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인의 길, 죄인의 길 시 1:1-6
시편 기자는 사람들이 찾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행복이었습니다. 세상은 형식은 달라질 수 있어도 실질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씀에 주목하는 데에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 자신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시대에 가장 근본적인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여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첫 번째 사실은 바로 행복을 얻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은 다른 모든 것과는 달리 우리가 행복을 찾지 못하는 이유를 말씀해줍니다.
성경은 행복이란 오직 두 가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그의 의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의존하며,
둘째는 내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어떤 선택하는 것 것이다.
삶의 문제를 바라볼 때에, 긍정 앞에 부정이 먼저 오는 이유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성경이 부정으로 출발하는 것은 그것이 온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세상의 잇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출발합니다.
성경은 절대로 현실을 회피하는 일이 없습니다.
성경은 정말로 정직한 책인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이 언제나 부정적인 정죄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첫째 메시지가 바로 이 세상의 삶이 악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깨닫기 전에는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사람이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사실은 그들이 잘못되어 있고 악하며 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언제나 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유는,
영혼을 다루는 유능한 의사와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치료를 하기 전에 먼저 진단부터 하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첫 단계는 언제나 죄의 악함과 회개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회개하고 그리고 나서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피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악인의 꾀”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악인’(불경건한 자)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아주 흥미가 있습니다. 거기 사용되고 있는 단어 자체 속에 불안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불경건한 자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분명히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죄인의 길에 서지 말라”고 합니다.
셋째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조롱하는 자들이요, 성스럽고 거룩한 것은 무엇이든지 이러쿵저러쿵 입에 올리는 자들입니다.
행복의 비결은 이것입니다. 곧,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에게 직접 다가가려는 잘못을 범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 전략을 가르쳐 줍니다.
의를 찾고 구하면, 반드시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을 찾고 구하면 절대로 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큰 실수는 행복이란 항상 환경과 처지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궁극적으로 이 행복은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따라서,
또한 우리 영혼의 상태와 조건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중대한 질문은 바로, 사람들은 어째서 성경이 말씀하는 이 복을, 이 행복을, 믿고 계속해서 체험하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진정한 모습을 전혀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출발부터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릇된 가정을 합니다.
진정한 행복이 잇다면, 주위의 변화하는 온갖 상항과 평편과 이런 저런 인생의 사건들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이나 기독교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차이는 무엇입니까?
나무와 겨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정말 깊고도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차이점들 (껍데기밖에 아무 것도 아님)
불경건한 자는 겨 더미와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불경건한 자는 다 쓰고 남은 잔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윗이 이 불경건한 사람,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은 그 사람은 껍데기에 불과한 사람이요,
생명과 가치를 지닌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남아 있는 찌꺼기에 불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진실은 무엇인가?
어째서 그 사람들에게 복이 없단 말인가?
그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 그에 대한 대답은 사람이 타락했다는 것이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입니다.
이 말이 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본래 타고난 본성대로 보면, 그리고 이 세상에 출생한 상태대로 보면, 사람은 결코 진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사람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면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엃어 버린 고귀한 알곡은 무엇입니까?
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에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는데, 바로 그 형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타락의 결과로 죄 가운데 있는 남녀노소를 볼 때에, 그들에게서 보이는 것은 껍데기밖에는 없습니다.
육체밖에는 없습니다.
일종의 정신적인 삶을 지닌 몸같은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남녀노소의 삶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삶이 아니요, 정신적인 삶일분입니다.
죄와 타락의 결과로 나타난 사람의 모습은 마치 시골에서 가끔씩 볼 수 있는 옛 성의 폐허나 오래된 저택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믿게 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이 겨와 껍데기와 쓰레기와 폐허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지 못하면 그리스도께로 돌아롤 수도 없고, 복음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무입니다. 나무는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겨에 대해서 말씀드릴 두 번재 사실은 그것이 전혀 형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남녀의 진실은 바로 그들이 자기들의 진정한 성격을 잃어버렸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라 할 대에 중요한 점은 그것이 일정한 형체가 있다는 점입니다.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습니다.
세 번째 말씀드릴 사실은 이것입니다.
곧, 나무와 겨를 쌓아 놓은 더미의 또 한 가지 아주 충격적인 차이는, 나무는 뿌리가 있는데 겨는 뿌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교리의 체계를 믿습니다.
그들은 마치 나무처럼 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단단히 박혀 잇습니다. 무언가에 고정적으로 붙어 있습니다. 뿌리가 땅 속에 꽉 박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도 날려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의 체계는 그저 하나님을 믿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심지어 그것조차도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다음 여러분 겨 더미와 나무의 차이는 무생명과 생명의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렇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스스로 개선되거나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자라지를 않습니다. 발전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바로 열매입니다.
겨에서는 절대로 열매가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겨는 언제나 무용지물입니다.
불경건한 자의 삶이 바로 그런 겨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진정한 만족을 주는 법이 없습니다.
죄의 삶은 절대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잠시 동안 만족을 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만족을 준다는 생각도 잠시 동안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는 다 잃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
그리스도인은 시편 기자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곧, 어떻게 하면 이 나무처럼 될 수 있을까?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라고 합니다.
그 나무는 누군가가 거기에 심어 놓은 것입니다.
그 나무 자체가 자기를 심는 것이 아니고, 다른 누군가가 그 나무를 심어 놓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하신 사랑하는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에서(그리고 그를 통하여) 행하신 일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일은 성령께서 모든 개개인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람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바로 이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겨의 상태로 남아 있지 않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는 행동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기록한 책입니다. 심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탄생만이 아니라 그의 유일하신 완전한 삶이요,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하신 그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희생의 죽음, 대속의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인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심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그가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라는 것입니다.
‘심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나요?’
영적인 진리는 과연 무엇입니까?’라고 말입니다.
누군가가 이 나무를 창조해야 하고, 창조한 다음에는 그 나무를 취해서 그 “시냇가”의 그 자리에 세워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 심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의 심령을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심으시면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몇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곡괭이로 내리치고 삽으로 흙을 퍼내는 과정,
곧 깨달음의 역사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과연 아는 바가 있습니까?
죄를 깨닫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왜 그런 마음이 생깁니까?
여러분에게 성령께서 한가지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시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의 모습이 왜 그런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그 이유 때문에 여러분이 불행해져 있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지금가지 행복을 찾으려고 돈과 시간을 그렇게 많이 허비해왔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전혀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그릇된 관계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절망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면 어찌하면 좋을까?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여러분의 영환의 캄캄한 흑암을 더 뼈저리게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저히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과 자괴감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시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모든 것이 땅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땅을 파고, 흙을 퍼내며, 땅을 고루고, 나무를 심을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경건한 사람의 비밀은 바로 그 사삼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거듭나고 중생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역사를 정말 완벽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심겨진 장소가 어디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냇가에”심겨졌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디에 심겨져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심겨졌습니다.
이 새로운 생명 속에 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 이 시편에 나타난 묘사 그 자체만을 보아도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시냇가에 있는 토양의 특징은 깊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냇가의 흙은 언제나 깊이가 있고, 견고한 진흙층이 있고, 온갖 영양분이 거기에 있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거기에 심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영혼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인에서 우리는 이 새로운 인간성을 부여받습니다. 그의 안에 있는 이 완전한 인간성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인들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한 시냇물을 생각해 봅시다.
이 나무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비옥한 토양에 심겨졌을 뿐 아니라, 그 뿌리가 깊이 퍼져 내려가 시내의 밑바닥에까지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거기 시내의 밑바닥에서 온갖 고귀한 영양분과 수분을 끌어 당긴 흡수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고귀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생명을, 그들의 영양분을, 그들의 수분을, 그들의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끌어 당겨 흡수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시편 기자가 “시냇가”를 강조하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거기에는 끝없는 공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듯, 그 생명의 공급도 영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너무도 악하기 때문에 전혀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엡 4:24). 다시 출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질 수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겨져서, 그리스도 자신의 생명을 흡수하고, 그의 안에 심겨지고, 그에게 접붙힘을 받은 것, 이것이 비로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과연 어떤 결과를 낳습니까?
그 첫째 결과는 이것입니다. 그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경건한 사람은 지속성이 있습니다.
진리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삶을 보여 준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5:22-23).
그리스도인이 되는 남자와 여자에게서 바로 이런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좋은 테스트가 됩니다.
그러나 열매가 더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도 열매입니다.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뿐 아니라 실제로 온유와 자비와 사랑의 행실로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가장 영광된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지든 그 모든 것을 대처하게 해 줍니다.
시편 92편은 말씀하기를,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14-1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엿도다”(시37:25)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우리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자들은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청청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