듬어 나는 속삭인다./여기 바다 있어요. 바다는 푸른빛. 바다는 깊어./바다는 추 워.//여기 산. 산은 높고 산은 위험해./(중략)/아마 좀더 오래 울어야 할까 봐요/강물이 만져지 질 않는군요.
--<점자지도> 중에서
구체적이고 물적인 조건 속에서 사랑하고 싶다는, 그 간절한 움켜쥠에의 갈망, 만져보고 싶다는 애타는 느낌이 전율이 되어 다가왔다. 우리 선생님도 죽는다던데, 그러면 채송화들도 말라버릴까? 그 작은 꽃송이가 마를까? 가루가 되어?
나는 선생님댁에 가는 일을 그만두었고, 다른 반 아이들이 공부하는 동안 우리반은 남자애 여자애 패를 갈라 장미군 깡통군 하며 전쟁놀이를 했다.
사학년이 된 뒤 어느 날이었다. 학교의 긴 나무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데, 누가 와서 너 이학년때 담임이 어제 돌아가셨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어제까지 살아계셨다고? 텅빈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죽음이 찾아오는 게 두려워 미리 죽여버렸던 선생님을 도로 살리고 다시 그 죽으심을 받아들이려 애쓰면서 나는 갑자기 늙어버렸다. 아니, 낡아버렸다. 내 전부는 아니라도, 그 어떤 일부는 걷잡을 수 없이 캄캄해져 갔다.
잠깐의 휴지, 그리고 갑자기 비추는 한 줄기 빛처럼, 또 하나의 죽음이 구원의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부러진 마음의 뼈들을 맞출 수가 없어서 절름거리던 내게, 한 소녀가 주어졌다. 내 첫사랑, 내 영혼의 최초의 반조각, 내가 배신한 소녀, 나의 달.
결핵성 척수염을 앓아 두해나 쉬다가 복학한 친구였다. 목발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풍요롭고 성숙했던, 그때 이미 어른이었던 그녀에게 나는 내 불행한 유년기의 마지막을 의지했다. 그녀의 홀어머니가 열었던 만화가게의 골방에서, 그녀의 식구들이 세들어 산 문간방에서, 우리는 낄낄대고 까르르 웃고 할딱할딱 넘어가며 한껏 즐거웠다. 미친 듯이 행복한 날들이 내가 잃었다고 생각한 안전하고 완벽한 세계를 내게 다시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6학년 가을, 그녀가 떠났다.
그녀의 죽음과 더불어 나는 결정적으로 나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을 잃어버렸다. 모든 죽음들이 내 탓이었다. 내가 그들을 잊어버렸고, 내가 그 사랑을 배신해 버렸고, 내가 그들을 무덤으로 만들었다는 죄와 후회의 쓰디쓴 맛이 늘 혀 끝에 묻어났다. 몸 속에서 부러진 뼈들이 덜그덕거렸다. 오, 하느님 아버지 제발, 날 용서하지 말아주세요.
자루 같은 몸 속에서 뼈들이 덜그덕거린다/걸어둘 못을 찾지 못한 영혼이 더러운 수건처럼 펄럭인다//그렇군, 아직 태어나기 전의 밤이군.
--<저개발의 기억> 중에서
그랬다. 태어나기 전의 밤이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 내가 지나와야 할 그 밤. 밤은 그렇게 내게 덮쳐 왔다. 단 하루의 충만과 너무나 길었던 사막의 밤으로. http://urimodu.com/bird/
노혜경의 문학세상 5--순명, 무서운 소환 앞에서의 죽어버리기
스무 살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내 인생이 하나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아직 살아 있을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는 들판의 풀꽃처럼, 나는 생각을 지우고 의지를 지우는 연습을 하며 살았고, 세상은 드디어 나를 껴안아 자기 속으로 넣어주는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몸이 아프고, 구체적으로 눈물이 났다. 나를 죽임으로써 나를 얻는 적극적인, 아니, 소극적인가? 어쨌든 그런 전략.
그 아득하던 어린 시절의 한없고 가없는 둥근 우주의 안심감이나, 나를 감싸 세상의 주인으로 모셔주던 잘 그려진 세계지도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옆구리가 터지고 내장이 비어져나와 어쩔 줄 모르는 망가진 인형에 불과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다시 시작하려 애쓰는 연약한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랬으면 어때, 시간은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고, 이젠 아무도 나를 훼손시킬 순 없어. 난 마침내 어른이 되었으니까.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마르고 늘 기침을 해대고 툭 하면 기절하는 약골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저 깊은 곳으로부터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세상을 처음 구경하는 어린아이처럼, 순결한 사랑에 빠졌고 철없이 행복했다. 인생이란 그럴 수도 있던 것이었다. 그 민들레 화분이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 나를 다시 소환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이미 망가져 있는 세계의 버림받은 공주란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상은 한 바퀴 돌아 제 자리에 왔다. 어린 시절 어느 때 생겨나 늘 떠나지 않던 죄의식이 다시금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눈먼 소녀가 아니었다.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씩씩한 전사의 모습으로, 나는 나를 부르는 알 수 없는 것의 소리를 따라 길을 나섰고, 조금씩 역사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시극인 <성모의 기사>는, 그런 방식으로 내게 왔다. 인간과 죄에 대한 내 그때까지의 상처들을 나 자신의 말로 치료하고 위안하라는 명령으로써.
나는 썼다. 순결이란, 단 한 방울의 잉크로도 다시는 최초의 맑은 물이 될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죄의 도가니에서 불타올라 맑은 금이 되는 그것이 바로 순결이라고. 또 그렇게도 썼다. 새 옷은 누군가 입어서 더럽혀져야 옷이며 새 빵은 씹혀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단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기자신의 전부를 바친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의 최후에 의탁해서, 나는 아우를 위해서도, 친구를 위해서도, 광주를 위해서도 죽지 못한 나 자신을 용서하려고 기도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수백 번도 더 죽인 나의 이사악, 나의 아벨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나는 희생자일 뿐 아니라 살인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콜베 신부가 피묻은 손톱으로 새긴 십자가가 내 심장 위에 아로새겨졌다. 그것은 진짜의 환희였다. 행복이란 말로는 도저히 다 이름할 수 없는, 지독하게 쓰라린 열광이었다. 단 한 사람의 죄로도 인류는 멸망하지만, 단 한 사람의 희생으로도 구원받는다. 아담이 죄짓고 예수가 구한 것처럼. 그리고 삶은 그렇게 되풀이되는 제사여야 했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겹쳐서, 역사가 나를 소환했다. 어쨌든 부르주아지, 어쨌든 지식인, 어쨌든 행복한 딸이자 아내인 내 삶의 빚은, 어떻게든 역사의 짐을 짊어짐으로써만 갚아지는 것이었다. 이 기묘한 수동태를 용서하시기를! 나는 삶이 나를 이끄는 것을 거절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순명당·해·야·만 했다.
80년대의 캄캄한 밤은, 그 수많은 죽음들이 닫아버린 차가운 겨울의 문은, 내가 나를 못박는 제사에 의해서만 봄 쪽으로 다시 열릴 것이다. 나는 침묵 속에 가두어졌고, 내 글은 격문들과 구호들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깊은 어둠 밑바닥에 나는 조용히 고여 있었다.
꿈 속에서도 이를 갈며 잠드는 사람들/어디선가 바람 한 줄기 불려 와/그들의 입술을 헤치고 불어 들어간다/아아, 잠 속의 잠, 뒤틀면서 떨어져 가는/꿈의 벼랑 끝까지//나는 창에 찔려 바들바들 떨면서/조금도 슬프지는 않으면서/이것은 꿈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나를 못박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내가 시인 박서원을 만난 것은 내 딸이 두 돌이 조금 못되었을 때였다. 이 사건--나는 내가 문학의 길에서 만난 세 여자를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김수경, 박서원, 그리고 김정란이다--은 나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벼랑으로 몰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자인 내 말이 시와 인류에 어떤 공헌을 할 것이란 믿음도, 기대도 없었고, 더 나아가 공적으로 시인이 되는 일이 중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던, 말하자면 나혼자 낑낑대던 방구들 귀신에 불과했다. 그러한 내 앞에 완벽한 여자의 말로, 완벽한 여자의 몸 그 자체인 언어로, 제 삶을 모조리 텍스트로 바꾸어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증명해 보이고야 말겠다는 결의로 가득 찬, 버려진 여성의 원형같은 그녀가--박서원 시인이--다가왔다. 아니, 운명적으로 주어졌다.
90년대에 들어 출판사 편집장으로서 새 직업을 얻은 나는, 나는 편집자로서의 맨 처음 작업으로 그녀의 첫 시집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의 새로움, 그 세계의 새로움에 놀랐다. 그 새로움은 우주의 시작부터 늘 존재해 왔지만 남성들에 의해 은폐되어버린 비밀의 새로움이었다.
80년대를 돌이켜보면, 사람들은 큰 걸음으로 걸어간 것 같다. 발길에 민들레가 채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는 내 눈이 빠져나가거나 얼굴에 칼집이 나도 상관말고, 그냥 가야할 길이니까 간다, 그런 것이었을까. 나처럼 애당초 보폭이 좁은 사람들은 가랭이가 찢어져서 피흘리게 되는 걸 그냥 견디면서 또 따라가야 하고. 거대 담론과 맞서기 위해 스스로 거대 담론이 되어버린 사람들 틈에서, 나는 완벽하게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경꾼도 아닌 채로, 역사와 나 자신 가운데 어정쩡하니 끼어서 어디에든 몸 한 귀퉁이를 걸치려고 기를 쓰며 한 시절을 보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문학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결코 시 한 편의 구조적 완결성에 목숨거는 "잘 빚어진 항아리"주의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시가 역사와 정치의 불의에 저항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도 된다고 믿는 "투사"도 아니었다. 나는 내 말과 내 삶과 내 시를 통합하고 싶었고, 더 나아가 시쓰는 행위 그 자체가 곧바로 투쟁이 되는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내가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쓰고 낱낱의 인간을 그가 속한 조직과는 별개의 소중함으로 바라보는 데 길들어 있는, 말하자면 여자라는 점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방법으로 말하고 다름 관점으로 사물을 본다. 그것이 하찮다고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남성들의 말일 뿐이다.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예수가 그랬듯이.
아주 조금씩이지만 나는 말한다는 것이 생을 단정하게 해 줄 뿐 아니라 생의 한 복판에서 존재를 발생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 80년대에 역사에 빚지지 않으려고 집을 나간 그때와 똑같은, 그러나 더 본질적인 존재의 소환에 이끌려 나는 박서원을 사람들에게 내밀어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혼자, 모든 여성들의 똥바가지를 혼자 뒤집어쓰게 내버려둘 순 없다는 인식이, 아니 죄의식이 나를 몰아붙여, 나는 등단절차를 밟고 공식적으로 그녀의 오른편에 서게 되었다. 내가 낳아 세상에 내보낸 내 딸에게 나는 떳떳해야만 했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남성들만을 지칭하는 말의 역사에 여성이라는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 초라하고 바보같은, 그러나 절박한 야심. 그 입구로서의 박서원에게 나는 감사한다.
여자로 살아도, 아니 여자로 살기에 더 살아있다는 실감, 광주와 아우슈비츠에서 집단의 이름으로 왕창 죽는 존재가 아니라, 나 한 사람이 죽으면 전우주가 제사를 지내는 그런 단독자로서의 실감. 카잔차키스의 말처럼, 신이시여, 저는 당신하고 키재기를 하고 싶습니다. 아니면 야곱처럼, 신이시여, 저하고 씨름을 한 판 붙읍시다. http://urimodu.com/bird/
노혜경의 문학세상 7--시와 삶과 윤리
일종의 문학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글을 연재하면서, 나는 80년대 중반에 해당하는 몇 년간을 건너뛰었다. 시극 <성모의 기사>로부터 박서원을 만나기까지의 약 5년간의 세월이 내게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기실, 살고 겪은 것으로만 말하자면 이 몇 년동안 나는 그동안의 인생을 합친 것보다 몇 곱절의 생을 살았다. 그 시간들은 어떤 의미에서 내게 역사 앞에서의 약간의 면책특권을 부여해 준 기간이기도 하다. 비록 386세대는 아니지만, 386세대가 흡사 전유물처럼 가지고 있는 역사적 민족적 자의식이란 것에, 그것의 구축에 나도 약간의 지분은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은,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간단히 하자, 최소한 비겁자 노릇은 안 했다는 아주 사소한 위안을 위하여, 80년대의 몇 년간 나는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저승사자가 나를 쫓아다니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 80년대라는 시간은 내게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시간이다. 문학을, 특히 시를 세계의 재현이거나 반영이라고 믿는, 또는 최소한 인간적 현실에 대한 일종의 복사물이라고 믿는 문학관을 지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와 실천이라는 두 명제는 아주 조화롭게 손잡을 수 있다. 80년대를 관통하는 문학은 실제로 그러했다. 시인들은 시를 통해 독재에 항거하고, 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들을 옹호했으며, 그 80년대가 물건너 간 지금은 도사나 신선 같은 인생관을 선전하는 것으로 시와 삶을 같은 자리에 놓는다. 실제로 그 문학은 힘이 있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발설하는 입술들은, 그 말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거룩한 분노와 의로운 슬픔에 고무되곤 했음을, 우리 모두는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러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힘차고 감동적인 언어로, 이 민족의 고통과 분노를 외치고 노래하고 싶었다. 이 80년대에 시인들은 <시여! 무기여!>를 외치는데, 그리고 나도 그러한 여느 시인들 못지않게 그런 말을 해도 되는 자격증은 딴 것 같았는데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속의 어떤 존재가 한사코 그런 말들이 시로 나오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발목을 붙잡아 섣불리 민중시인이 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일종의 윤리의식이라 할 수 있는 어떤 감각이었는데, 그 때는 내 안의 어떤 무의식적 자아가 아직 내가 덜 실천했으므로 말할 자격이 없다고 여겨 나를 잡는 것으로 해석했었다. 어쨌거나 감옥에도 가지 않았고 심하게 고문당한 적도 없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냥 벙어리로 살아라라고 말이다.
지금 와서 깨닫는 것은, 시와 삶은 그런 방식으로 같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 시에 나오는 현실을 되풀이하거나 자기 삶을 고스란히 담는 것이 시인의 윤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시인의 삶이 아무리 개차반이어도 시에서는 아름답디 고운 잠언풍의 말들로 독자에게 달콤함을 선사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실천은, 최소한 시인의 실천은, '나'라고 하는 대표단수인 인간존재가 자기 존재의 극점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도정을 언어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 이렇게 단 한 마디로 말해도 될까? 시인의 윤리란, '나'라는 개인성이 우리 모두의 보편성이 될 수 있도록 가장 정직하게 자신을 찢어발기는 것이다. 아, 또 이렇게 한 마디로 말해도 될까? 나와 내 말이 한 가지로 가는 것, 내 말이 나를 들어올리는 그 정도만 떠 가는 것, 나는 이것이 시인됨이 지녀야 할 윤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타는 목마름으로" "네 이름을 벽위에 쓸" 수도 없고,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 인간성은 결코 민주적이지도, 내 삶은 결코 자유평등박애하지도 않기 때문에. http://urimodu.com/bird/
노혜경의 문학세상 8--교리문답, 수십개의 자아를 가진 여자
누가 나를 내게 주었는가. 이것은 내게 의식이란 게 생겨나면서부터 나를 사로잡은 의문이다. 누가 이 우주를 내게 주었는가. 누가 나라고 하는 이 형식을, 나라고 하는 이 몸과 이 생각할 힘을, 그리고 이 광활한 장소에서 길잃지 않을 수 있는 촉수를 주었는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질문은 분명 일반적이지 않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야만 할 물음인데, 나는 너무 쉽게 '누가', 즉 나라는 존재를 만든 누군가가 있다고 간주하고서 바로 그 누구에 대한 물음을 내 존재의 첫 번째 명제로 삼았던 것이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는 분명코 나와 같은 질문을 한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시기에, 친구들이 데미안을 읽고 환호하던 그 시기에, 마음놓고 자의식이 생겨나야 할 그 시기에 나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나를 발생시키지 못했다. 여전히 나라는 존재는 내게 가장 큰 수수께끼였고, 그 수수께끼의 규모는 거의 우주 전체와 맞먹을 만큼 큰 것이었다.
이 시기,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때쯤, 나는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의 자살시도를 했다. 아, 이렇게 얘기하면 무척 끔찍한 것 같지만, 지극히 단순한 동기, 그러니까 내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무지에 짓눌린 것이었다. 이미 죽어서 지금은 없는 사람들이 그립고 궁금하기도 했다. 성당에서 가르치는 천국이 있었으면 하는 기대와, 죽음의 순간에 어떤 점프가 일어나 내 모든 궁금증이 환히 비춰 보일 것이라는 지극히 물질적인--물질적이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흡사 피부의 가려움 같은 정신의 가려움을 내 자살이 해소시켜 줄 것이라는--기대 등이 어우러진 해프닝이었다. 약국에서 사다모은 수면제(그때는 몰랐지만, 사실은 신경안정제였다)들을 잔뜩 배부르게 먹고 잠이 들었는데, 깨고보니 아침이었다. 자살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학교에 갔더니, 아이들이 어제는 왜 결석했냐, 어디 아팠느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나는 한 밤이 아니라 두 밤을 잔 것이다. 집에 와서 왜 깨우지 않았느냐고 투정을 했더니, 원래 잠이 많고 몸이 약한 내가 지쳐서 늦잠을 자는 줄만 알았던 것이고, 그래서 푹 자라고 내버려 두었던 모양이었다. 이 민망한 경험은, 그 일을 저지르기 전보다 그 후에 더 많은 상처를 내게 남겼다.
인생에는 분명코 운명적인 순간이라는 게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순간에 운명의 의미를 곧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딱 한 번이지만 나 스스로 죽으려고 했다는 경험이 내게 심적 부담감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때 내가 나의 무엇을 걸고 도박을 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고, 나라는 존재에 또 하나의 알 수 없는 얼굴을 보탰을 뿐이다.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 자아, 자아의 파편, 말하자면 깨어진 거울.
그러니 이 질문은 분명코 내게는 예언적인 교리문답의 첫 문항이었다. 누가 나를 내게 주었는가.
글쓰기를 질문과 대답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내 생각에는, 시란, 특별히 더 심각하고 중대한 질문이며, 시쓰기란 죽기를 다하여 대답을 하려고 애쓰는 삶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나 할까. 끊임없이 나에게 주어지는 낱낱의 나를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원--써클--고리--바구니--마침내 레이스에 이르기까지, 늘 한다발로 묶이려는 강렬한 의지로 나는 거의 죽으려고 하면서 시를 쓴다. 내 생애를 다하여, 내가 몰랐던 나에게 제대로 된 얼굴을 주려는 것.
나는 오래 오래 기다렸다/덤불 숲 아래 어린양의 울음소리 들려 오기를/한밤이 오고/별들은 두려움에 떨며 모래는 침묵의 소리를 웅웅거릴 때/내 칼은 결심에 겨워 천천히/그러나 깊이/이사악의 목을/찔렀다//점점이 흘러 떨어진 핏방울에서/수많은 어린양들이 태어났다/내 이사악이여 어디 있느냐/울부짖는 내게 그분이 말씀하셨다/너의 이사악이 누구였더냐//어린 양떼를 몰고 머리 풀어헤친 여자가 와서/내 양들을 받아 품에 안았다/아가야, 새로 태어난 아가야/너의 엄마가 여기 있다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질문을 받을지도 모른다. 내가 비록 인생의 마지막을 알고 있는 것 같더라도, 죽기 전에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직업을 만들어내거나 역사가 인준한 어떤 확실한 직업을 택해서 뭔가를 하지 않는다면 나는 계속 아직은 '뭐'가 아닌 사람이다.
시인이라는 것은 직업이 안될까? 어른이라는 것은? 엄마라는 것은?
이렇게 말하고 보니 흡사 장정일이 쓴 시처럼 들린다. 언덕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은 왜 job이 아닌가 어쩌구 하는 가슴아픈 시. 문학을 평생 업으로 삼겠다는 사람들이 감수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 직업이 남들의 눈에는 '아직' 할 만한 '뭐'를 찾지 못한 애들의 일로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시인이라는 직업을 예언자라는 직업과 동일시하는 직업관을 가졌던 적이 있다. 대학생때 어떤 계간지에서 나를 등단시키겠다는 제안을 해 온 일이 있었는데, 그때 몇밤을 잠못이루고 고민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난 아니예요, 하느님" 하고 말하며 고래 뱃속으로 도망친 요나처럼, 난 아직은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때 내겐 시인이 된다는 건 김수영처럼 뱃속을 투명하게 할 수 있어야 하고 김지하처럼 감옥에 가야 하며, 더 나쁜 것은 이사야나 예레미야처럼 남들에게 끔찍하도록 싫은 소리를 해야 되는 일이었다. 더더욱 나쁜 것은, 바로 우리의 든든한 빽줄인 청년 예수처럼, 한점 부끄럼 없는 태도로 십자가에 묶여 손바닥에 못을 쿵!하고 박혀도 그걸 참아낼 수 있는 일이 시인의 일인 것이었다.
내가 그러한 예언자들과 시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지나친가? 지금 시인들은 예언자가 아니라 궁정의 광대가 아닌가? 하기야, 지금 우리 문단 상황을 보면, 문학은 확실히 광대의 job이 되어가고 있다. 임금에게 욕해주고 녹을 먹는 '욕쟁이 광대', 웃기는 얘기와 위로의 말로 귀염받는 '웃기는 광대', 눈물나는 얘길 해서 정신의 배설을 시켜주는 '우는 광대', 어쨌거나 인생 그 자체의 진상과 대면시켜 미래를 준비하라고 외치는 예언자의 job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진짜 시인이라는 직업은, 이런 광대들에게 둘러싸여 인생을 연극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다가왔다"라고 외치다가 오히려 광대 취급을 받는, 그런 직업이 아닌가. 나는 내가 어느 쪽을 더 싫어했던 것인지를 잘 모르겠다. 광대처럼 보이는 예언자인지, 예언자 행세를 하는 광대인지. 어쨌거나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많이 그렇다. 뼛속까지 완벽하게 사라질 수만 있다면, '무'라는 것이 정말 모든 존재가 소멸되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것이라면, 나는 아낌없이 나자신을 무에다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아암, 있고 말고!
그러나, 문제는, 내 속에 있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없는 것 좋아하시네. 에너지 불변의 법칙도 몰라, 이 바보야? 한 번 생긴 것이 없어지는 것 봤어, 이 바보야! 너는 이미 생겨 있고, 이제부터는 몸바꾸며 존재할 뿐이라구.
이 끔찍한 깨달음과 대면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으며, 언젠가는 끝이 있다고 믿을 수 있을 때 오히려 인생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삶이란 게 영원히 회귀하는 신화라면? 그 끝없는 되풀이 속에서도 게을러지거나 지쳐빠져서 인간다움의 품위와 삶 그 자체의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존재하기를 그만둘 수 없다면 말이다.
나는 불교의 윤회설을 말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단 한 번 일어났던 부활사건을 믿는다. 그러나 인류적 단위로 볼 때, 인류는 부활이 올 때까지 끝없이 반복해서 사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조금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난 아직도, 나중에도, 뭔가가 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난 지금도 '아무것'이니까. http://urimodu.com/bird/
노혜경의 문학세상10--펄럭이는 레이스자락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미 자아정체감이라는 것을 얻고자 자연이라는 매끈한 동일성의 거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 우리는 늘 스스로에게 묻는다. 삶은 왜 파편일까? 나는 왜 이런 삶을 잘 사는 것처럼 보이다가 맥을 툭 끊고 저런 삶으로 옮아가기를 반복하는 것일까? 썩은 동아줄이 끊어지기 전에 이 심연에서 저 심연으로 건너뛰는 절묘한 타잔, 단지 건너뛰는 행위의 일관성에 의해서만 자기동일성을 담보받는, 왜 나는 그러한 "잡동사니 꽃다발"일까?
나는 시인으로서 시를 통해 나의 내면에서 자아를 발생시키기 위해 애써 왔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 작업에 실패를 거듭해 왔다. 삶이 무정형의 반죽인 것처럼, 말도 늘 꼬리가 남아 잘 끊어지지 않는 질긴 실이었던 것이다. 엉기는 말들의 거미줄. 찐득거리지 않기 위한 절제된 말들, 잘라내고 걸러내고 비누로 씻어 뼈만 남긴 말들이 내 첫 번째 시집의 앙상한 언어들이다. 나는 솔직히 무서웠다.
갑자기 내가 뜻도 모를 주문 같은 말들을 내뱉게 될까봐, 그리하여 "거의 무당이군" 하는 식의, 수많은 여성들을 때려잡아 온 미신의 방망이로 두들겨맞게 될까 봐 말이다. 시대는 이미 물건너 가고 있는데 아직 물이 어딘지도 모르는 한국문학사라는 무덤 속에서, 내 삶을 잘 다린 넥타이처럼 펴기 위하여, 덩달아 깔끔하고 세련된 항아리가 되기 위하여 기를, 기를, 기를, 그리고 기를 썼다.
첫 시집이 나온 다음, 나는 내 글쓰기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문학적이고 문단적이며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다시 말해 전면적인 삶의 태도를 결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삶 그자체의 진상이 무엇이든 간에 문학사, 아니 문단 관행이 요구하는 유행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내 내면이 시키는 대로 울면서 겁내면서도 어쨌거나 따라갈 것인가. 그리고 결정했다. 어차피 나는 내 삶의 단정한 형태를 모른다. 그러니 영혼이 부르는 대로 가자, 라고. 여성이고, 지방 문인이며, 군소잡지로 등단하고 돌보아줄 문단적 파트롱도 없는 나 자신의 취약성 대신에, 내 안을 통해 나를 부르는 거대한 '영혼의 역사'에 몸을 맡기자, 라고.
아마도 그러한 결정의 은덕이었으리라. 마침내 언어가 나를 소환하기 시작했다. 말로 붙잡을 수 있는 이미지들이 나를 습격했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버스를 타고 부산진시장 앞을 지나고 있었다. 무언가 화급한 일로 서면으로 가는 중이었다. 입 속에서 크리스탈이라는 말이 맴을 돌았고,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용을 쓰며 지우고 있었고, 그리고 눈앞을 스쳐가던 것.
그래. 펄럭이는 레이스 한 자락. 누군가의 옷깃 같은, 손수건 같은, 색실같은, 그리고 점점 선명해지는 둥근 레이스. 한 오래기의 실로 짠 거미줄. 나는 버스를 내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심호흡을 했다. 바야흐로, 내 생애 전체를 결산하는, 어쩌면 인류의 역사 전체를 결산하는 이야기를 쓰려는 참이었으므로. 무슨 이야기를 쓰게 될지 나는 몰랐다. 다만, 대단히 정직하고 힘센 말들이 내 손끝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것만을 알았다. 이것을 반드시 써야 한다는 것도.
그리하여 나는 썼다--"레이스 마을"이라고.
오후 네시경부터 다음날 새벽 두세시까지, 천천히 또박또박 여섯 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거의 한 글자도 고치지 않은 레이스 마을 이야기의 탄생이었다. 종말과 부활에 대한, 스스로를 바치는 제사에 대한, 사랑과 희생에 대한, 무엇보다도 인류적 단위의 구원에 대한 내 열망과 눈물과 하소연을 담은, 그러나 그 어디에도 주장하거나 강요함 없이 단지 레이스의 무늬로만 존재하는 내 꿈의 서사시. 거대한 레이스. 완벽한 통일성. 이 시는, 삶이라는 무정형의 괴물 앞에 기죽지 않고 뻣대지 않으며 최대한 순연하게 내면의 부름을 따르려고 했던 내 삶에 주어진 응답이었다. 모든 시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시였다. 이 시를 쓰고 난 다음 나는 비로소 내가 문학사에 더는 빚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선물이다.
이미지가 사유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이해하십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한없이 부드럽고 넓게 퍼지며 온 세상을 덮는, 따뜻하고 포근한 레이스를. 그런데 그 레이스는 나와 여러분들이 삶의 모든 것을, 심지어 몸과 목숨까지도 다 털어넣어 짠 것입니다. 이 레이스는 우주라는 밥상을 빈틈없이 덮고, 이제 아무도 배고프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의 형이상학입니다. 묵시록 이후에도 쓰여지는 역사입니다. 내가, 아니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안녕. http://urimodu.com/bird/
첫댓글 이건고문이야.
음악, 쥑이잖냐?
선상님 제가 이 음악 진작 올렸을 때는 암말 없으시더니...ㅠㅠ 심경에 변화가 생긴 모양입니다. 봄바람 비스므레한 것.
마중물님도 올리시고, 행인님도 올리시고................열번정도 듣고 다 읽었습니다. ~ 헉 숨차라!
그래! 그래! 노혜경 시에 깔려 있어 더 기막혔나 보다. 이거 어디서 들었더라? 했다. 주색겸비 카페 사랑방에 자주 드나들지 못한다. 오늘처럼 아침부터 내내 으막에 빠지고 마는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도 방안 가득 널어놓다. 돌아가고 싶어! 마중물, 행인. 미안해!
내 원래 분위기에 무지 약하다. 아무런 일도 못하고 만다. 해야, 언젠가 들려준 '해 저물녘'(해금?)을 찾을 수 있을까?
사연에 집중하면 음악이 멀어지고 선율에 빠져들면 깨알같은 글씨들이 멈추고 정지한 눈동자를 기다립니다. 저는 이 곡을 들으면 산수유 열매가 생각납니다. 첨에 올려졌을 때 인상에 남아서 그런가 봅니다.
노혜경. 수빈이 엄마. 옆 집 여자. 이름만으로도 반갑네요. 신월동 살 때 옆 집까지는 아니고 근처 사는 여자엿어요. 가난한 동네 성당 자원봉사도 함께 하고 수다 떨고... 부산으로 내려간 뒤 연락이 끊겼어요. 얼굴도 가물가물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