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정신 투철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다
김용식은 1910년 7월 25일, 지금은 이북 땅이 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1910년은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경술국치의 해다. 그가 이해에 태어난 건 이후 성장 과정에서 무시로 드러나는 그의 일인 구타 사건, 광주 학생 운동으로 인한 경신학교 퇴학 사건 등 항일·반일 운동과 태생적으로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 김익두 목사 역시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구속된 다음 혹독한 고문으로 늑골이 골절되는 등 숱하게 곤욕을 치른 바 있어 이 집안의 항일 정신은 부전자전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김 목사의 교회에는 꽤 넓은 마당이 딸려 있었는데, 김용식은 어려서부터 이 마당에서 뛰어노는 게 취미였다. 그러다 일곱 살 무렵 처음으로 주먹만 한 고무공을 차 본 것이 운명적인 축구 인생의 시작이었다.
축구와 연이 닿으려고 그랬는지 공차기가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었다. 온종일 차고 놀다가 지치면 행여 누가 어찌할세라 그 공을 품에 꼭 안고 잠들고는 했다. 돌이켜 보면 이 일곱 살배기 김용식의 공차기는 당시로선 상상할 수도 없던 축구 조기 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공차기에 맛을 들인 다음부터는 해가 떠 있는 낮에는 집 안에서 김용식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동네 아이들과 학교 운동장이나 마을 공터에서 축구 놀이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의 타고난 축구 감각은 이처럼 유년 시절에 길든 몰입의 과정을 통해 몸에 배고 부단히 성장한 것이었다.
김용식은 공차기를 재미있게 하는 한편 신천에 와서 사는 일본 아이들을 혼내 주기 위해 골대 맞히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못 맞혀서 꼴찌를 하면 3전의 벌금을 내도록 규칙을 정했다.
또래 가운데 왕초이던 김용식의 말은 그들 세계에선 법이나 한가지였다. 아이들은 벌금은 싫어도 공 차는 재미를 떨쳐 버릴 수 없어서 시합에 끼어들게 마련이었다. 시합이 반복됨에 따라 꼴찌가 수시로 생기고 지고서도 돈을 못 내는 아이도 있게 마련인데, 그런 경우 김용식은 절대 그냥 두지 않았다. 며칠씩 쫓아다니면서 돈을 받아 내고야 말았다.
우리 아이들은 눈감아 주는 때가 있어도 일본 아이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든, 이를테면 모욕을 주든 주먹질을 하든 반드시 돈을 받아 냈다. 김용식으로선 까짓 3전,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들어온 일본의 만행과 일경의 횡포에 대한 반일 감정이 그의 온몸 구석구석에 분노의 신경망이 되어 퍼져 있었던 까닭이다.
김용식은 열세 살 때 아버지를 따라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된다. 전학을 한 곳은 새문안교회 뒤편에 있던 협성보통학교였다. 그런데 전학과 동시에 큰 골칫거리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그의 황해도 사투리를 흉내 내면서 놀려 대곤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촌놈이라고 공연히 욕질을 하거나 따돌렸다.
본래 성격이 불 같았던 그는 그런 아이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일이었는데, 일대일로 싸워서는 진 적이 없었다. 여럿이 떼로 덤벼들면 한두 차례 맞기도 했지만, 그럴 때는 꼭 나중에 한 사람씩 집으로 찾아가 불러내서는 코피가 터지게 복수를 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의 난투극은 그칠 날이 없었다. 그 결과 전학한 지 1년 만에 불량 학생 누명을 쓰고 학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김용식을 놀려 대다가 얻어맞은 아이들 부모들이 학교에 몰려와 항의 시위를 벌인 까닭이었다. 도둑이 되레 매를 드는 적반하장격이었다. 힘없고 백 없는 시골 촌놈이 고분고분하지 못해 괘씸하다는 게 죄라면 죄였다. 담임선생이 아버지를 불러 전학을 권유한 형식이었지만, 실은 학교 교사나 급우들로부터 성분이 불량한 싸움패로 낙인찍혀 퇴학을 당한 꼴이었다.
그 뒤 김용식은 승동기독학교를 1년 정도 다닌 다음 다시 종로의 YMCA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다. 거기서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상재 선생은 일제의 악랄한 탄압과 나라 잃은 백성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 가르침으로써 민족혼을 일깨우는 강의를 하곤 했다. 이미 아버지를 통해서 항시 반일 감정을 품고 있던 그인지라 이상재 선생의 가르침은 조국애를 더욱 가슴 깊이 아로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축구는 물론 싸움패로도 한가락하는 그였지만 머리는 총명해서 보통학교 졸업 성적은 6등이었다.
YMCA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는 1885년 언더우드 목사가 세운 기독교 계통의 경신학교(이후 '경신'으로 약칭)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개교와 동시에 서구식 근대 스포츠를 도입해서 보급하는 데 앞장섰는데, 특기할 만한 점은 축구를 학교 체육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했다는 점이다.
이 학교에서 김용식이 평생 축구의 동지가 된 채금석과 만난 건 그의 행운이자 또한 채금석의 행운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입학하자마자 뜻밖의 사고를 당해 그는 1년여 동안 선수 생활을 유보해야만 했다. 학교에 들어가 처음 만난 아이들과 힘자랑을 하던 중 허리를 다쳐 1년여 동안 전혀 운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힘깨나 쓰는 개구쟁이에다 오기로 똘똘 뭉쳐 있던 그는 소위 주먹깨나 쓴다는 아이들의 기를 꺾어 놓고 싶었다. 그래서 그 아이들과 큰 돌 들어올리기 시합을 벌였는데 너무 큰 돌을 택한 것이 화근이었다. 용을 쓰며 돌을 들어올려 아이들을 놀라게는 했으나 그만 허리를 삐끗해서 크게 다치고 말았다. 처음에는 좀 있다 나으려니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갈수록 통증이 심해졌다. 좋다는 약은 다 구해 먹고 용하다는 한의사는 다 찾아가 침도 맞았지만 도무지 차도가 없었다.
얼마나 통증이 심한지 허리를 똑바로 펴지도 못해 밤낮 구부정한 자세로 다녀야 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늘 옆에서 돌봐 주던 채금석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금 같은 산골(광물질의 일종이며 산에서 나는 한약재 자연동)을 먹고 허리 병을 고친 사람이 있으니 그 산골을 파는 녹번동의 한약방에 한번 가 보자고 했다.
한약방 주인은 산골을 내주면서 반드시 홀수 날 새벽 해뜨기 전에 동쪽을 보고 앉아 먹어야 효험이 있다고 복용시 노하우(?)까지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 약의 효험 덕분인지 아니면 시쳇말로 운이 좋았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산골을 먹은 지 닷새쯤 지나면서부터 허리가 펴지더니 신통하게도 1년이나 계속되던 허리 병이 완치되었다. 그 일이 소문이 나면서 이후 경신 팀 선수가 허리나 무릎, 다리를 다치면 산골을 구해 먹곤 했다고 한다.
옮긴이: Zlatan 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