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키2 - 데살로니키 로톤다를 보고는 갈레리우스개선문에 가다!
그리스 여행 12일째인 2024년 5월 4일 메테오라 Meteoro 입구 칼람바카역에서 07시 15분에 버스를 타고
트리칼라 ΤΡίκαλα 를 지나 팔레오파살로스 Paleofarsalos 역에 도착해 아테네에서 오는 10시 46분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카테리나 Katerini 를 거쳐 13시에 데살로니키 Thessaloniki 에 도착합니다.
데살로니키 Thessaloniki Θεσσαλονίκη 역에서 우리 호텔은 1km 거리인데, 버스나
택시를 타지 않고 배낭을 메고 Monastiriou 대로를 따라 20여분을 걸어서
민주광장 Democracy Square을 지나 Egnatia 24 번지 Hotel Ilisia 호텔에 도착합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는 프론트에서 시내 지도를 받은 다음에나와서 Egnatia 거리를
오른쪽으로 5분 쯤 걸으니 Archaias Agoras Square 가 나오고
좌회전을 하니 북쪽(왼쪽) 에 고대의 유적인 로만 포룸 Roman Forum 이 보입니다.
로만 포럼은 BC 30~143년까지의 도시 관련 기록이 새겨진 명문이 발굴됐으니 신약
성경에 언급된 바울의 전도 여행 이야기를 증명하는 기록도 함께 나왔다고 하며
동쪽으로 조폐국, 도서관, 극장이 남쪽으로는 상점가가 있었으나 현재는 공원 입니다.
동남쪽으로 10여분을 걸어서 로톤다 (Rotonda) 에 도착하는데... 돔이 있는 원형의 건물을 말하니,
306년에 완성된 이 원통형 건축물로 천장은 벽돌로 만들어졌고 높이가 30m 정도인데
원래는 로마의 판테온과 같이 오쿨루스 (Oculus) 가 있는 돔 (Dome) 형식으로 계획했다고 합니다.
311년에 사망한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는 세르비아 에 묻혀 있기 때문에 로톤다는 그의 뜻대로
무덤으로 사용되지는 못했고..... 대신에 로마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에 그리스
정교회 교회로 사용되기 시작해 비잔틴 제국에 이르기 까지 1,200년 간 이어져 왔다고 합니다.
로톤다를 뒤로 하고 150m 쯤 남쪽으로 걸으니 시내 한복판에 생경스러운 건축물이 보이니
갈레리우스 개선문 The Arch of Galerius (αψίδα του Γαλερίου) 에 도착합니다.
갈레리우스 개선문 The Arch of Galerius 은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가 4세기에 페르시아
의 왕조인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으로 세운 문이라고 하는데....
갈레리우스 황제는 사탈라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사산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298년과 299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어 303년에 헌정되었다고 합니다.
갈레리우스 황제는 북쪽 100여미터에 테살로니키 궁전과 무덤인 인 로톤다를
함께 이 개선문을 지었는데.... 세개의 건축물은 개선문을 중심으로
일직선이 되도록 설계했다고 하니 바로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 입니다.
여기 멋진 갈레리우스 개선문은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표면에 부조를 새긴 대리석을
붙여 장식 했는데..... 303년에 세워진 이 문은 본래 여덟 개의 기둥과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세 개의 기둥과 두 개의 석조 아치 (arch) 부분만 남아 있습니다.
기둥의 대리석 부조는 전쟁을 이끌던 갈레리우스 황제의 영웅적인 모습을 주로 담고 있는데.... 비록
오래되어 일부 손상이 되긴 했으나 당시 전쟁 상황을 아주 실감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갈레리우스 개선문에서 동쪽에 있는 큰 정교회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 (Agiou
Dimitriou) 으로 들어가는데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은 5세기 중엽에 테살로니키
의 수호 성인인 성 드미트리오 스 (Saint Demetrius) 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 중 하나인 이 건물은 초기 기독교와 비잔틴 양식을 볼 수 있는 건축물로 그리스
내에서 가장 큰 바실리카식 성당이니..... 바실리카식 성당은 외벽을 돌벽돌로 쌓고 내부에
중앙과 측면 양쪽으로 복도를 두고 중앙 복도 끝에 재단이 있는 사격형 형태의 건축 양식을 말합니다.
이러한 형태는 유럽의 성당 건축에 기초가 되었다고 하는데..... 성당 앞 광장은 돌로 덮혀
있으니 이 돌들은 데살로니키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묘지에서 가져온 것이라
하며, 성당이 지어진 이후 대화재로 크게 소실되었다가 원형을 살려 7세기에 재건했습니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절에는 모스크로 사용되니 그때 성당의 이름도 이슬람식 '카시미예
자미 '(Kasimiye Camii) 로 바뀌었는데... 여기서 '카시미예' 는 성 디미트리오스의 이스람식
이름이라고 하니 '디미트리오스 모스크'(?) 쯤 되는 것으로, 모스크로 사용되면서 성당의
이름이 이렇게 바뀐 것은 디미트리오스가 이슬람인들에게도 존경 받았던 인물이기 때문 입니다.
그런 까닭에 모스크로 사용되던 동안에도 그리스 정교회 교인들이 디미트리오스의 무덤을 참배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하며 그러다가 1917년 큰 화재로 다시 한번 성당이 큰 피해를 입게 되는데 현재의
모습은 이 화재 이후 재건된 것으로 7세기의 성당 모습을 최대한 살린 것이라 하며..... 성당
내부의 회랑을 이루며 아치를 받치고 있는 원기둥들의 색이 다른 것은 1917년 화재의 흔적을 보여 줍니다.
또 성당 안에는 8세기에 모자이크로 장식된 제단과 성 디미트리오스의 유해를 안치해
놓은 곳도 있다고 하는데..... 성당 지하에는 고대 로마 시대 목욕탕
유적과 카타콤베 (카타콤 Catacombs, 초기 기독교인들의 지하 무덤) 가 있다고 합니다.
갈레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43대 황제로 사두정치를 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인 갈레리아 발레리아
의 남편인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동방 부제를 거쳐 장인의 은퇴 후 동방 정제에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저 디오클레티나누스 황제는 내란을 수습하고 로마 황제가 된후 거대한 제국을 혼자
다스리기 어려우니 동서 로마로 나눈 다음..... 다시 4개로 분할하니 황제가 4명
인데, 권력 순위는 콘스탄티노플의 동방정제 - 서방 정제- 동방부제 - 서방부제 순이었습니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세르디카 (불가리아 소피아) 근교 로물리아눔 출신으로 아버지
는 트라키아인이었고 어머니는 다키아인이었다고 전해지며...... 미천한 변방
출신으로 여동생이 있었는데,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바로 갈레리우스 여동생의 아들 입니다.
부친은 일리리아 (크로아티아) 일대에서 살던 목동이었고, 갈레리우스는 비슷한 출신 또래
남자 아이들 처럼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직업을 가업으로 이어받았다고
하는데 이때 별칭이 집안 가업인 목동에서 따온 아르멘타리우스 (Armentarius) 였습니다.
대개의 일리리아 출신 황제들이 그렇듯..... 출세를 위해 로마군에 입대해 고위 군 장교를
거쳐 로마 제국 지배층까지 오른 사람인데, 그는 비슷하게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고위 장교를 거친 세베루스 2세와 달리 굉장히 상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또 갈레리우슨느 로마제국 동방 부제로 지명되기 전 부터 탁월한 전략가
이자 뛰어난 다뉴브 일대 주둔군 장군으로 높이 평가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로마제국 동부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제(帝) 의 황녀 갈레리아 발레리아와 혼인하기 위해 훗날
콘스탄티누스 대체 처럼 본부인과 이혼했으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제에 의해
직속인 동부 부제(副帝) 로 책봉되었으며... 서방 부제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임명 되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부제로 이민족 격퇴에 힘썼으니 293년 도나우강 야만족들을 격퇴하여 일대를 수복했고,
298년 사산 왕조(페르시아)의 나르세스 1세를 사탈라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수도 크테시폰
을 넘어 티그리스 강 동쪽까지 진출하니 이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대의 동진(東進) 사례이기도 합니다.
점령지에 대해, 공세 종말점의 개념에 따라 사산조 페르시아와 강화조약을 맺어 수도 크테시폰을 돌려
주는 대신에 아르메니아 지방을 얻은 교환을 바탕으로 약 40년간 평화 상태를 유지하게끔 했습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정제 시기에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이뤄졌는데 부제 갈레리우스
가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제 에게 황궁에 화재가 일어난 건 기독교인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며..... 그 결과 기독교 신자들을 무참히 처형하는 조직적 박해가 이뤄졌습니다.
이후 305년 갈레리우스는 장인이자 동부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제의 돌연 은퇴 선언으로 그를 계승하여
동부의 정제가 되었으며 동시에 서방 정제도 원치않게 은퇴함으로써 서방 부제였던 콘스탄티우스도
서방 정제가 되었으니..... 2차 사두정치의 시작인 셈이나 1차와 다르게 새로운 로마 내전의 씨앗이 됩니다.
갈레리우스 동방 정제는 자신의 외조카인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동방부제로
자신의 신하인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서방 로마 부제로 임명 했습니다.
306년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군대를 일으켜 브리튼
(잉글랜드) 과 갈리아(프랑스) 를 장악하고 그곳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갈레리우스는 타협책
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를 서방 부제로 인정해 주고 기존의 부제였던 세베루스를 서방 정제로 승격시켰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공치제였다가 타의로 은퇴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가 서방 정제를
참칭하자, 세베루스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공격했지만 도리어 패하고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으며 갈레리우스 역시 이탈리아를 공격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채 퇴각합니다.
308년 갈레리우스 동방정제는 친구 리키니우스를 서방 정제로 삼았으나, 전 황제 막시미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훗날 콘스탄티누스 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 모두 반발했으며 이후
311년 중병으로 몸져눕자 기독교인들에 대한 관용조서를 발표했으나 불과 6일만에 사망합니다.
그의 죽음 이후 로마 제국은 본격적인 내전에 돌입하였고, 콘스탄티누스 1세(훗날 콘스탄티누스 대제)
는 소수의 병사들을 일끌고 이탈리아 반도로 침공해서 막센티우스를 패배시키고 로마를 탈환합니다.
그러고는 잠시 갈레리우스의 동방 로마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다가.... 군대를 이끌고
동방 로마를 전격적으로 기습해 현지 부대를 손에 넣고는, 갈레리우스황제를
죽이고 승리해 로마를 다시 통일하고는 비잔틴을 새 수도로 삼으니 "콘스탄티노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