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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받은 사람
시편 1 : 1 - 6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갈라디아서 강해를 무사히 끝내고 오늘부터 구약에서 시편을 강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시편강해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시고 또 많이 참석하셔서 은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듣는 대로 우리 교회에 처음으로 인도하시는 분들의 대부분이 삼일 기도회 시간에 먼저 모시고 나오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예배당에 처음 나오시는 분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강해하려고 애씁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건전한 신앙 생활은 말씀을 따라 사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좋아합니다. 가령 우리 한국 사람들의 경우 복을 무던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대문에도 ‘복’자를 써 붙입니다. 입춘이 되면 “입춘대길, 시시개문 만복래(立春大吉, 時時開門 萬福來)”라고 써서 붙입니다. 처녀들이 시집갈 때 보면 이불에도 복, 베개에도 복, 방석에도 복, 옷장에도 복, 저고리에도 복, 치맛자락에도 복, 숟가락에도 복, 젓가락에도 복, 밥그릇에도 복, 국그릇에도 복, 어디에나 복자를 써 가지고 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복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요사이 어떤 데서는 집회를 하는데 ‘축복 성회’라고 크게 써서 내걸고 하는 것들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정말 축복을 받기 원하면 오늘 이 시편을 잘 읽고 배우고 그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축복이란 최고의 행복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오복(五福)을 말하는데 그것은 수(壽), 부(富), 강(康), 덕(德), 호종명(好綜命)의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오복은 참된 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의 평범한 인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 있는 사람도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일은 다 당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저 분간하고 알아보기 위해서 그 얼굴이 다르게 만드셨지 그 외의 것은 모두가 비슷합니다.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인간의 심령 뿐입니다. 축복 받은 사람도 똑같은 인간입니다. 축복 받은 사람도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을 겪어야 하며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질병에 시달려야만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고통을 당하지 않거나, 실패하지 않거나, 질병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축복 받은 사람도 역시 약한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도 자칫하면 시험에 빠지고 죄에 물들기 쉽습니다. 세상에 약점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축복 받은 사람도 보통의 인간입니다.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큰 축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다.
오늘 본문은 복 있는 사람의 생활을 처음에 언급했습니다. 먼저 소극적인 방면으로 복 있는 사람의 생활에서 피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피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피한다는 말은 너무 소극적인 생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지마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피해야 할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시험에 장사 없습니다. 낚시질을 해 보면 미끼 옆에서 뱅뱅 도는 고기는 얼마 안 있어 낚시에 걸리고 맙니다. 위험한 곳은 피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시험 당할 기회를 갖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한 마디로 말해 축복 받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불경건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피해야 합니다. 숯을 가까이하면 나도 모르는 동안에 숯가루가 몸에 묻습니다. 먼지 구덩이에 들어가면 자연히 먼지가 묻을 것 아닙니까?
물론 불경건한 사람들이란 부정한 생활을 하는 저속한 사람들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의미하는 것은 그보다도 깊은 뜻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훌륭하고, 존경받고, 인정을 받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불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축복 받은 사람들이 이것을 피하고 있습니다. 왜요? 우리 인간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하여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경건한 사람과 불경건한 사람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축복 받은 사람은 세상의 유행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데 그 마음을 씁니다. 그러므로 축복 받은 사람의 관심은 언제나 어떻게 하면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여 불경건한 사람들의 음모를 피하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 받은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했습니다. 죄인들은 쾌락을 위해 생활합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은 세상적인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것은 그들의 구미에 결코 새로운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족의 근원을 세상에서 찾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미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만족의 원천을 세상에서, 죄악된 길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기에 만족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읽어보면 우리가 잘 아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일행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다가 점심 때가 되자 예수님은 우물가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은 점심을 준비하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어떤 미모의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물을 좀 줄 수 없느냐?” 이때 이 여인이 물 좀 달라는 사람을 보니 유대인이란 말이요. “아니 보아하니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해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이 때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하는 말이 “당신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습니다. 당신은 야곱보다 더 큽니까?”
예수님은 “이 물을 먹은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대 여자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얼른 들을 대 엉뚱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왜요? 이 여인은 죄인의 길을 걷고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자가 하는 말이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른 대답하시는 말씀이“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다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때 이 여자가 예수님 앞에 고꾸라져 회개하고 죄인의 길에서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찾던 것 세상을 완전히 떠나게 된 것입니다.
주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합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욕됨을 들었을 때 그들은 의분을 금치 못합니다. 전에 다윗같은 소년은 그 나이 비록 어리고 전쟁의 경함이 없었지마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덤벼드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볼 때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를 쳐 물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축복 받은 사람은 어디서 즐거움을 얻습니까?
축복 받은 사람의 즐거움은 주님의 율법 안에 있습니다. 사람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공허한 상태로 놓여 있지 아니합니다.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면 그 마음은 허탈감에 절망적인 것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악이 떠나면 선이 차지하고, 선이 쫓겨나면 반드시 악이 차지하는 법입니다. 물은 쉴 새 없이 흐르지 아니하면 곧 썩어 냄새가 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말 가치 있는 것, 기뻐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간 수간 참된 즐거움이 없을 때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의 원천은 세상이나 육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37편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축복 받은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요한1서 5장 2-3절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즐거워하는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신랑으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신부로 비유했습니다.
어떤 신부가 신랑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이고 바쁜데 일이나 다 끝내고 한가할 때 읽어야지!” 그럽니까? 언제, 어디서나, 틈나는 대로 그저 읽고 또 읽습니다. 왜요? 사랑하는 남편에게서 온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편지를 읽은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만일에 즐겁지 않다면 이거 큰 병난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글을 읽으니까, 젊은 부인이 그 동안 사우디에 가서 돈 벌려고 고생하며 돈 보내고 편지 보내는데 그 동안 다른 남자와 좋아 지내게 되었어요. 매달 오는 돈을 받아쓰면서도 편지가 와도 읽을 흥미도 없고 다른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어요. 이것을 시집 식구들이 눈치채고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오고 말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성경 말씀을 얼마나 즐거워하며 읽습니까? 세상에 한 눈팔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을 하나님 사랑하는 일에 대한 자기 진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인 말씀을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별로 흥미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하나님의 율법, 이 말씀을 즐거워하는 이유 여섯 가지를 쓴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이 율법은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위 골동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오래된 가구, 오래된 그릇, 오래된 책, 오래된 동전, 오래된 것일수록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좋아합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우리 나라 이조 백자 접시 하나가 8억6천만원에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성경만큼 오래된 책도 없습니다. 성경은 오래된 책이면서도 생명력이 있어서 언제나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이 율법이 공평하기 때문에 기쁨을 누립니다.
여기에 기록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까? 계급도 차별도 없을 것입니다. 이 율법은 절대적인 양심입니다. 사람의 양심은 경우에 따라서 달라지고 왜곡되고 마비될 수 있지만 이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셋째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를 줍니다.
다른 말로 이 말씀은 지혜의 책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삶의 지혜에 대한 최고봉을 발견하게 되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정치가는 정치를 바로 하며, 예술가는 영감을 얻으며, 과학자는 우주의 신비를 체험하며, 가정에서는 행복의 비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넷째로, 이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 즐거움을 갖습니다.
소설은 취향에 따라 읽을 수도 있고 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이 말씀은 믿을 수 있고 여기서 기쁨을 얻습니다.
다섯째로, 이 말씀 자체에 맛이 있기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성경은 꿀과 꿀송이보다 더 맛이 있습니다. 성경에 맛을 들이면 이것 이상 맛이 있는 책이 없습니다. 세상의 다른 책은 한두 번 읽으면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한 번 읽었을 때 보다 열 번 읽을 때 더 맛이 납니다. 이것은 경험이기 때문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여섯째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을 읽는 사람이 많은 이유를 아십니까? 인간에게 그 어느 책보다 가장 유익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 책에서 얼마나 기쁨을 맛보십니까? 이 책을 기쁨으로 읽습니까? 만일에 그저 의무적으로 읽는다면 이 말씀의 핵심을 놓쳐 버리고 말 것이고 거기서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축복 받은 사람은 무엇에 시간을 보냅니까? 오늘 본문에 “복 있는 사람은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했습니다. 읽는 것은 소가 풀을 뜯어먹는 것과 같고, 묵상은 말씀을 새김질하며 소화시키고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깊이 묵상하며 소화시켜야 합니다 먹기는 먹었는데 그것을 소화시키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젖어 있게 되고 어떤 시험이 우리에게 닥쳐도 말씀의 검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할 때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하면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검과 같이 차고 다녀야 합니다. 언제 마귀가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서 도전한다고 하여도 당장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말씀의 칼로 마귀의 도전을 소멸해야 합니다.
혹 어떤 사람이 마귀가 도전하는데 “집에 가서 말씀의 칼을 가지고 와야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싸움은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서 내가 간수하고 있다가 언제라도 그 말씀의 검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고보 1장 22절 이하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저 자신을 보고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묵상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 율법을 지키는 사람,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이 사람은 우선 삶에 대한 축복을 받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나무에다 비교하였습니다. 축복 받는 사람은 말라 죽어 가는 나무가 아니라 생기가 넘치는 싱싱한 나무입니다. 시냇가에 뿌리를 박은 나무와 같습니다. 삶의 근거가 생명수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그 안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입니다.
요한복음에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하였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가뭄이 드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자주 비나 눈이 오기 때문에 들에도 산에도 어디에나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매우 건조한 땅입니다. 가을이나 봄에 한 번 비가 온 다음에는 일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 곳입니다. 더구나 더운 지방이기 때문에 선인장 같은 것 외에는 잘 자라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요단 강가에만은 나무가 사철 푸르게 자라고 있습니다. 강물 줄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삶의 근거를 두고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 좀 잘되면 좋아하고 교만해지지만 조금만 어려워지면 죽는다 산다 하면서 야단합니다. 날씨에 따라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삶의 근거를 두고 있는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합니다. 그 행사가 형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축복 받은 사람은 그 마음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시냇가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견고하게 서 있어서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반면에 세상의 악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바람이 없을 때는 무엇이 좀 있는 것 같다가도 바람이 불면 다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 그리스도인은 그 소망이 영원합니다. 그 기쁨이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계속 성장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위로 자라고, 옆으로 퍼지고, 가지를 뻗습니다.
시편 92편에도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전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정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합니다.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잎이 마르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 인간의 겉모양은 후패해 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형상을 닮아 어린 감람나무처럼 그리고 궁궐에 심겨진 나무처럼 아름다울 것입니다.
더구나 복 있는 사람은 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 이 말은 무슨 일이든지 내 마음대로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말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는 사랑인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어려운 일, 억울한 일, 고생스러운 일이 많았습니까? 그러나 결국에는 선한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다.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까를 아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늘 햇빛 뿐이면 사막을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끔 비도 주시고 눈도 내리십니다. 햇빛이 쪼이는 아름다운 날도, 구름 낀 어두운 날도 복 있는 사람은 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내맡깁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선히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이라야 복이 있습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오늘 말씀처럼 축복된 사람의 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의인의 길 악인의 길
성경 본문 : 시편 1: 1~6(6절) / 찬송 434장-나의 갈 길 다 가도록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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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묵상하며 : 의인의 길 악인의 길(1:1-6)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은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겐 두 가지 인생길이 있습니다. 중간지대의 길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놓인 두 가지 인생길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의인의 길로 가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복을 가진 사람의 신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의 길을 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의인의 길을 가는 사람은 소극적으로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때마다 과실을 맺는 것처럼 모든 일들이 형통케 된다고 말씀해줍니다. 의인의 길에도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의 꾀에 유혹을 받기 쉽고, 죄인의 길이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고, 오만한 자의 자리가 더 높고 화려하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을 이기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힘과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날마다 묵상하는 생활에서 옵니다. 이것이 의인의 길로 가는 핵심입니다. 우리가 큐티 생활을 성실히 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인의 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큐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기 위해 마음속에 되새기며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형통한 삶,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원하신다면 큐티 생활에 충실하시길 바랍니다. 의인의 길은 큐티 생활에서 결정됩니다.
악인의 길에서 돌아 서십시오.
의인 필승(必勝), 악인 필망(必亡)이 분명하지만 악인의 길에서 돌아서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그 이유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은 겉으로 보면, 쉽게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구별은 구체적인 열매를 맺었을 때 드러나게 됩니다. 악인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꾀를 추구하고, 도덕적 기준이 자기중심적이거나 세상 중심적이며, 하나님과 의인을 무시하고 안하무인격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로 그는 바람에 나는 겨(쭉정이)와 같으며,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의 회중에 들어올 수 없으며,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길이 망하게 된다면 누구나 그 길을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필히 망하게 된 길인데도 그 길을 모른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혹 우리의 삶이 자기의 꾀를 따르며,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기반도 없고 내용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당장에 돌이켜서 의인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의인의 길을 적극적으로 가지 않은 것도 악인의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악인의 길을 알았다면 속히 돌이켜서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일용할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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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 유태영 박사의 형통
유태영 박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들은 형편 때문에 교육시킬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유 박사는 어릴 때 동네 사람들로부터 똑똑하다는 인정을 받아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5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는 교회학교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는 중학교를 다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통신중학교를 다녔으며 그 후에 서울로 올라와서 낮에는 구두닦기를 하면서 저녁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녀 졸업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굶어 보았으며 남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한강이 얼어 붙은
추운 겨울에는 냉방에서 내의도 없이 있어야 했는데 너무 추워 잠을 못 자고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새벽에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햇볕이 나면 교회 담 밑에서 몸을 녹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의지하자 비록 과정은 힘들었지만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미국, 이스라엘, 덴마크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 박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꿈을 가지고 기도에 힘쓴 것이 형통의 비결이었다고 말합니다.
출처 : 한태환 목사 예화집*************************************************************************************************
질문하며 적용하며
1.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1, 2절), 그의 삶의 결과가 어떠합니까(3절)?
2. 악인은 어떻게 되며(4, 5절),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은 어떻게 됩니까(6절)?
3.의인의 길에서 당신이 주의해야 할 것과 힘써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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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며 간구하며
주님,
오늘도 복 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시편기자의 고백대로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이 되게 하시고,
말씀의 지배를 받아
말씀에 이끌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그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이,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맺어가는 열매가 있게 하시고,
성실한 자에게 더하시는
형통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쭉정이 같은 인생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악인의 삶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항상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복 있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상한 맘, 찢긴 가슴 안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이 절망과 좌절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병든 이들의 마음을 끌어 안으셨던
그 손길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셔서 다시 일어서게 하옵소서
주님,
오늘도
주님의 사랑안에서 감격의 감사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카페에서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