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도보해설관광 담당자인대요. 일행 중 휠체어 타신 분이 있으시다고 했지요?"
병원 진료차 서울을 방문하신 엄마와 창경궁 나들이를 예약했는데 참고란에 엄마 사정을 썼더니 따로 전화가 왔다. 우리 엄마는 5년 전에 두개저 뇌종양으로 큰 수술을 받으셨다.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시력이 더 나빠져 중증 장애등급을 받았고 그 외 여러 증상들로 불편함을 안고 사신다. 천천히 걸으실 수는 있으나 7시면 어둡기도 하고 길도 울퉁불퉁할 터라 휠체어를 이용할 참이었다.
담당자가 원래 코스인 궁 안을 돌 것이 아니라 휠체어 이동이 가능한 곳으로 코스를 바꾸어 돌면 어떻겠냐 묻는다. 그리 해 주시면 너무 감사하지요! 원래 무장애코스와 장애인 코스도 있는데 일반 코스는 사흘 전까지 신청이 가능한 반면 이 코스들은 일주일 전까지는 예약을 해야 한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여행 사나흘 전이라 무장애코스는 신청이 불가했다. 그래서 아쉬우나마 일반예약을 했는데 마침 신청한 사람도 우리 가족밖에 없어서 배려를 해 주신 것이었다.
엄마와 어디를 함께 갈 수 있을까 검색을 꽤 했었다. 일단 하루는 청와대에 가고, 다음날은 어디 가지? 몇 년 전에 경복궁을 갔다가 휠체어를 끄는 게 힘들어 궁궐이 다니기 좋은 곳이 아니구나 생각했더랬다. 근정전의 월대(계단)를 올라가 일월오봉도 앞의 어좌를 직접 볼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그저 산책하듯 다니는 수준도 힘들어 박석과 싸우는 모양새- 엄마는 덜컹거림을 감내하며 불편을 삼키는 인내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다보니 창경궁이 무장애코스에도 들만큼 경사로도 정비했고 통명전 월대에도 최초로 휠체어 리프트를 설치했다고 했다. 갈만하겠다 싶었다.
엄마와 외출준비는 왕후의 그것과 비슷하다.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든다. 몸에 물 묻히고 비누묻힌 샤워타올로 문지른 뒤 좋은 향 나는 샴푸로 머리를 감겨드린다. 양치와 세수가 끝났나 살펴보다 수건을 갖다드린다. 갈아입을 옷이 얇아보여 처녀시절 박시하게 입던 긴팔 남방을 찾아 우아하게 걸쳐드리니 딱이시다. 에센스, 로션까지 톡톡 발라 드리고 드디어 준비 끝. 행차 준비가 끝난 왕비님은 기분 좋은 얼굴로 소파에 잠시 앉으셨다. 아이들은 내가 멀티로 정신을 바짝 챙기고 할 것 하라고 챙기면 그대로 하니 다행이다. 휠체어도 먼저 끌고 문밖에 나선다. 나는 엄마의 양손을 최대한 부드럽게, 빨리 잡아끈다. 물을 못 챙긴 것이 생각났지만 냉장고로 잠시 되돌아가기엔 마음이 바쁘다. 차에 앉으시는 것 돕고 안전벨트 해드리고 휠체어를 싣고 겨우 출발한다.
홀로 한양도성길을 돌고 합류하신 아버지와 퇴근길에 바로 온 남편까지 창경궁 홍화문에서 여섯명 완전체로 모이다. 해설사님과 인사를 하고 궁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옥천교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했다. 수강궁이 창경궁으로,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었다가 다시 창경궁으로 가꾸어진 역사라는 대목 이후부터는 사실 명정문을 통과하여 들어가 직접 보면서 설명을 듣게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휠체어는 박석 때문에 궁 내부로 들어가기 힘들기에 문 안으로 저 멀리 들여다보이는 명정전에 이르기까지, 한 자리에서 설명이 길어진다. (이 글에서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박석은 사실 미끄러짐과 빛의 반사를 방지하고 빗물이 잘 빠지게 하는 아주 과학적이고 기특한 바닥돌이다)
아이들은 언젠가부터 바닥에 주저앉아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들끼리 재미있어 보인다. 휠체어에 묵묵히 앉은 엄마는 어떠신지 궁금하다. "엄마, 컨디션 괜찮으세요? 어떠세요?" 하니 지루하다 하시네. 더 지루해지기 전에 다행히 자리를 이동한다. 아무리 완만한 경사로가 설치되었다 해도 실제 휠체어로 이동할 때는 부드럽지 않다. 경사로 시작점이 약간 높이가 있는데 그 낮은 높이에도 텅! 조그만 돌이 바닥에 박혀있어도 텅! 하며 멈춰선다. 휠체어에 탄 사람의 상체가 추처럼 앞뒤로 흔들리며 충격을 몸으로 삼키고 나면 그제서야 앞바퀴를 약간 들거나 핸들로 방향을 조절해 겸손하게 장애물을 비켜가게 된다. 앗 이런! 여전히 궁궐이 쉽진 않구나.
이동하는 우리 가족의 현 상황이 어떠한가? 알고 보는 기쁨이 큰 아빠를 위해 프로그램을 신청했는데 해설사님의 자분자분한 말소리는 청력이 약한 아빠가 잘 알아듣기 힘들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엄마는 사위가 힘들까 마음이 불편하고, 평탄치 않은 길에 휠체어를 미는 사위는 몸이 힘들 것 같다. 엄마가 끔쩍 놀라실 것을 걱정하는 나는, 눈길이 향하는 곳에 발이 먼저 움직이는 9세 자유 영혼을 끊임없는 눈길로 붙잡는다. 그 와중에 해설사님이 누구를 포커스로 맞춰 설명을 잘 해야 하나 계속 고민하시는 게 보인다. 잘 듣는 모양이라도 내야 할 것 같은데, 실제 정말 경청하고픈데 그럴 수 없는 약간은 우스꽝스런 상황이다.
호수 쪽으로 가는가 했는데 왼편 통명전 앞에서 풍악이 울린다. 어머나! 창경궁 야연이라고, 야간연회를 재현하는데 마침 오늘(9월 22일)부터 2주간 7시반부터 30분간 하는거다. 해설사님도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아이들의 동동거림을 눈치채셨는지 통명전에의 설명 이후 5분 정도 감상하는 시간을 주셨다. 가운데 빨간 의복이 왕이라는 것과 오른편에 짙은 파랑옷 입은 분이 세자라는 것을 집어내고는 관람객 중 차려입은 여인들은 누구냐고 서은양이 묻는다. 마침 해설사님에게 삼정승의 부인인 정경부인들이라 들었던 터다. 정경부인과 삼정승이 모자와 머리에 잔치를 알리는 꽃을 꽂고 앉았다. 다시 와서 제대로 보고 싶은 풍경을 대하며 마음 속에 다른 정서가 더 강해졌다.
참 오길 잘했다. 이렇게 예약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나올 수 있었던 거지. 고즈넉한 풍경 속에 풍악이 울리면 기쁨이 별가루가 되어 반짝반짝 밤공기 속에 빛나는거지. 그 속을 함께 걷는 우리 가족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멋진 추억 하나를 공유하게 된거지. 엄마는 서울의 밤공기를 쐬어 보셨고 사위가, 그리고 잠시는 막내손주가 고사리손으로 미는 휠체어를 타 보셨다(조마조마 하셨을 거다). 아빠는 조명 속에 은은하게 빛나는 밤의 창경궁의 멋을 느끼셨고 혼자 엄마를 챙겨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셨다. 서은가은에게도 창원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다닌 기억이 많이 남길 바란다.
엄마와 편찮으시고부터 다니는 한순간 한순간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수술 전에 더 많이 다녔으면 좋았을 것을! 하다가 지금부터 잘하면 되지. 바로 지금이 엄마의 살아계신 날들 중 가장 건강하실 때야. 싶어 정신을 차린다. 엄마와 함께 다니는 것은 여러 조건이 잘 맞아 교집합을 이룰 때 가능하다. 가장 먼저는 엄마의 컨디션이 좋아야 한다. 두번째는 지역적 거리가 있기에 만날 시간을 잡고 잘 활용해야 한다. 또 생각나는 것은 장애인의 이동권이 보장되는 사회여야 한다.
이번에 다닐 곳을 검색하다보니 반가운 소식들이 꽤 보였다. 장애인도 여행을 다니고 문화적인 혜택을 누리도록 인식이나 여건이 지속적으로 좋아지는 듯 하다. 다누림관광이라고 임산부나 고령자 등 유모차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교통약자를 위한 사이트가 있다. 대표적인 서비스로 여행시 미니밴을 대여할 수 있다는데 미리 알았으면 이번에 이용해봤을 것이다. 코로나19 여파도 있었겠고 홍보가 안 되어 실제 사용 후기가 많지 않았다. 수동형 휠체어를 전동으로 쉽게 조종하게 하는 보조기구 키트를 대여해주는 곳도 눈에 띈다. 많이 알려져서 더 활성화되고, 다양하고 건전한 시도가 끊임없이 활발하게 일어나면 좋겠다.
왕비님과 마실 한 번 나서려면 맘을 먹어야 하지만 최대한 많이 다녀야 겠다 싶다. 창경궁을 끝까지 안 돌아도 괜찮다. 창경궁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 놓치고 드문드문 들어도 괜찮다. 부모님과 우리 부부가, 손주들이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여기를 함께 누렸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흡족하다. 조금 여유있게 준비하고, 함께 하는 것에 의미를 둔 느린 발걸음으로 다니니 엄마와의 여행은 그 무게감만큼 깊은 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