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군의 旌閭(孝子)이야기
9. 禮山 孝子 方萌의 旌閭
예산읍 향천리 ‘삽티공원’ 안에 있는 조선전기 ‘孝子 방맹方萌 旌閭’를 점심시간에 다녀왔다. 예산초등학교에서 쌍송 삼거리를 지나 대술 방면으로 걸어가다 보니 우측에 삽티공원이 보였다. 공원 인접에 더센트럴웨딩홀, 윤봉길 체육관이 신축되어 있어 많이 변해있었다. 사랑채요양원을 지나자 연못이 반겼다. 연못위에 효자 방맹의 정려 있었다. 원래 방맹 정려는 예산초등학교 후문 쪽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방맹方萌(1518~1590)본관은 온양溫陽이다. 고려 충렬왕 때 판도판서를 지낸 방서方曙의 21세손이다. 방맹은 1563(명종18년)효자각과 정려문을 받았다. 그가 예산의 향리鄕吏였다는 것 외에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여지도서』예산현 [인물人物](효자)에 “호장 방맹方萌 정문이 읍내 향천동香泉洞에 있는데 일의 자취가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장은 고을 향리 중 우두머리격의 지위였다.
1617년(광해군9)에 편찬된『동국신속삼강행실효자도東國新續三綱行實孝子圖』에는 효행 기록과 그림이 남아 있다. 이에 의하여
향리 방맹은 예산현 사람으로 어버이를 극진히 섬겼다. 아버지가 죽자 예로서 제사를 지내고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몸소 찬을 만들어 제상에 올렸고, 출입할 때마다 신주에 고하였다.
방맹의 효행과 관련한 전설이 있다.
“어느 겨울 방맹의 아버지가 수박과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방맹은 창호지로 온상을 만들어 수박을 재배해 아버지에게 드렸다. 또한 무한천 상류 ‘예당저수지 제방 아래쪽’ 배다리 앞 얼음 위에 꿇어앉아 밤낮으로 3일간 정성을 다해 기도하니, 꿇어앉은 자리에 구멍이 뚫리고 잉어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잉어를 아버지에게 먹이자 병세가 잠시 호전되었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러한 방맹의 효행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명정을 받았다.”라고 전한다.
『중종실록』에는 1535년(중종 30) 3월24일 충청도 관찰사 이수동이 예산의 향리鄕吏 방맹의 효행이 특이하니 포상할 것을 중앙에 건의하는 기록이 있다.
정려의 내부 명정 현판에는 ‘효자호장방맹지문 숭정후삼계사구월 일 십일세손호장문탁여제족개건孝子戶長方萌之門 崇禎後三癸巳九月 日 十一世孫戶長文鐸與諸族改建’이라고 쓰여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20권 , 충청도편>에 『예산현』의 [효자], 인물에 오른 사람은 효자 김근金勤과 이개우李開右, 호장戶長 장중연(張仲淵)의 딸 열녀 매읍덕每邑德이다. [성씨] 申, 孫, 沈, 張이 있는데 심은 속성續性이다. 화물 방 化物 方은 문석文石과 같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申 孫 沈 張의 네 성씨 기록이 되어 있다.
이번 예산읍 향천리 삽티공원 내에 있는 온양방씨 정려 탐방은 예산읍 성씨 태동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어 기쁘다.
溫陽方氏
초선 초 예산의 토착성씨 申 孫 沈 張
沈은 續性이고 化物 方은 文石과 같다네
예산 香泉洞 향리 方萌 효행사실 전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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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예산군에 산재되어 있는 정려 탐방 중에 고려시대, 조선시대 여러 성씨의 내력을 알게 되었다. ‘교동인씨 쌍효각 정려’(덕산면 낙상리), ‘철원임씨 정려’(삽교읍 상하 1리), ‘청해이씨 정려’(고덕면 사1리), ‘온양방씨 정려’(예산읍 향천리), 예산을 본관으로 하는 예산장씨(禮山張氏)등이다.
아직 예산군 효자 정려 탐방을 마치지 않은 신양면, 광시면, 대흥면, 응봉면이 기대된다. 어떤 새로운 성씨가 효를 실천하여 정려를 받았나 하고 무척 기다려진다. 앞으로 나에게는 예산군 성씨 연구에도 큰 도움이 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