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 이거(潭陽君 李璖, 1439-1450)는 朝鮮 世宗의 第 18子이며 막내 왕자이다. 관례를 따라 11歲에 개국공신 남은(南誾)의 손녀요 병조판서 남경우(南景祐)의 여식 宜寧南氏와 약혼하고 그해 말 嘉禮를 올릴 예정이었으나 부왕이 위중하여 가례를 미루고 해가 바뀌어 1450年 庚午年 世宗32年 2月 세종이 승하하자 슬퍼함이 지나쳐 병을 얻고 궐 밖으로 피접 나갔으나 쾌차하지 못하고 3月에 세상을 떠났다. 하세하신 장소는 司謁 高仲陽의 집이다. 이에 文宗이 담양군에게 坡州 坡平山 西麓을 賜牌地로 내렸고 부왕을 예장 하기 전 먼저 5月에 담양군을 예장하므로서 파주에 처음 入鄕 하게 되었다. 문종이 당시 담양군에게 내린 시호는 회간(懷簡)이다.
20년 후 成宗이 자신의 생부 의경세자(懿敬世子, 세조의 장자)를
“ 德宗 ”으로 추존하고 명나라에 고하자 내린 시호가 회간(懷簡)이다. 이에 혐명률법(嫌名律法)에 따라 담양군의 시호 회간을 거두고 성종이 다시 담양군에게 내린 시호가 이애(夷哀)이다.
담양군 사후 10년 지난 1460年 世祖10年 庚辰年, 世祖가 특명을 내려 강양군 이숙(江陽君 李潚, 1453-1499)을 담양군의 후계자로 정 함으로서 담양군은 파시조가 되어 문호를 이루고 세종왕자 담양군파 왕자 가문이 탄생하였다.
강양군 이숙은 세조일등공신 세종왕자 계양군 이증(桂陽君 李璔, 1427-1464, 諡號 忠昭)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세조가 총애하여 특별히 지어준 賜號가 琴軒이고 성종 조에서 종친부 정일품 흥록대부(興祿大夫)에 이르렀고 세상을 떠난 뒤 파주 파평산 담양군 묘 아래에 예장 되었다. 연산군이 강양군에게 내린 시호는 양도(良悼)이다. 강양군 신도비는 대제학 홍귀달(洪貴達)이 지었고 왕실 서적 “宗班行蹟”에 신도비가 실려 전한다.
그 후 담양군의 손자와 증손자가 파평산에 묻혔다. 왕족 법으로 왕자의 증손까지 종친부 왕족이라 주거지가 제한되어 대대로 한양에 살았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네 번의 대란을 겪으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임시로 거주하였다.
병자호란 뒤 이십 년 못 된 1654年 孝宗5年 甲午年, 담양군의 7世孫 이진규(李震奎, 贈吏曹參議)가 宗契를 결성하여 처음 종친을 모으고 파평산 선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고 그 뒤로 이진규의 제5男 이홍령(李鴻齡)과 자손 등이 선영을 관리하며 선영 아래에 거주하였고 차차 선영 아래에 의지하러 들어 온 종친이 모여서 오늘에 이르도록 세거지 중 한 곳이 되었다. 조선시대 담양군파 宗契 문서 네 편이 전하고 있다.
지금 담양군파 파평산 사패지 범위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십리 즉 사십 리로 1762年 英祖38年 壬午年, 담양군파 최초 족보를 발간하고 서문을 쓴 담양군 9세손 刑曹參判 李齊華가 후손에게 알려주려고 남긴 글에 나타나 있다. 문종이 내려 준 최초 당시 사패지 범위가 아니다. 현재의 파평면사무소 및 파평중학교 부지는 담양군파 사패지 일부를 기부한 것이고 파주산업단지를 포함한 파평산 서록 아래 모든 평지 농토 주택지가 모두 담양군 사패지 였다.
그밖에 파주에 남은 기록을 말하자면, 담양군 현손 宣祖 祖 戶曹判書 坡谷 李誠中은 임진왜란 호성원종공신으로 贈領議政 完昌府院君이고 그 長子 임진왜란 扈聖2等功臣 贈吏曹判書 完興君 李幼澄은 義州牧使로 둘 다 癸巳年 왜란 중 순직하고 선조가 한양에 돌아온 뒤 파주 남쪽 운천리에 예장 되었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 발발 전 인렬왕후 청주한씨의 최초 장릉(長陵)地로 채택된 까닭에 양보하고 서쪽으로 10리를 옮겨 이장하고 다시 파평산 북쪽 선영 지금 자리로 옮겼다. 후에 長陵도 서쪽으로 옮겼다. 특히 완흥군 묘는 현재 파주산업단지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1950년 경인동란전까지 사당에 선조대왕 당시 그려준 화상이 봉안되어 전하였으나 (파주거주 후손 이호영 증언)난리에 화재로 전소되고 복구되지 못한 채 지금은 봉분 바로 앞까지 산업단지에 편입되었다. 또 파주 금릉(금촌)에는 광해군 인조시대에 담양군 5세손 淳昌郡守 이유혼(李幼渾, 執義 李敬中 長子)이 거주하였다.
그 외 파주에 남은 금석문 기록을 말하자면,
1577年, 宣祖10年 丁丑年 담양군 증손 順川君 李琯를 예장할 때 묘비명은 草堂 許曄이 짓고 글씨는 礪城君 宋寅이 썼고
1581年 宣祖14年 辛巳年, 담양군 증손 錦川君 李瑊 부부 묘를 합장할 때 동인의 영수 省菴 金孝元이 짓고
1621年 光海君13年 辛酉年, 坡谷 李誠中 부부 묘를 합장할 때
묘비명을 柳川 韓浚謙이 지었고
1654年 孝宗5年 甲午年, 담양군파 선영 보수 단장할 당시 남인의 영수며 4대 선생인 眉叟 許穆과 龍洲 趙絅이 坡谷 李誠中과 丹涯 李敬中 묘비명을 짓고 글씨도 썼다. 미수 허목은 篆書의 대가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바로 坡谷 李誠中 墓碑의 篆書이다. 李敬中묘 전서로 썼으나 지금은 모두 마모되어 전하지 않는다.
또 1665年 顯宗6年 乙巳年에 미수 허목이 李幼澄과 그 장자 척화신 完陽君 李命雄과 그 아들 李震奎와 正郎 李幼淸 묘비명을 지었다. 이명웅 묘비 글씨는 당대 명필 여주이씨 참판 李震休가 썼다. (담양군파 8대의 돌림자가 震인 까닭에 이진휴가 이명웅의 족질로 잘못 알려져 있으므로 담양군파 종친은 이점을 숙자하시기 바랍니다.)파주 장단에 있는 掌令 李龜齡의 묘비명은 玉川 趙德鄰, 星湖 李瀷이 지었다. 그 아들 李齊宇의 묘지명은 성호 이익이 지었다. 그 이후 세대는 거의 파주에 묘를 쓰지 않았다.
담양군파는 선조시대에 처음 李誠中 敬中 養中 삼형제가 문과 급제하여 이름을 날렸다. 당시만 해도 종친이 문과 급제한 일이 드물었다. 총 2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고 생원 진사 합격자는 백여 명에 이르러 백여 왕자 가문 중 10위 안에 들었다. 종친 인구 수에 비하면 더욱 높은 성적이다. 담양군파는 이성중 형제가 소위 “東人”과“南人”에 속하였던 까닭에 소위 동인과 남인 명문가로 일컬어졌다.
또 담양군의 증손자 錦川君 順川君 洪川副守 삼형제는 모범 종친부 왕족으로서 우애가 남다르고 관혼상례 및 오례에 정통하고 학업에 힘씀은 물론 유교 경전에서 배운 대로 실행하고 부모상이나 中宗 仁宗 明宗 국상에 삼 년을 소식하며 내실에 들지 않은 까닭에 향당에서 감복하고 풍속에 좋은 영향을 끼친 까닭에 “宗 英” “宗班公子”등으로 일컬어졌다. 그 중 順川君 李琯(1518-1577)은 諡號가 孝文, 渾溪先生이고 종실 유학자로서 소위 “宗室 孔孟”으로 일컬어지고 삼 백여 명의 제자를 양성 배출하였다. 살아서 明宗의 표창을 받고 종친부 당상관 明善大夫 順川都正으로 승진하였고 사후엔 광해군이 간행한 “東國新續三綱行實圖”“ 鑄字洞志”에 삼형제의 행적이 실렸다. 또 광해군은 순천군이 살았던 鑄字洞 집에 忠 孝 두 붉은 旌閭門을 세워 주었다. 또 순천군은 유학자로서 “東儒師友錄”에 실리고 “海東名臣錄”仁宗祖 名臣으로 실려 전한다. 또 조선 대표적인 왕실 인물을 수록한 서적 “宗班行蹟”에도 형 錦川君과 함께 실려 전한다. 순천군의 주자동 집은 후손이 서로 전하여 조선 말까지 보존되었고 국조 이래 보존된 故家는 순천군 집뿐이었다고 한다. 또 순천군의 별장은 나라에서 세운 용산 독서당 옆에 있었고 역시 조선 말까지 존재하였다고 한다. (정약용의 글에 나오는 당시 남인 소장파 문인들이 흰 구름떼 처럼 모여서 토론하던 척암 이기경의 용산 별장이란 바로 독서당 옆 순천군 가문 별장을 말한다. 참고로 이기경의 집은 종로 연지동에 있었다. 순천군이 세운 주자동 학교와 용산 별장은 조선말까지 존재하였다.) )순천군 삼형제의 영향으로 담양군파는 남다른 예절로 유명한 남인 명문가였다. 성동이 되기 전 10세 안팍 의 나이에 관혼상례를 익힌 노숙한 어린이가 많았다고 전한다. 예법으로 유명한 명문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