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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5. 묵상글 들 ( 연중 제 5주일. - 초승달이든 보름달이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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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5. 연중 제 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초승달이든 보름달이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아주 짧고 그만큼 주제도 명확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는 착한 행실>, 이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착한 행실, 이것은 정말 세상을 밝게 하는 빛입니다.
악한 행위가 세상을 어둡게 하고 우리 맘을 절망케 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착한 행위가 무슨 세상의 빛이고, 세상을 밝게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작은 빛일 뿐 어둠이 아니고 세상을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의 착한 행위 곧 선행이 대단하다면
세상을 그만큼 더 넓게 그리고 더 밝게 비추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의 착한 행위는 작게나마 세상을 비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의 착한 행위는 그리 대단치 않고 오히려 작습니다.
그럴지라도 나의 착한 행실을 무시하지도 말고 과시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자주 양극단의 잘못을 범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 조금 하고 그것을 대단히 자랑하고 과시하는 한 극단과
이까짓 선행은 선행도 아니고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다른 한 극단이 있는데
과소평가할 경우, 오늘 주님 말씀처럼 선행을 함지로 덮어두거나
더 나아가 선행을 하려는 의지마저 꺾어버릴 수도 있으니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은 크고 작음으로 인해, 하거나 말거나 하지 말고,
크거나 작거나, 해야 할 것이기에 하고, 사명이기에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선행은 겸손으로 할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어둠은 참 빛이신 주님께서 없애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우리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당신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빛이라고 하시고,
세례자 요한과 우리는 그 빛의 증언자라고 하는데 이것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착한 행위는 참 빛을 증언하는 빛이고,
그 빛에서 빛을 받아 비추는 빛이기에 겸손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선행은 초승달이든 보름달이든 달과 같습니다.
태양 빛을 받아 비추는 달 말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선행은 사랑으로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만족으로 선행을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간혹 우리는 선행을 했다는 자기만족을 얻기 위해 선행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선행은 어쩌면 선행도 아니고 세상의 빛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 선행은 그리스도를 낳는 선행이 되어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라고 하면서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라고 얘기하는데, 우리의 선행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악행이 근근이 주님을 믿던 사람을 교회로부터 떠나게도 하고,
우리의 선행이 주님을 믿게도 하는데 그것은
그 선행이 비록 아무리 작아도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작은 착한 행실로라도 그리스도를 낳는 어머니들이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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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5. 연중 제 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5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빛에 대한 주제는 성서 계시 전체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빛은 하느님의 영광을 반영합니다. 빛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적으로 표시할 뿐 아니라, 지혜서에 의하면 하느님 당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빛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하나의 빛이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은 인간을 인도하는 등불이 되기도 합니다(욥 29,3; 시편 18,29).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빛을 주심으로써(시편 13,4) 인간을 위험에서 구하시고 인간의 빛과 구원이 되십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는 것처럼(이사 9,1) 빛은 기쁨과 해방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하느님께로부터 기쁨과 희망의 빛을 받아 절망과 좌절로 인해 영혼의 어둠 속을 헤메이는 이들을 기쁨과 희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빛의 역할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은 당신 자신 속에 빛의 근원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이시며 인간의 생명과 빛이시며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참된 빛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4.9).
또한 빛은 영광스러운 변모를 나타냅니다 인간 영혼에 하느님 사랑의 빛이 비추이면 그 빛으로 인하여 영혼 안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부정적인 마음에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미움에서 너그러운 용서의 마음으로,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마음에서 자기희생적이고 개방적인 마음으로 바뀌는 영적인 변모를 일으키게 됩니다. 영혼의 환골탈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의 등불인 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과 같이, 마음의 어두움을 없이 하여 빛을 환하게 비출 수 있도록(마태 6,22-23; 루가 11,34-36) 빛의 갑옷을 입고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릴 수 있도록 (로마 13,12-13) 이 은총의 빛을 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느님과 일치하여 머물러 있게 되고 빛 속을 걸어가게 됩니다.(1요한 1,5-7 참조).
사람이 어둠속에 있는지, 또는 빛 속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1요한 2,8-11). 형제적 사랑을 실행하고 참된 빛의 자녀로서 생활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춥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자신도 세상의 빛이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소금은 향의 경우 처럼(탈출 30,35) 정화를 나타냅니다. 옛날 희생제사에서 제물에 모두 소금을 치는 것도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레위 2,13; 에제 43,24). 또한 소금은 오랫동안 보존하는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바룩 6,27) 계약의 지속적인 특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충실하고 항구하게 지킴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악의 부패로부터 방지하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영혼을 보존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은총의 빛이 영혼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영혼을 깨끗하고 순수하게 보존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소금의 역할은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 안에서 회개의 삶을 몸소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주님은 우리를 은총의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방과 성찬용 잔
최후의 만찬이 열렸던 방은 예루살렘의 남쪽 외벽에 인접해 있는 성령의 시온교회 옆에 있다. 이 방은 그리스도교의 성지 중의 한 곳이다. 마치 온 세상이 바라보이는 듯한 이 곳 시온산 언덕에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충직한 제자들과 함께 그분의 참사랑의 나눔이었던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셨다.
여기 이 집에서 구세주께서는 그리스도의 모든 종들 중의 종이 되도록 그분의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거룩한 겸손을 보이시어 그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여기에 새로운 계약의 첫 제대가 있는데 그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희생된 사제인 동시에 희생제물의 양으로서 처음으로 성스러운 미사를 봉헌하셨다. 곧 주님은 당신의 사도들에게 당신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임박한 십자가의 희생봉헌을 앞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계속해서 새롭게 재현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고, 이 일을 행하도록 명(命)하셨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를 현시하셨을 때 새 계약을 맺는 최초의 교회로서 당신을 섬기는 비길 데 없는 명예를 이 집에 허락하셨던 것이다. 아마도 성모 마리아나 성 요셉의 친척이 되는 신앙심깊은 여관주인으로 하여금 그의 방을 주님께 내어 드리게 함으로써 거룩하신 주님께서 친히 최후의 성 만찬이 열리는 세계적인 방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그 실천력과 사랑면에서 뛰어났던 두 명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이런 특정한 집과 특정한 방을 찾도록.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았으며 자세한 가르침도 받았다. 왜냐하면 곧 다가올 박해, 곧 주님께서 고통받고 돌아가실 날에 그 집은 사도들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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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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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5. 연중 제 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폭탄선언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언합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나오리라.”(이사 58,8)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사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럽게도 ‘우리의 빛’, 더 나아가서 ‘우리가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곧 ‘우리 안’에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곧 ‘빛’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단지 빛을 들고서 비추는 것도 아니고, 빛을 반조해서 비추는 것도 아닌, 우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존재인가?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빛의 자녀”(요한 12,36;에페 5,8)이니 ‘빛의 존재’임에는 틀림없고, 그리고 “세상의 빛”임에도 분명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 타오르는 않고 있는 불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빛은 타올라야 빛이 되는데, 그리고 타오르려면 자신을 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직 밝게 환히 타오르지 못하고 있는 불이고 맙니다. 소금이 타인 안으로 들어가 녹아야 부패를 막고 맛을 돋우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 세상을 품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함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원을 말해줍니다. 곧 ‘소금’은 타인 안에서 녹고, 빛은 타인을 품고 비춥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의 정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정신, 곧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으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저 ‘피안의 세상’이 아닌, 바로 이곳의 이 세상에 당신을 내어주시어, 빛의 하늘나라를 건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러한 ‘세상의 빛’에 대해서, <제1독서>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이러한 착한 행실에 우리의 사명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사명이 단지 어둠을 피하거나 막거나 몰아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선을 보호하고 행하고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불꽃으로 삼으십니다.’(히브 1,7 참조).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여전히 세상에서 타오르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이 불은 바로 말씀이요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불이요, 빛입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서도 말씀의 불꽃이 타올라야 할 일입니다. 마치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그렇게 성령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4).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마태 5,16)
주님!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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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5. 연중 제 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상의 소금과 빛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 본성을 취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라고 말씀하셨고, 동시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테살 5,4-5).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5,8).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13,12).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소금이며 빛입니다.
이미 소금이요, 빛이거늘 짠맛을 내지 못하고 밝게 비추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이미 존재 이유를 잃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어 결국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이 되고, 빛을 비추어 주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비추어진 모습은 “착한 행실”입니다. 의도적인 착한 행실이 아니라 삶에 젖어있는 나의 모습이 다른 이의 모범과 표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체적 실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명함은 사랑입니다.
착한 행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면,
첫째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58,8).입니다.
각자의 삶 안에서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본당에서 준비한 자선함은 1년 내내 운영됩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구체적 행동이 바로 빛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들이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큰 힘과 위로와 희망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위로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이사60,19).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비추임을 받아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과한 욕심을 내려놓은 맑은 영혼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십니다.
둘째는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58,10). 입니다.
“네 가운데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시기, 질투, 미움으로 흉보고, 비난하고 험담하며 모함하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직도 뒷담화를 하나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콜로4,6). 하느님께서는 말 많은 것을 싫어하고, 말꼬리 잡는 것도 싫어하며 말을 뒤집는 것도 싫어하십니다. 헛된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품격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주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을 채우고 영감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나눔과 말조심에 마음을 써야 하겠습니다.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희생의 봉헌을 하고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한다면 그 자체가 소금이요, 빛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뭡니까? 자신을 녹여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부패하지도 않고 세상의 부패를 막습니다. 또한 소금은 절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향력을 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불평, 불만이 많고 교만한 사람을 감사의 사람,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소금의 절정은 맛을 내는 데 있습니다. 소금은 일단 사용이 되면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기능은 여전합니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맛은, 드러나지 않게 이웃 안에서 사랑으로 녹아나야 합니다. 희생과 봉사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생명의 가치를 알게 해 주며 가치 있는 삶, 안락함이 아니라 충만함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금의 삶입니다. 인생의 맛을 잃었던 이들이 우리들의 기도와 헌신적인 사랑으로 삶의 맛을 회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여기 촛불을 보십시오. 자신을 녹이지 않고서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없이는 세상을 비출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가 밝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둡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이렇게 어둡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빛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세상을 어둡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풍족해졌는데 말입니다. 과거에 비해 소비는 늘어났지만, 더 가난해졌고, 기쁨도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정은 무너졌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는지 모르지만 소중한 가치는 줄어들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도 줄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천주교나 개신교, 불교등 제도 종교의 의례와 가르침 그리고 계율은 따르지 않으면서 개인적 취향에 따라 종교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까닭에 밝지 않습니다. 신앙이 아니라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음을 각성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두운 것은 의롭고 밝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알면서도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됨이 적어서입니다. 진리가 부족해서입니다. 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고 사랑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빛을 비추지 않고,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이 더 필요합니다. 소금의 역할이 간절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2,15).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구체적 사랑의 실천으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도록 합시다. 하늘의 별은 어두운 밤에 더 빛나게 보입니다. 사회가 어둡다고 생각될수록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져야 합니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생각될수록 소금의 역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워야 합니다. 까만 밤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더욱 빛나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눈길이, 예수님의 눈길을 닮고, 나의 손과 발이 그분의 손과 발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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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5. 연중 제 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민자들의 삶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삶은 견딜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타향도 정이 들어 고향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잘 이겨낼 수 있지만 이민자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의 문제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자식의 신앙 문제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을 따라서 성당에 가고, 주일학교에도 다니고, 복사도 합니다. 그러나 대학에 가면서부터 많은 자녀들은 성당을 멀리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부모님들은 성당에서 봉사를 많이 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는데 어째서 자녀들은 신앙의 등불이 점점 꺼져갈까요? 대화와 소통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은 잘 찾아주고 도와주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시와 명령은 있었지만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화하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아들에게 엄마가 밖에서 놀고, 친구들도 만나라고 했답니다. 아들이 엄마에게 컴퓨터 게임에도 나름 스토리가 있고, 그 안에서도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의 시대에는 밖에서 친구를 만나고 놀았지만 우리들의 시대에는 컴퓨터 온라인에서 친구를 만나고 논답니다. 학업에 지장이 있지 않느냐는 엄마의 말에 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즘 대부분의 직업은 컴퓨터와 관련된 직업입니다. 쇼핑도, 은행업무도, 예약도 대부분 컴퓨터로 하는 세상입니다. 컴퓨터 게임 때문에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과장된 말이라고 합니다. 컴퓨터 게임이 있기 전에도 폭력과 전쟁은 있었고, 폭력과 전쟁을 하는 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들의 말에 엄마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엄마도 예전에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하는 컴퓨터 게임에서 우승을 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가끔 나가서 운동을 하겠다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화는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나는 견진성사 안 받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아버지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견진성사는 내가 확신이 있어야 받는 것인데,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신앙에 확신이 서면 그때 ‘Confirmation’을 받겠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 교리 시간에 배운 것과 실제 역사에서 드러난 교회의 모습이 다릅니다.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공헌한 것도 많지만 교회가 잘못한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유 있는 답변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지만 안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다시 신앙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네가 나의 집에서 사는 동안은 내가 정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내가 정한 규칙은 주일에는 성당에 가는 것이다. 집안에 기일이 있으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아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대화를 마쳤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수제비’를 해 주셨습니다. 수제비는 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을 만들면서 시작됩니다. 어머니는 찰지게 반죽을 하였습니다. 물이 밀가루에 완전히 스며들어 반죽이 찰져야만 수제비는 끓여도 잘 풀어지지 않고, 맛이 쫀득쫀득 했습니다. 수제비는 어머니의 손맛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구수한 육수와 호박과 감자가 들어간 수제비는 비오는 날 저녁 별미였습니다. 시장에 가서 새로운 부식을 사오지 못한 날에는 ‘비빔밥’을 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양푼에 야채와 밥을 넣고 구수한 들기름을 넣고 비벼 주었습니다. 맛을 더하기 위해서 고추장을 넣기도 했습니다. 수제비가 밀가루와 물이 하나 된 작품이라면 비빔밥은 야채와 밥이 기름에 어우러져서 각자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기름도 자신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비빔밥의 고소한 맛을 더해 줍니다. 저는 신앙에는 두 가지의 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물이 스며들어 밀가루를 맛있는 반죽으로 만들어주는 수제비의 영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들기름처럼 밥과 야채의 풍미를 살려주면서 조화를 이루는 비빔밥의 영성입니다.
가정에 문제와 어려움이 있다면 자녀들의 고유한 인격과 품성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의 방식대로 하나가 되도록 강제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뿌리가 땅 속에서 양분을 끌어 올려 꽃이 피게 하듯이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스며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며 이를 행하여라.” 저는 이것이 스며듦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각자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기름이 제자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각자의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이 건강하고 화목하기 위해서는 ‘반죽’이 되기보다는 ‘비빔밥’이 되어야 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기름이 되어 아이들의 삶을 더욱 빛나고 풍요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금은 스스로 녹아서 맛을 내는 스며듦의 영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빛은 각자의 품격을 잃지 않지만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비빔밥의 영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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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5. 연중 제 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연구에 의하면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의 행복은 1년을 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고로 다리를 잃은 사람은 어떨까요? 다리를 잃는 순간부터 큰 좌절감 속에서 힘든 시간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한 1년을 넘어가면 불행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개척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1년 뒤의 행복도가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보다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그래서 영원히 행복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우리 몸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즉,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 어느 쪽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 몸 안의 유전자가 그 역할을 하는데, 행복감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게을러지고 나태해져서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의지가 약해질 것이고, 반대로 불행에 빠져 우울감이 너무 길어지면 삶을 포기하게 되어 유전자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행복이든 불행이든 어느 한 곳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수백만 년 동안 진화됐고 또 앞으로도 진화될 인간이기에 계속된 변화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삶 자체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할 때 불행의 순간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으며, 자기 삶에 더 충실할 수 있습니다.
늘 행복하길 원하는 우리이지만, 이는 욕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신 어떤 삶이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출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세상 안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빛나는 사람, 세상 안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단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14)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춰주신 것도 아닙니다. 분명하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로 태어났고,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또 불행 안에서 헤어나지 못해 좌절과 절망을 반복하는 삶도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 꼭 필요하고 거룩한 삶입니다. 그래서 이 모습에 맞게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우리의 빛이 새벽빛처럼 세상에 터져 나올 것입니다(이사 58,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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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란, 사람들에게 하기 싫은 일을 시키면서도 그것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사람이다(해리 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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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5. 연중 제 5주일. 키엣 대주교님.
복음의 짠맛
소금은 겸손함의 표현입니다.
소금의 실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소금은 단지 고기나 생선, 나물 등 식재료의 간을 마추는 보조 재료일 뿐입니다. 요리를 소개할 때 주재료를 설명하지 녹아 없어진 소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처럼 소금은 자신을 모두 희생하는 겸손입니다.
소금은 자신을 잊는 것입니다.
소금은 존재하지만 아주 작고 겸손하게 자신의 모두를 용해합니다. 녹아 형체가 없어져야만 비로소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녹지 않는다면 고기와 생선의 살에 스며들지 못하여 신선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녹아들었을 때만이 이로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소금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버리고 존재할 때만이 비로소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소금은 자신의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존재입니다.
아주 작고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소금은 아주 적극적으로 음식을 상하지 않게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하며 음식의 질을 높입니다. 볼 수 없고 음식에 들어간 소금에 대해 말하는 사람도 없지만 맛으로 소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이와 같은 소금의 특성을 갖고, 세상 속에서 소금처럼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작은 소금 알맹이처럼 음식에 완전히 용해되는 진정한 겸손이 필요합니다. 드러내지 않되 가치와 존재감,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소금의 짠맛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정체성과 소금의 가치인 짠맛은 바로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타인을 보듬는 사랑으로 주님의 여덟가지 참행복의 정신으로 사는 삶입니다.
복음의 짠맛을 지니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나의 가족과 이웃, 사회에 겸손한 사랑을 주고 받는다면 사랑의 사회를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눈 작은 사랑이 빛이 되어 세상을 밝게 비추는 힘이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주님을 간절히 사랑하고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소금을 보면 어떤 생각이듭니까?
2. 소금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3. 세상의 소금이 되고 있습니까?
말씀의 나눔
1. ‘세상의 소금이 되라’ 이 말을 이해하지만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아닌 타인을 올려주기 위해 나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을 때의 기쁨을 가져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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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5. 연중 제 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멋지고 매력적인 삶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삽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바로 우리 믿는 모든 이의 신원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신자들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살아갈 때 참 멋지고 매력적인 삶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세상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이 짓밟힐 따름이다.”
설명이 필요없는 너무 자명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변질, 변절, 변심하지 않은 한결같은 제맛을 지닌 삶인지요. 늘 제맛을 지닐 때 참 멋지고 매력적인 삶입니다. 부패로 맛이간 변질된 삶이라면 원상복구는 참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제맛의 소금으로 살아가기 위한 항구한 노력이 필수이겠습니다.
“음식이 맛이 가면 버리기라도 하겠는데 사람은 맛이가면 버릴 수도 없고 참 난감합니다.”
오래전에 들은 말마디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제맛을 잃지 않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소금은 조미료나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있으면 모르지만 적절량이 없으면 금방 맛이 드러납니다. 또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입니다. 그러니 소금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합니다. 음식 맛을 내기 위한 소금이요 음식의 부패를 막기 위한 소금입니다. 또 소금은 보이지 않으면서 자신은 점차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면서 서서히 녹아 사라집니다.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작용하면서 자신은 서서히 사라지니 그대로 한결같고 묵묵한 희생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소금이라 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세상과 단절 격리된 소금같은 존재라면 참 무의미한 삶일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존재라면 말그대로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너희는 세상이 소금이다”, 너희는 단수이면서 복수입니다. 참으로 변질되지 않고 한결같은 제맛을 지닌 세상의 소금같은 개인이요 교회공동체인지,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듯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같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과연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같은 개인이요 공동체의 삶인지요? 서서히 꺼져가는 희미한 빛은 아닌지요? 늘 한결같이 세상을 은은히, 환히 밝히는 개인이요 공동체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인 삶일까요.
촛불의 이치가 소금의 이치와 똑같습니다. 마지막 끝나는 순간까지 서서히 녹아 사라지며 세상을 밝히는 촛불같은 사랑과 헌신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겠는지요.
오늘 마태복음 소금과 빛의 상징어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계속되는 예수님 산상설교에 나오는 일부입니다. 바로 산상설교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 몸소 산상설교의 말씀을 사셨기에 이렇게 힘차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처럼 앞의 참행복의 진복팔단에 이어지는 산상설교 말씀의 수행에 한곁같은 분투의 노력과 공부를 다할 때 비로소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같은 삶이겠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짜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의 빛나는 모범이자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예수님에 계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따랐던 숱한 성인성녀 신자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벌써 부패로 변질되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마찬가지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따랐던 선의의 무수한 성인성녀들이 신자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이미 캄캄한 어둠속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른다는 교회공동체가, 또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해야 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제반 종교공동체들이나, 수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세상에 동화, 속화되어 제맛을 잃고 부패된다면, 또 제빛을 잃는다면 그 폐해가 얼마나 크겠는지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면서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종교공동체가 속화俗化된다면 참으로 절망적일 것입니다. 거룩한 것이 부패하면 그 악취는 대책이 없습니다.
불가의 고 성철 큰 스님이 수좌에게 줬다는 평생 좌우명이 소박하나 결코 잊지 못합니다. '속이지 마라' 입니다. 남은 물론 자기도 속이지 마라, 진실하라, 정직하라는 말씀인데 평범하나 얼마나 공감이 가는 말씀인지요! 거창한 거룩함이 아니라 이런 정직하고 진실한 수행자의 삶자체가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입니다.
또 어제 도반형제의 말에 참 반가웠습니다. "우리 수도원에는 아부하는 형제가 없다" 정말 수도자다운 순수한 모습입니다. 아부한다는 것은 수도자의 정서에 너무 안어울릴뿐 아니라 이러면 결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역할을 못합니다.
이런 가르침이 깨달음이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에 속한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다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어 살게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그 아득한 옛날에 우리를 위한 참 귀한 가르침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참된 단식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좋아하는 단식은 밥을 굶는 단식의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있음을 역설하십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좋아하셨던 이사야 예언자가 그대로 예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은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다음 같은 구체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참으로 말뿐, 마음뿐, 실천이 결여된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도 생략할 수 없는, 단숨에 읽혀지는 내용이라 제1독서 전문을 그대로 다 인용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저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넔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흙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어찌 수천년전에 오늘날에도 그대로 공감이 가는 이런 진리 말씀이 선포됐는지 참 불가사의한 하느님의 예언자 이사야입니다. 이런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없는 삶과 유리된 단식이나 전례행위는 얼마나 공허하겠는지요!
어떻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을까요? 답은 단 하나 진짜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대로 온힘을 다해 살아내는 것입니다. 바로 제2독서의 바오로가 그 모범입니다. 참으로 겸허한 미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파스카의 삶을 살아갔던 바오로 사도입니다.
“나는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애오라지 이런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된 삶이라면 그 삶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같은 삶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되어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빛은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하나될수록 비로소 우리 또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우리가 변질 부패되는 것을 막아 한결같은 제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으로, 또 한결같이 세상을 밝히는 환한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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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5. 연중 제 5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저는 뚝딱뚝딱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제가 먹고 싶은 것을 만들다가 문득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모든 음식에는 짠맛 혹은 단맛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둘 다 함께 쓰입니다. 짠맛이 2가 들어간다면 단맛은 1이 들어갑니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음식에는 짠맛이 들어갑니다. 짠맛은 음식을 더욱 맛있게 만들어줍니다. 물론 너무 짜게 먹는 것은 우리 건강에 좋지 않지만, 짠맛은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을 더욱 맛있는 음식으로 선물해줍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 각자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짠맛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공동체가 더욱 따뜻한 공동체로, 밝은 공동체가 더욱 밝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도 말씀해주십니다. 빛은 참 많은 역할을 합니다. 특히 저는 빛을 통해 볼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한 줄기 빛도 없는 방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방에서 나가는 문을 쉽게 찾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쉽게 찾지 못할 것입니다. 한참을 더듬거리며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방에 1초 정도 혹은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빛이 비친다면 우리는 그 순간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지금 내가 어디쯤 있는지, 그리고 문은 어디 있는지, 그 짧은 시간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절 미사가 기억나십니까? 그 미사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말했고, 동시에 그 빛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의 빛이 되어주십니다. 그 빛을 우리는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가 그대들의 길을 비출 터이니, 그대들도 그대들의 주변을 밝게 비춰주시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게.’
감사함의 힘
뇌과학에 따르면 우리의 뇌파를 안정시켜서 평안한 마음을 만들어주는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평안한 음악과 따뜻한 차 한잔, 산책이나 독서 등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 가운데 으뜸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기도와 명상 등의 종교적인 행위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태풍과 같은 우리 마음에 평안함을 선물하며 동시에 뇌파를 안정시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으뜸보다 더 으뜸인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함’이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마음으로부터 끌어 올려 입으로 표현할 때 우리의 뇌파는 평안함으로 느끼는 뇌파로 바뀐다고 합니다.
평안함을 원하십니까? 마음의 평화를 바라십니까? 그럼 이렇게 해 보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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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5. 연중 제 5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을 당당하게 드러내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뽑으신 까닭은
귀한 보물 삼아 깊은 곳에
감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어두움 환히 밝히는
한줄기 빛이 되어
기쁨과 희망을 나누는 이가 되라는
주님의 뜻을 새기십시오.
빛을 죽이려 달려드는
어둠의 세력 한가운데에서
빛으로 산다는 것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빛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꺼뜨리고 싶을 때에,
빛이 될 자격이 없다며
그저 쓰러지고 싶을 때에,
바로 당신에게
몸소 불을 놓으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한 줌의 재가 되어
당신의 모든 것이 사라질 때까지
빛으로 불로 활활 타올라
온 누리 모든 이에게
당신을 아낌없이 나누십시오.
당신의 사라짐으로
온 세상을 환히 밝히고
밝아진 온 세상을 가득히 품에 안는
벅찬 영광을 맘껏 누리십시오.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을 당당하게 드러내십시오.
당신은 온 세상에 드러나야 할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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