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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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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 씨는 소설가다. 소설로 등단한 작가다. 그러함에도 어느 순간 그의 관심은 온통 바둑사에 쏠려 있다. 시쳇말로 돈도 되지 않는 일에 골수를 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돈을 생각했다면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일. 좋아서...그저 바둑이 좋아서 '피끌림'마냥, 운명처럼 발품 팔며 고서를 뒤지고 여러날 밤을 하얗게 태우며 번역하고 퍼즐 맞추듯 시대를 추적하고 있다. 그래서 종종 나는 그를 말할 때 "하늘이 바둑계에 보내준 귀인"이라고 한다. 잃어버린 우리의 바둑사, 화석조차도 구경할 수 없었던 우리의 옛 바둑문화를 순전히 한 사람의 노력 덕분으로 다시 보는 행운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연초면 바둑대상이라는 잔치를 성대히 여는데, 줄줄이 주는 공로상에 이런 사람 이름 하나쯤 끼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저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유폐되었던 우리 바둑시대, 바둑사를 이만큼 복원한 사람이라면 그 신명장단에 멍석 정도는 깔아줄 때도 된 것이다. 세계 일등이라고 자부하는 대한민국 바둑계라면 말이다. -----------------------------------------------------------------------
밥들고 찾아갔다가 돌아와서는 슬프디 슬프게 혼자 운다네. (獨婦餉糧還哀哀舍南哭) 고대에 한 여자가 있었다. 광산 부역에 끌고가 진종일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식은 밥 한덩이 주지 않던 관아의 처사는 국가의 횡포다. 부역자들은 옥을 캐는 광산에서 진종일 일하고 지붕도 없는 더불 속에서 잠을 잔 모양이다. 부역자들을 면회하고 온 가족은 절망한다. 주먹밥 한덩이를 만들어 면회를 다녀온 여자의 슬피우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던 모양이다. 위응물(韋應物)이 목도한 이 시(詩)는 천지를 미친 듯 주유하며 돌아갈 귀로마저 잊었다던 대복고(戴復古)의 차디찬 냉기와,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했던 이탁오(李倬悟)의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기상 속을 맴돈다. 독한 언어만이 메시지가 되지는 않는다.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너도 나도 따라 짖어댔다. 누군가가 왜 짖냐고 물어오면 그냥 중의 주문마냥 웃었다.-이탁오.
인간은 누구나 세계 속에 놓여진 자신과 자신 속에서 분열하는 정신세계의 굴절과 대면한다. 세계는 마주치는 자기자신의 자아로 파악되기 마련이다. 개인의 파악은 이미 굴절을 담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인의 색안경 말이다. 이탁오가 말한 오십 이전의 개였다는 의미는 오만과 편견 그리고 맹목으로 무장했던 자신의 반성문으로 읽힌다. 위응물, 대복고, 이탁오 등은 모두 왜(?)를 묻던 사람들이다. 그림자를 보고 맹목을 외치지 않겠다던 사람들인 것이다. 그만큼 맹목을 벗어나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필자도 그 맹목에 빠져 사는 사람이다. 바둑사가 궁금 하다는 가장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한 행보가 이제는 너무 멀리(?) 왔다. 산책이 일이 되었다는 것 그것도 부담이다. 갑오음청록(甲午陰晴錄)의 발굴 '음청록'은 일기라는 뜻이다. 이 일기는 지남규(池南奎)가 1894년 갑오년에 쓴 일기로 동년 4월13일부터 다음해 2얼1일까지 대략 10개월 분량으로 앞뒤가 망실된 상태로 필자의 눈에 띄었다. 소장자의 허락을 받아 복사를 하고 해제를 하는 과정에 일기의 주인공이 바둑마니아였음을 알고 일기 전체를 번역했다. 지남규는 한강 동쪽에 살던 상인으로 잡품(雜品)을 취급하며 생업을 유지하는 한편 취미로 삼은 바둑이 부업(?)일 정도로 빠져 있던 사람이다. 10개월여의 일기 곳곳에 바둑에 대한 기록이 있어 바둑마니아를 자처하는 필자를 감동시켰다. 일기는 초서로 되어 있고 지명, 호, 전거 등이 난분분하여 내용파악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수십년 한문에 빠져 살았았으면서도 한문은 언제나 함들다. 중언부언 원고 4백자 분량의 일기를 번역하면서 필자는 많은 공부를 했다. 특히 1894을 앞뒤로 수십년간을 살았던 지남규의 증언으로 그 시대의 정보에 도움을 얻었고 근대와 현대 사이에 장막으로 가려진 바둑사를 엿본 것은 큰 수확이었다. 필자는 지남규의 일기를 공개하면서 필자가 찾아낸 수십 점의 조선의 바둑기보를 함께 소개하면서 미욱한 칼럼난을 채워갈까 한다. -이청 |
바둑의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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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흐리고 오후 갬. 음청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는 거의 죽은 문자가 된 한문 초서로 쓰여진 한 사람의 일상이 옛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서랍 속에서 잠을 자다 어느날 망실의 시간을 찢고 불쑥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인다. 1894년 4월13일로 가보자.
4월13일. 아침흐리고 오후 갬(朝陰晩晴). 경상 박점(朴店)에서 그릇 20바리(馱)를 받았다. 양근분원(도기공장)보다 비싸다. 땔감 15냥어치를 사고 김(金)이 고을 형리(刑吏)와 함께와 늦게까지 바둑을 두었다.
일꾼 4명을 얻어 밭일을 시켰다. 술값 국수값으로 4냥을 주었다. 김이 와 어제의 복수를 청하기에 일이 바빠 내일로 미뤘다. 상점이 성업을 이뤄 50냥 남짓 이익을 보았다.
김이 오지 않았다. 한양(京)으로 바둑을 두러 간 모양이다. 기보(碁譜)를 보며 앉았다 섰다 했다. 늦게 술 5전어치를 사와 먹고 잤다.
음청록은 모두 이런식이다. '지남규'의 하루의 일과는 장사하고 집안일을 돌아보고 취미를 즐기는 지극히 소박한 생활인의 모습이다. 일기 하루 분량은 원고 한장에서 대여섯장 정도로 간단 간단하다. 지남규는 한강주변(송파 양주)에서 비교적 큰 상점을 운영하며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상인이다. 그릇을 한양상인들과 양주분원 등에서 도매로 사와 소매를 하는 식이다. 땔감을 15냥어치 샀다고 한다. 일기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술, 땔감, 쌀, 담배, 고깃값이 재미있다. 일기에 쌀 한섬(10말)이 150냥에서 250냥을 오르내리는 가격에 비교해 보면 품삯이나 땔감 등의 가격은 엄청나게 낮다. 상대적으로 쌀값은 거의 금값 수준이다. 지남규의 상점에 김(金)이란 사람이 찾아온다. 지남규와 가까운 곳에 살던 사람으로 바둑도박에 빠진 인물이다. 김이 형리와 함께 왔다고 한다. 형리는 고을 관아의 '형방'에 근무하는 포교다. 지역의 포교가 무상으로 출입하는 것만 봐도 안정된 지남규의 생활이 엿보인다. 그날 바둑은 지남규가 이겼다. 김이 다음날 복수전을 하겠다고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지남규의 상점이 바빠 대국을 다음날로 미룬다. 상점영업이 잘되어 50냥의 이문이 남는다. 50냥을 오늘날의 쌀값에 비추면 큰돈이 아니지만 당시 여타 물가에 견주면 상당한 액수다. 다음날 온다하던 김이 나타나지 않는다. 한양으로 바둑을 두러 간 모양이다 했다. 김(金)의 심상치 않은 포스가 느껴진다. 지남규는 '기보'를 보며 바람불고 비오는 날의 무료를 달랜다. 지남규의 3일간의 행적은 (바둑인의 입장에서) 흥미롭다. 바둑을 즐긴다. 내기 바둑꾼이 찾아온다. 내기 바둑꾼은 한양까지 바둑을 두러 원정을 다니는 사람이다. 비오고 바람부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지남규는 이런 날이면 기보를 꺼내 든다. '기보'라고 했다. 우리는 지남규가 말한 기보가 궁금하다. 1894년 4월 지금으로부터 117년전 송파 양주부근에 살던 지남규의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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