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던 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 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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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
개나리 봇짐 지고 가는 곳이 어데냐
팔도 강산 타향살이 몇몇해던가
석양지는 산마루에 잠을 자는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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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 蘭皐 金炳淵 1807~1863
1807년 순조7년 3월 13일 김안근과 함평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고 열 살 전후에는 사서삼경을 통달하는 수준.
20살 되던 해에 과거 예비고사격인 백일장에 참가하는데 이날 백일장 시제는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였다.
이는 1811년(순조11년) 12월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관련.
가산군수 정시는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나
선천방어사 김익순은 국가안보의 중책을 맡은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커녕 즉석에서 항복해버렸다.
이듬해 봄 난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처형 당하고 말았다.
김병연은 평소부터 가산군수 정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 이라고 존경해왔던 반면
김익순을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오던터라
김익순을 탄핵하는 글을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는데,
반역자 김익순이 바로 김병연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반역자는 삼 대를 멸하라는 그 당시의 법대로 김병연 역시 죽어 마땅하였지만
어머니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도망쳐 숨어살고 있었던 것.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얘기를 들은 김병연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을 생각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그의 아내와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아이와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방랑의 길을 떠난다.
역적의 자손인데다 조부를 욕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탔으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여
삿갓을 쓰고 이름도 김병연 대신 김삿갓이라 부르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고 금강산을 특히 좋아했던 그는 서민속에 섞여 상류사회를 풍자하는 시를 짓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두루 살펴보며 수많은 시를 뿌려놓은 난고 김삿갓은
1863년 3월 29일, 57세의 나이로
마침내 전라도 동북땅 적벽강 흔들리는 배에 누워 기구했던 한평생을 회고하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차남인 익균이 거두어 영월군 하동면 노루목에 외로웠던 육신을 모셔놓았다.
세상 사람들은 김삿갓을 '한평생 술이나 얻어먹으며 돌아다니다가 객사한
거지시인'으로 알고 있기가 고작인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김삿갓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생활시인이었고,
문학적으로도 모든 욕망을 초월한 세계적인 선(禪)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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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삿갓
가뿐한 내 삿갓이 빈 배와 같아
한 번 썼다가 사십 년 평생 쓰게 되었네.
목동은 가벼운 삿갓 차림으로 소 먹이러 나가고
어부는 갈매기 따라 삿갓으로 본색을 나타냈지.
취하면 벗어서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고
흥겨우면 들고서 다락에 올라 달 구경하네.
속인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장이지만
하늘 가득 비바람쳐도 나만은 걱정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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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이 춘천 소양강변에서 나룻배를 탔다.
노 젓는 이가 처녀 뱃사공이다.
김삿갓 그예 한 마디 농을 걸친다. "여보 마누라. 노 좀 잘 저으소."
처녀 뱃사공 펄쩍 뛰며 "어째서 내가 댁의 마누라요?"
김삿갓 태연히 답한다. "내가 당신 배에 올라탔으니 내 마누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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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 김삿갓 배에서 내린다. 이때 처녀 뱃사공 회심의 한마디.
"내 아들아, 잘 가거라."
김삿갓 눈이 똥그래져서 "아니, 내가 어찌 그대의 아들인고??”
우리의 처녀 뱃사공 왈 "내 뱃속에서 나갔으니 내 아들 아닌 감!”
김삿갓 오장육부가 시원해질 정도로 껄껄 웃는다.
"헉! 맞는 말일세 그려! 하하하! 어머님 !! 만수무강 하소서.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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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의 혼인 첫날밤
29세 때 기생 가련과 동거했던 것으로 추정
김삿갓이 일생을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세상을 유람하다가
단천(端川) 고을에서 결혼을 한 일이 있었다 한다.
신혼 첫날 호롱불이 꺼지고 천재 시인과 미인이 함께 찰떡처럼...
그런데, 갑자기 김삿갓이 잠자리에서 펄떡 일어나 불을 켜더니
실망의 표정을 지으면서
벼루에 먹을 갈고 그 좋은 名筆로 一筆揮之,
毛深內闊 (모심내활) 必過他人(필과타인)
털이 깊고, 안이 넓어 트였으니
필시 타인이 지나간 자취로다.
이렇게 써 놓고 입맛만 다시면서 한 숨을 내쉬는 신랑의
그 요상한 행동에 신부도 요상한 생각이 일어
김삿갓이 써 놓은 화선지를 물끄럼이 보다가
슬그머니 이불에 감쌓인 몸을 그대로 일으켜 세워
백옥같은 팔을 뻗어 붓을 잡더니
필답으로 그 예쁜 손으로 一筆揮之
後園黃栗不蜂坼 (후원황률불봉탁) 溪邊楊柳不雨長 (계변양유불우장)
뒷동산의 익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저절로 벌어지고
시냇가의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니더.
~~ㅋ 김삿갓 ko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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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金炳淵, 1807년(순조 7년) ~ 1863년(철종 14년))은 조선 후기의 풍자·방랑 시인이다.
속칭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삿갓 립'(笠)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한다.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
선대의 조상을 살펴보면 9대조부는 병자호란때 척화대신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의 사촌형으로 형조참판을 지낸 김상준이며
5대조부는 황해도병마절도사 김시태, 고조부는 전의현감 김관행, 증조부는 경원부사 김이환이다.
그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로 있다가 항복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시로
장원 급제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단장을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 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그는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로 가족과 연락을 일체 취하지 않았으나 한때
그의 아들 익균을 만나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 후 사실상 마지막 방문지인 전라남도 화순에 들렀던 중 그 곳에서 죽었는데
아들 익균이 부고(訃告)를 듣고 화순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시신을 강원도 영월로 운구하여 그 곳에서 안장되었다.
김삿갓 붓을 던지고 羽化登仙
김삿갓은 가물가물하는 정신을 가다듬고, 마지막 정력을 다 쏟아 詩魂을 불사른다.
새벽종소리 들으며 방랑길에 오르니 생소한 객지라서 마음 애달팠노라
從南曉鐘一納履
風土異邦心細量
마음은 고향 그리는 떠돌이 여우같고 신세는 궁지에 몰린 양 같은 나로다.
心猶異域首丘狐
勢亦窮途觸藩羊
머리 굽신거림이 어찌 내 본성이리요 먹고 살아가기 위해 버릇이 되었도다.
搖頭行勢豈本習
糊口圖生惟所長
그런 중에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 삼각산 푸른 모습 생각할수록 아득하네.
光陰漸向且巾失
三角靑山何渺茫
떠돌며 구걸한 집 수 없이 많았으나 풍월 읊는 바랑은 언제나 비었도다.
江山乞號慣千門
風月行裝空一囊
큰 부자 작은 부자 고루 찾아다니며 후하고 박한 가풍 모두 맛보았네.
千金之家萬石君
厚薄家風均試嘗
신세가 기구해 남의 눈총 받다보니 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었도다.
身窮每遇俗眼白
歲去偏傷鬢髮蒼
돌아가자니 어렵고 머무르자니 어려워 노상에서 방황하기 몇 날 몇 해이던고.
歸兮亦難停亦難
幾日彷徨中路傍
김삿갓은 여기까지 쓰다가 마침내 기력이 다하여 붓을 던지고 말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應口輒對로
시를 읊어 댄 것은 그의 타고 난 천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힘이 다하여 눈을 감은 채
무거운 침묵에 잠겨 버린 것이다.
배는 가벼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소동파의 적벽부에 보면
"바람이 가볍게 불어 세상을 잊고 우뚝 선 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다.
(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라는 말이 나온다.
김삿갓은 지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리하여 삼천리 방방곡곡을 두루 답파하여
수많은 시를 뿌려 놓던 천재시인 김삿갓은
마침내 전라도 동복의 적벽강 범선 위에서
永久歸天 하였으니 때는 철종14년 (1863), 향년 56세이었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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