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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를위한불교/제 1 장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란 말 뜻
불교란 글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말한 가르침을 기독교라 하고,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이슬람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명명법이다.
여기서 부처님이라고 함은 불타 석가모니를 말한다.
석가모니는 불교의 교주이다.
불교는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기 위해 설법함으로써 성립된 종교이다.
부처님이 말한 진리를 '법'이라고 하는데 불교를 달리 말하면
'불법' 즉 부처님이 말한 진리이다.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자기가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는가.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필요가 있어서 생겨났는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이 그 가르침에 따라 실천하면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것을 염원하는 까닭이다.
결국 불교는 목적적으로 말한다면
'부처님이 되기 위한 가르침'이다.
실천을 '도'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런 뜻에서 '불도'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붓다를 '부도'라고 음사하고
한국에서는 '부처님'
일본에서는 '호도게'라고 부른다.
한자의 '불(佛)'은 붓다를 표현하기 위한 조자(造字)이다.
불교라는 한자어를 범어로 표현하면 '붓다-사사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도에서 힌두교나 자이나교에 대비해서
불교를 부를 때는 '바웃다' 또는 '바웃다 다르마'라고 한다.
바웃다는 '부처님에 관한'
'부처님에 속한' '부디즘'이라고 표기한다.
'불법'의 원어는 붓다 다르마라고 할 수 있으나
다르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므로
하나의 뜻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불교라고 부르기보다는
'불법'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는데 이는 불법의 권위는
왕법, 즉 세속적 국가권력보다 높다는 의미로서였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불법이 왕법에 종속되었던 것이 역사상의 사실이다.
불도는 불교도들이 사용하는 '보회향문'중에서 '
개공성불도'라고 하는데서 나온 말이나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불교의 삼요소(佛·法·僧)
불·법·승은 불교를 구성하는 세가지 기본적 요소이다.
첫째
불이란 곧 부처님으로 이것이 없으면 불교가 존재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불타 석가모니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불교가 없었을 것이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부처님의 출현, 즉
석가모니가 진리를 깨달은 것,
성도하여 부처님이 된 것을 인정함으로써 불교는 시작된다.
그러나 만약 석가모니가 부처님이 된 후에 그 깨달음의 내용을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석가모니의 가슴속에 갇혀 있다가 그가 죽는 것으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불교'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석가모니의 설법이 가진 역사적 중요성이 있다.
우리들은 그가 남긴 가르침을 통해서만 이
깨달음에 이르는 진리를 알 수가 있다.
즉 진리로써 가르쳐진 '법'은 불교를 성립하게 하는
두 번째의 기본적 요소이다.
그러나 또한 '불법'은 가르침을 듣는 자와
'불도'를 실천하는 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부처가 되기 위한 도를 실천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승가라고 부르며 '승(僧)'이라고 약칭한다.
승가는 교주 석가모니의 제자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본래 뜻이지만 넓게는 각 지역, 각 시대의 교단을 말한다.
이 집단이 없이는 제자에서 제자에게로 불교가 상속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었다면 불교는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승'의 존재는 불교의 생명을 영원하게 하는데
빠질 수 없는 요소의 하나이다.
이것이 세 번째의 요소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이 세 가지 요소, 다시 말해
첫 번째 불(붓다),
두 번째 법(다르마),
세 번째 승(상가)은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보물이라는 의미에서 '삼보(三寶)'라고도 한다.
불·법·승의 세가지 요소는 오늘날 종교학에서 말하는
종교를 성립시키는 불가결한 요건인
교주(佛)·교리(法)·교단(僧)에 해당한다.
자연종교나 민족종교에서 교주는 알려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또 태어나면서부터 종교가 결정되므로 특별히 교단에의
가입(入信) 의식도 없다. 또한
교단도 간단해서 조직화 된 것이 없다.
우리 나라로 말한다면 성황당 신앙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 종교(불교·기독교·이슬람교)는 이와 다르다.
교주와 교리와 교단이 있어야 하고 가르침의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삼보에의 귀의
삼보는 불교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대상이다.
모든 불자는 삼보를 마음의 귀의처(歸依處:위험할 경우
안전하게 숨을 곳을 말함)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삼보에 대한 귀의의 표명은 통상 다음과 같은
구절의 외움으로써 이루어진다.
"나무불타(南無佛陀)
나무달마(南無達磨)
나무승가(南無僧伽)"
그러면 왜 삼보는 귀의할 가치가 있는가. 이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불은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양족중(兩足中) 가장 훌륭하기(兩足尊) 때문입니다.
법은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탐욕을 떠난 청정함 가운데 가장 훌륭하기(離欲尊) 때문입니다.
승은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공동체 중에서 가장 훌륭하기(和合尊) 때문입니다."
여기서 양족존이라 함은 두 발로 서 있는, 다시말해
인류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간 불타,
즉 석가모니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또 승을 화합존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교교단이 인간이 운영하는 집단,
공동체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집단이라는 뜻이다.
승은 곧 평등과 화합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또 법을 이욕존(離欲尊)이라 하는 것은 교주의 가르침이
욕망을 떠난 이상상태(이를 열반이라고 한다)로 인도하는
진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을 매개로 하여
교주와 제자들이 화합하여 이상적인 공동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불교교단의 당초 목표였다.
이와 같이 불교는 귀의의 대상이 본질적으로 어느 특별한 초월
적인 절대자가 아니고 인간이 만든 모범적인 대상이었다.
즉 인간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남방불교권에서는 일상적으로 팔리어의
'삼귀의문(三歸依文)'을 세 번 한다.
팔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붓담 사라남 가차미(나는 불타를 귀의처로 합니다.)
담맘 사라남 가차미(나는 진리를 귀의처로 합니다.)
상감 사라남 가차미(나는 승가를 귀의처로 합니다.)
삼귀의는 불교에 입문할 때 수계(受戒)와 함께 한다.
의정(義淨:635∼713)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에 의하면 수계할 때는
먼저 삼귀의를 하도록 되어있다. 즉
'나무불법승(南無佛法僧)'을 세 번 외운 뒤
'귀의불양족중존 귀의불이욕중존 귀의승화합중존'을 세 번 외우는 것이다.
'나무(南無)'란
산스크리트어로 예경·경의를 표명하는 말이다.
원어로는 나마스로 '나무'는 소리대로 옮긴 말이다.
인도 인들이 통상 인사할 때 하는 말
나마스트(당신께 경의를 표합니다.)에서 온 말이다.
다음에는 '귀의불경 귀의법경 귀의승경'을 삼창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경(竟)'이란 '이미 끝났다'는 완료의 뜻으로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가르침에 귀의했습니다.
교단에 귀의했습니다.'라는 말이다.
《화엄경(華嚴經)》정행품에는 다음과 같은 삼귀의례문이 있다.
"자귀의불 당원중생 체해대도 발무상의
自歸依佛 當願衆生 體解大道 發無上意.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원하옵나니 중생들과 같이 대도
를 체해(體解)하고 무상의(無上意)를 발하게 하옵소서.)
자귀의법 당원중생 심입장경 지혜여해
自歸依法 當願衆生 深入藏經 知慧如海
(스스로 가르침에 귀의했습니다. 원하옵나니 중생들과 더불어 깊
은 장경(藏經)에 들어가 지혜가 바다와 같게 하옵소서.)
자귀의승 당원중생 통리대중 일체무애
自歸依僧 當願衆生 統理大衆 一切無碍
(스스로 교단에 귀의하겠습니다. 원하옵나니 중생들과 더불어 대
중을 통리하고 일체 경계에 걸림이 없게 하옵소서.)
여기에는 삼보에 귀의함과 동시에 중생제도를 서원하는 대승
불교의 이타적 입장이 표명되고 있다.
법의 절대성
삼보는 이와 같이 처음에는 교주 석가모니와 그 가르침,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교주의 입멸과 동시에 그 의미가 변화됐다.
'불'은 이미 현전의 교주가 아니고 제자들의 기억에 의해
점차 신비화되어 갔다. 그리고 '부처님은 누구인가'의 구명이
후계자들의 과제가 되어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제불의 관념이 생겨났다.
아울러 부처님은 신앙의 구극적 대상으로써
신과 대등한 절대자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은 제자들에 의해서 정리되어
'경전'으로 전해져 왔으나
진리탐구의 열의는 대승불교에서 보는바와 같이 새로운 경전의
편찬과 발전된 교리 해석을 낳게 했다.
현재 불교도는 본존으로서는 불상을 안치하고,
그 앞에서 경문을 외우는 형식으로 불과 법에 동시에 귀의를 한다.
'승'은 출가수행자, 전문 교역자를 승이라 하고 있으나
귀의의 대상으로는 인간의 이상상으로서 보살과
나한 역대 조사등을 모시는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나무아미타불'은 귀의불,
'나무묘법연화경'은 귀의법,
'나무관세음보살'은 귀의승을 표명하는 것이다.
삼보는 이와 같이 동등한 귀의와 예배의 대상으로 되어 있으나
교리적으로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불·법·승은 구극적으로는 하나의 가치로 귀착한다는 것이
교리적 해석이다. 이 구극적 가치에는 '법'이외는 없다.
불이라 함은 '진리를 깨달은 자'인
이상 '깨달은 진리(所證의 法)'는 절대적이며 이것은
부처님이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는 것과 관계없이 영원불변한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진리(所證의 法)'의 근원, 즉 법계 또는 진여이다.
한편 승은 '진리를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자'의 집단이므로
삼자는 법을 매개로 하여 일체가 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일체삼보라 한다.
원시불교의 인간중심주의는 비인격적인 법의 절대성을
전제로 하여 성립되었고 대승불교도 기본은 같다.
다만 대승불교는 부처님이 진리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진리와 일체가 된 자' 즉 여래라는 의미로서
불이 즉 법이라는 형식으로써 절대자를 구한다.
여기서 '불(佛)은 법신(法身)'이라는 이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불'을 표면에 내세워서 종교성을 강화하게 되었다.
불교의 특질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진리와 하나가 된 절대와의
합일을 목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와 같은 신교와는 다른 특이한 점이다.
절대자와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사상은 널리 신비주의라고 부른다.
신비주의는 기독교와 회교의 일부에도 있으나 주류는 아니다.
이와는 달리 인도에서는 브라흐만의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가르침에서 볼수 있는 것과 같이 절대자와의 합일을 강조한다.
불교는 오히려 이같은 인도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승과 소승
불교에서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상과 같이 불·법·승 삼보라고 하는
기본적 요소를 바탕으로 해서 모든 논리를 전개해 왔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앞으로 다룰 여러 가지 문제에서 제시 될 것이나
그에 앞서 약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있다.
우리가 흔히 '불교'라고 한마디로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한국불교가 있고 스리랑카 불교가 잇는 것과 같이 현실적으로
존속하는 교단은 그 내용이 각각 틀리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입장에서 해석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불교, 즉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이다.
그러나 스리랑카 불교는 오늘날
장로 불교(또는 상좌부 불교)라고 불리우고 있다.
우리는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상좌부쪽보다는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대답하는 것이 이해도 용이하고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대승불교라는 것은 근대불교학이 밝혀낸 성과에서 보면
부처님이 입멸한 지 5백년이 지난 때에 생겨난 일종의 개혁 운동이다.
그 가르침에 있어서도 결코
부처님이 직접 말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은 '아함'이란 이름으로 전해져 왔다.
대승불교에서는 아함을 무시한 것은 아니나 스스로
교리의 근거로써 이른바 '대승경전'을 소유했고 그것만이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을 담은 것이라고 주쟁했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는 그들의 경전이 당연히
부처님이 말씀(佛法)'한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결코 '불설'이 아니다. 즉
대승은 '비불설'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의 학문적 상식으로는 '대승비불설'은 당연하나
같은 방법의 연구에 의하면 실은 아함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한 불설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아함이면서 한문으로 번역된 불전과 스리랑카 등
남방의 여러 불교권에서 사용되는 팔리어와는 약간의
상위가 있음을 근대불교학을 밝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역 중에서도 각기 다른 부파에 의해 전해진 경전이
혼재하고 가르침의 내용도 서로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이같은 현상은 불교가 부처님의 입멸이후 약 1백년 경부터
몇개의 교단으로 분열하여 마침내는 20여 개가 넘는
부파를 형성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들 부파는 아함을 전승하는 과정에서 점차 독자적인
해석을 가하게 되어 어느 사이 부처님께서 가르친 내용과는
상당한 간격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대승불교는 종래의 이와 같은 부파교단의 학설이 부처님의 참뜻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처님의 입장에서의
복원을 목표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대승불교가 '소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시 말해
'부파의 교설'을 지칭한다.
소승이라고 불리우는 의미 속에는 출가자가 자신들만의 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하고 재가불자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비난이 포함되어 있다.
대승은 소승의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면서 출가·재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함께 깨달음에의 길로 나가는 길이다. 그
것은 대승불교운동 실천자(보살)의 입장에서 보면 이타적 실천,
즉 자기의 깨달음에 앞서 다른 사람을 먼저 깨닫게 하는 것이다.
부파의 교학은 아비달마라고 한다.
그 의미는 다르마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것을 연구하는 것,
바꿔 말하면 '법의 연구'이다.
이를 중국에서는 '대법'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각 부파는 불설인 아함을 연구하면서 자기들 입장을 정
당화하기 위해 해석을 독자적으로 했던 것이다.
이는 한편에서 보면 '불교학의 발전'이기도 했으나
부처님의 참뜻을 적지 않게 왜곡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비달마학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한역으로 전해진 것으로는 설일체유부의 교학이고,
다른 하나는 스리랑카 장로 불교에 전해진 팔리어 불전이다.
그 중 대승불교가 소승불교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하고
영향을 받은 것은 유부의 교학이다.
유부의 교학을 알기 위한 대표적인 강요서는
바스반두(世親)가 쓴 ≪구사론(俱舍論)≫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당나라때 현장이 번역한 것이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불교 강요서 또는 입문서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와 함께
≪유식론(唯識論)≫도 많이 읽힌다.
세친은 대략 5세기경 사람으로 형은 아상가라는 사람이다.
세친은 처음에는 소승불교를 하다가(구사론은 소승교서다)
나중에 형을 따라 대승으로 전향해 ≪유식론≫을 썼다.
그러므로 ≪유식론≫고 ≪구사론≫은
대소승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비슷한 점도 있다.
그러니까 유식의 학설은 '대승의 아비다르마'인 셈이다.
사실 대승교학의 뿌리가 소승교학에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관계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연히 ≪구사론≫의 입장에서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불교를 알려고 할 때 학문적으로 부처님께서
직접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가를 알고 싶은 욕구는 당연한 것이다.
때문에 최근의 불교학은 부파적 해석이 가미된 여러 가지 불교경전에서
공통항목과 공통된 교리를 모아서 재편성함으로써 어느 정도
부처님이 참으로 말하고자 했던 본뜻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이러한 의도 아래 불교학자들은 부처님 시대의 불교 또는
부파로 갈려지기 이전의 불교를 '원시불교'라고 하며 다시
그 위에 가장 오래된 것을 '최초기의 불교' 또는 '근본불교'라고 부른다.
뒤에 발달된 불교를 '소승불교(또는 부파불교)' '대승불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소급하여 불교의 원초형태를 찾아내는 것만이
불교의 내용 전체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인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불교'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숱한 변모를 거친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조직과 제도를 가진 것을
통틀어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역사적 엄밀성도
고려해야 하지만 불교가 불교로서의 체계를 확립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고 그 위에서 후대에 발전된 교리체계를
언급하는 것이 이해하기 편리하다.
불교의 성전
불교의 성전은 부처님이 입멸한 뒤 제자들이
스승이 살아 있을 때 말한 진리에 대한 가르침과
교단에 관한 여려가지 규칙을 정리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를 결집이라 한다. 이 때는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법', 교단의 규칙을 '율'로 지칭하였으며
그 두가지가 성전의 전부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기설법이라 하여 여러 가지 상황에
대응한 것이어서 표현상의 차이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모순을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른바 '8만 4천 법문'으로
불리우는 부처님의 설법은 해석을 할 필요가 생겨났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생긴 것이 아비달마이다.
아비달마는 서양의 신학, 특히 스콜라 철학에 비견될 만하다.
아비달마의 성립에 따라
'법'은 가르침의 기본이라는 의미에서 '경'이라고 불려지게 됐다.
이에 대해 아비달마는 주석해설서라는 의미에서
'논'이라고 불리운다.
삼장은 경·율·논을 총칭하는 말로
장은 '모아서 정리한 그릇'이라는 뜻이다.
또 율에 대한 주석도 나타났다. 이를 '아비비나야'라고 하는데
이것은 율장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독립된 장을 이루지는 않았다.
법 또는 경은 원래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직접 말씀되어진 것이라 하여
'금구설법'으로 불리우며 아함이라고도 한다. 아가마란
'전해진 것'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성스럽게 전승된 경전을 말한다.
물론 모든 아함을 금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하여튼 그같이 전승되어 왔다고 믿어왔다는 것이다.
≪아함경≫은 형식과 내용에 따라
장(長)·중(中)·잡(雜)·증일(增一)등 네가지로 분류된다.
이같이 구분하는 것은 인도에서 부파교단이
전승해온 경전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경장속에는 아함경 외의 것도 포함돼 있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 불교도가 일상으로 읽고 있는
대승경전들이 그것이다.
대승경은 《법화경》《화엄경》《아미타경》을 비롯해
《유마경》《반야경》그리고 《대일경》《금강정경》에 이르기까지
그 숫자도 많고 내용도 다양하다. 이것들은 모두 대승불교가
성립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써 역사적으로는
부처님의 설법과는 관계가 없는 후세의 산물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대승비불설'은 틀림없지만 대승불교 쪽에서는
오히려 《아함경》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참뜻을 전하는
심원하고 구극적인 가르침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불설'이라고 표명하는 것은 단지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대승불교가들의 신념의 표현이라고 볼수 있다.
사실 대승경전은 여러 가지 발전된 교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깊고 높게 했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대승경전도 아함경과 같은 '경'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형식적으로는 '여시아문'이라는 말로 첫머리를 시작한다.
경을 말할 때와 장소·청중 등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무한하게 확대되고 공상을 하고 싶은대로 한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그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 중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모든 경전은 '여시아문'으로 시작해서 들은 사람이
'개대환희 신수봉행'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형식을 지킨 것은 모두 '경'으로 인정되고 경장속에 포함된다.
인도에서는 불멸 훨씬 뒤에까지 새로운 경전으로 계속 만들어졌으며
중앙아시아(西域)와 중국에서도 몇 가지의 경전이 만들어졌다.
중국에서는 옛부터 그같은 중국제 경전을 판명하기 위해
'위경'이라는 말을 썼으나 근대학문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위경으로 지칭될 만한 것들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대승 경전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로 위경이라 해도
내용적으로 불교교리가 일관되게 말해지는 뛰어난 것이 있고
그것을 경으로 존중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중국에서는 경·율·논 삼장을 총칭해 '경'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경은 '성전'과 같은 뜻으로써 '
대장경' 또는 '일체경'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불교 전래 이후 삼장에 속한 여러 가지 성전이 점차
번역돼 왔으나 역대의 왕조는 그 관리에 주력하여
'입장'을 시키고 또 '경록'을 만들었다.
대장경은 그같이 하여 입장된 역경류의 집대성이다.
그중 경장은 소승경(아함경)과 대승경, 논장도 대승론, 소승론으로
갈라져 있으나 율장의 경우는 계뿐이며 율은 아니다.
한역 율장 속에서는 《사분율》《오분율》《십송률》
《마하승지율》《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를 5대부로
칭하고 있으나 이것들은 원래 부파의 율장이었다.
율장은 교단의 규칙이었으며 부파별로는 독자적인 것이 있었다.
대장경 중 논장에는 중국인이 만든 주석서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런 뜻에서 본다면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한국에서
만든 교의서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집성한 대정신수대장경 속에는 한국고승의 것과
일본고승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대장경에는 한역 외에도 남방불교가 사용하는 팔리어 성전
(경·율·논 삼장을 완비, 후대의 논전은 장에서 제외한다고 한다)과
티베트어역 성전 등이 있다.
또 산스크리트어와 기타 여러 가지 언어로 쓰여진 경·율·논 원전과
단편들이 현존하고 지금도 발견되어 출판되고 있다.
또한 티베트어역 대장경은 다시 몽고어·만주어로도
번역되어 현존하고 있다.
불경은 원래 암송되어 왔으며 또 부처님의 유시에 따라
인도 각지의 사투리로 설해져 왔다.
그것은 점점 교단이 소재하는 지방어에 의해 기록 정리되어 왔다.
팔리어는 원래 인도방언을 모태로 하고 있으며 (팔리란 성전어의 뜻)
그 필사의 시기는 기원전 1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도 본토에서는 그후 지방어를 산스크리트어로 고치는 작업이 있었다.
굽타왕조 이후의 저작은 대체로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졌다.
티베트어역은 산스크리트어에서의 번역이 대부분이었다.
또 한역도 옛날 것은 북인도 지방의 방언과
서역(중앙아시아)의 언어로 쓰여진 것의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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