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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대한 7가지 공부
예배에 대한 공부(1)요4:19-24
세계적으로 한국교회가 예배드림에 제일 열심히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왜 예배를 드려야 하며, 예배가 또 무엇인가?" 를 생각해 본 사람이 얼마나될까요? 교회에 나오면 의례히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형식이 되고 나의 삶과는 무관한 하나의 종교적 행위 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예배를 왜 드리는가를 알고,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며, 예배를 통해서 나의 인격과 삶이 성숙해 지는 그런 경험 속에서 예배를 드려봅시다.
1. 하나님은 예배 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예배 드리는 사람을 오늘도 찾고 계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요 4:23). 이 말씀은 예배당에 와서 찬송하고 설교 듣는 정도의 사람 보다는 "신령과 진리 "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의 예배는 받아주셨지만 가인의 예배는 받아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만나고대화가 이루어지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는데 (창 1:26) 그것은 당신과 교제하며 대화의 상대 즉 예배드리며 살 수 있게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나라(천국)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찬양과 경배로 가득찬나라입니다(계4-5장) 그 나라는 천지 만물이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돌리고, 네 생물이 아멘으로 화답하며, 24장로들이 면류관을 다시 드리며 업드려 경배합니다. 이 영광스런 하늘의 예배에 우리가 초대 받은 것입니다.
2. 예배에 대한 우리의 관심
한국교회는 기도, 찬송, 헌금 그리고 예배드림에 열심 있는 교회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대하고 긴급하며 가장 영광스런 행동이라고 한 빨트의 말에 의하면 바람직하고 자랑스런 교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배를 드린 만큼 어떤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가 무엇이며 어떻게 드리는 것인지를 모르고 자기 생각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 됩니다.
첫째는 복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무교(shamanism)의 영향이고 또 주일을 거룩히 여기지 않거나모이는데 등한히 여기는 것은 불교의 영향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분명히 복을 받는 길이지만,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성도와의 교제를 이루려는 데 목적이 있는것입니다.
3. 예배는 은총을 깨달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배는 억지로 드리는 것도, 습관적으로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쁨과 감격 속에서 드리20), 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계21-22장)이기도합니다.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우리를 모세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며(출3:12),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베전 1:1)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은 우리를 어떠한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위에 굳게서서(히11:1) 값지고 보람있게 살게 합니다(요 8:31-32)
그런 점에서 예배는 폰 알멘이 주장한 것 같이 "구원의 축제"입니다. 사실 기독교 예배는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심을 축하하며, 그것은 곧 우리의 구원의 축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기쁨 속에서 축제적인 예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 우리는 예배를 위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햐 하는 우선적인 이유는 구원하여 주신 은총에 대한 감격의 표시라고 말했지만 보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예배를 드려야할 이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첫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과 예배하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창1;26).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찾지 않아도 고사를 지내야 하고 또 무엇인가를 섬겨야 하는 것들은 인간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지었다는 증거입니다. 히브리어 " 카할(qahal)"에서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 봉사, 교육, 정의의 실현 등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예배를 드리는데 그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1. 당신은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예배자"라고 생각하십니까?
2. 당신은 복을 받으려고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3. 구원 받은 감격이 당신을 예배드리게 한다고 생각합니까?
4. 교회가 해야할 첫 번째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에 대한 공부(2) ㅡ 예배가 무엇인가?
이사야 6:1-8 지난번 공부에서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 의례히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해 버리지 말고, 하나의 종교적 행위처럼생각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리는가를 알고,기쁨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서 나의 인격과 삶이 성숙해 지는 그런 경험 속에서 예배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열심히 드리고 있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아봅시다.
1.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한국교회가 예배에 열심히 있는 것은 대부분 복을 받으려는 마음에 있지만,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받으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데" 있다고 배웠습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시29:1-2)
예배(Worship)라는 말은 "가치있는" (worth)이라는 말과 추상명사를 만들기 위해거 "말 끝에 붙이는 말"(ship)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께 최선의 가치를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그 가치를 제물로 표현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예배 (제사)는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가 있었는데, 어떤 예배든지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했습니다. 그 제물은 소, 양, 비둘기 였습니다. 그 제물의 결정은 예배의 종류가 아니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재산 정도에 따라서 결정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최선을 다하면 소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양을 드리면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은다는 말입니다. 또 제물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예물을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전한 예배 즉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예배는
첫째: 예배는 흠이 없어야 하고,
둘째; 모든 예배순서 진행에 흠이 없어야하며,
셋째; 찬송과 기도가 항상 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2. 예배의 내영은 하나님과 만남이고 대화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알지 못하거나, 또 예배를 설교를 듣는 것 정도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정해진 시간(주일)에 정해진 장소(예배당)에서 하나 첫째 변화입니다. 두 번째의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기쁨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가는 선교의 역군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속사람이 더욱 거룩해지고 또 하나님의 교회 에 충성스런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없는 예배 드림은 참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3. 예배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드리는 공동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도, 또 하나님의 부름으로 예배당에나오는 것도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집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것도 또한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성령의 도우심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예배는 구원받은 개인의 행위가 아니고 구원받은 공동체인 교회의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끼리의 아름다운 코이노니아가 있어야합니다. 옆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드리는 예배는 좋은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1 지금도 당신은 복 받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2 예배 시간에 하나님 앞에 있음을 늘 느끼고 있습니까?
3 예배를 드림으로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까?
예배에 대한 공부(3) ㅡ 예배순서는 어떤 구조로 되었는가?
고전14:26-33
우리는 왜 예배를 드려야 하고 또 예배가 무엇인가도 알았습니다. 여기서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예배는 "계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예배를 드려야 하고,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의식을 [예배순서]라 합나다. 좋은 예배순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그 하나님과 대화하게 하는 것이고, 아무리 좋은 순서라도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1.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들의 삶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원하심이고, 또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살기를 원하심 입니다.(마22:37-40)둘째는 세상에서 빛되고 소금되어 살기를 원하시며(마5:13-16)증인되어 살기를 원하십니다.(마28:18-20)다시 말하면 자기의 모습을 찾고, 항상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 아 다니는 곳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게 하는 곳이요, 형제간에 불화하고 죽이게 하는 곳이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을 박는 곳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하여도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기가 어렵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가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대화함으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찾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삶의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예배는 <부르시고-만나고-파송한다>는 구조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드리고 있는 "예배순서"는 어떻게 짜여져 있고 또 그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를 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는 "계시에 대한 응답" 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계시의 부분(하나님의 초청, 성경봉독, 설교, 축도)이 있고 또 응답부분 (찬송,기도,헌금)이 있어 베의 씨줄과 날줄처럼 짜여져 예배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배순서는 두 흐름 속에서 크게 세 토막으로 짜여진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살면서 지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만남의 장소로 불러 주시고,
둘째로 부름 받아 나온 당신의 자녀들과 대화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 시키면서 삶에 용기와 소망을 주시며,
셋째로 그렇게 새로워진 당신의 자녀들을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 순서는 [부르시고-만나시고-파송하시는] 세 토막으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배의 순서에도 하나의 언어가 있는 것입니다.
3. 세 토막으로 된 예배순서의 의미
첫째 토막은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시작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묵도로 시작하지 않고 "초청의 말씀"(call to worship)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내용은 출애굽 때에 홍해를 기적으로 건넌 감격으로 백성들이 춤을 추며 찬송을 불렀던 것 같은 그 감격으로 우리에게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이 기쁨에 앞서서, 이사야가 자기의 죄를 깨닫고 "화로다 나여" 하고 참회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던 것 같은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죄의 고백"이라고 합니다.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기쁨으로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개회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첮째 토막입니다.
둘째 토막은 [말씀 속에서 만남]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성경과 설교를 통하여 우리와 대화를 하시고, 우리는 기도와 찬송과 헌금으로 그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으로 책임 있게 살아갈 것을 고백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의 정점은 "성찬"입니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됨을 확인하고, 또 함께 떡과 잔에 참여한 예배자들이 하나 됨을 확인한 것입니다(고전10:17) 다시 말하면 성찬에서 하나님과 우리 또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과의 깊은 코이노이아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셋째 토막은 [세상으로의 파송과 복주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살면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새로워진 사람들에게 사명을 맏기며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여기서 새로워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을 부른 뒤에, "파송의 말씀" 을 듣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과 동행하며 (마 28:20) 능력을 주실 것을 약속하며 보내는데 그것을 "축도" 라고 합니다.
이런 예배순서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예배가 끝난 뒤에 일주일 동안에 항상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느끼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4. 예배순서들의 다양성
예배순서는 2-3시간이 걸리는 "동방정교회" 예배로부터 예배순서가 전혀 없는 "퀘이커교회" 예배까지 다양합니다. 개신교의 예배순서의 틀은 대개 7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성찬을 예배의 중심에 두는 루터교와 성공회,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두는 장로교, 감리교,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 그리고 예배순서 자체를 부인하며 삶을 예배로 보는 퀘이커교가 있고, 한국교회에 예배순서를 전해준 자유교회의 예배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순서는 말씀과 성찬이 균형을 이루는 예배순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와 그 후 약 5백년 동안의 예배순서 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 예배순서는 어떻게 이루어 졌습니까?
3. 개신교 예배의 틀은 몇가지나 있습니까?
예배에 대한 공부(4) ㅡ 예배의 요소(계시부분) 이해
사도행전 2 :37-42
예배가 [계시에 대한 응답]이기에 예배는 두 흐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부분인데 "초청의 말씀- 성경봉독- 설교- 축도"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부분인데 "찬송- 기도-헌금" 입니다. 성찬예식도 계시의 부분이지만 다음 자세히 하기로 하 고 오늘은 계시부분의 [초청의 말씀][성경봉독][설교]에 대해서만 공부하겠습니다.
1. 예배를 시작하는 하나님의 초청 (call to worship)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예배를 시작할 때에 강대상의 종을 치며 "묵도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종을 치는 것이나, 묵도를 하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현상인 것입니다. 예배의 역사를 보나, 외국의 예배 순서를 보나 예배의 시작은 묵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초청"(Call to Worship) 또는 예배의 부름 인 것입니다.
예배를 하나님의 초청으로 시작하는 것은 예배가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 된 것을 말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온 사람들은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더나가서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은 대개 성경 구절을 읽기도 하지만, 교독문처럼 인도자와 회중이 주고 받는 형식도 있으며, 성가대가 노래로 초청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때의 성가대의 노래는 송영이 아니고 초청의 내용에 곡조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2. 말씀선포인 성경봉독 (scriptual Lession)
개신교는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봉독은 설교 하기 위한 예비 작업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 할 것은 성경봉독 그 자체가 설교와 똑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이고 그 그리스도를 말해주는 책이 성경중에 복음서이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복음서] 가 봉독 되었습니다.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안에서 나타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더 분명히 해주기 때문에 [구약]도 읽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기 위하여 사도들의 [서신]을 읽기 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대교회 때부터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어 왔지만, 4세기 경에 이르러 신약을 복음서에서 한 곳, 서신들에서 한 곳을 읽기 시작하여 예배시간에 성경을 세 곳이나 읽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때에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읽기 시작했고 다 읽고 나면 회중은 "아멘" 하며 화답을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Preaching)
설교는 영원한 복음을 현재화 하고, 개인화 하며, 현실화하는 신비라는 설교학의 어려운 설명 보다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쉽게 이해합시다 . 행 10:33에 있는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는 말씀이 설교가 무엇이고 또 우리는 설교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를 알게 해 줍니다.
위에서 말한 성경에서 [주께서 당신 (설교자) 에게 명하신 모든 것]이 설교 입니다. 즉 설교는 설교자가 하고자 하는 말씀이나 교훈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설교자에게 주어서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봉독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 성경구절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그 말씀을 어떻게 알아듣기 쉽게 전할까?"를 기도하며, 또 "어떻게 하면 이 말씀 앞에서 결단할까?" 에 대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또 설교를 듣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옥토가 준비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 10:33에는 설교를 듣는 태도도 가르쳐 주는데, "주께서 설교자에게 주신 그 주님의 말씀" 을 듣기 위하여 지금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는 태도를 취할 때 은혜를 받게 되고 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행 10:44). 고넬료는 "주께서 설교자에게 주신 그 말씀"을 듣는다는 생각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림"(행10:24) 으로 행동으로 보여주었던것입니다.
또 설교를 듣는 태도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성에 가서 전도 할 때에 니느웨 백성이 회개했던 이야기와 , 천사가 찾아 갔지만 듣지 않고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증명을 해 줍니다.
4. 하나님의 이별의 인사인 축도(Benediction)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만나서 우리를 회복시키고,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신 뒤에 다시 세상으로 파송을 하는 것입니다. 축도는 이제 삶의 자리로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주신 작별 인사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우리의 인사와 크게 다른 인사입니다.
세상은 마귀가 제 때가 가까운줄을 알고 두루 삼킬자를 찾아 다니는 곳이지만 그세상에서도 꼭 승리하며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있게 하겠다는 약속의 인사입니다. 모세와(출 3:12) 예레미야(렘1:8) 는 이 말씀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약속 (마28:20)을 이미 해 주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기]
1. 당신은 예배를 드리러 올 때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2.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까?
3.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합니까?
4.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에 하나님의 파송을 확신합니까?
에 대한 공부(5) ㅡ 예배의 요소(응답부분) 이해
예배소서 5:15-21 예배가 [계시에 대한 응답] 이기에 예배의 순서에는 두흐름이 있는데 ,
그 첫번째 계시부분(초청의 말씀/성경봉독/설교/축도/)에 대하여는 지난 시간에 충부히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 이시간은 두 번째의 응답부분인 [기도][찬송][헌금]에 대하여 공부를 하겠습니다.
1. 예배에서의 기도
1) 개인 기도와 공중기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성령안에서 하나님과 내적인 교제를 가지게 될 때에 기도의 형태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릴때의 기도는 내가 하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 시간에 누가 기도를 인도하던지 간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전부가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알고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도하는 사람은 회중이 무엇을 기도하기를 원하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2) 기도의 유형
우리 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에 보통 4번의 기도를 드립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묵도 다음에 [기원]을 합니다. 이것이 이 예배를 성령님이 도우셔서 모두 정성스럽게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수 있게 해달라는 간단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교회는 첫 번에 [죄의 고백]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사6:1-8에 나오는 이사야의 하나님 체험에서 나오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개회기도"라고 하는 장로님들이 인도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개회기도라기 보다는 "중보의 기도" 또는 "목회기도"라 불리어온 기도 입니다. 성도들의 신앙, 정으로운 사회, 건전한 나라, 세계 평화 등을 위하여 온 교회가 드리는 기도입니다. 특히 성도들의 승리하는 삶을 위해 있는 시간입니다. 세 번째는 [설교후기도]인데 설교의 말씀을 가지고 회중이 결단하는 시간이고, 네 번째는 예물을 드린 후에 [봉헌기도]는 복을 비는 내용보다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를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중심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3) 기도의 종류
우리는 [자유기도] 만을 선교사들로부터 받았지만, 주기도문과 같은 [성문기도] (또는 예전기도)도 오랬동안의 전통을 가졌고, 성구영신 예배 때에 드렸던 인도자와 회중이 함께 교독식으로 드리는 [연도](Litant) 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은 충분한 내용을,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간절하게 기도하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기 전날이나,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와서 기도할 내용을 기록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록한 것을 그대로 읽어도 훌륭한 기도가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기리는 찬송
우리는 왜 찬송을 불러야 하고 또 어떻게 찬송을 불러야 하는지 교육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찬송은 유대교로부터 물려 받았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구원하여 주신 은총을 기리는 예식이니(출15:19-21.계511:14) 감격과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찬송가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두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찬송] 과 [복음성가]입니다.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멘" 이 있는 것은 찬송이고, 없는 것은 복음성가 라고 보면 좋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예배시간은 찬송을 부르고, 예배시간이 아닌 때는 복음 성가를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또 설교를 들은 후에 결단을 표현하는 찬송을 부를때에는 아멘이 없는 것도 그 내용에 맞는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 순서에는 찬송이 4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이 다 다른 것을 알고 불러야 합니다.
우선 첫 번째 부르는 것은 사 6:2-4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 나라를 체험했을 때에 천사들이 합창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개회찬송"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내용은 죄를 용서 받은 사람들이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입니다. 초대교회 부터 이 찬송을 "영광송"(gldria patri) 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설교 후에 부르는 찬송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내용의 찬송입니다. 사실은 설교 후의 기도나 찬송이나 , 헌금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적인 것입니다.
마지막 축도 전의 송영은 예배를 마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에서 "송영"(送榮)이라고 합니다.
성가대의 찬양은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인데 하나님은 아름다운의 하나님이기에 최선의 화음과 선율로써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찬양에 참여하여야 하기에 찬양의 중간이나 끝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3. 나와 나의 모든 소유를 주님께 드리는 헌금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바쳤던 것 같이 (마 2:11).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던 것 같이 (요12:3),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께 무덤을 바쳤던 것 같이 (마27:57-61)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으로 나와 내 소유를 주님께 드리며, 주님께 헌신 하겠다는 예배자의 신앙고백입니다. 예배에서 이 시간이 예배의 절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재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기]
1.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이 몇가지라고 생각합니까?
2. 당신은 찬송을 부를 때에 흥분과 감격에서 불러본 일이 있습니까?
3. 당신은 헌금시간에 어떤 의미로 예물을 드립니까?
예배에 대한 공부(6) ㅡ 성찬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도행전 2:43-47
1. 예배에서의 성찬
처음 교회의 예배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성경은 말했는데, 처음부터 예배에서 성찬이 규칙적으로 베풀어 진 것을 뜻합니다.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주간의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해" 모였고(행20:7), 고린도 교인들은 "먹기 위해"(고전11:33) 매주 첫날 모였던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처음부터 성찬이 주일예배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증거입니다. 기록상으로는 2세기 초에 순교자 져스틴이 로마 황제에게 보낸 변증서에 매 주일마다 성찬이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16세기 종교개혁이 있기까지는 예배에서 성찬이 핵심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예배의 역사를 보면 처음 교회에서부터 약 5백년까지는 설교와 성찬이 함께 있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카톨릭이 되면서 점차 설교가 없어지고 성찬(미사)만 있는 예배를 드렸으며, 다시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설교를 회복하여 설교와 성찬이 균형 잡힌 예배를 드리려 했는데, 개신교는 점차로 설교만 있고 성찬이 없는 예배로 변했습니다. 다시 19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설교와 성찬이 균형 잡힌 예배를 드리는 드리는 운동을 시작했고 최근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순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리마 예식서"입니다.
2. 성찬은 복음 전체를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예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요약으로써 표현됩니다. 그 사건을 집약해 오는 역사적 과정에서 성찬(미사) 중심의 예배도 생겼고(동방정교회,천주교,루터교회,성공회 등), 복음선포(설교) 중심의 예배도 생겼습니다.(장로교를 중심한 개신교들) 그 전통을 신학화 하고 절대화 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예배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사건 즉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인데, 예배는 이것을 설교로서 선포하고 성찬으로 행동화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회상하고 기념하는 정도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찬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한 식탁에 모여서 주님이 수난을 당하시고 대속적인 죽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았음을 생각하고 그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이 무덤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을 확인합니다. 성찬에서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 속에 들어감으로 그분과 우리가 하나를 이루며, 그분의 지체가 되어 살아가며, 함께 지체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공동체가 됩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현장은 주님이 나타나시는 현장이 됩니다. 그리고 성찬은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영광 중에 다시 오신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복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선포하게 됨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이 복음의 도전에 분명하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우리가 살아났는데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요? 우리는 지금 주님의 지체로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주님 다시 오실 것인데 당신은 항상 때어 있습니까?
3. 성찬에서 중요한 것
성찬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빵을 떼고 잔을 붓은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가지사 축북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마 26:26-27) 라는 말씀에 따라 4가지 행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것은 [봉헌]과 [감사의 성별기도]와 [빵을 떼는 일]과 [나누어 주는일] 입니다.
첫째, 봉헌인데 빵과 포도주를 식탁에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초대교회는 각자가 빵과 포도주를 드리면 그 일부를 성찬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물질 대신 헌금을 드림으로 봉헌의 의미가 희미해 졌고 또 개신교에서는 떡과 포도주를 성찬상에 미리 개인용으로 만들어 놓음으로 그 의미가 약화되었던 성입니다.
둘째 감사와 성별기도인데 주님께서 빵을 가지사 축북하시고 잔을 가지고 축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감사의 기도가 예식에 나타난 것은 2세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러나 3-4세기경에 와서는 어떤 일정한 형식을 갖추기시작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인사][Sursum][목사의 기도][Sanctus][Anamnesis][구원에 대한 감사][Epiclesis][봉헌][중재와 기도] [송영][주기도]등으로 복잡해졌는데 칼빈은 "성찬 제정어" 와 "성별기도"만을 원했고 후에 개혁 교회는 [성령의 도움을 위한 기도](Epicleis)를 찾아 보탰던 것입니다. 성찬이 없을 때에는 이 기도를 설교 전에 했습니다.
셋째, 손으로 하는 행위 곧 빵을 떼는 일입니다. 빵을 뗀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파괴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집, 이기심, 자기자랑, 등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의 빵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떼야 하며 한 잔으로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것을 목사는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미리 빵을 나누어 놓고, 잔들을 나누어 놓는 것은 선교사들이 미국의 자유교회의 관습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넷째, 빵과 잔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것은 다락방 예식의 완성인데 구약의 희생 제사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희생 제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예식이며, 하나님께 나가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빵과 잔을 받지 않으면 그 속에 생명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6:53) 성찬을 받을 때에는 우리처럼 하는 방법도 있고, 성찬상으로 나와서 조용히 무릅을 꿇고 받는 것도 있습니다.
예배에 대한 공부(7) ㅡ 한 해를 주님과 함께 사는 예배
히브리 12:1-3
한 해를 주님과 함께 사는 예배는 교회력의 문제입니다. 최근에 한국 교회들이 [교회력](The Chistian Year) 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가운을 입고, 그 위에 색깔 있는 영대를 두르고, 또 강대상에 드림천을 내리기도 하며, 대강절과 사순절 같은 교회력의 여러 절기들을 구체적으로 지키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 교회력은 교회의 좋은 전통이었는데,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루터교를 제외하고) 교회력이 카토릭적인 제도라고하여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개혁교회에서는 교회력이 사라졌다가, 1940년대부터 다시 교회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교회력은 한해동안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한 중요한 계획입니다.
1. 교회력의 시작과 그 의미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3대 절기인 [유월절][오순절][장막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셨음을 유월절을 통하여 늘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게 했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백성에게 율법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게 오순절을 주었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광야 가운데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장막절을 주었던 것입니다. 기억하고, 감사하며, 재헌신을 하는 것을 축제라고 한다. 절기는 예배를 축제화 하게 합니 다.
교회력도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고, 감사하며 주님 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주님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게 하고, 또 성령을 주어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함으로 한 해를 주님을 기다림으로 시작해서 성령님의 인도 속에서 열매를 맺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력이 미국으로 가면서 [추수감사절-어버이 주일-어린이 주일]등이 보태졌고 또 한국에 오면서 [송구영신 예배-삼일절-광복절] 등의 예배가 더해 졌습니다.
2. 구체적인 교회력
교회력은 [성탄절]-[부활절]-[성령강림절]이라는 세 절기를 골격으로 이루어집니다. 성탄절을 의미 있게 지내기 위하여 [대강절]을 설정했습니다. 한 해를 주님 기다리면서 시작하라는 뜻이고, 또 처음 주님이 오셨을 때의 비극을 두 번째 오실 때에 되풀이하지 말자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Christ-mas) 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역사 속에 오셨음 (His-Story)을 축하하면서,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처럼 그리스도(Christ)를 예배(Mas) 하게 합니다. 성탄절 후에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날 비로서 공식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고 하여 [현현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에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사순절]을 두었습니다. 40일 간 자기를 살피며 참회하면서, 꾾을 것 끊고, 버릴것은 버림으로 믿음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부활절]은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나심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날로 교회에서는 제일 중요한 절기입니다. 매 주일은 작은 부활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부활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주일 밤이나 수요일과 새벽 기도회와 그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신 후로 한 곳에 모여 10일 동안 합심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내려 주심으로 교화가 탄생한날을 기념하기 위해 [성령강림절]을 지킵니다. 그리고 남은 기간은 약 6개월인데 다음 대강절까지를 왕국절 또는 [삼위일체주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8월말일까지를 성령강림절로 하고 남은 3개월 동안을 삼위일체 주일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3. 교회력의 색깔과 성경일과
교회력은 색깔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색깔도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색깔이 주는 감정은 민족과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이것이 정리되기까지는 세계적으로 통일된 의미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의 영 대(stoic)와 드림천의 색깔이 대강절과 사순절에는 기다림과 참회의 색깔인 [보라색]이고, 성탄절과 부활절은 순결과 환희와 승리의 색깔인 [초록색]을 씁니다.
교회력에는 주님의 일생을 주심으로 성경을 배열해서 3년 주기로 성경을 다 읽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읽을 성경은 [구약-서신-복음서]이렇게 3번을 읽는 것이 전통입니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이기에 2번 읽는 경우도 있고 , 세 번을 읽을 때에는 그 예언인 [구약]을 먼저 읽고, 복음이 어떻게 삶이 현장에서 이루어 가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신]들을 읽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설교와는 상관없이 집사들에 의하여 예배 시간에 읽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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