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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의 조선사회 뒷마당 - 술문화와 금주령 / 술마신자 임금이 직접 목을 베니…
술문화와 금주령
근자에 건강상의 이유로 술을 거의 먹지 않는다. 본의 아닌 금주를 하게 되자, 술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그래서 술에 대한 갈망을 조선시대의 음주와 주점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술에 관한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저도 있다. 변영로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과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는 이 방면의 포복절도할 쾌저(快著), 명저가 아니던가? 여타 문인들의 소소한 음주기(飮酒記)를 더러 읽어보았지만, 모두 이 두 명저에 몇 걸음을 양보해야 하리라. 하지만 이 책에 불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음주에 관한 역사적 접근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술집에서 술을 마셨으며, 또 술집은 언제 생겨난 것인가? 이 물음에는 아무도 답해 주지 않는다. 답답하다. 술은 역사적인 사회학적 고찰을 요하는 어휘다. 한국 기업의 접대문화는 술과 분리할 수 없는 바, ‘술상무’란 말에는 20세기 후반 한국이 경험했던 압축적 산업화·근대화가 각인되어 있다. 또 지금 한국의 거창한 향락산업 역시 술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뿐인가. 술은 거대한 세원(稅源)이니, 곧 국가경제의 문제다. 음주 허용연령은 청소년 문제와 연관된 사회학적 문제다. “여자가 술을?”이란 의문은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술단지의 밑바닥에 사회, 역사, 경제, 문화가 녹아 있다. 조선시대의 술집과 금주령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식량확보 위해 금주령 발동
국가 권력이 음주를 향한 욕망을 꺾어버린다면, 즉 앞으로 1년 동안, 혹은 석 달 동안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술을 마실 경우 감옥에 가둔다면, 또한 이런 조치가 수시로 발동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선시대엔 이런 적이 많았다. 국가는 자주 금주령을 발동하여 개인의 음주를 금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알코올은 주로 곡물과 과일에서 얻기 때문이다. 벌꿀이나 용설란 같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대종을 이루는 것은 역시 곡물과 과일이다. 술은 곡물을 ‘낭비’한다. 말하자면 주 식량을 낭비하는 것이다. 술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밥은 먹지 않으면 곤란해진다. 경제체제가 전적으로 농업 위주였던 조선시대에 곡물의 안정적 확보는 곧 정치-경제 체제의 안정과 연결되는 문제였다. 흉년이 들었을 때 곡물의 낭비는 곧 많은 사람들의 아사를 불러온다. 그러니 곡물이 술로 낭비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전통이 이어져서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쌀로 막걸리를 담글 수 없었다. 즉, 조선시대엔 흉년이 되는 해에 금주령이 강하게 발동되었던 것이다. 천재지변이라든지 화재와 같은 재난, 국상 등이 있으면 전국민이 근신하는 의미에서 금주령이 발동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에선 500년 동안 금주령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유지됐다. 그렇다면 조선의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 술의 유통을 통제했을까. ‘태조실록’ 7년 5월28일조엔 전국 각도에 술을 금하는 영을 거듭 엄하게 내렸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것이 조선시대 최초의 금주령이라 여겨진다. 물론 그 구체적 내용은 미상이다. 태종 때도 금주령이 잇따라 시행됐다. “금주령을 내렸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늙고 병든 사람이 약으로 먹는 것과 시정에서 매매하는 것도 모두 엄하게 금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태종 10년 1월19일).” “임금이 의정부에 명하였다. ‘금주령을 먼저 세민(細民)에게 행하고, 거가(巨家)에는 행하지 아니하였다. 또 술을 팔아서 생활의 밑천으로 삼는 자도 있으니, 공사연(公私宴)의 음주 이외는 금하지 말라’(태종 12년 7월17일).” “공사의 연음(宴飮)을 금지하였다. 환영과 전송에 백성들이 탁주를 마시는 것과 술을 팔아서 생활하는 자는 금례(禁例)에 두지 말게 하였다(태종 15년 1월25일).”
근자에 건강상의 이유로 술을 거의 먹지 않는다. 본의 아닌 금주를 하게 되자, 술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그래서 술에 대한 갈망을 조선시대의 음주와 주점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술에 관한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저도 있다. 변영로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과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는 이 방면의 포복절도할 쾌저(快著), 명저가 아니던가? 여타 문인들의 소소한 음주기(飮酒記)를 더러 읽어보았지만, 모두 이 두 명저에 몇 걸음을 양보해야 하리라. 하지만 이 책에 불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음주에 관한 역사적 접근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술집에서 술을 마셨으며, 또 술집은 언제 생겨난 것인가? 이 물음에는 아무도 답해 주지 않는다. 답답하다. 술은 역사적인 사회학적 고찰을 요하는 어휘다. 한국 기업의 접대문화는 술과 분리할 수 없는 바, ‘술상무’란 말에는 20세기 후반 한국이 경험했던 압축적 산업화·근대화가 각인되어 있다. 또 지금 한국의 거창한 향락산업 역시 술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뿐인가. 술은 거대한 세원(稅源)이니, 곧 국가경제의 문제다. 음주 허용연령은 청소년 문제와 연관된 사회학적 문제다. “여자가 술을?”이란 의문은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술단지의 밑바닥에 사회, 역사, 경제, 문화가 녹아 있다. 조선시대의 술집과 금주령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가난뱅이만 걸려드는 불공평한 법
조선시대 금주령은 대개, 중앙정부가 명령을 내리면 각 지방 행정기관들이 이를 받아 단속하는 방식으로 집행됐다. 금주령은 개국 초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강력하게 시행된 법령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천편일률적이어서 금주령의 이유(보통 흉년 가뭄), 금주 기간, 금주령의 적용대상 범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중 금주령의 적용대상 범위가 주목할 만하다. 다음은 ‘태종실록’ 7년 8월27일조 사헌부의 말이다. “① 각사(各司)의 병술(甁酒)과 영접·전송,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다탕(茶湯)을 빙자하여 허비하는 따위의 일은 일절 금지하고, 조반(朝班)과 길거리에서 술에 취하여 어지럽게 구는 대소 원리(大小員吏)를 또한 규찰하게 하되, ② 다만 늙고 병들어서 약으로 먹는 것과 시정에서 술을 팔아 살아가는 가난한 자는 이 범위에 넣지 않게 하소서.” ①이 금주의 대상이고, ②가 제외의 대상이다. 늙고 병든 사람이 술을 약으로 마시는 경우, 가난하여 술을 파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는 금주령에서 제외되었다. 물론 금주의 범위는 늘 가변적이다. ‘세종실록’ 2년 윤1월23일의 실록 기록에 따르면, 금주령 기간 이라도 부모 형제의 환영 전송, 혹은 늙고 병든 사람의 복약(服藥), 또 이런 경우에 필요한 술을 매매한 사람은 처벌에서 제외되었고, 오로지 놀기 위하여 마시는 경우, 부모 형제가 아닌 사람을 영접 전송하면서 마시는 것, 또 이들에게 술을 판 경우는 모두 처벌 대상이었다. 금주의 범위는 사회적 상황, 정책 담당자의 성격, 임금의 의지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예컨대 무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할 때 음주를 허락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중요한 국정 토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4년 5월10일, ‘성종’ 9년 5월29일). 음주를 허용하자는 측은 활을 쏠 때 술의 힘을 빌려야 잘 맞는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이 경우 음주 허용과 불가 방침이 반복됐다. 조선시대 금주령은 결론적으로 약을 먹을 때 마시는 술과 혼인·제사 때 마시는 술은 대체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성종실록’ 14년 3월6일). 금주령은 강력했지만 실제 단속에 걸려드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이었다. ‘청주(淸酒)’를 마신 자는 걸려들지 않고, ‘탁주’를 마신 자는 걸려들어 처벌을 받는다 했으니(‘세종실록’ 2년 윤1월23일), 요즘으로 치자면 양주를 마신 사람은 괜찮고 소주를 마신 사람은 걸려든다는 얘기다. “금주령으로 처벌되는 사람은 언제나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이고 고대광실에서 호사를 떨며 술을 즐기는 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세종실록’ 8년 2월23일)거나, “가난뱅이는 정말 우연히 탁주 한 모금을 마시다 체포되고, 세력과 돈이 있는 자는 날마다 마셔도 누구도 감히 입을 대지 못했다”(‘세종실록’ 11년 2월25일)는 데서 알 수 있다.
소주는 조선 상류층의 상징 금주령에서 특히 문제삼았던 것은 소주였다. 조선 건국 이후 체제가 안정되자 술은 점점 고급화되었다. 소주의 소비가 늘어났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소주는 지금과 달리 고급술이었다. 원래 소주와 같은 증류주는 알코올 함량이 높기 때문에 곡식이 많이 소모된다. 세종 15년 이조판서 허조(許稠, 1369~ 1439)는 “내가 처음 벼슬길에 들어섰을 때는 소주를 보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집집마다 소주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세종실록’ 15년 3월23일). 허조는 조선 건국 직후부터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건국 초기에는 소주가 드물다가 세종 연간에 와서 소주를 마시는 풍조가 성행하기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종 21년의 자료에 의하면, 세종 때는 사대부가에서도 드물게 쓰는 것이었으나 성종 때엔 연회에도 모두 소주를 사용하였다고 한다(‘성종실록’ 21년 4월10일). 소주를 마시는 것은 관청에서 시정에 이르기까지 풍습이 되었기에 소주를 만들거나 마시는 것에 대한 금지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성종실록’ 22년 2월22일). 그러나 금지령이 지켜지는 것은 한때일 뿐 소주는 이내 다시 음용되었다. 소주의 유행에 ‘신래침학(新來侵虐)’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신래침학은 과거에 합격하여 처음 관청에 보직을 받아 출근하는 사람에게 고참들이 술과 요리를 요구하는 일종의 입사의식(入社儀式)이다. 신참은 고참들에게 값비싼 소주를 바쳐야 했다. ‘중종실록’ 19년 8월1일자에서 남곤은 “민간의 의식이 부족한 것은 술 때문이고, 그 중에서도 소주를 만들기 위해 미곡을 낭비하는 것이 가장 심하며, 소주는 특히 신래를 침학할 때 반드시 요구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단순히 금주령만으로 술을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국민을 의식화시키는 방법도 고안되었다. 금연 캠페인이 벌어지듯 음주의 해악을 지적한 책이 제작되고 보급되었다. 세종 15년의 일이다. 세종은 ‘계주윤음(戒酒綸音)’이란 책을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반포했다(‘세종실록’ 15년 10월28일). 술의 부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 논리를 잠시 따라가보자. “술은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한다.” 이 대목은 설명이 필요 없다. “술은 안으로 마음과 의지를 손상시키고 겉으로는 위의(威儀)를 잃게 한다.” 술을 마시면 평소 지키던 몸가짐을 잃는다는 얘기다. 유교가 국교이던 시기여서 예의 문제도 금주 캠페인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술 때문에 부모의 봉양을 버린다.” 술값을 마련하기 위해 부모 봉양을 소홀히 한다는 뜻이다.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한다.” “해독이 클 경우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敗亡)하게 만든다.” “해독이 작으면 성품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상실하게 한다.” 지나친 음주가 정신건강과 육체적 건강에 위협이 된다는 얘기를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은 이 책을 서울과 지방의 관청에 보급하여, 족자로 만들어 관청의 벽에 걸어두고 늘 술을 조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술 최대 소비층은 양반 조선은 강력한 통제 사회였지만 금주령은 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조선 전기는 ‘음주의 시대’라 불릴 만큼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7년 전인 1585년 지평 한응인(韓應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즈음 여항(閭巷)에서는 대소귀천(大小貴賤)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연회에 절도가 없어 주육(酒肉)이 낭자하고 음악이 시끄러운 것이 태평하여 근심이 없을 때와 같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술병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일절 금단하소서(‘선조실록’ 18년 4월29일).” 그야말로 로마의 평화가 아닌 조선의 평화였다. ‘대소귀천’ 모두가 술에 빠져 있었다. 현재 한국의 국민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세계 최고 수준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실록은 대소귀천 운운하지만 술의 최대 소비자가 지배계층인 양반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술은 곧 곡식이었으니 궁핍한 백성들이 술을 마음대로 마실 수는 없었다. 근대 사회 들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값싼 술이 등장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가난한 사람들도 알코올에 중독될 수가 있었던 것이지 오로지 곡식에만 의존해 살았던 중세의 보통 백성들에게 알코올은 너무나 값비싼 기호식품이었다. 각 관청에는 주고(酒庫, 술창고)란 시설물이 있었는데, 특히 서울 각 관청은 고위 인사의 영접 전송 때 모두 술을 사용했다. ‘중종실록’ 36년 11월13일조에 따르면 서울의 품계가 높은 아문과 육조 소속 각 관청에서는 자체 내에서 술을 빚어 술을 물처럼 마셨다. 이 때문에 원래 술 판매에 종사하던 각 관아의 노복(奴僕)들이 생업을 잃기도 했다. 또 서울 시내 각 시장에는 누룩을 파는 곳이 7, 8곳이고 거기서 하루 거래되는 술은 쌀 천여 석에 달했다. 약간의 과장이 섞였겠지만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정부는 흉년을 핑계로 관청의 주고를 혁파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술의 소비량이 줄어들었던 것은 아니다. 양반계급의 술 소비엔 당시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양반관료 중심사회였다. 양반들은 성리학 이념에 투철한 도덕적 존재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면일 뿐 양반은 지배계급으로서 사회적 특권과 쾌락을 누리는 데도 열중했다. 음주 역시 그 특권적 쾌락의 일단이었다. 요즘 골프를 치는 것이 상류층-중산층의 상징이듯 조선시대에 소주 마시는 것은 양반계급의 상징이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거의 200년간 평화를 누렸다. 크고 작은 정변과 외교적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토록 장구한 평화는 역사적으로 드문 일이었다. 긴 평화는 양반들의 음주벽을 진작시켰다.
조선 전기에 주류판매업 생겨
그렇다면 조선 전기 사람들은 어디에서 술을 마셨을까. 상점 같은 곳에서 술을 사 집에서 마시기만 한 것일까, 아니면 요즘의 카페나 룸살롱 같은 전문 술집에서 마신 것일까. 조선시대에도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술을 팔았을까. 상식적으로 조선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셨으므로 당연히 술집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사극 드라마를 보면 주막에서 주모가 손님들에게 술과 안주를 내오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문건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경우 술을 판매한 상점은 있었지만 술집은 아마도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추측’이라고 한 것은 이제까지 필자가 접한 문헌에서 술집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술집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술을 마실 수 있는 상업적 공간이 실제로 없었거나 그런 공간이 극히 드물었던 데에 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선전기의 술집에 관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종 16년 4월11일조의 ‘실록’에서 성균 생원(成均生員) 방운(方運)은 “백성들은 굶어죽는 일이 있으나 승려들은 일을 하지 않고도 굶어죽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급기야는 교만하고 방자한 버릇이 생겨 어떤 자는 찻집(茶肆)이나 술집에 나와 놀면서 스스로 서로 잘난 척하고 뽐내며, 어떤 자는 약한 백성과 서로 이익을 다투어 재물 모으기를 꾀하고, 처자를 끼고 먹이어 청정(淸淨)한 곳을 더럽히고, 추악한 행동을 드러냅니다…” 이 자료는 상당히 문젯거리다. 술집과 함께 찻집이라니! 찻집은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여기서 등장하는 술집과 찻집은 아마 고려의 유풍이 아닌가 한다. 이 자료 이후 찻집은 물론 술집에 관한 기록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디서 술을 마셨을까. 조선 전기 실록에는 ‘회음(會飮)’을 금한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회음이란 환영 전송 잔치 등의 기회에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는 일을 뜻한다. 아마 조선시대엔 회음이 가장 일반적 음주 형태였던 것 같다. 이 경우 술은 양조주(釀造酒), 즉 집에서 스스로 만든 것이 주로 동원됐다. 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관청에서도 술을 빚었다. 술을 빚어 판매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술을 사서 마시는 일도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 ‘태종실록’ 금주령에 관한 자료에서도 술을 빚어서 판매하는 사람들의 생계 수단인 양조는 금지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 전기 술의 판매 구조를 알기 위해선 병술이라는 말의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병술은 휴대용 술이란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집 밖에서 약을 먹기 위해 술이 필요한 경우 술을 병에 담아 휴대할 수밖에 없다. 병술에는 또 양이 적다는 의미도 있다. 병술을 금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은 양의 음주는 굳이 금지시키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병술은 어떤 방식으로 유통됐을까. 다음은 ‘옛날의 음식점’(김화진 저)의 한 대목이다. “바침술집은 주세를 내지 않고 임의로 술을 만들어 파는 집을 뜻한다. 대개 집 문간에 병이 그려져 있으며 ‘병술집’이라고도 한다.” 병술은 병술집(바침술집)에서 주로 판매됐다. 병술집은 오직 술을 병에 넣어 판매만 할 뿐이었다. ‘옛날의 음식점’에 나오는 자료는 조선 전기의 것이 아니고 19세기 말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조선 시대의 사회 풍습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김화진의 증언이다. 믿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 이 간단한 형태의 술 판매구조야말로 간단하기에 변화가 거의 없으며, 실록의 기록들에 의하면 그 유래를 조선 전기까지 소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침술집은 어원도 독특하다. 바침술집은 국어사전에는 ‘받힘술집’이 옳은 표기라 되어 있다. ‘받힘’은 ‘받히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받히다’는 현재 거의 쓰지 않는 말인데, ‘모개(전체)로나 도매로 팔다’는 뜻이다. ‘받힘술집’은 술을 많이 담가서 도매로 술장수에게 넘겨주는 술집이란 뜻이다. 국어사전은 여기에다 또 병술로도 파는 집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즉 받힘술집이라는 말엔 술의 제조창 겸 도매상 겸 소매상이라는 의미가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 전기에는 술과 안주를 동시에 제공하는 형태의 상업적 시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병술집으로 불리는 주류판매업은 존재했다. 덧붙이자면 40대 이상의 연령층은 어렸을 때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받으러 갔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병술집은 대개 이것과 동일한 것이다. 술을 받으러 가는 일의 역사는 400~ 500년 전부터 시작된 셈이다.
숙종 때 술집 처음 등장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술집은 조선 후기가 되어서야 출현했다. 하지만 술집에 관한 기록은 이때도 드물다. 술과 술집이란 그때도 일상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상화된 것은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기록에 남길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특히 술집에 관한 자료를 찾기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가 아닌가 한다. 일단 이 점을 감안해두자. 술집이라는 단어는 ‘숙종실록’ 22년 7월24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업동의 사건에 이 단어가 나온다. “방찬이 또 응선을 꾀어 술집에 가게 하여 취한 틈을 타서 방찬이 그 호패를 잘라서 주고 이홍발에게 갖다 주게 하였는데, 제가 그 말대로 전하여 주었습니다.” 업동의 사건은 매우 복잡한 것이나 여기서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 자료에선 구체적으로 술집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없다. 단지 술집이란 것이 숙종 22년에 존재했던 것만 확인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실록’ 4년 6월18일조 형조판서 서명균(徐命均)의 상소는 퍽 중요하다. “듣건대, 근래 도민(都民)의 살길이 점점 어려워져서 술을 팔아 생업으로 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지고 그 가운데에서 많이 빚은 자는 혹 100곡(斛)이 넘기도 하였으나, 시가가 뛰어올라 폭력을 휘두르고 살상까지 한다 합니다. 차츰 금지하려고 신칙(申飭·단단히 타일러 경계하는 것)하는 뜻으로 오부(五部)에서 감결(甘結·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로 보내던 공문)을 받았는데, 나라의 풍속이 두려워하고 와전되어 금란(禁亂)을 가탁하여 속이고 협박하며 뇌물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가탁하는 자 두어 사람을 잡았더니, 바로 사헌부에서 내쫓긴 하인과 포도청(捕盜廳)에서 물러난 군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뒤부터 술집에서 내기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그쳤는데 쌀가게에서 부르는 값은 갑자기 더하므로, 바야흐로 들어가 아뢰어 먼저 술 많이 빚는 자를 금하고 이어서 옛 제도를 더욱 밝히기를 청하려 하는데 승선(承宣)이 문득 폐단을 끼친다고 말하니, 폐단을 고치려다가 도리어 백성에게 폐해를 가져온다는 뜻일 것입니다.” 술집이 늘어나고 있음이 확인된다. 특히 ‘술집에서 내기 술을 마시는 일’이란 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병술집이 아닌 주점을 뜻한다. 시정에 주점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2년 전 영조는 붕당(朋黨), 사치와 함께 음주의 폐해를 신하들에게 간곡하게 언급하면서,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하고 훗날의 대사령 때에도 용서하지 말라고 명했다. 실록 자료에 따르면, 영조의 명으로 술집에 대한 단속이 철저하게 진행됐다. ‘영조실록’ 4년 9월16일 사간 강필경(姜必慶)의 말에 따르면 술집의 영업행위는 단속으로 일시에 거의 종식된 듯했다. “주금(酒禁)을 신칙(申飭)한 뒤로 술집으로 이름난 것은 모두 술 빚는 일을 끊었습니다.” 흥미로운 단속 사례도 있었다. “송교(松橋) 근처 큰 술집 하나가 있는데 내자시(內資寺)에서 도장을 찍은 첩자(帖子)를 높이 걸고 어공(御供)하는 술이라 청하여 법부(法府)에서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뜻대로 매매하여 꺼리는 것이 없으니, 내자시의 해당 관원을 먼저 파직하고 서원(書員)은 유사(攸司)를 시켜 가두고 처벌하소서.” 내자시는 대궐에 필요한 식료품 자재를 공급하는 관청이다. 송교의 큰 술집이 내자시와 결탁하여 어공(御供), 즉 임금에게 바친다고 속여 술을 빚어 팔면서 한성부·형조·사헌부 등 사법권이 있는 관청의 단속을 피해왔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힘있는 행정기관과 결탁하고 ‘청와대’를 사칭하여 법망을 피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내자시의 관원과 서원(書員, 書吏)들은 당연히 처벌되었다. 이후 영조는 금주령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과잉단속·함정단속
대략 17세기 말쯤 시정에 나타난 술집은 영조의 가혹한 금주령으로 거의 사라졌다. 금주령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늘 그래왔듯이 일시적인 것이었다. 흉년이 들면 금주령을 발동했다가 식량 사정이 좋아지면, 다시 금주령을 푸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영조는 달랐다. 그는 그의 치세 기간 내내 강력한 금주 정책을 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려 했다. 국가의 제사인 종묘 제례에도 술을 쓰지 않았다. 민가에서도 제사에 술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이다. 영조는 1724년 8월부터 1776년 3월까지 53년간 재위하여 조선조 왕 중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금주단속이 무려 반세기 동안 실효성 있게 시행됐다는 의미다. 애주가들에게 영조 치세기는 세계사에서도 흔치 않은 탄압기였다. 영조의 강력한 금주령으로 인해 많은 소동이 벌어졌다. 첫째 과잉단속. 다음은 영조 9년 장령 안경운(安慶運)의 상소 내용이다. 포도종사관(捕盜從事官) 김성팔(金聲八)은 밤에 술집에 갔다. 그는 술집에 관한 정보를 듣고 단속하러 갔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팔은 욕설을 퍼부으며 술집 주인을 심하게 구타했고 다음날 포도대장에게 보고하였다. 술집 주인은 포도청 감옥에 갇혀 ‘절도범을 치죄할 때 사용되는 형’을 받은 뒤 죽었다. 일흔 살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죽었다. 아흔 살의 조모 역시 상심, 비통해하다가 죽었다. 3대가 한꺼번에 죽은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성팔은 사형에 처해졌고 포도대장은 파직됐다. 이는 술집에 대한 과잉 단속으로 인해 발생한 대표적 사고였다(‘영조실록’ 9년 4월13일). 단속반의 비리도 잇따랐다. 영조 28년 우의정 김상로(金尙魯)는 금주령 이후의 폐단을 말한다. 금주령 이후 술집에 대한 단속 권한이 있는 형조와 한성부의 이속(吏屬)들이 ‘금란방(禁亂房)’이라는 술집 단속 전담반을 설치하여 은밀히 술 파는 집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뜯는다는 것이다. 김상로는 형조에 이 폐단을 개혁할 것을 요구했고 임금도 허락했지만, 단속반의 부정부패가 척결됐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영조실록’ 28년 12월20일). 함정 단속도 공공연히 행해졌다. 형조 낭관(郞官)은 몰래 사람을 술집에 보내어 술을 사서 마시게 하고 그것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영조는 “이것은 형(刑)에 걸리도록 유도한 것”이라면서 형조 낭관을 파직했다(‘영조실록’ 32년 1월9일).
술 마시면 사형 영조의 금주령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목이 달아난 공무원이 있을 정도였다. 금주령 위반죄로 참형을 당했던 윤구연(尹九淵)의 예를 보자. 영조 38년 9월5일 대사헌 남태회(南泰會)는 남병사(南兵使) 윤구연을 고발했다. “자신이 수신(帥臣)이면서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지엄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멋대로 금주령을 범하고 술을 빚어 매일 술에 취한다는 말이 낭자합니다. 이와 같이 법을 능멸하는 무엄한 사람을 변방 장수의 중요한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이러한 보고를 받은 영조는 “과연 들리는 바와 같다면 응당 일률(一律, 사형)을 시행해야 한다. 어찌 파직에 그치겠는가?”라고 말하며 윤구연을 체포해 올 것을 명했다. 윤구연이 잡혀오자 영조는 숭례문 앞에 나아가 윤구연의 목을 직접 칼로 쳤다. 영조가 이렇게 성급했던 것은 사실 확인차 보낸 선전관이 윤구연이 있던 곳에서 술 냄새가 나는 항아리를 가져와 대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술항아리의 술은 금주령 이전에 담근 것이었다(‘영조실록’ 38년 9월5일). 해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사람의 목을 벤 것은 전제군주의 횡포였다. 영의정 신만, 좌의정 홍봉한, 우의정 윤동도가 차자(箚子·상소문)를 올려 윤구연의 목숨을 구하려 하였으나, 영조는 비답을 내리지도 않고 세 정승을 파직했다.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의 신하들도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도리어 이들까지 벼슬이 떨어졌다(‘영조실록’ 38년 9월17일). 부수찬 이재간(李在簡)은 “사형을 너무 섣불리 집행했고 또 말리는 신하들을 파직한 것이 너무하지 않느냐”는 항변성 발언을 하다가 졸지에 성환찰방(成歡察訪)으로 좌천되었다(‘영조실록’ 38년 9월18일). 윤구연은 사실 억울한 죽임을 당했기에 이후에도 그를 신원하여 명예를 회복시켜주려는 신하들의 요청이 계속되었으나, 그것이 실현된 것은 12년 뒤인 영조 50년 2월24일이었다. 이 날 영조는 윤구연에게 직첩(職牒)을 돌려주라고 명하였으니, 12년이나 지나 명예가 회복된 것이다. 영조의 금주령은 이렇듯 잔인한 것이었다.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영조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계속 사형에 처해진 듯하다. 그러나 영조는 지나치다 싶었는지 이 조치만큼은 철회했다. 영조 39년 사헌부 지평 구상(具庠)은 “금주령을 범했다고 해서 사형에 처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말했다(‘영조실록’ 39년 6월23일). 영조는 이 말을 수용하여 “금주령을 범한 술의 양의 다과(多寡)로 등급을 나누어 죄를 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다. 공포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1년 뒤 영조는 포도청에 “양반으로서 금주령을 범하고 술을 빚은 자를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영조 때 서울 도성 안의 인구는 20만 이 채 안 되었다. 포도청은 성내를 수색하여 7명을 잡아 왔다. 영조는 “죽은 할아비에게는 (제사지낼 때) 감주를 쓰고 그 손자는 술을 마시니 명색이 사대부로서 이런 짓을 한단 말이냐”라며 엄형을 가한 뒤 서민으로 강등시켜 절도(絶島)와 육진(六鎭)에 귀양을 보냈다(‘영조실록’ 40년 4월26일). 영조는 제사에도 술 대신 감주를 쓰게 했기 때문에 “죽은 할아비에게 감주…”라고 말한 것이다. 이 사건 역시 금주령을 완화하려는 신하들의 의도를 영조가 좌절시킴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영조는 금주령을 발동하면서 종묘의 제사에도 술을 쓰지 않고 감주를 쓸 것을 결정하여 시행하고 있었는데, 정언(正言) 구상이 종묘에 술을 쓸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영조의 가혹한 금주령을 늦추어 보자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물론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상의 요청이 있고 난 뒤 영의정 홍봉한이 구상의 진언으로 인해 금주령이 완전히 풀린 것으로 소문이 나 술을 마구 담그고 거리에서 술을 파는 자까지 출현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리고 금주령을 더욱 강화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영조는 격노하여 도성을 뒤져 사람을 잡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영조는 사형을 면해주기는 했으나, 금주령을 어긴 사람들의 귀양행렬은 영조시대 내내 이어졌다. 영조의 서슬 퍼런 금주령은 신하들의 어떤 진언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영조 40년 9월11일 정언 박상로(朴相老)가 금주령의 폐단을 10개 항목에 걸쳐 조리 있게 논박했으나 영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박상로만 사적(士籍)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처벌을 받았을 뿐이었다.
영조 때 술집에 ‘네온사인’ 등장 하지만 술이란 것이 애초에 없었거나 이슬람교처럼 종교적 설득이 병행됐다면 모를까 모든 사람이 술을 안 마시게 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영조 때에도 술꾼들은 여전히 숨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영조실록’ 46년 1월26일조 주강(晝講)의 한 장면이다. 주강이란 임금이 낮에 경연관을 불러 경전을 강독하고 정사를 토론하는 엄숙한 자리다. 그런데 이 자리에 불콰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참찬관으로 참여한 승지 조정(趙晸)이 범인이었다. 영조는 강(講)을 하는 막중한 자리에 술 냄새를 풍긴다면서 앞으로 그를 벼슬에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조정은 술 냄새를 풍긴 죄로 요직인 승지 벼슬이 떨어진 것이다. 영조는 한익모(韓益謨)에게 물었다. “민간에서 술로 발생하는 화(禍)가 자못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않은가?” 이에 한익모는 “성상의 하문(下問)이 이에 미치시니, 백성들에게 다행스런 일입니다. 국가에서는 다만 사전(祀典)에 술을 사용하나, 민간의 경우 대수롭지 않은 잔치에도 모두 술에 빠져 크게 술을 빚는 일이 서로 잇따르고, 곳곳에 주정하는 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영조는 형조(刑曹)로 하여금 술을 많이 빚은 자에게 장형을 가하게 했다. 또 주등(酒燈)을 켜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끝내 주등 켜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주등이다. 이것은 당시 술집을 알리는 징표였다. 요즘으로 치면 술집의 네온사인이다. 주등 운운은 곧 시정에 술집이 다시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영조는 죽을 때까지 술과의 전쟁을 벌였지만, 당시의 조선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술을 마시려 했다. 단속이 심해질수록 알코올을 목숨과 바꾸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결국 영조의 ‘술 없는 나라 만들기’는 미완의 성공에 그친 셈이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했다. 정조는 정반대의 정책을 폈다. 술꾼들에게는 복음이었다. ‘정조실록’ 6년 5월26일조에 금주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좌의정 홍낙성(洪樂性)은 “곡식이 허비되는 것이 술에 있으니, 술을 많이 빚는 것을 금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정조는 곡식을 줄이는 효험도 보지 못하고 백성들만 고생시킨다는 이유로 금주령의 발동을 거부했다. 정조는 영조 시절의 가혹한 금주령이 백성들을 괴롭히기만 하고 사실상의 효과가 없었음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의 관대한 정책으로 술의 소비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정조실록’ 6년 6월2일 첨지중추부사 정술조(鄭述祚)의 상소를 보자. “팔도에서 술을 빚는 데 허비되는 것을 통틀어 계산하여 보면 이를 백성의 식량에 견줄 경우 삼사 분의 일은 될 것 같습니다만, 서울을 가지고 말하여 보건대 의당 반의 숫자에 해당될 것입니다. 방금 만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어 낟알 하나가 금(金) 같은 때를 당하여 어떻게 함부로 무익한 곳에다 곡식을 허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대소의 제사와 장례에 필요한 것 외에 몰래 술을 많이 빚어서 여러 점포에서 판매하는 부류들은 일체 아울러 엄금하면 거의 폐단을 구제하는 데 일조가 되겠습니다.” ‘술을 많이 빚어 여러 점포에 판매하는 부류’가 출현했으니, 이것은 시정에 다수의 주점이 성업중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정조가 전혀 주금책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정조실록’에도 정조의 금주령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의 한시적인 금주령으로 돌아가 있었고, 더욱이 금주령을 범했다 해서 목숨이 떨어지거나 귀양을 가는 일은 없었다.
술값으로 가산탕진 속출
술집은 이내 시정에 범람하게 되었다. 정조실록 14년 4월26일조 대사간 홍병성(洪秉聖)의 상소문에 구체적 내용이 나온다. “국가를 다스리는 계책은 재정을 넉넉히 하는 것보다 앞설 것이 없는데, 식량을 낭비하는 것으로 술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근래 도성 안에 큰 술집이 골목에 차고 작은 술집이 처마를 잇대어 온 나라가 미친 듯이 오로지 술 마시는 것만 일삼고 있습니다. 이는 풍교(風敎)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실로 하늘이 만들어준 물건을 그대로 삼켜버리는 구멍이 되고 있습니다. 마땅히 너무 심한 것은 제거할 생각을 하여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나라의 금령을 알게 한다면 몇 달 안에 5부 안에서 몇 만 섬의 곡식을 얻어내게 될 것입니다. 이 어찌 작은 보탬이겠습니까.” 서울 시내에 큰 술집이 골목에 차고 작은 술집이 처마를 잇대었다고 한다. 술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술을 금지한다면 몇 달 안에 몇 만 섬의 곡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에서 술 소비량이 급증하고 있음을 알 만하다. 그러나 정조는 “술로 곡식을 낭비하는 것이 비록 폐단이 되지만, 어떻게 온 나라가 술을 마시는 데까지야 이르렀겠는가”라고 말하고, 홍병성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정조 이후 시정에 술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순조실록’ 3년 8월에도 사간 이동식(李東埴)은 “서울의 쌀은 모두 술을 만드는 집에 들어가고, 저자의 어육(魚肉)은 죄다 술집에 돌아가니, 근래에 물가가 오르고 백성들의 생활이 고생스러운 것은 주로 이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고종 때까지 금주령이 수시로 발동됐지만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순조실록’ 32년 윤9월17일에는 금주령을 어겼을 경우, 형조에서 처벌하는 상세한 규칙을 만들었지만 실효는 없었다. 영조 이후 한번 금주령이 완화되고부터는 다시는 이를 다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술집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져갔다. 다음은 정조가 신임했던 채제공(蔡濟恭)의 말이다. “비록 수십 년 전의 일을 말하더라도, 매주가(賣酒家)의 술안주는 김치와 자반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백성의 습속이 점차 교묘해지면서, 신기한 술 이름을 내기에 힘써 현방(懸房)의 쇠고기나 시전(市廛)의 생선을 따질 것도 없이 태반이 술안주로 들어갑니다. 진수성찬과 맛있는 탕(妙湯)이 술단지 사이에 어지러이 널려 있으니, 시정의 연소한 사람들이 그리 술을 좋아하지 않아도 오로지 안주를 탐하느라 삼삼오오 어울려 술을 사서 마십니다. 이 때문에 빚을 지고 신세를 망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시전의 찬물(饌物) 값이 날이 갈수록 뛰어오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일성록’ 18 서울대 도서관 1990년 544-545면). 이 희귀한 자료는 정조대의 술집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채제공은 1720년에 태어났다. 이 자료의 연대가 정조 16년(1792) 9월5일이니, 그의 생애의 전반기는 영조 시대에 걸친다. 금주령이 삼엄했던 시절의 술집 안주란 사실 김치와 자반 같은 보잘것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 이후 금주령이 완화되고 술집이 본격적으로 발달하자, 술의 종목과 안주가 크게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로운 술의 개발을 경쟁하고, 안주로 쇠고기, 생선 등 당시로선 고급 음식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술보다는 안주에 혹하여 파산하는 자가 있다 했으니, 술집의 영업은 날로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엔 목로주점 대유행 시정의 술집이 발달하면서 점차 그 종류도 다양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연구된 것이 없다. 하기야 누가 이런 이상한 주제에 관심을 갖겠는가? 그나마 내용이 가장 충실한 자료는 김화진의 ‘옛날의 음식점’이다. 여기서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까지 서울 안에 음식점은 목로술집·내외(內外)술집·사발막걸리집·모주(母酒)집이 전부이고, 이채를 띠고 여자가 조흥(助興)하는 술집은 색주가(色酒家)뿐이었다”고 말했다. 일단 김화진의 증언에 등장하는 술집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목로주점은 서서 술을 마시는 선술집이다. 내외주점은 “(양반으로) 행세하던 집 노과부가 생계에 쪼들려 건넌방이나 뒷방을 치우고 넌지시 파는 술집”(이서구, ‘주막, 서민의 바아’ ‘세시기’, 배영사, 1969)이다. 색주가는 여자가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는 술집이다. 색주가에선 매매춘도 벌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발막걸리집’이란 사발막걸리를 파는 목로라는 것이 국어사전의 정의다. 사발막걸리는 사발 단위로 값을 정해서 판매하는 막걸리다. 사발막거리집은 목로주점의 형태이긴 한데, 막걸리만 팔고 안주로는 간단한 조리 음식만 판매하는 저렴한 간이주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주집은 모주를 파는 술집이다. 모주란 ‘술찌기를 거른 것’이다. “빈한한 자와 노동자의 양식이며, 추운 새벽과 해질녘에 일등 가는 요리”(李用基, ‘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永昌書館, 1926, 56면)였다. 이것은 주로 술찌기를 다시 걸러 비지에 무청, 김치 따위를 넣어 끓인 전골을 안주로 하여 먹는 노동자의 술이었던 것이다. 김화진이 ‘옛날의 음식점’을 집필한 연대는 1967년이다. 따라서 70년 전이라고 하는 것은 김화진이 태어난 1895년이다. 즉 그의 증언은 구한말의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구한말에 이 다섯 가지 술집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형태의 술집이 언제부터 생겨났느냐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술집 중에서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문헌에서 확인되는 술집은 목로주점과 색주가뿐이다. 신윤복의 풍속화에 목로주점이 등장한다. 유만공(柳晩恭)의 ‘세시풍요(歲時風謠)’(19세기의 저작이다)에는 “젊은 계집이 있는 술집을 색주가(色酒家)라 한다”는 말이 있다. 색주가는 적어도 19세기에는 확실히 존재했으며 더 소급해 18세기 후반경에 생긴 것으로 보아도 상관이 없을 듯하다. 이는 정조 때를 말하는 것인데, 그 이전 영조 때 강력한 금주령이 시행됐음을 고려했을 때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영조 이전 상황은 알 수가 없다. 내외주점과 사발막걸리집, 모주집의 기원은 미상이다. 이서구의 ‘주막, 서민의 바아’는 내외주점의 출현 시기를 개화기로 잡고 있는데, 이서구의 이 글 자체에 오류가 많아 미심쩍기는 하지만, ‘황성신문’ 등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나온 신문에서도 처음으로 내외주점이란 단어가 보인다. 아마도 그 문헌적 증거의 상한선은 19세기 말이 될 것이다.
폭음문화 경고한 연암 박지원 술집에 대해 실학자 등 당대 사상가들은 날카로운 비평을 했다.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술집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흥미롭다. 박지원은 1780년 7월10일 중국 성경(盛京)에 도착하여 그곳의 주루(酒樓)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중국 술집의 큰 규모와 화려함과 운치에 충격을 받는다. 문득 서울의 술집이 생각난다. 그는 서울의 술집을 이렇게 쓴다. “우리나라 사람이 술 마시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독하고, 이른바 술집이란 것은 모두 항아리 입 같은 창에 새끼줄로 만든 문지도리가 있다. 길 왼편의 작은 각문(角門)에 새끼줄 발을 드리우고, 쳇바퀴로 등롱(燈籠)을 만든 것은 틀림없는 술집이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흔히 말하는 푸른 깃발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술집 등마루에 꽂힌 깃발 장대를 도무지 본 적이 없다.” 조선의 술집은 항아리 입구처럼 생긴 들창에 새끼로 지도리를 만든 문이 있고, 길 옆 작은 각문에 새끼로 발을 늘이고 쳇바퀴로 등롱을 만들어 달아 술집임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영조 말년 실록에 나왔던 주등이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시인들의 시에 나타나는 술집의 깃발은 시의 관습적 표현이지 실제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화려하고 거창하고 청결한 술집을 본 연암에게 조선의 술집이란 것이 눈에 찰 리가 없었던 것 같다. 중국의 명사와 벼슬아치들은 기생집과 술집에 출입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중국의 술집은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퇴근길에 들르는 곳이요, 명사들이 몰려들어 술 취한 김에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곳이었다. 조선의 술집 문화는 어떠했을까. “술 마시는 양만은 너무나 커서 큰 사발에 철철 따라 이맛살을 찌푸리며 들이켠다. 이는 무작정 술을 쏟아 붓는 것이지 마시는 것이 아니고, 배를 불리려는 것이지 흥취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래서 마셨다 하면 취하고, 취했다 하면 술 주정이고, 술 주정을 했다 하면 싸움질이고, 싸움을 벌였다 하면 술집의 술항아리며 술잔을 죄다 걷어차 깨어버린다. 이른바 풍류를 즐기는 문아(文雅)한 모임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런 풍류와 문아한 술자리는 되레 술 배를 불리는 데 무익하다고 비웃는다. 이런 술집(골동품과 화초로 장식된 중국 술집)을 우리나라에 옮겨온다 해도, 하루 저녁을 못 넘기고 그 골동품은 부서지고 화초는 꺾이고 밟힐 것이니 이것이 가장 애석한 일이리라.” 연암의 시각에선 술집에서 고상한 풍치는커녕 술을 뱃속에 쏟아 붓고, 주정을 하고 싸움을 벌이고 급기야 술집을 마구 부수는 것이 조선 말 술집의 풍경이었던 모양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다. 그러나 개혁가들이 언제나 현실을 어둡게 묘사하듯, 열렬한 개혁주의자 박지원은 역시 화려 무비한 중국을 보았기 때문인지 조선의 것들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금속화폐 발달로 술집 번창 한편으로는 17세기 말에 이미 조선의 대표적 지성인이 국민들의 ‘폭음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이 관심을 끌기도 한다. 요즘 한국사회에도 ‘폭탄주 문화’가 만연해 있는 것과 관련지어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17세기 말에도 폭음은 문화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200년이 지났어도 한국인의 폭음 습성이 별반 달라지지 않은 점은 아쉬움을 주는 대목이다 숙종조에 모습을 보인 시정의 술집은 영조 치세의 혹독한 금주령에 의해 일시 위축되다가 18세기 후반 정조 때에 와서 번성하게 된다. 술집 문화가 발달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발전에 있을 것이다. 자급자족 경제 체제에서는 주점의 호황을 기대할 수 없다. 또 술을 사서 마신다는 것은 금속화폐의 발달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18세기는 조선시대 경제적 융성기였다. 화폐가 본격적으로 사용됐고 대동법과 균역법의 전면적인 시행으로 도시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농업 분야에서도 기술적 진보로 인한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다.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일부 계층에 생활의 여유를 가져오게 했고 급기야 시정의 술집타운까지 출현케 했던 것이다. (끝)
출처;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3/04/28/200304280500025/200304280500025_9.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