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포의 새벽 편지-1347
부모은중경020
동봉
[불설대보부모은중경]
佛說大報父母恩重經
제1편 서분
제1장 기원정사
총지비구 아난다는 이와같이 들었노라
거룩하신 부처님이 사위국의 왕사성중
기원정사 머무실때 삼만팔천 비구들과
여러보살 마하살과 모두함께 하시니라
初序分
第1章 祈園精舍
如是我聞一時佛在舍衛國王舍城祇樹
給孤獨園與大比丘三萬八千人菩薩摩
訶薩衆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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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고 하는
크로체의 선언이 있어서가 아니라
생명의 삶은 언제나 오늘이라는 것이다
'오늘'에는 '올all'이 배어 있다
'오늘' 속에는 '온百'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오늘'은 '온'을에서 가져온 말이다
이 '온'을 '온갖'을 '온갖 것'을에는
일차적으로는 시간성이 들어있으며
덤으로 공간성까지 함께 한다
이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起고 사라滅진 숱한 역사가
배경복사背景輻射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인류의 스승 서가모니 부처님께서
역사적 인물로 이 땅에서 살다가신 것은
되돌아보면 분명 까마득한 옛날이다
올해가 불기 2562년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석존釋尊의 생애 80세를 보탰을 때
2642년이라는 더욱더 장구한 시간이다
우리가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의
살아 꿈틀대는 역사를 바로 이해하려면
내가 2600년 전 그 때로 돌아가서
함께 느끼는 공감각共感覺이어야 한다
공감각synaesthesia이란 게 뭘까
눈眼根이든
귀耳根든
코鼻根든
혀舌根든
피부身根든
의식意根이든
어떤 하나의 감각기관感覺器管이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눈으로 빛이나 생김새는 물론
눈으로 소리를 듣고
눈으로 냄새를 맡고
눈으로 맛을 보고
나아가 눈으로 촉감을 느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은 물론
모습과 냄새와 맛을 느끼고
촉감까지 느낀다고 하는 것이
어려울 듯싶지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이미 우리 불교에서는
보살의 공능과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관세음觀世音'에서다
분명 '보다'라는 동사는 빛이 대상이지
결코 소리가 대상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세음보살은
세상世의 소리音를 관찰觀한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관세음을 공감각으로 바꾸면
보살의 이름이 이처럼 불릴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관례에 따라
으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되고
세상의 소리를 코로서 맡는
후세음보살嗅世音菩薩이 되고
세상의 소리를 혀로 맛보는
미세음보살味世音菩薩이 되고
세상의 소리를 피부로 느끼는
촉세음보살觸世音菩薩이 되고
세상의 소리를 뜻으로 아는
의세음보살意世音菩薩이 되고
소리를 듣는 귀의 기능을 되살려
청세음보살聽世音菩薩이 될 수도 있다
말씀의 종교로 알려진 기독교와는 달리
불교는 들음聞을 중시하는 종교다
아난다가 부처님 말씀을 들어 기억했다가
우리에게 전하는 게 장한 것은 맞다
그렇기 때문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서구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달리
불교는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한다
설하는 종교와 듣는 종교는 다르다
분명 틀린 게 아니고 다르다
틀렸다면 이는 정오正誤의 문제다
올바름과 그르침이란 매우 미묘한 세계다
하나 아무리 아난다가 많이 듣고
이를 후세에 전하는 데 기여했다 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하는
너, 나, 그, 그리고 우리가
빛깔을 보觀지 못하고
소리를 듣聽지 못하고
향기를 맡嗅지 못하고
진리를 맛味보지 못하고
사물을 느끼觸지 못하고
생각을 이해法하지 못한다면 어찌 될까
그러므로 내 자신이 아난다가 되어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감각 현상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때로 필요하다
이 공감각 현상을 열반경에서는 표현한다
이른바 '선타바仙陀婆 이야기'이다
시종이었던 선타바는 영리했다
가령 주인이 "선타바야!" 하고 부르면
주인의 목소리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
때로 양치할 소금을 가져오고
어떤 때는 외출할 말을 대령하였으며
또 어떤 때는 물을 가지고 달려왔다
단지 "선타바야!"란 부름 하나만으로
기수급고독원祈樹給孤獨園에서
첫자와 끝자를 따 '기원祈園'이라 하고
여기에 사찰의 뜻 정사精舍를 붙여
기원정사祈園精舍로 부르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기타祈태자 숲樹이었는데
급고독給孤獨 장자의 동산園이 되었다
절을 짓기 위해 황금을 덮으면서
부동산 명의가 급고독장자에게로 넘어갔고
마침내 거기에 장중한 절精舍을 지었다
그런데 이 기원정사가
사위국舍衛國 왕사성王舍城에 있다
사위국은 이른바 나라 이름이고
왕사성은 수도首都 이름이다
이 사위국 왕사성 도시 중심지로부터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급고독 장자가 기타 태자와 손을 잡고
절을 지어 부처님과 비구들에게 올렸다
부처님은 이 기원정사가 생긴 이래
생애의 많은 시간을 여기서 보내셨다
이 기원정사는 약 1,200명 남짓의
많은 비구들이 생활할 수 있는 큰 절이다
따라서 금강경에서는 비구 1,250명이
이 기원정사에서 생활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부모은중경에서는
함께 하는 비구가 38,000명이란다
상주 대중의 30배에 달하는 인원이다
38,000명이 살아가는 넓은 곳에
1,250명이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겠으나
1,250명이 살기 적당한 시설에
38,000명이 살아가는 것은 으레 무리다
나는 이미 21년 8개월이 훌쩍 지난
1997년 1월 초 인도/네팔을 여행하였다
불교방송 해외성지 순례팀을 인솔하여
부처님의 성지를 두루 탐방했는데
그때 본 기원정사 터는 지금도 생생하다
함께 간 한 부동산학과 교수에게
기원정사에 대해 물었더니
"약 1,500명까지는 수용이 가능하다"며
불교 경전 말씀이 들어맞는다고 했다
서가모니 부처님 재세시 인도 사회와
우리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큰 사원은 대부분이 대학이었다
그러므로 인도 기원정사를 비롯하여
죽림정사 등 대가람이 모두 다 학교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구 38,000명은
기원정사에서 축제를 벌이는 게 아니라면
상수대중으로서는 지나치게 많은 편이다
여기에 보살마하살이 함께 했다 하는데
보살마하살들은 분명 외부인사다
비구 수가 38,000명이라면
타지에서 온 보살대중들도 그에 상응한다
38,000명 비구가 대학정원이라면
보살마하살은 부처님 강의를 들으러 온
그냥 청강생聽講生이었을 수도 있고
신도나 재가불자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묘법연화경을 설한 영취산 기슭보다
평지에 지어진 고층빌딩이니만큼
그래도 이 정도면 슬그머니 넘어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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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블로그-기원정사Jetavana-Vihara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EIcO&articleno=12369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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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니스트 배종훈 선생의 '붓다카노 내리는 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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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2018
종로 대각사 봉환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