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生)
이전 생과 지금 생을 분리시키는 것은 그저 지각이 빚어낸 환상일 뿐이다. 실상에는 단 하나의 생이 있을 뿐이고, 주기적으로 환생하는 것은 어떤 조건들이 일정한 문제들의 해소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세례 요한으로 돌아오리라고 말했을 때 환생을 인정했다(마태11:7~14, 17:10~13). 운동역학을 이용한 영적 연구에 따르면, 예수는 그 이전에 인간의 삶을 받은 적이 없으며, 사실상 하늘 나라에서 곧장 내려왔다. 예수의 목적은 신과 하늘나라의 실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임무는 인류의 구원이었다.
같은 방식에 의한 연구에 따르면, 구세주는 600수준 이하로 측정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간으로 수많은 전생이 있었던 붓다의 목적은 600이나 그 이상의 수준에 도달하기위해, 이른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붓다는 전생을 기억했고 카르마의 교훈과 부정적인 카르마를 피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부정적인 카르마가 있다면 영혼은 육체의 죽음이후에 하늘나라에 가지 못할 것이다.
영적으로 진보한 구도자 들은 단순히 두려움이나 죄의식에서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에서 덕행과 하늘나라를 선택한다. 일차적으로 죄가 무지와 동물적 본능이 합쳐진 것이라면 그것을 ‘혐오’하는 것은 역효과를 내고, 따라서 에고의 또 다른 위치성에 붙들리게 된다.
일부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600이하의 의식 수준에서는, 육체/마음을 ‘나임’의 실상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전생에 대한 망각이 있다. 이러한 망각은 변성된 의식상태, 유체이탈경험, 꿈, 최면 상태, 임사체험, 그리고 저절로 일어나는 환각에서 넘어 설 수 있다. 임상에서 전생퇴행의 활용은 유명한데, 지금 생에서 질병이나 심리적 문제로 드러난 숨어있는 전생의 상처나 오류들에 대해서 그것은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전생 퇴행 요법은 정말로 눈부신 치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게다가 어린 아이들도 전생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어떤 아이들은 과거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을 만큼 자세하게 기억해 내기도 한다. 600이상의 의식 수준에서는 전생을 기억해 낼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목격자/경험자/의식의 앎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생을 돌이켜보면, 전생의 의미 깊은 영적 사건들과 지금생의 사건, 태도, 심리적 특성이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잘 살펴보면 하나의 패턴이 떠오르고 그것은 영혼의 여행이라고 할 만한 것을 반영한다.
※현인의 뇌파는 주로 1초당 약 4~7싸이클(4~7cps)의 느린 세타파나 그보다 더 느린 주파수를 나타낸다. 보통 명상상태의 알파파는 8~13cps의 주파수 영역에 있고, 보통 사람의 뇌파는 주로 13cps이상의 빠른 베타파이다.
4. 육체
육체와 일치하는 것은 오로지 에너지로만 구성된 에테르체이다. 에테르체는 영을 구성하며 주관적 경험의 중심이다. 그것은 두뇌에 정보를 전달하고 뇌신경회로를 활성화 시킨다. 유체이탈 체험에서 에테르체는 육체에서 분리된다. 그런 상태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움직이고, 듣고, 보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면에 육체는 그때 완전한 휴면 상태에 들어가 가능하지 않다.
인간에게서 에테르체는 또한 상위 아스트랄체(지혜, 추상적 사고)와 하위 아스트랄 체(구체적 사고)는 물론 감정체를 포함한다(※여기서 ‘체body’란 사실상 육체가 아닌 에너지 장). 멘탈체 너머에는 영체들이 있는데, 그것은 오랜 세월동안 다양한 이름(원인체, 붓다체, 크리스트체, 아트마체 등)을 얻었다. 상위 영체의 출현은 의식의 진화와 병행하며 지상의 시간으로 장구한 세월이 걸린다.
※육체➟에테르체(영을 구성. 주관적 경험의 중심. 두뇌에 정보전달. 뇌신경회로 활성)➟아스트랄체(上:추상적 사고. 下:구체적 사고. 감정체)➟멘탈체(영적 정보 저장)➟영체(원인체, 붓다체, 크리스트체, 아트마체)
영적 정보는 멘탈체에 저장되며 교육적이고 유용하지만, 상위의 영적 에너지 장이 진보한 영적 스승의 현존에서 방사되는 고주파에 의해 활성화되기까지는 경험되지 않는다. 고주파 에너지 장의 전달은 말없이 비언어적으로 이루어진다(이는 고전적으로 ‘은총’으로 일컬어짐). 이 사건은 카르마에 각인되며, 그리고 상위 영체들에 에너지를 불어 넣음으로써 내면의 주관적 경험적 지식에서 이해가 솟아나도록 밝혀 준다. 역사적인 붓다의 무언의 전달은 따라서 ‘무심’의 전달이었다.
육체는 나라기보다 ‘그것’이다. 그것은 방안의 가구와 똑같은 물체에 불과하다.
5. 이름
사람의 이름조차 상황에 따라 선택되었다. 그것은 차량 번호판과 마찬가지로 식별을 목적으로 한 임의적 명명이다. 이름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좋다. 새로운 영적 이름을 갖는 것은 환상을 지속시키고 그것에 보다 성스러운 뉘앙스를 덧붙여줄 뿐이다. 개인의 이름과 동일시하는 것은 제한이다. 성(姓) 또한 미묘한 동일시에 대한 집착을 나타낸다. 실상에는 이름이 없다. 실상이란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한 ‘신’이라는 용어와 비슷한 언어적 지시일 뿐이다.
6. 말
나(I)는 궁극적 전망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이나 ‘그때’ 혹은 ‘여기’나 ‘저기’를 넘어서 있는 전부임의 비국소적 실상이기 때문이다. 위치성을 갖지 않고 볼 때, 언어적으로 반대로 보이는 것들이 상대적 성질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모든 말은 암묵적 위치성과 맥락을 포함하고 있다. 실상에서, 일체는 근본적으로 있는 그대로일 뿐이고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것도 없다. ‘그것이 있다’라는 진술조차 그릇된 묘사이다. ‘있음’혹은‘존재’는 추론이자 지적 결론이고, ‘전부가 있다’라는 진술조차 또다시 추상적 진술이다.
언어적 표현의 목적 외에 자동사의 필요성은 없다. 신비주의자가 묘사할 수 없는 ‘실상’의 근본적 주관성에 관해 수십 년 간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깨달음의 상태에 대한 언어적 표현은 사실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선사는 그저 갑자기 ‘할!’하고 고함을 지르고 막대기로 때리기도 하는 것이다. 누구나 설명할 수 없는 실상이 드러나는 갑작스러운 순간을 기대한다.
말의 배후에 있는 에너지는 언어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오로지 앎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한 조건에서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궁극은 어떠한 외적 관련도 없는 그 자체일 뿐이다. 인간적 관점에서 그것은 ‘무심’의 조건 혹은 상태이다. 공간이나 시간 속에서 어떠한 위치도 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모든 곳에 지속적으로 평등하게 현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현존함 혹은 ‘현존하지 않음’을 넘어서 있다.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깨달음의 상태는 ‘사람’이라는 용어 자체가 함축하는 모든 것을 다 배제하기 때문이다.
7. 이기(利己)· 이타(利他)
에고의 핵심은 이기심으로 확인 되는 일이 많지만 반면에 영적 목표는 이타심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입니까?
표면적으로 반대로 보이는 모든 짝은 자동적으로 솟아나는 양극성의 환상이다. 행위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은 의도이다. 이기심의 의도는 얻음과 이익이고, 그 목표는 생존이다. 반면에 이타심의 목표는 봉사하고 주는 것이다. 이러한 대조적인 동기를 고려할 때, 이기심은 그릇된 것이나 나쁜 것으로, 그리고 이타심을 옳은 것이나 좋은 것으로 분류하는 또 다른 위치성을 피할 필요가 있다. 이기심과 이타심이란 그저 의식 진화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것은 정 반대가 아니라 서로 다른 대안일 뿐이다. 이기심의 기원은 동물세계로 거슬러 올라가고, 인간 뇌에 잔존한 동물의 뇌 구조를 통해 기능한다. 이기심의 기본 전제는 “나는 원한다.”이다.
8. 욕망
흔히 이기심, 욕망, 탐욕은 결핍에서 유래 한다고들 합니다.
이기심은 지나친 허영과 욕망에서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기대나 요구의 결핍이란 없다. 지나친 욕망이 결핍의 환상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은 마치 경제적 문제라는 것이 수입보다 더 빠른 소비에 의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현실적 요구에 기초한 욕망은 그것이 충족 되었을 때 완성된 느낌에 이른다. 그것은 충족과 평화의 느낌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갈망에 시달리는 사람은 만족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이 ‘태양신경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배적 의식 수준으로서의 욕망은 충족될 수 없으니까.
부, 지위, 소유물에 대한 일반적 욕심을 제외하고,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새로운 경험, 신기함, 관계, 섹스, 흥분, 명성, 승리, 칭찬, 명예, 타인을 통제하는 힘, 그리고 여러 가지 상징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정상적 자기이익과 자존감은 이기심과 어떤 차이를 갖습니까?
건강한 자기이익은 타인의 복리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는 반면, 이기심은 타인을 등한히 한다. 자기 이익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온전하며 자존감을 높여준다. 반면에 자만심은 분리주의자이고 타인을 희생시켜 이익을 구하며, 내적 자존감의 상실로 인도한다. 따라서 그것은 상처받기 쉽고, 온전하지 못하며, 자기 존중의 상실로 귀결되는 환상적 자기 팽창이다.
욕망과 갈망을 몰아가는 환상이란, 욕망의 대상이 과장된 중요성과 의미로 물들고 이는 가치와 매력의 부풀림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일단 욕망의 대상이 손에 들어오면 그것은 신비스러운 광채를 상실하고 그 유혹적 이미지는 이제 다른 욕망의 대상에 투사 된다. 이는 성적 관계의 영역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성적 관계에서는 정복이 목표이어서 욕망과 심취의 대상이 된 상대의 매력은 순식간에 희미해진다.
그러므로 추구의 대상은 실상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추구하는 것은 부풀어 오른 가치에 대한 환상적 약속이다. 행복의 진정한 근원은 내부에 있기 때문에 바람이나 욕망은 충족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욕구는 특별함을 끊임없이 외부에 투사하는 것이고 따라서 환상의 추구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욕망이 충족되면, 초점은 막대에 줄줄이 꿴 당근과 갗은 욕망의 다음 대상으로 이동한다.
위치성을 점차 내맡길 때 의식은 상승하고, 욕망의 매커니즘은 결국 무너지며 내적 목표의 각성에서 만족감이 솟아난다. 행복의 근원이 내부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 충족감이 결핍을 대신하게 된다. 내맡겨야할 것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하는 성질이고, 신비스럽게 부푼 가치로 대상을 물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