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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영필 원문보기 글쓴이: 작은무늬
사료에 나타난 구영필의 항일독립운동과 약력<2>
- 일우 구영필 연구회 -
<1>에서 계속
● 1921.06 입법, 사법, 행정권을 가진 조선인 자치기관인 영안현「입적간민호회」 설립.
최계화란 이름으로 중국에 입적하여 「영안현입적간민호회」로 조직을 변경하고 회장으로 추천되어 이주동포를 계속 지도하였다. 「영안현입적간민호회」는 중국당국으로부터 입법, 사법, 행정 등의 권한을 획득하여 조선인에 대한 자치를 실시한 북만의 실질적인 조선인 자치기관이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인자치국가를 영안현 일대에 건설코자 농지를 매입하고 간척지 개간과 수전사업을 일으켜, 조선인 이주가 급증하였다. 동지들을 규합하고 중국 관헌과 교제하고 협의하여 학교, 병원, 정미소, 교회, 묘지 등을 설립하고 청년회를 조직하여 문화독립을 표방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간민호회는 1923년 10월경에는 회원이 420여호에 이르렀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대정 11년 10월 5일 기밀번호 제235호, 「고려국 건설 계획에 관한 건」 밀 정의 정보에 의하여 고려국 건설 계획이 있다는 보고를 함.
『조선일보』 1927.01.25 -‘영안현 입적 간민호회는 중국으로부터 허가를 득하여 입법, 사법, 행정 등 조선인에 대한 자치를 실시한 북만의 자치기관이었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아세아국 제3과 기밀 수제140호과 기밀 수제237호
김정명, 『민족주의 운동편』 1025-1027,1054쪽.
『매일신보』 1921.12.22. 『조선일보』 1925.01.11.
조선총독부, 「길림성 동부지방상황,1928년 북만지방사상운동 개황, 북만지방재주 조선인상황 종합보고」,43쪽.
영고탑 영안병원 개원기념(구영필의 가족과 병원 관계자)
※ 구영필 제수 지수옥의 증언에 의하면, 구영필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온돌방 불을 지피고, 시장에 나가 채소와 식료품을 직접 사오며, 동네를 한바퀴 돌아 둘러보았다. 그는 인자하고 부지런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을 상해로 보내곤 하였다. 영고탑에서 구영필의 하는 일이 재무 담당이고 상해임정의 재무위원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를 흔히 최재무라 불렀다.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신주백 저, p.60-61.
- 간민호회와 무장독립세력의 갈등 시작
북만 지역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이주한 곳은 영안현이다. 이곳에는 귀화한 한인을 중심으로 1921년에 결성된 영안현입적간민호회가 있었다. 애초 입적간민호회는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의 대항 단체로 결성되어, 중국 지방정부의 후원을 받았다. 이에 당시 경신참변을 피해 동만지역의 무장독립세력이 북만지역에 이주해 와서 이곳에 세력의 뿌리를 내리면서 입적간민호회와 같은 주민 자치조직과 원만한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대한독립군단은 1922년 말 목릉현 마교하에서 한인의 무장활동을 견제하는 중국 지방관헌에게 무장을 해제당하였고, 이후 주요 간부들이 영안현 영고탑으로 집결하여 재기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이들의 의무금 징수활동은 입적간민호회와 그곳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이에 중국의 지방관헌은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를 체포하려 하였고,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는 다시 흩어져야했다. 이렇게 하여 쌓인 갈등은 신민부가 결성된 이후 폭발하였다.-
『조선총독부경무국, 길림성동부지방의 상황, 387쪽, 411-415쪽』
『경찰사-하얼빈총영사관 외편, 12568-12574쪽』
● 1921.06.12 보고 중국, 일본, 한국 등지의 각 신문 구독하여 정세 분석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대정 10년 6월 12일 기밀번호 제384호
- ‘최계화(남선인) 토지 천일경(경)을 소유하고 있다.’고 기록됨. ‘영고탑에서 많은 농토를 소유하고 있으며 하얼빈신문, 부산신문, 봉천신문, 대판(오사까)의 조일신문, 동경일보 등을 구독하고 있다.’ ‘최계화는 그 지방의 조선인과 중국인과의 교제와 왕래가 적극적이고 원만하다.’-
● 1921 중국인과 합작회사 설립
중국 영안현에서 「동북간목공사」라는 합작회사를 중국 사람과 함께 설립하여 농지를 개간하고 이주동포를 지도하였다. 『민국12년 신조사 중, 영안현지 권3 직업편』
● 1921.12. 독립운동의 방침 결정
김정명 편, 『공산주의운동편』 230쪽, 대정 11년 5월 23일 「조특보 17호」
- 상해가정부 재무부장 최계화 이하 십 수명은 영고탑에서 만나 독립운동에 좌의 방침을 결정했다.-
- 상해가정부은 재정난으로 앞으로 유지가 곤란하여 전원 사직하고 이후 북경의 박용만의 지도를 받아서 소련공산당과 손을 잡고, 동지연선과 시베리아 방면으로 세 력을 확장할 것을 천명했다.-
영안 고려공산당 북만 지부 수령 최계화, 강구우로 기재 되어 있으며, 관련인으로 이동휘, 박용만, 구춘선, 홍범도, 문창범, 최명록, 백인민, 안무, 마진’등도 기술되어 있다.
● 1922 공제호 정미소 개설 간민호회의 최계화는 1920년에 설립한 공제호(공제호) 기관에 새로이 정미소를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명치백년사총서 조선독립운동II 민족주의운동편』 김정명편, 1025쪽, 제3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주의운동, 191 영고탑 부근에 있어서 조선인 등의 현황보고의 건, 대정11년 2월 6일, 조특보 제4호, (비) 영고탑 부근에 있어서 선지인의 현황, 6. 유력선인」
※ 공제호란 기관의 이름은 “함께 빈곤에서 구제하자고 부르짖어 외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제호는 빈곤한 조선인을 도와주고 구제하기 위해서 세운 구제적 성격을 가진 기관이었으며, 당시 영고탑 지역의 조선인을 위한 우편 업무까지 도와주었던 다목적 기관이었다.
※ 한영근의 부인 주선의 증언에 의하면, 구영필은 늘 많은 자금을 가지고 남들이 하려고 해도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땅을 사놓고, 또 당시 길림성 일대에 유일한 동력 정미기계를 들여와서 정미소를 차렸다.
공제호 정미소 개공 기념
※ 구영필의 제수 지수옥의 증언에 의하면, 영고탑으로 오는 조선인 편지, 소포 등은 모두 공제호로 도착하여 배달되었고, 구영필 집에는 항상 독립운동가, 농민들이 주재하였는데, 매일 곡식 반 가마를 풀어 좁쌀밥과 국을 대접하였고, 일주일에 한 번씩 소 내장을 사서 쇠고기국을 대접하였다. 공제호에서 우마차가 나갈 때 가마니 속에 무기를 숨긴 채 우마차에 실어 밖으로 가는 것을 직접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 1922.02 일어, 중어, 조선어의 3개 국어에 능통한 북만지역 불온선인 수괴로 지목
영고탑에 거주하는 불온선인 수괴로 최계화를 지목하여 기록함.
『명치백년사총서 조선독립운동II 민족주의운동편』 김정명편 「제3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주의운동 불령선인, 191 영고탑 부근에 있어서 조선인 등의 현황보고의 건, 대정11년 2월 6일, 조특보 제4호, (비) 영고탑 부근에 있어서 선지인의 현황」
1. 서언(서언)
영안현 영고탑에 있어서 현황을 직접 조사한 것과 북만주 특파대사령부의 조사에 관한 통보를 참조하여 해지 부근의 정황을 상술한다.
2. 조선인
인구 및 직업상황 : 대정 9년(1920년) 말 영안현 안에 이주조선인의 수는 겨우 3천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토지가 비옥하고 논농사에 적합하여 대정 10년(1921년) 중에는 일 만여 명의 이주자가 증가하였고, 논 개간지가 2천2백 정보에 이르고 벼 수확이 12만 석이 되었고, 개간예정지 7천 정보를 가졌으며, 이를 개간하기 위해 대정 11년에는 조선인 2만 인을 이주시키려고 한다.
3. 대일인 관계
영고탑 거주 유자선인 최계화와 같은 자는 해지 부근에 있어서 선인에 대하여 절대의 세력을 가지며, 동산과 부동산을 합하여 3만여 원 및 개간지 오십 정보, 개간예정지 이백 정보를 갖고 있다. 그는 종래 불온사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근래 해소로부터의 정보는 현재 그가 불온행동을 감행하고 있는 것처럼 산견되지만, 이제 그는 불온행동을 그만두고 영안흥업주식회사와 서로 제휴하여 수전사업을 종사할 뿐 아니라 이해를 회사와 함께 하고부터는 크게 친일을 가장하기에 이르렀다.
4. 유력선인
영고탑에서 유력선인으로서는 비교적 세상에 통하는 김중구, 최충호, 김연원, 최계화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김연원은 일본어를 해독하고 의사를 업으로 하고 친일경향이 있고, 최계화는 해지 호회의 장으로서 일본어, 중국어, 조선어의 3개국어에 능통하고 중국에 있은 지 20년, 황기둔에 농장을 갖고 그 산출미를 그의 점포 공제호에서 판매하고 있다. 선인 간에는 아무튼 평이 나 있으나 식자로서 외경되고 있다.
5. 교육
영고탑에 여명의숙(구영필이 세움)이 있으며 교사1명 생도18명, 교수과목 조선어, 한국사, 산술, 지나어로서 경비는 일절 부형의 부담에 맡긴다.
6. 불온선인
영고탑 부근에 있어서 불온선인의 행동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일본 관헌의 제재가 적어서 행동은 거의 자유로우며 상해가정부의 독립신문 및 불온문서의 산포가 심하고 왕성하게 독립을 고취하고 있다....특히 영고탑 황기둔 주재 조선인은 중국당국이 지정한 민회마저 설립하지 않고 일의(한마음으로) 민족독립을 절규하고 있다.
이에 영고탑 부근에 거주하는 불온선인 수괴의 행동에 관하여 상술한다.
수괴에 관한 일
본적-경상남도 현주소-길림성영고탑 상해가정부 수괴-최계화
가. 이력
본인은 일본합방 이후 우리 조선통치에 불평을 품고 봉천에 망명하여, 지관배일을 고취하고(오로지 배일이란 노래만 소리 높혀 부르고) 독립을 절규하며 협박적 수단에 호소하여 군자금의 수집에 분주하고 있으나 상해에 가정부가 설립되자 곧 상해로 가서 재정부장에 직을 받들어 봉직 후 석 달이 지나, 봉천 특파원으로서 봉천에 돌아와서 의연 군자금의 수집에 노력하고 대정 7년 징집자금 4만여원을 착복하고 봉천을 떠나 영고탑에 이르러 주요한 중국의 행정관에 증여하여 교묘하게 해지 부근의 가옥을 매수하고 표면 지주 겸 자본가가 되고 이면에서는 해지 부근의 불온선인을 규합하여 수전사업을 경영하여 현재 소작인 또는 사용자라 칭하는 장정(거의 모두 독신자임)이 사십 명을 헤아린다. 대정 9년 훈춘사건을 위해 일본군대가 출동하자 그는 호기가 왔다고 하여 부하 수십 명을 무장시켜 스스로 채배를 취하여 일어서려고 했을 때, 간도의 동지는 일제히 패퇴함으로써 잠시 무력독립의 불가능함을 알고 그 이후로 문화독립을 부르짖게 되어 동지의 규합에 힘쓰는 한편 중국 관헌을 매수하여 이제는 최의 세력은 확고하여 뿌리를 뽑을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영고탑 현내에 최계화의 동지로 인정될만한 자가 2백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 구영필의 외삼촌이 지원한 4만 원을 탐지하지 못한 그들은 자금출처를 징집자금 4만 원 착복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나. 독립에 관한 선전(선전)
본인은 상당한 학식이 있어서 이후로 극단적인 배일행동은 없어도 항시 문화적 독립사상을 갖고 언제나 동지에게 이르기를, “우리 조선민족은 일본의 압박정치를 배제하고 의당히 윌슨이 제창하는 민족자결을 결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동지를 규합하고 먼저 지반으로 해야 할 토지를 얻어서 생활의 안정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이 이루어진 후에 비로소 문화적 독립수단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합리적 문화독립은 자연의 이로서 각국 식자도 크게 우리들에게 성원을 주는 바 있으나 무력적 독립은 불합리하고 시세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면 우리들은 여하히 하여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할 것인가? 말 하건데 식산흥업은 말하자면 지식의 계발에 있다. 이상의 취지에 입각하여 그 수단으로서 여명의숙을 설립하고 수전(논농사)을 일으켜 수전에 적당한 지방의 요도(필요한 지도)를 제작 인쇄에 부쳐 이를 원근의 식자에게 배포하는 등 질서 있는 행동을 취해 가고 있다.”
최가 현재 투자한 금액은 3만여 원에 달하며 수전에 관한 건은 전술한 바와 같다.
다. 세력 및 대일감정
그의 세력이 왕성하기 전에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은 대일감정에 대하여는 특필할만한 것이 없으며, 종래 일본인과의 교제는 애써 이를 피하고 일본인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일본인과의 교제를 바라나 잘 아는 바와 같이 나의 사업은 중국 관민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중국인에 질시되어 사업에 해를 미칠 것이 두려워 고의로 접근하지 않았던 것이지 결코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인에 대하여 호감을 가졌다고는 인정하기 어렵다. 다만 최근 정보에 의하면 그는 이제야말로 영안차관공사와 제휴하여 실로 친일을 가장함으로써 현재에 있어서 그의 행동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가 명백하지 않을지라도 기술해 둠으로써 후보를 기다린다.
※ 위의 일본 측에서 파악한 정보 보고서에 의하면, 구영필은 영고탑 거주 불온선인 수괴 6명(최계화, 백인민, 유정근, 신일헌, 신명국, 김좌진) 가운데 제일 첫 번째로 보고 되고 있으며, 가장 많은 내용을 보고하고 있는 세력이 큰 중요한 독립운동가임 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 의하면, 구영필은 오직 배일과 독립을 부르짖으며 무장독립 투쟁을 주도하였고, 훈춘 사건 이후로 잠시 무장독립의 불가함을 깨닫고 문화독립을 주장하며 토지를 얻어서 지반으로 삼고 생활의 안정을 얻은 후에 합리적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훈춘사건 이후 구영필이 그 당시 북만지역의 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루는 교육산업 우선론 및 자치 독립운동을 실현하는 선구자였음을 알 수 있다
● 1922.03.28 보고 영고탑호회 회장 최계화와 부회장 최충호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아세아국 대정11년 3월 28일 기밀번호 제140 호」
최계화는 나이 35세, 경상남도 밀양군 출신이며, 직업은 농업으로 현재 영고탑 호회의 회장으로 표현함. 영고탑 호회의 부회장은 나이 32세 경상북도 출신의 최충호로 표기됨.
※ 구영필의 제수씨 지수옥의 증언에 의하면, 최충호 부인이 본인 지수옥의 결혼식 때 들러리를 서 줄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웠고, 영고탑에서 최충호는 강화린과 더불어 변함없이 끝까지 구영필과 함께 하는 동지였다. 그리고 김좌진의 여자와 사진도 찍었다.
1920년대 초 영고탑에서 구영필의 부인
김수련(앞 오른쪽)과 한봉근의 부인
주시보(앞왼쪽, 동경폭탄사건으로 옥사)
● 1922 북만지역 청년회 효시인 「발해청년회」 조직
중국 영고탑에서 북만지역 청년회의 효시인「발해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청년들 에게 독립사상을 지도하여, 이후 여러 청년회 단체가 생기게 되었다. 『일본 외무성 경찰사』 12645쪽, 12686쪽
-1920년대 초기 청년단체는 대부분 청년의 수양과 훈련을 내세웠으며, 민족주의 운동 에 관계하는 사람이 많았다.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청년회이자 수양 단체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청년단체가 표방하는 수양은 유교적인 원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풍속을 개량하고 음주와 도박을 금지하며 신문화를 배우는 것이었다. 또 근대적인 지식과 사회주의 사상을 습득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청년들이 배우는 수양과 교육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반봉건적인 것이었다. 이런 성격의 청년회로서 영안현 영고탑의 발해청년회와 화룡현 장흥동의 동구청년회가 그 경우이며, 두 청년회는 입적간민호회 의 지도자 최계화와 임민호등이 각각 주도 하였다.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신주백 저, p.66-67.
합파제213호 대정15.10.05일 「북만ニ어ケル조선인공산주의운동 ノ 경향ニ관スル건」, 조선공산당관계 잡건 1, 521-522쪽」
「만주ニ어ケル공산주의운동사,강진외 4인조서(1932), 385쪽: 소화2년7월말조간도급 훈춘지방선인 결사단체 조사표 조선공산당관계잡건 2」 241쪽 244쪽, 258쪽
● 1922.05 보고 기독교 미감리교회 영고탑 예배당 설립
『조선통치사료, 제10권, p.274. 대정 11년 5월, 북만 재주조선인의 상황,
재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조선총독부 파견원』
위의 자료에 의하면, 영안현 내에 미감리회 교회가 있었는데. 교당이 1채, 신도가 52명이었으며, 대종교 교당이 4채, 신도는 353명에 달하였다. 이 당시 하얼빈에는 대종교가 없었으며, 북감리회 교회만 1채가 있어 총 종교인이 62명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영안현 내에 종교인은 기독교, 대종교 합하여 모두 교당수는 7채에 달하며, 신도 수는 687명에 이르렀다. 영안현은 북만의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당시 기독교 교회와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정명편, 『민족주의운동편』 p.1040
-특히 교회의 건축물은 당시 일본 정부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독립운동의 근거로 삼았다.
※ 구영필의 제수씨 지수옥의 증언에 의하면, 1922년 이전에(년도 미상) 이미 최계화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의 사돈(지수옥의 부친 지훈일, 별명 지천당)의 조력을 받아 자택 중 한 채를 기독교 미감리회 영고탑 예배당으로 내주어 교회를 설립하였다.
기독교 미감리교회 영고탑 예배당의 교인들 사진
● 1922.10.05 보고 고려국 건설 계획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아세아국, 대정 11년 10월 5일 기밀번호 제235호,
「고려국 건설 계획에 관한 건」
밀정의 정보에 의하여 고려국 건설 계획이 있다는 보고를 함.
※ 구영필은 영안현 영고탑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조선인 자치단체를 완성하여 민족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 1922.10.03 보고 불온선인들의 표면 친일위장 이면 배일활동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대정11년 10월 3일 기밀번호 제234호 「불온선인 행동 에 관한 건」
밀정의 보고에 의하면, 길림성 영고탑 거류 선인의 호회에 회장 최계화, 부회장은 최충호. 요원에 김준구, 한봉근, 신명국, 강구우(상해국민대표 회원), 등등....위에 사람들은 표면 친일로 위장하고 있다.
● 1922.10.17 보고 표면 친일위장 및 김규식과 군자금 모집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대정11년 10월 17일 기밀번호 253호
- 길림성 영고탑 입적 간민호회에 회장 최계화, 부회장 최충호, 한봉근(최계화의 외사촌제) 등등 위에 사람들은 표면 친일을 위장하고 있으며, 대한독립단 제2군 사령관인 김규식과 연락을 취하고 독립자금 모집대를 결성하여 군자금 모집을 주도함.-
● 1922.10 해림 주둔 일본군의 철수 후 개천절 행사로 독립사상 고취
『조선일보』 1922.12.8. -개천절 행사로 군중대회 개최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함. 해림에 주둔한 일본군이 철수하자 여명의숙에서 개천절 행사를 성대히 거행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군중대회를 개최함.-
● 1922.10.30 보고 「경고아영안동포」의 성명서 발표로 이상적 독립근거지 건설 주창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대정 11년 10월30일 기밀번호 273호
『일본 외무성 경찰사』 12373쪽-12383쪽, 「최계화의 경고문에 관한 건」
- 길림성 영고탑에 거주하는 최계화는 같은 지방에 있는 불온선인들로부터 친일파로 변화되었다는 악평이 있어, 동지유력자들의 권유로 “영안동포들에게 널리 알린다”는 의미의 “경고아영안동포”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의 주된 내용은
- 20년 동안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이룬 것은 없구나. 그러나 좌절할 수는 없다.
첫째 입적간민호회를 발전시키자. 둘째 저축기관을 급히 조직하자.
셋째 교육기관을 급히 조직하자. 그리함으로 영고탑에 독립근거지 및 조선인의 이상향을 건설하자.-고 주창하였다.
※ 최계화가 성명서를 통하여 위와 같은 3가지 주장을 하게 된 것은 단순히 반대파에 의한 친일변절이라는 누명을 근절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3가지 주장을 하게 된 목적은 당시 북만지역의 여건과 조선인의 실태를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내용은 아래 자료와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총독부, ‘만몽の 미작と 이주선농문제’ p.40-41, 66, 92.
리훈구, 「만주와 조선인」, 1932, 115쪽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p.50.
위의 자료와 저서들에 의하면, 당시 국내에서 이주한 사람 혹은 남만과 동만에서 중국 관헌의 압박을 피하여 재이주한 사람들이 북만의 목단강, 송화강, 오소리강 등 수전 농사지역에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무자력 농민으로 기본적인 농기구조차 없었으며, 지주가 식량을 제공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사람도 많았다. 더욱 북만지역은 한인들이 광활한 지역에 흩어져 살아서 근대적인 금융기관이 없어서 돈이 필요한 경우 지주 특히 중국인에게 직접 돈을 빌리는 등 대인신용으로 대차할 수밖에 없었는 데, 이때 담보는 자신의 가족인 경우가 많아 나중에는 중국인 지주에게 인신적 구속 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북만의 이주 농민들이 중국인에게 착취당하지 않도 록 보호하기 위해 간민호회를 설립했고, 간민호회를 발전시켜야 할 것을 호소한 것 과 조선인들의 인신적 구속에서 보호하기 위해 저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금융기관을 조속히 조직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런 세 가지 호소는 모두 독립운동의 한 방편 이었다. 실로 민중의 밑바탕이 없는 가운데 행해지는 독립운동은 어떠한 형태로 진행되던지 모래 위에 지은 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을 배척하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면 튼튼한 민중적 뒷받침이 되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북만의 조선인들의 어려운 형편을 살리고 독립운동의 진정한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간민호회는 단순한 토지 소작업이 아니었으며, 실로 북만지역의 조선인들을 위한 최초이며 유일한 실질적인 자치기관이었음을 아래의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조선일보』 1927.01.25
-영안현 입적 간민호회는 중국으로부터 허가를 득하여 입법, 사법, 행정 등 조선인에 대한 자치를 실시한 북만의 자치기관이었다.-
● 1922.11.02 조선인 구제를 위한 좁쌀 구매
『일본 외무성 경찰사』 12384쪽 ~ 12387쪽, 대정11년 11월 2일, 「영고탑지방 불온선인 행동에 관한 건」 최계화에 대하여 원상해가정부원(친일ナルモ주위ノ위배일ヲ장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외무성 경찰사』 12389쪽
최계화ノ 언동:조선인을 구제하기 위해서 좁쌀을 구입한 사건.
일본영사관을 통하여 좁쌀을 구입하여 운송할 때 마적단들의 강탈 피해를 막으려는 그들의 일상적인 책무로 일장기를 달고 일본 철도원의 경호 아래 9화차 분량으로 운반되었는데, 반대파에서는 이를 친일 및 밀정으로 매도하여 서로 간에 쟁투가 일어났다.
※ 당시 매우 극심한 가뭄과 기근이 들어서 농사가 흉작이 되었으며 수많은 북만의 이주 조선인들이 굶어 죽게 되었다. 이에 부족한 식량을 얻기 위하여 간민호회에서는 일본영사관과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좁쌀을 대량으로 구매하고 굶어 죽어가는 북만의 조선인 동포들을 구제하였다. 이미 앞에서 바와 같이 같은 해 20년부터 간민호회의 최계화는 빈민을 구제하자는 뜻에서 공제호를 창설하고 22년에는 정미소를 개설하여 그 수입으로 생활이 어려운 조선인들을 구제하는 일을 해왔었다. 그런데 굶주리는 조선인을 구제하기 위해 일본에 좁쌀을 사들인 일을 반대파에서는 일본과 내통한 친일행각이라고 모함을 하며 비난과 공격을 하였다. 어려운 상황에서 독립단체들은 대동단결해야 할 터인데, 최계화의 반대파들은 자신의 세력 확대를 위하여 틈만 생기면 트집을 잡아 분쟁만 일삼고 분열을 조장시켰다.
1920년대 중반 영고탑에서 중국관헌들과
함께(가운데 구영필)
~<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