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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당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
오늘날 로마교는 이전보다 훨씬 더 호감으로 개신교의 인정을 받고 있다. 천주교가 우세하지 못한 나라들에서는 법왕 교도들이 세력을 얻기 위하여 융화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개혁교회들과 법왕의 교권 제도를 분리시키는 그 교리들에 관하여 점차적으로 무관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결국 개신교도들이 지금껏 생각해 왔던 것만큼은 중요한 점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것과 우리 편에서 조금만 양보하면 로마교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 세력을 더해가고 있다.
일찍이 개신교도들은 매우 고귀한 값을 지불하고 얻은 양심의 자유를 높이 평가한 때가 있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법왕교를 거부하도록 가르쳤고 로마교와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충성한 일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표현되고 있는 의견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GC 563.1)
법왕권을 옹호하는 자들은 그 교회가 중상을 받아왔다고 주장하며, 개신교계에서도 그 말을 인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무지와 암흑의 세기 동안에 그 교회의 지배의 특징이 되었던 포학과 모순으로 오늘날의 그 교회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두려운 잔인성을 그 시대의 미개함에 돌리고 근대 문화의 영향이 그 교회의 생각을 변화시켰다고 주장한다. (GC 563.2)
그 사람들은 그 거만한 세력이 8백 년 동안 주장해 온 법왕 무류설을 잊어버렸는가? 그 주장은 철회되기는커녕 도리어 19세기에 있어서는 이전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로마교는 “교회는 결코 오류가 없었고, 성경 말씀에 따르면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John L. Von Mosheim, Institutes of Ecclesiastical History, book 3, Century 11, part 2, chapter 2, section 9, note 17) 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 교회가 과거에 지배되어 온 원칙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GC 564.1)
법왕 교회는 그 무류설을 결코 철회하지 아니할 것이다. 법왕 교회의 교리를 부인한 자들에게 자행한 온갖 박해를 그 교회는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동일한 일을 반복하지 아니하겠는가? 현재 세속적 정부들에 의하여 과해져 있는 억제가 제거되고 로마교가 이전의 권세를 회복하게 되면 그의 박해와 학정이 급속히 부활될 것이다. (GC 564.2)
어떤 유명한 저자는 양심의 자유에 대한 법왕권의 태도와 그 정책의 성공으로 특별히 북미 합중국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GC 564.3)
“북미 합중국이 로마 천주교에 대하여 느끼는 불안을 종교적 편협이나 유치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로마 천주교의 특성과 태도에서 우리의 자유로운 제도에 적대적인 것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거나 아니면 로마 천주교의 성장에서 불길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먼저 우리 정부와 천주교의 근본 원칙의 몇 가지를 비교해보자.” (GC 564.4)
“북미 합중국의 헌법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보다 더 귀중하고 근본적인 것은 없다. 그런데 법왕 피우스 9세는 1854년 8월 15일자의 동문 통달 (同文通達) 에서 ‘양심의 자유를 옹호한다는 불합리하고 그릇된 교리나 헛소리는 가장 유해한 오류로서 한 국가에 있어서 어떤 다른 것보다 가장 두려운 해를 끼치는 것이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 법왕은 1864년 12월 8일부의 동문 통달에서 ‘양심과 예배의 자유를 주장하는 자’와 또한 ‘교회가 폭력을 쓰지 말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자들’을 저주하였다.” (GC 564.5)
“미국에 있어서의 로마교의 평화적 태도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 관대한 태도를 취한다. 오 커너 감독은 말한다. ‘종교 자유는 반대가 천주교계에 해를 끼침 없이 수행될 수 있을 때까지만 허용된다.’...세인트 루이스 대감독은 한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단과 불신은 죄악이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와 스페인처럼 국민 모두가 천주교도이며, 또한 천주교가 그 국가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는 이단과 불신은 다른 범죄와 같이 처벌될 것이다.... ’” (GC 565.1)
“천주교회의 모든 추기경과 대주교와 주교들이 법왕에게 하는 충성의 맹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다. ‘나는 이단자들과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 그리고 주 (법왕) 와 그 후계자를 반역하는 자를 극력 반대하고 박해하겠나이다.’” (Josiah Strong, Our Country, ch.5, pars.2~4). (GC 565.2)
로마교 내에도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교회에 속한 무수한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빛을 따라 최선껏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도록 용납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와 단지 형식과 의식만을 반복하는 것과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혼미하고 만족을 줄 수 없는 신앙의 교육을 받은 그들을 긍휼이 많은 자비의 눈으로 주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두르고 있는 짙은 암흑을 꿰뚫을 수 있는 빛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의 진리를 그들에게도 계시해 주실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그들의 입장을 같이 하게 될 것이다. (GC 565.3)
그러나 오늘날도 로마교의 제도는 과거의 역사에서처럼 그리스도의 복음과 전혀 조화되지 아니한다. 개신교회들은 큰 암흑 속에 묻혀 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였을 것이다. 로마교는 그의 계획과 경영 방식이 매우 원대하다. 그는 그의 세력을 넓히고 전 세계를 지배할 세력을 다시 얻고, 박해를 부활시켜서 개신교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한 치열하고 결정적인 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온갖 계책을 다 써서 그의 영향력과 권세를 증가시키는 데 힘쓰고 있다. 오늘날 도처에서 로마교는 세력을 얻고 있다.
개신교 국가들에서 로마교의 교회당과 교인수가 증가되고 있는 것을 보라. 미국에서 개신교도들의 광범위한 후원을 받고 있는 로마교의 대학들과 신학교들의 인기를 생각해보라. 영국에서의 의식주의 (儀式主義) 의 성장과 로마교의 대열에 가담하기 위한 빈번한 탈회 행위를 보라. 이런 일들은 복음의 순수한 원칙을 존중하는 모든 사람들의 깊은 우려를 일깨워야 한다. (GC 565.4)
개신교는 로마교에 손을 내밀어 후원해 오고 있다. 그들은 로마교들도 놀라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타협하고 양보하였다. 사람들은 로마교의 진상과 그가 최상권을 잡게 될 때 생길 위험들에 대하여 그들의 눈을 감고 있다. 사람들은 정치와 종교 자유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이 원수의 진격을 저항하기 위하여 각성할 필요가 있다. (GC 566.1)
많은 개신교도들은 로마교가 매력적이 아니며 그 예배 역시 어리석고 무의미한 의식의 반복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오해하고 있다. 비록 로마교가 기만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을지라도 그것은 조잡하고 졸렬한 모양으로 가장되어 있지 않다. 로마교의 예배 의식은 가장 인상 깊은 의식이다. 그 화려한 장식과 엄숙한 의식은 사람들의 감각을 매혹하고 이성과 양심의 소리를 침묵시킨다. 그 눈은 황홀해진다.
웅장한 교회당, 당당한 행렬, 황금빛 제단, 보석으로 장식한 신단, 정선된 그림들, 정교한 조각들은 사람들의 미적 감각에 호소한다. 귀도 또한 황홀해진다. 그 음악은 비할 데 없이 훌륭하다. 은은하면서도 풍성한 오르간 소리, 웅장한 성전의 높은 천장과 둥근 기둥으로 구분된 복도를 통하여 울려오는 무수한 음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질 때 사람들은 경이감과 숭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GC 566.2)
이와 같이 외형상으로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과 의식은 죄에 빠진 영혼들의 갈망을 우롱 (愚弄) 하는데 불과하고 그 내부의 부패를 증거한다.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것에 매력을 갖게 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에서 비쳐오는 빛 가운데서 참된 그리스도교는 순결하고 아름답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 참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외관상 장식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은 성결의 미와 겸손하고 안정된 정신이다. (GC 566.3)
외관상 아름다움이 반드시 순결하고 고상한 사상의 지표는 아니다. 고상한 예술 지각과 우아하고 세련된 취미가 세속적이며 육욕적인 사람의 심중에도 흔히 있다. 그들은 흔히 사단에게 이용되어 사람들에게 심령의 필요를 잊어버리게 하고 미래의 생애와 영생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무한한 구원자에게서 돌아서서 이 세상만을 위하여 살도록 만든다. (GC 567.1)
외관을 치장하는 종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매력적이다. 천주교 예배의 화려한 모습과 의식에는 매혹적이며 황홀케 하는 일종의 힘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기만당하여 로마교를 바로 하늘 가는 문인 것처럼 쳐다보게 된다. 오직 진리의 기초 위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성령으로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들만이 로마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스도께 대한 체험적 지식을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경건의 모양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종교가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종교이다. (GC 567.2)
교회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주장은 로마교도들에게 마음대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다. 그리고 죄를 고백하는 의식 (儀式), 곧 그것이 없으면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그 의식 또한 죄를 범하도록 허용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해주는 경향이 있다. 타락한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심중의 은밀한 사상과 생각을 고백하는 자는 자신의 인간성을 저하시키고 심령 속에 있는 온갖 고상한 능력을 저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사제 (司祭), 실수와 죄가 많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너무도 흔히 음주와 방종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자기 생애에 있는 죄를 고백함으로 그의 품성의 표준은 저하되고 그로 말미암아 더럽혀진다. 그는 하나님을 타락한 인간과 같은 분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제가 하나님의 대표자의 위치에 서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그 비열한 고백은 이 세상을 더럽혀서 마지막 멸망을 받게 하는 많은 죄악을 흘려 내보내는 보이지 않는 원천이다.
그러나 방종을 좋아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 마음을 펴놓는 것보다 자기와 동일한 인간에게 고백하는 일이 더욱 좋게 여겨진다. 또한 인간성에서 볼 때 고행을 하는 것이 죄를 버리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일이며 육체를 베옷과 쐐기풀로 괴롭게 하고 쇠사슬로 제어하는 편이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보다 더욱 쉽다. 육신의 마음으로는, 무거운 멍에를 메는 것이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보다 더욱 낫다. (GC 567.3)
로마교회와 그리스도 초림 당시의 유대교와는 현저한 유사점이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원칙들을 비밀리에 유린하면서 표면상으로는 그 조문들을 엄격히 지켰다. 그리고 까다로운 요구와 유전을 첨가시켜 그것을 준수하는 일이 고통스럽고 괴롭게 만들었다.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을 존중하노라고 공언했던 것처럼 로마교도들은 십자가를 존중하노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징을 높이면서도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는 그것이 대표하는 그분을 부인한다. (GC 568.1)
로마교도들은 십자가를 교회에, 강단에 그리고 그들의 의복에 붙인다. 어디에서나 십자가의 휘장을 보게 된다. 외관상으로는 어디서나 그것이 존경과 높임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들은 무의미한 유전과 거짓된 해석과 엄격한 규칙들의 무더기 아래 묻혀 버린다. 완고한 유대인들에 관한 구주의 말씀은 오히려 로마 천주교의 지도자들에게 더욱 정확히 적용된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 (마 23:4) 한다. 양심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거스름으로 받는 진노를 두려워하고 있는 한편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사치와 쾌락을 즐기는 생활을 하고 있다. (GC 568.2)
성상 (聖像) 과 유물 예배, 성자 (聖者) 들에게 드리는 기도, 법왕 숭배 등은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에게서 떠나가게 하려는 사단의 간계이다. 사단은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오직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의 분에게서 그들의 주의를 이탈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사단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고 말씀하신 분을 대신할 어떤 대상에게로 그들을 이끌 것이다. (GC 568.3)
사단은 하나님의 품성과 죄의 성질과 대쟁투에 걸려 있는 진정한 문제를 잘못되게 나타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의 궤변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의무 관념을 박약하게 하여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그릇된 관념을 갖게 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그분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게 만든다. 사단은 그의 품성 속에 본래부터 있는 잔인성을 창조주께 돌리고 그것을 종교 제도에 구현시키고, 예배의 형식에 나타내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의 마음이 어두워지자 사단은 그들을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일에 자신의 대리자로 삼는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관념이 곡해됨으로써 이교국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사람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우상 숭배의 형태 하에서 무섭고도 잔인한 일들이 자행되어 왔다. (GC 569.1)
로마 천주교는 이교와 그리스도교의 형태를 혼합하고 또한 이교처럼 하나님의 품성을 잘못 나타내며, 그에 못지않은 잔인하고 역겨운 수단들을 사용해 왔다. 로마교의 전성시대에는 그의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기 위하여 고문하는 기구들이 사용되었다.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위한 화형주가 있었다. 심판 때까지는 결코 알려지지 않을 어떤 규모의 대량 학살들이 감행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주인이 되는 사단의 지배 아래 그들의 희생물이 된 자들에게 최대의 고문을 하면서도 그 생명을 종식시키지 않는 방법을 고안하기 위하여 연구하였다. 많은 경우에 사람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극악무도한 고문을 반복하였으므로 고통받는 자의 신체가 투쟁을 포기하였으며 그는 죽음을 즐거운 해방으로 환영하였다. (GC 569.2)
이런 것이 로마교에 반대하는 자들의 운명이었다. 로마교는 그 신봉자들에게도 채찍질과 굶주림의 고통과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있는 온갖 육체적 고통과 낙담시키는 방법으로 징계를 과하였다. 하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회개한 자들은 자연의 법칙을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지상 생애를 복되고 즐겁게 해주시고자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줄을 끊어 버리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선천적 애정을 억제해 버리고 그들의 동료 인간들에게 대한 동정의 생각과 감정을 갖는 것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로 생각하여 그것들을 억누르기 위한 헛된 노력에 그들의 생애를 허비한 무수한 희생자들이 교회의 묘지에 누워 있다. (GC 569.3)
과거 수백 년 동안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들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교국의 중심부와 그 전역에서 사단이 나타낸 잔학성을 알고자하면 로마교의 역사를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이 거대한 기만의 조직을 통하여 악의 왕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인류를 불행하게 하는 그의 목적을 수행한다.
사단이 자신을 변장하는 일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그의 사업을 수행하는 일에 참으로 성공적임을 알 때 우리는 그가 성경에 대하여 그처럼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더욱 잘 깨달을 수 있다. 성경이 읽혀지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무거운 짐들을 하나도 사람들에게 지워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회개하고 상한 심령과 겸손하고 순종하는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GC 570.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 가운데 남녀들이 하늘에 적합한 사람들이 되려면 수도원에 묻혀야 한다는 아무런 모본도 주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랑과 동정심을 억제해야 한다고 결코 가르치지 않으셨다. 구주의 마음은 사랑으로 넘쳐 있었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완전해지면 질수록 그의 감수성은 더욱 예민해지고 죄에 대한 지각은 더욱 밝아지며 고통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심은 더욱 깊어진다. 법왕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품성을 우리 구주의 품성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하늘의 왕으로 존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감옥이나 고문대에 넘겨주신 일이 있었는가? 그분께서 당신을 믿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등한히 여김을 받으시자 사도 요한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질문하였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쫓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 9:54).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눈으로 당신의 제자를 보시며 그의 과격한 정신을 책망하셨다.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 (눅 9:56 난외 주).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그 정신은 그분의 대표자라고 공언하는 사람의 정신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GC 570.2)
오늘날 로마교는 그의 무서운 잔학성의 기록을 변명으로 덮어 버리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세상을 대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같은 차림으로 나서지만 실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지나간 시대에 존재했던 법왕교의 원칙들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가장 암흑한 시대에 고안된 교리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천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 개신교도들이 존경하고자 하는 법왕교는 종교 개혁 당시에 세상을 지배하였고 그 당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그의 죄를 폭로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걸고 항쟁한 그 동일한 로마교이다. 그는 왕들과 군주들을 다스리고 하나님께 속한 권한을 가졌노라고 공언하던 동일한 교만과 뻔뻔스런 주장을 오늘날도 가지고 있다. 그의 정신은 인류의 자유를 억압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죽인 당시와 똑같이 오늘날도 잔인하고 포학하다. (GC 571.1)
많은 개신교도들은 로마교가 매력적이 아니며 그 예배 역시 어리석고 무의미한 의식의 반복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오해하고 있다. 비록 로마교가 기만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을지라도 그것은 조잡하고 졸렬한 모양으로 가장되어 있지 않다. 로마교의 예배 의식은 가장 인상 깊은 의식이다. 그 화려한 장식과 엄숙한 의식은 사람들의 감각을 매혹하고 이성과 양심의 소리를 침묵시킨다.
그 눈은 황홀해진다. 웅장한 교회당, 당당한 행렬, 황금빛 제단, 보석으로 장식한 신단, 정선된 그림들, 정교한 조각들은 사람들의 미적 감각에 호소한다. 귀도 또한 황홀해진다. 그 음악은 비할 데 없이 훌륭하다. 은은하면서도 풍성한 오르간 소리, 웅장한 성전의 높은 천장과 둥근 기둥으로 구분된 복도를 통하여 울려오는 무수한 음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질 때 사람들은 경이감과 숭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GC 566.2)
이와 같이 외형상으로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과 의식은 죄에 빠진 영혼들의 갈망을 우롱 (愚弄) 하는데 불과하고 그 내부의 부패를 증거한다.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것에 매력을 갖게 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에서 비쳐오는 빛 가운데서 참된 그리스도교는 순결하고 아름답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 참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외관상 장식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은 성결의 미와 겸손하고 안정된 정신이다. (GC 566.3)
외관상 아름다움이 반드시 순결하고 고상한 사상의 지표는 아니다. 고상한 예술 지각과 우아하고 세련된 취미가 세속적이며 육욕적인 사람의 심중에도 흔히 있다. 그들은 흔히 사단에게 이용되어 사람들에게 심령의 필요를 잊어버리게 하고 미래의 생애와 영생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무한한 구원자에게서 돌아서서 이 세상만을 위하여 살도록 만든다. (GC 567.1)
외관을 치장하는 종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매력적이다. 천주교 예배의 화려한 모습과 의식에는 매혹적이며 황홀케 하는 일종의 힘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기만당하여 로마교를 바로 하늘 가는 문인 것처럼 쳐다보게 된다.
오직 진리의 기초 위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성령으로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들만이 로마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스도께 대한 체험적 지식을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경건의 모양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종교가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종교이다. (GC 56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