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거의 일주일 걸려 이 책을 읽었다. 집에 앉아서 읽기도 했지만 주로 전철 안에서 읽었다. 사실 집안에서는 이런 저런 일때문에 도무지 진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철안이라면 다르다. 아무도 나를 개의치 않는다. 전철은 사람이 아주 많더라도 전혀 방해받지 않고 책에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두 번 환승하느라 걸리는 시간을 빼면 거의 한시간, 온전히 책에 몰입했다. 오가는 시간을 합치면 두시간이다.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 동안 책에 빠져 전철 타는 시간이 사뭇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이 책은 영화로 먼저 보았다. 따라서 줄거리도 알고 있었고 다음 장면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미 아는 내용을 읽는다는 것은 확인에 지나지 않는다. 자칫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 게다가 영화의 몇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면 도입 부분, 대사없이 장면으로만 이어지는 그 부분에서 홍차가 다 떨어진 것을 깨달은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쓰레기통에서 이미 마시고 버린 티백을 꺼내는 장면. 어찌 표현하면 좋을까. 막막할 정도로 그 장면이 가슴 깊이 찔러들었다. 낭만적, 그랬다. 영화는 중년의 감성을 노린 로맨스이기도 했다.
한데 책은 달랐다. 묵직했던 것이다.
우선 양이 많았다. 586쪽이란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다. 물론 두툼한 책을 읽는데 익숙해져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586쪽은 다르다. 게다가 책은 느릿느릿 했다. 현재와 과거, 그것도 주인공과 주인공이 읽는 책 속의 주인공의 과거가 오가는 이중 삼중의 플래시백으로 인해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웠다. 지금 누가 회상하고 있는 거지?
뿐만 아니었다. 책은 결코 로맨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전혀 다른 세계를 모험하는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언어가 찬란하게 빛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건 무얼까. 그의 언어에 익숙해진다는 것, 혹은 그가 말하는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 아닐까. 우리의 언어는 생각과 삶 전체를 보여준다. 그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책을 읽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나는 이런 책을 쓰고 싶어하는 것일게다.
삶은 우리가 지닌 온갖 가능성 가운데 단 몇 개만을 살도록 한다. 이 부분에서부터 깊이, 아주 깊이 빠져버렸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평생을 바쳐왔던 학교를 떠난 것은 아마도 '포르투게스'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때문일 것이다. 대학교수는 아니지만 고전문학의 대가, 누구나 인정하는 존재. 언어에 심취해 살고 싶었던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는 선생. 그랬던 그가 어느날 홀연히 학교를 떠난다. 수업하다가 말고, 책을 놓아둔 채로. 입은 옷차림 그대로 리스본 행 기차에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탐색, 한 인물에 대한 심취.
그가 찾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데우 프라우의 일생? 리스본의 낯선 거리를 헤매면서 독재에 대항하는 삶을 살았던 의사이자 저항가인 한 천재의 궤적을 따라가는 그 일이 순전히 호기심에서였을까? 그레고리우스가 프라우의 글을 읽으면서 더듬었던 의식은 곧 자신의 존재를 향한 더듬이이기도 했다.(언어의 천재가 아닌 나는 그토록 쉽게 번역을 해내는 일이 존경스럽다. 물론 우리의 언어와는 달리 유럽의 언어들은 비슷하다는 점을 알고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생전 처음 접한 포르투갈어, 의식을 논한 프라우의 글들을 번역해내는 그레고리우스. 이건 저자의 경험이었을까?)
여러 사람의 기억속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봉인되어 있던 프라우, 실상 우리 삶은 조각들이다. 어느 한 기간, 어느 한 순간의 조각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상대를 기억한다. 그것은 이해의 차이이기도 했고 인식의 차이이기도 했으며 입장의 차이이기도 했다. 우리는 나와 가장 비슷한 이에게서 온전히 이해받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 비슷한 이를 만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간혹 내가 나를 돌아본다 하더라도 온전한 나를 알기란 어렵다. 나는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이해하는 이는 내가 아닌 나의 의식을 읽고 나의 삶을 아는 누군가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조각으로 흩어져 있다. 삶, 달리 말해서 내가 살아온 순간들은 모두 각기 다른 조각이 되는 것이다. 프라우의 삶이 그러했다. 여동생, 어린 시절의 친구들 모두가 각기 다른 면을 기억했다. 그것은 프라우의 일부, 우리의 일부. 누군가에게 나는 다른 모습으로 기억된다. 죽은 의사, 아마데우 프라우의 모든, 아니 거의 모든 조각을 찾아낸 전혀 낯선 타인 그레고리우스는 베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하는 장면에서 책은 끝난다.
타인을 이해하는 순간 곧 나를 이해하게 된다. 얼마나 큰 울림인지. 우리는 결국 모두 다른 이의 조각이 아닌가.
첫댓글 2년 전, 잠깐 스쳐지나 왔음에도
리스본(리스보아)의 매력에
아직껏 젖어있는 1인입니다.
아껴둔 그 영화,
찾아봐야겠어요.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영화는 책과 많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기는 하지요. 흥미가 아닌, 감성이 아닌, 본질적인 면에서 생각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