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 10월 28일에 산림청이 주최하고 한국문인협회와 (사)무궁화사랑회가 주관한
제2회 무궁화문학상 수필부문에서 122명 응모작중에 3명이 입상한 작품입니다.
참고로 읽어주시고 내년에는 더많은 상금으로 현상공모한다고 하오니
많은 응모로 수상의 영광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은집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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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60년 만에 만난 나의 무궁화
이 은 집
지난 여름의 긴 장마와 푹푹 삶던 찜통더위가 9월로 접어들자 마음 변한 연인처럼 싹 바뀌어
이젠 아침 공기가 제법 선선한 느낌이다. 작년에 갑작스런 건강의 적신호로 처음 병원 신세를 진 후에,
나는 <숨쉬기 운동>이 최고라며 100미터도 안 걸어 다니던 운동혐오증에서 벗어나야 했는데,
이는 오로지 의사의 협박(?) 때문이었다.
“이 작가님! 아직 명작을 더 쓰고 싶으시죠? 그렇다면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하하! 운동은 숨쉬기 운동만 하면 되잖습니까?”
“...하지만 이 작가님은 곧 휠체어를 타야 할 정도로 근육지수가 걱정되거든요.”
“네에? 그 정도예요?”
“그러니까 아침 저녁으로 동네 공원같은 데에 나가서 한 시간씩만 걸어보세요! 보약이 따로 없습니다.”
암튼 이런 의사의 처방으로 나는 평생 안 하던 걷기운동을 시작했는데, 정말로 밥맛도 나고 잠도 잘 와서
작품은 물론 활동도 예전과 다름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오전 6시에 일어나 아침운동을 위해
동네 근린공원으로 나갔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주로 나이가 든 아침운동 동호인들이 산책로를 따라 돌고 있었다.
“아! 정말 상쾌한 아침이야! 영정사진 찍고 상조회 가입한 내가 이렇게 살아서 아침운동을 하다니...!”
문득 나는 이런 감격에 젖어 공원의 산책로를 돌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에서 문자메시지가 들어 온 신호음이 들렸다.
그래서 핸드폰의 폴더를 열고 확인해보니...!
<화암7회동창회 부고! 이호규 회장 금일 새벽 별세! 00병원 영안7호실! 발인 28일! 총무 강인철>
‘으응! 뭐야? 아프단 소리도 없었는데...!”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허어! 이호규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뜨다니...?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 건가?’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공원의 잔디밭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이호규와 함께 초등학교를 다닌 고향의 유년시절로 달려갔다.
“그러니까 벌써 몇 년전인가? 초등학교 입학한 여덟살에 만나 졸업 때까지 함께 다녔으니까 60여년이나 되는군!”
흔히 충남의 알프스로 불리우는 내 고향 청양의 화성면 화암리 공덕골 마을은 그야말로 산촌중에도 험한 오지였는데,
그래도 들판 가운데 화암초등학교가 있어서 화암리, 기덕리, 수정리, 농암리의 아이들이 입학하여 동창이 되었다.
그중에서 이호규는 같은 화암리에 살아도 동네가 틀려 나는 입학을 해서야 알게 된 아이였다.
“야! 너 공덕골 사는 이은집이지? 너희 형과 누나가 공부를 잘 해서 항상 우등생인 걸 알아! 하지만 넌 우등생이 안될 걸!”
“응? 그게 무슨 소리여?”
그때 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채로 이호규를 바라보았는데, 걔는 빡빡 깎은 머리에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나와는 달리
상고머리에 노란 단추가 나란히 박힌 양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흥! 두고 보자구! 누가 우등생이 되는가!”
하지만 이호규의 이런 장담은 빗나가고 말았다. 역시 내가 형과 누나의 뒤를 이어 일등을 했던 것이다.
“은집아! 느네는 천재 집안인가 보다. 또 일등을 했응께 말여!”
당시 나의 담임이던 박승일 선생님의 감탄이었다. 그러자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을 때 이호규가 나를 불러 학교 뒤뜰의
으슥한 곳으로 이끌었다. 그곳엔 무궁화 울타리가 있었는데 한창 꽃송이가 피어 있었다.
“야! 내 부탁 하나 들어줘라!”
“응? 그게 뭔데...?”
“내가 엄니랑 약속했거든! 꼭 일등을 한다구. 근디 네가 일등을 하잖여?”
“난 그냥 암케나 시험봐두 그런 걸 워쪄?”
“임마! 답을 틀리게 쓰면 되잖여?”
“뭐여? 워찌 틀린 답을 쓴다냐? 글지 말구 짝꿍인께 내 걸 살짝 보라구!”
말하자면 나는 이호규에게 컨닝을 시켜주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호규가 나의 답을 훔쳐보다가 들통나서
담임선생님에게 종아리에 피멍울이 맺힐만큼 회초리를 맞게 되었고, 이를 내가 몰래 고자질한 것으로 오해를 했던 것이다.
“얌마! 네가 꼬아바쳤지?”
그 바람에 나는 다시 학교 뒤뜰의 무궁화 울타리로 끌려가 이호규한테 얻어맞았다.
“공부만 잘 하면 다여? 혼자 일등 다 해먹어라! 나쁜 새끼!”
이윽고 이호규는 나에게 욕설을 퍼붓고 나서 교실로 들어갔고, 나는 억울함에 눈물만 흘리다가 무궁화 울타리로 다가가
무심코 꽃송이에 코를 대어 냄새를 맡았다. 그러자 나의 코로 무궁화 꽃향기가 아찔할 정도로 파고들었다.
“아! 이래서 벌들이 무궁화꽃에 많구나!”
그런데 무궁화는 다른 나무에 비해 아주 늦게 잎이 피어나지만 꽃은 한번 피기 시작하면 몇 달을 두고 끊임없이 피어났다.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꽃!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꽃!>
이 무렵 담임선생님이 음악시간에 풍금 반주로 무궁화꽃 노래를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 반 애들은 학교 뒤뜰의 무궁화 울타리에 가서
무궁화꽃을 따먹으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부르곤 했다. 하지만 2학년에 올라간 여름에 오랜 가뭄으로 들판의 논에 물이 마르고
동네 어른들의 걱정소리가 높았을 때 그토록 끔찍한 6.25전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나는 전쟁소식을 큰누나가 부엌솥에 콩을 볶아 줄 때
처음 들었다.
“얘 은집아! 큰일 났다! 김일성이 쳐들어와 난리가 낫디야!”
“난리가 뭔디유?”
“으응! 바루 이 솥에서 콩튀듯 인민군이 따발총을 쏘면서 쳐들어와서 벌써 서울을 쑥대밭으루 만들었디야!“
“증말유? 그런디 학교서 선생님들은 그런 말씀 안 허시던디유!”
“두구 봐라! 너같은 애들은 잘 모르겠지먼, 인제 우리 동네에두 큰일이 벌어질껴!”
나보다 다섯살이나 위인 큰누나는 볶은 콩을 주걱으로 푸면서 이렇게 말했다. 큰누나의 그런 예언은 얼마 안 되어 사실이 되었다.
갑자기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동네를 돌아다녔던 것이다. 암튼 그 전쟁으로 여러 날 동안 학교를 다니지 않았는데,
어느날 다시 학교를 나오라고 해서 우리들은 신이 나서 달려갔다. 그러자 아주 젊은 선생님들은 우리를 학교 뒷산의 소나무
숲속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상한 사투리로 노래를 가르쳤다.
"어린 동무들! 노래 따라 하라우!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바로 이때 이호규가 실력을 발휘했다. 그 노래를 가장 잘 불렀던 것이다.
“오! 호규 동무가 최고입네!”
북에서 온 선생님의 칭찬에 이호규는 나를 향해 으쓱하는 몸짓을 보였는데, 나는 며칠 후에 더욱 놀라운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호규 에미가 여성동맹위원장이라네! 그래서 집집마다 다니며 호박도 세어가고 장독대의 된장도 퍼간다네!
누가 과부 아니랄까봐 방물장수로 떠돌며 남의 서방 홀리더니 이젠 아주 살판났는가벼!”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나는 이호규가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6.25 전쟁이 끝나자 이호규는 어머니와 야밤에
동네를 떠나버리고, 그로부터 소식이 끊긴 채로 30여년이 지나서야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나이도 사십줄인데 동창회를 만들어야 하는게 아녀?”
도시로 떠났던 화암초등학교 동창들은 명절 때 가끔씩 만나면 이런 논의를 하다가 드디어 1989년에 정식으로
화암7회동창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히 수원에 산다는 이호규를 찾게 되었는데, 그는 나를 보자 못볼 사람을 본 듯 외면했다.
그런데 내가 총무로 뽑히자 이호규는 사사건건 토를 달고 나섰다.
“야! 우리 다같이 늙어가는데 적당히 넘어가자구!”
회장이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도 이호규는 끝내 심통을 부렸는데, 그럴수록 화합이 필요하다며 동창들은 그를 다음 회장으로 추대했고
나를 계속 총무를 시키자고 했다.
“무슨 소리야? 총무 임명은 회장의 고유 권한이라구! 강인철을 총무로 임명하겠어!”
그 바람에 나는 20여년이나 계속 하던 총무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마지못해 참석하는 동창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이와 함께
점점 쇠퇴하는 화암7회동창회가 되었는데, 바로 오늘 갑작스레 이호규 회장의 부음을 듣게 된 것이다.
“이 총무! 나 강 총무야! 이호규 회장, 문자 받았지? 췌장암으로 갔다는구먼! 고향에 묻힌다니께 너두 함께 가자.”
그런데 죽음은 모든 애증을 풀어주는 계기가 되는 것일까? 나는 그 동안 이호규 회장과 껄끄럽던 관계가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그의 영안실에 가서 가장 오랜 시간 문상하는 동창이 되었고, 고향인 충남 청양군 화성면 화암리 동산에 묻히는 그의 장지에까지
따라가게 된 것이다.
“야! 은집아! 근데 이호규 회장이 부인한테 유언을 했대. 자기가 죽으면 화암학교를 들려 장례를 치러달라구 말여!”
“그래? 왜 그랬을까? 호규는 6.25때 고향을 도망치듯 떠나서 모교도 잊은 줄 알았는데...”
나는 그 순간 이런 의문에 빠졌는데 그의 유언대로 우리 화암7회 동창들이 함께 영구차를 타고 화암 모교에 들러서야 이를 깨닫게 되었다.
이미 20여년전에 폐교된 화암초등학교는 이제 마을공동의 농촌체험장으로 바뀌어 전혀 딴 모습으로 변했지만, 뒤뜰의 무궁화 울타리는
그대로 남아 60여년전처럼 여전히 화려한 무궁화꽃을 피워 애국가의 구절처럼 <화려강산>을 수놓았던 것이다.
“아! 무궁화야! 얼마만이야? 60년도 더 됐잖아? 정말 반갑구나!”
나는 초등학교 때 이호규한테 끌려와 처음 만난 무궁화이지만 이젠 그가 고인이 되어 왔기에 두려울 것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가 살았다면 우리는 옛 추억을 나누며 오히려 우정을 나누게 되지 않았을까?
“그래! 다 지나간 일이야! 이젠 나도 수구초심으로 고향에 묻힐 나이니까...!”
나는 혼잣말로 중얼이며 무궁화 가지마다 활짝 핀 꽃송이에 코를 대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에 담임선생이
풍금 반주로 가르쳐 준 <무궁화> 동요를 나직히 브르기 시작했다.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꽃...!>*
2012 무궁화 문학상 응모작.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