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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 역사박물관(이동희 관장) 기획전시실 3층,
하회동 탈박물관(김동표 관장) 교류특별전.
중요무형문화재 2호,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 #5. 상좌탈.
탈은 얼굴을 감추거나 다르게 꾸미기 위하여 나무, 종이, 흙 따위로 만들어 얼굴에 쓰는 것을
말한다. 원시시대 이래 만들어져 왔던 탈에는 제사를 지내고 악귀를 쫓는 신앙적(信仰的)
탈과, 춤과 놀이에 쓰이는 연희적(演戱的)[예능적] 탈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탈은 부산 동삼동(東三洞) 패총(貝塚)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조개 탈’이라고 할 수 있다. 문헌으로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대면(大面)’이란 시가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대면(大面)=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중 하나.“누런 금빛
탈을 썼다 바로 그 사람/ 방울 채를 손에 쥐고 귀신을 쫓네/ 자진모리 느린 가락 한바탕 춤은
/ 너울너울 봉황새가 날아드는 듯”]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탈놀음은 조선후기 피지배층들이 즐겼던 놀이이다.
양반의 부도덕성과 무능함, 승려의 타락상, 첩(妾) 제도의 비극을 풍자(諷刺)하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하층민들이 탈놀음을 통해 신분제하에서 억눌린 한을 씻어버리고
새 삶의 활력소를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탈춤이라는 말은 황해도 지방의 탈놀이에만 쓰는 명칭으로, 지역에 따라
부르는 놀이이름이 다르다. 경남에서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쪽에서는 ‘오광대’, 동쪽에서는
‘들놀음’ 또는 ‘야류(野流, 野遊)’라고 부른다. 오광대는 다섯 광대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야류는 ‘들놀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경기 일원에서는 ‘산대놀이’라고 한다. 전라도와 충청도는 탈놀이가 발전하지 않았다.
보통 탈놀음은 서로 다른 이야기 몇 개로 구성되는데, 5~8개 마당에, 20~30개 정도의 탈을
사용한다. 놀이시기는 영남은 정월대보름, 중부 이북은 단옷날로, 밤에 마을 너른 마당에서
성인 남성들이 즐겼다.
오광대와 야류 발생지는 낙동강 상류의 초계(草溪) 밤마리[지금의 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로 전한다. 밤마리 큰 장터에서 대광대[竹廣大]패가 여러 공연과 함께 탈놀음을
하였으며, 이 탈놀이가 경남의 각 지방에 퍼져나가 오광대놀이와 들놀음이 되었다.
산대놀이와 해서탈춤의 탈이 인간적이라면 오광대와 야류 탈은 주술적(呪術的)이며, 선이
굵고 투박하여 단순하면서도 풍자성(諷刺性)이 강하다. 특히 말뚝이놀이로 인식될 정도로
말뚝이의 비중이 크다. 말뚝이탈의 큰 크기와 과장된 이목구비는 양반의 하인으로서 말뚝이
가 가지는 기존체제에 대한 불만과 반항을 드러낸다. 탈의 재료는 주로 바가지와 종이이다.
야류는 경남 해안지방에서 벌이던 탈놀이로 현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동래·수영 야류가
전한다. 야류 들놀음은 탈놀이 이외에도 산신제, 지신밟기 등 다른 야외놀이까지 통칭(統稱)
한다.
산대놀이는 경기일원의 탈놀음을 말한다. 산대는 산의 형상을 본떠 만든 무대이다. 17세기 말
궁정의 공연문화가 쇠퇴하고 한양을 중심으로 전문 놀이패인 본산대놀이가 등장하였으나
전해지지 않고, 그 영향을 받은 양주별산대와 송파산대놀이만이 전한다. 별산대는 본산대와
구분해 붙인 명칭이다.
산대놀이 탈은 인물묘사가 다른 지역의 탈에 비해 사실적이고 아기자기한 손질이 많이
가해져 기교적인 느낌을 준다. 춤사위는 부드럽고 우아하며 섬세한 중부지방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양주별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2호]는 경기도 양주군 유양리에 전승되고 있다.
다른 탈놀이에 비해 사실성이 강한데, 탈도 모습이 사실적이어서 과장이 심한 봉산탈춤 탈과
비교 된다. 노래와 춤을 사용하지 않는 연극적 요소만 갖추고 있으며, 대사는 주로 서민들의
일상어로 사용한다. 양반을 잘 아는 말뚝이와, 양반을 처음 만나는 쇠뚝이를 등장시켜
관객들로 하여금 양반의 실상을 파악하게 해준다.
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49호]는 한강 송파나루의 큰 시장 송파장에서 열렸다. 명절과
장날이 되면 송파장 상인들이 돈을 걷어 펼쳐졌는데 이는 상업적 번성을 위해서였다. 장터에
낮에는 줄타기, 씨름, 소리판이 벌어지다가 저녁이 되면 모닥불을 밝히고 산대놀이춤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탈을 만드는 기법을 말하자면, 재료는 가벼워야 탈춤을 추거나 연기를 할 때 편하다. 주로
나무, 종이, 바가지, 소쿠리, 털가죽 등의 재료로 만들어진다. 바가지나 소쿠리에 눈과 입을
도려내고 눈썹과 코, 입술은 노끈·새끼·털가죽 등으로 덧붙인다. 또는 이 위에 젖은 종이를
여려 차례 붙여 올리거나 종이죽을 찰흙처럼 만든 다음 빚어 만들기도 한다. 나무 탈은
오동나무와 오리나무 등을 이용해 조각하는데 수염 외에는 덧붙이지 않는다.
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는 서울·경기
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 놀이이다. 이 놀이는 조선시대 양주목사가 군행정을 집행하던 양주구읍(楊州舊邑)에서
약 200년 전부터 놀아오던 명절놀이였다. 사월초파일, 단오, 추석 등 크고 작은 명절과 비가
오길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 행사 때에 공연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양주고을 사람들이 한양의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놀다가 그들이
지방공연 관계로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아지자 고을 사람들이 직접 탈을 만들어 놀기 시작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놀이는 전체 8과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놀이를 시작하기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진하는 길놀이와 관중의 무사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놀이에는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 하인 및 늙고 젊은 서민들이 등장하여 현실을
풍자하고 민중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등장배역은 모두 32명이지만 탈은 함께 사용하는 것이
있어 보통 22개가 활용된다. 지금은 본산대(本山臺)라고 불리던 녹번, 아현, 사직골 등지의
산대놀이가 전하지 않으므로, 본산대를 본받아 만들었다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본산대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놀이터는 전에는 마을 북서쪽 불곡산(佛谷山) 아래의 사직골이었고, 나중에는 마을 뒷산 송림
속의 잔디밭에서 놀았으나 최근에는 향교 바깥마당에서 놀거나 마을 뒤에 새로 지은 전수
교육관 앞마당에서 먼저 길놀이에 이어 고사를 지내고, 제1과장은 개장 의식무인 상좌춤이,
제2과장은 옴중과 상좌놀이, 제3과장은 목중과 옴중놀이, 제4과장은 천령(天靈)과 지령
(地靈)을 나타낸다는 연잎과 눈끔쩍이가 나와 거드름춤을 추고, 제5과장과 제6과장은 파계승
놀이이다. 제5과장 팔목중은 제1경(景)이 팔목중들의 염불놀이이고, 제2경은 침놀이, 제3경은
애사당북놀이이다. 제6과장 노장은 제1경이 파계승놀이로 대사 한 마디 없이 노장이 소무와
더불어 파계하는 과정을 춤과 몸짓으로만 보여주는 장면이다. 제2경은 신장수놀이로 신장수가 노장에게 신을 팔고, 돈 받으러 원숭이를 보낸다. 제3경은 취발이놀이로 취발이는 노장의
파계를 꾸짖고, 소무를 빼앗아 사랑놀이 끝에 아이를 갖게 된다. 제7과장 샌님은 양반놀이로
제1경은 의막사령놀이(依幕使令놀이), 제2경은 포도부장놀이로 평민인 젊은 포도부장이 늙은
양반의 소첩을 빼앗는다. 끝으로 서민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
놀이로 이어지고, 신할아비의 박대로 미얄할미가 죽어 지노귀굿을 한다. 상좌춤으로 시작
하여 지노귀굿으로 끝나는 과정은 주술종교(呪術宗敎)적인 의례에서 출발하여 연극으로
옮겨온 가면극의 내력을 말하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봉산탈춤의 대사가 비교적 운문억양을 고집하고 있는데 비하여 양주별산대놀이의 대사는
일상회화조의 대사이다. 옴중과 취발이와 말뚝이 대사가 백미로서, 특히 취발이나 말뚝이
대사는 민중을 대변하는 대사라고 할 수 있어 관중의 흥미를 끌었다.
양주별산대놀이에 등장하는 배역은 모두 32명이지만 겸용하는 가면이 있기 때문에 실제
사용되는 가면수는 보통 22개(상좌 2개, 옴, 목중 4개, 연잎, 눈끔쩍이, 완보, 신주부, 왜장녀,
노장, 소무 2개, 말뚝이, 원숭이, 취발이, 샌님, 포도부장, 신할아비, 미얄할미 등)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중부지방 탈춤을 대표하는 놀이로서 해서지역 탈춤과 함께 한국 가면극 중
연극적인 볼거리가 풍부한 가면극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