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우리가 다 죄인이 되었듯이, 이제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하여 거듭난 자들은 모두 의인이 되었습니다.
(롬 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런데 제가 교회에서 같이 자란 장로교 목사 친구에게 확인을 해 봤는데 ‘이제 우리는 의인이 되었다’라는 말이 아직도 좀 조심스러운 분위기인 것 같았습니다. 이해를 해 보자면 이제는 의인이 되었다면서 아무렇게나 막 사는 사람이 생길까 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데, 사실 그것도 좀 이해는 안 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집단이 있었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수 없듯이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는데도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정죄함이 없으니까,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지 않으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 1절에 분명히 그렇게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신다’고 하면 또 난리가 납니다. 그 말을 죄를 마음껏 지어도 좋다는 뜻으로 이해를 해서 그러지 않나 이해를 해 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마음껏 죄지으란 말이 아님을 분명히 했으니, 이제 죄의 정의와 하나님의 최선의 관계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이전 큐티에서도 설명한 것인데 오늘은 '하나님의 최선을 누리는 삶'과 '거룩함'과의 관계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최선 안에서 사는 법(앤드류 워맥)' 참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 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이 말을 종교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싫어합니다.)
세상과의 관계에서는 내 죄가 내 삶을 제한합니다. (= 이 말을 극단적 은혜 주의자들이 싫어합니다.)
‘죄’란 헬라어로 ‘하마르티아’로,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이라고 이전 큐티에서 말씀드렸는데 여기서 과녁의 정중앙은 하나님의 최선입니다. 그것(하나님의 최선)의 첫 번째 그림은 바로 에덴동산인데,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악을 모른 채 즐거움만 만끽하며 사는 것이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최선이었습니다. 선악과라 하면 선과 악을 아는 거니까 좋게 들리지만 선은 그렇다 치고, 악을 안다고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선과 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만 감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최선이 아닙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면 인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고 괴로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죄(하마르티아-과녁을 빗나가다)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지신 최선'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고 설명 드렸었습니다. 그렇다면 죄를 멀리하는 거룩한 삶은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최선으로 향해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할렐루야!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율법도 아니고 종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선이 내 삶 가운데 풀어져서 나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저 개인적 생각이지만 저는 우리가 거룩한 만큼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은혜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나무의 뿌리라고 생각해 본다면, 뿌리가 깊은 나무는 비바람도 견디고 많은 새가 날아들어도 견딥니다. 그러나 뿌리가 깊지 못하면 약한 바람에도 뽑혀 날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해주셨지만 마귀는 호시탐탐 우리 삶에 사망을 풀어 놓을 기회를 엿봅니다. 그런데 거룩함이 없는 자를 크게 쓰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청문회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은 자리를 넘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탈탈 털립니까? 비슷한 이치로, 거룩함이 없는 자가 높임을 받으면 마귀에게 탈탈 털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차원에서 우리의 거룩함만큼만 우리를 쓰실 수 있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관련된 내용이 '더 큰 은혜, 더 큰 은총'에도 나옵니다.)
이 말은 내가 잘나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크게 쓰시기 원하시지만 마귀에게 공격받지 않을 만큼만 사용하실 수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니까요. 그러나 또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최선을 너무나도 주고 싶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거룩함을 추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 크고 나를 향한 그 사랑이 너무도 크심에 감사하여, 여기 안주하지 말고 그분의 최선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언급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나의 거룩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은 우리의 믿음뿐입니다(히 11:6). 그러나 죄는 하나님의 최선, 그 외의 모든 것이기에 죄를 멀리하는 우리의 거룩함이 결국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최선에 데려다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