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규원사화(揆園史話), 朝鮮의 사막(沙漠), 그 書誌的 根據 [제4-2편]
[朝鮮 疆土와 사막지대(沙漠地帶)의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
2,026년 04월 12일
○ 〈「규원사화(揆園史話)」는 「북애자(北崖子, ?~?)」에 의해 저술(著述)된 보기 드문 민족(民族)의 자긍심(自矜心)을 고취(鼓吹)시키는 ‘민족(民族) 사서(史書)’로,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동이(東夷), 구이(九夷), 한(韓) 왕조(王朝)를 총칭(總稱)】는, 반도(半島) 땅이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왕조(王朝)’였음을 후세(後世)에 알리고 있다.」〉
위서(僞書)냐? 진본(眞本)이냐? 하는 문제(問題)는 아주 중요(重要)한 것이지만 : ‘위서(僞書)다. 진본(眞本)이다’라고 주장(主張)하는 무리가 누구냐? 하는 것 역시(亦是) 중요(重要)한 관심(關心)거리다.
☛ 또 관심(關心)은, 규원사화(揆園史話)에 기록(記錄)된 그 내용(內容)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서술(敍述)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問題)는 위서(僞書)냐? 진본(眞本)이냐? 하는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웃기는 짓거리로 만드는 핵심요소(核心要素)다.
역설적(逆說的)으로 :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일제(日帝)가 일부(一部) 내용(內容)을 첨삭(添削)한 것이다. 당연(當然)히 위서(僞書)다. 그러나 이러한 위서(僞書) 논란(論難)을 잠재우는 것이 바로 그 내용(內容)이다.
➥ 동방(東方)의 동이(東夷) 곧 구이(九夷)의 활동(活動)을, 동국(東國)의 번성(繁盛)함을 기록(記錄)한 것으로, 그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사실(史實)로써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왕조(土着王朝)였음을 사실(史實)로 기록(記錄)해 놓은 겻이다.
그 어떤 동사(東史)에서도 말하지 않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왕조(王朝)였음을 가감(加減)없이 솔직(率直)하게 서술(敍述)해 놓고 있다”. 이는 위서(僞書)냐? 진본(眞本)이냐? 하는 논쟁(論爭)을 불필요(不必要)하게 만들고 있는 요소(要素)다.
「규원사화(揆園史話), 조선(朝鮮)의 사막(沙漠), 그 서지적(書誌的) 근거(根據)【조선 강토(朝鮮疆土)와 사막지대(沙漠地帶)의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제4-2편]」입니다.
---------------------------------------------------------------------
「규원사화(揆園史話) 만설(漫說)」 편(篇) 해설(解說)
○ 「규원사화(揆園史話) 만설(漫說)」 편(篇) :《余嘗論之, 强國之要, 有三. : “내가 일찍이 논(論)하기를, 강한 나라의 요건(要件)에는 세 가지가 있다”라고 하였다. 一曰地廣而物博, 二曰人衆而合, 三曰恒守其性而不失其長. 此所謂地利人和及保性也. : 첫 번째는 땅이 넓고 산물이 풍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사람이 많으면서 화합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항상 그 본바탕을 지키며 자기의 장점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는 지리적(地理的) 이익(利益)과 사람의 화합(和合) 및 본바탕의 보전(保全)을 말하는 것이다. 而朝鮮則, 得地利而不全, 失人和而亡其性, 此萬世之患也. 何謂得地利而不全. : 그러나 조선(朝鮮)은, 지리적(地理的)인 이득을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 되며, 사람들은 화합을 잃은 데다 본 바탕을 망각(忘却)하고 있으니, 이것은 만세(萬世)에 걸친 걱정이라 할 것이다. ‘지리적인 이익을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 된다’라 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 (1) 夫朝鮮之地, 北連大荒, 則凍天氷地斷我後退之路 : 무릇 조선(朝鮮)의 땅은 북(北)으로 대황(大荒)과 연결되어 있으니, 곧 얼어붙은 하늘과 빙판 같은 땅이 우리의 퇴로를 끊고 있고, ➥ (2) 西接蒙古, 而萬里流沙斷我左展之臂. : 서(西)쪽으로는 몽고(蒙古)와 접하니, 만리(萬里)에 뻗친 유사(流沙)【사막(沙漠)】이 우리의 왼쪽으로 뻗은 팔뚝을 끊고 있으며, ➥ (3) 西南隣漢土, 而無泰岳峻峙 長江大河之限, 則其勢易於進攻, 難於防守 ; 서남(西南)【서(西), 남(南)쪽】으로는 한(漢) 땅과 인접하여 있으나, 태산의 험준함이나, 장강(長江)의 큰 물줄기 같은 경계가 없기에, 곧 그 형세가 나아가 공격하기는 쉬우나 방수(防守)하기는 어렵고, ➥ (4) 東南阻大海, 而無前進一步之土. : 동남(東南)【동(東), 남(南)쪽】으로는 큰 바다에 가로막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땅이다. ∼중략(中略)∼. ➥ (5) 昔者, 蚩尤氏卽帝位於涿鹿, : 옛날에 치우(蚩尤)씨는 탁록(涿鹿)에서 제위(帝位)에 올랐고, ➥ (6) 屹達陳兵於豳.岐, : 흘달(屹達) 임금【揆園史話, 檀君記 : 흘달(屹達) : 在位 43년 - 紀元前 1,843년 卽位】은 빈(豳)·기(岐)에 병사를 주둔시켰으며, ➥ (7) 藍侯建四侯於殷地, : 남후(藍侯)는 은(殷)나라 땅에 네 제후를 세웠고, ➥ (8) 奄薄姑王誘三監而唆武庚, 幾撓周室, ; 엄박고왕(奄薄姑王)은 삼감(三監)을 꾀고 무경(武庚)을 부추켜 주나라 왕실을 거의 휘어잡았으며, ➥ (9) 徐偃王抑宗周而王潢池之東朝三十六國. ; 서언왕(徐偃王)은 종주(宗周)를 누르고 황지(潢池)의 동쪽을 다스려 서른여섯 나라로부터 조회를 받았다. ➥ (10) 後世, 遼 金 淸者, 皆起於舊朝鮮[地]而有中原. : 그 뒤에 요(遼)와 금(金) 및 청(淸)등이 모두 옛 조선의 땅에서 일어나 중원 땅을 차지하였으며, ➥ (11) 高句麗之方盛也, 强兵百萬, 南擊吳. 越, 北挑幽燕 齊.魯, 恒虎威於漢方. : 고구려(高句麗)가 막 번성할 때에는, 강병이 1백만으로서, 남방의 오(吳)와 월(越)을 치고 북방의 유연(幽燕) 및 제.노(齊.魯)등과 싸움을 일으키는 등 항상 한나라 땅에 위엄을 세웠다. ➥ (12) 百濟則跨渤海而略遼西 晉平, 越草海而占越州. : 백제(百濟)는 발해(渤海)를 뛰어넘어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을 공략하였고, 초해(草海)를 건너 월주(越州)를 점령하였다. ➥ (13) 新羅[則]鯨濤萬里, 陳雄兵於明石, 刑白馬而盟赤關. : 신라(新羅)는 ‘1만 리 길의 거대한 파도를 넘어, 명석(明石)에 뛰어난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백마를 잡아 적관(赤關)의 맹세를 받았다. 》라고 하였다.
☛ 위 본문(本文) “(13-01) ∼ (13-10)”은, 제1편(篇)에서 설명(說明)하였으므로 : 제2편(篇)에서는 “(13-11)”부터 시작(始作)합니다.
---------------------------------------------------------------------
(13-11) 《高句麗之方盛也, 强兵百萬, 南擊吳. 越, 北挑幽燕 齊.魯, 恒虎威於漢方. : 고구려(高句麗)가 바야흐로 기세(氣勢)가 일어날 때, 강(强)한 병사(兵士)가 ‘1’백만(百萬)으로, 남(南)쪽의 오(吳)와 월(越)을 치고, 북(北)쪽의 유연(幽燕) 및 제(齊), 노(魯) 등에 도발하고, 언제나(늘) 한(漢)나라 땅에 위력(威力)을 떨쳤다》라고 하였다.
「강병(强兵)이 “1”백만(百萬)이었다」라는 것은 : 「물론(勿論) 뒤의 일이지만 수양제(隋煬帝)는, ‘고구려(高句驪)를 침공(侵攻)하는데 12군(軍), 113만(萬)을 출정(出征)’시키고 그 후속부대(後續部隊)까지 ‘2’백만(百萬)이 넘는 대군(大軍)을 투입(投入)하고도 궤멸(潰滅)당하는 수모(受侮)를 겪고, 결국(結局) “수(隋) 왕조(王朝)는 소멸(消滅)되었다.”」
「수양제(隋煬帝)가 200만(萬) 대군(大軍)을 출정(出征)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원인(原因)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강병(强兵) ‘1’백만(百萬)이 도사리고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南 擊 吳. 越 : 남(南)쪽의 오(吳)와 월(越)을 쳤다」 라는 말은, 「“당시(當時)의 고구려(高句驪)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결정적(決定的)인 서지적(書誌的) 근거(根據)요, 증거(證據)다.」
「반도(半島) 땅에서 “남(南)쪽의 오(吳)와 월(越)을 치려면, 중원대륙(中原大陸) 한복판을 관통(貫通)해 장강(長江)의 북안(北岸)에 진격(進擊)했다.”」라는 것인데……고구려(高句驪)가 아무리 강병(强兵) ‘1’백만(百萬)을 보유(保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한복판을 무슨 재주로 휩쓸고 남(南)쪽으로 진격(進擊)할 수 있겠나?
아니면 : 「수만(數萬), 수십만(數十萬)의 강력(强力)한 강습상륙전단(强襲上陸戰團)을 투입(投入)하여 수천(數千), 수만(數萬)의 상륙정(上陸艇)으로 해안(海岸)을 돌파(突破), 기마(騎馬)로 번개같이 치고 나갔다는 것인가?」
「오(吳), 월(越)」 땅은 : 「장강(長江)의 하류(下流) 곧 강좌(江左) 땅에 있었던 “만이(蠻夷)”들의 땅인데, 오늘날의 “강소(江蘇)와 절강(浙江) 등지(等地)”를 중심(中心)으로 있었다」라고 전해진다.
이러한 강좌(江左)의 땅을 치려면 어디로, 어떻게 진격(進擊)해야 만이 가능(可能)한가? 「과연(果然) 당시(當時)의 고구려(高句驪)는 어떻게 강좌(江左)의 땅을 쳤을까?」
「北 挑 幽 燕 齊. 魯 ; 북(北)쪽의 유연(幽燕) 및 제(齊), 노(魯) 등을 도발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액면(額面) 그대로 받아들이면 : 「당시(當時)의 고구려(高句驪)는, 유연(幽燕)이나 제노(齊魯)의 남(南)쪽에 영토(領土)가 있었다」라는 뜻이다. 그래야 북방(北方)에 있었던 유연(幽燕)과 제노(齊魯)의 땅을 도발(挑發)하여 위협(威脅)하여 위세(威勢)를 떨칠 수 있는 것이다.
「유연(幽燕)의 땅」은,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말대로라면 :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이 중심(中心)이다.」
「제노(齊魯)의 땅」은,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말대로라면 :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땅이 중심(中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說明)은, 위의 기록(記錄) 내용(內容)과는 배치(背馳)되는 것으로, 곧 「北 挑 幽 燕 齊. 魯 : 북(北)쪽의 유연(幽燕) 및 제(齊), 노(魯) 등을 도발(挑發)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 「반도(半島) 고구려(高句驪)가 요동(遼東)까지 영토(領土)로 했으니, “유연(幽燕)의 땅은, 제와 노(齊, 魯) 땅은, 북(北)쪽이 아니라 서(西)쪽 방향(方向)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옛 기록(記錄)을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헛소리”에 대입(代入)해 보면 : 황당무계(荒唐無稽)해설을 하고,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어버려,
➥ 말 그대로 동서남북(東西南北)도 분간(分揀)하지 못하는 금수(禽獸)와 같은 무리가 되어버리고, “해(日)가 뜨는 동(東)쪽도, 해(日)가 지는 서(西)쪽도 모르는 어이없는 민족(民族)이 된다.” 이런 실태(實態)가 바로 「작금(昨今)의 반도사학(半島史學)의 현주소(現住所)다.」
「반도사학(半島史學)은, 곧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연장(延長)일 뿐이다.」 이들이 바로 민족(民族)과 국가(國家)의 정체성(正體性)을 모호(模糊)하게 만들고, 선대(先代)의 조상(祖上)들을 금수(禽獸)와 같은 무리를 만들고 있는 원흉(元兇)이다.
➥ 「요수(遼水)의 동안(東岸)으로부터는 옛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강토(疆土)였고, 고구려(高句驪)의 강토(疆土)였음은 모든 사서(史書)에서 말해주는 공통(共通)된 내용(內容)이다.」
이곳이 결과적(結果的)으로 보면 : 『동방(東方), 동국(東國)의 땅이며, 동사(東史)의 영역(領域)임은 누구도 부인(否認)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옛 기록(記錄)으로 보면 : 「해동(海東)이 발해(渤海)의 동(東)쪽으로 동방(東方), 동국(東國)의 영역(領域)」이 되며, 「요수(遼水)의 동(東)쪽이 바로 해동(海東)과 겹치게 되고, 이곳이 동국(東國)이 되며, 동사(東史)의 영역(領域)」이 되는 것이다.
➥ 곧 「고구려(高句驪)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이다. 오늘도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위서(僞書)다, ‘진본(眞本)’이다”라면서 패를 갈라 아옹다옹… …하지만, “도나 개나 똑같은 것이다” 「그 속에 기록(記錄)된 내용(內容)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인가?」를, 밝혀내면 되는 일인데,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어설픈 실력(實力) 가지고는 어림 반 어치도 없는 일다.
「恒 虎 威 於 漢 方 : (늘) 언제나 한(漢)나라 땅에 위력(偉力)을 떨쳤다.」라는 것을, 우리는 새롭게 인식(認識)할 필요가 있다. “한(漢)”을 “한(漢)【서한(西漢), 동한(東漢)】”으로 보았을 때, 그곳은 “반도(半島) 땅일 수 없다.”
곧, 「한(漢)」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인데,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고구려(高句驪)가 위력(偉力) 즉(卽), “뛰어난 힘【위대한 힘】을 보여주었다, 또는 뽐냈다.”」라는 뜻이다. 이러할 때 :
반도(半島) 고구려(高句驪)가 중원대륙(中原大陸)을 차지했다?
본시(本是) 고구려(高句驪)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나라였다?
∼에서 무엇이 올바른 것일까? 답(答) 이미 정해져 있다. 곧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 신라(新羅)는 본시(本是)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박이 나라였다」라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그래서 사가(史家)들이 말하기를 : 「고구려(高句驪)는 점점 커져, 수(隋) 때에 이르러, 동서(東西) ‘6’ 천리(千里)나 되는 나라가 되었다」라고 기록(記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바로 이 점을 지적(指摘)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코 헛소리가 될 수 없는 기록(記錄)이다」라는 것이며, 또한 “고구려(高句驪)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증거(證據)요, 「조선(朝鮮)【통칭(統稱)】변방(邊方)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있었다」라는 “서지적(書誌的) 근거(根據)”가 되고도 남는 일이다.
(13-12) 《百濟則跨渤海而略遼西 晉平, 越草海而占越州. : 백제(百濟)는 발해(渤海)를 뛰어넘어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을 공략하였고, 초해(草海)를 건너 월주(越州)를 점령하였다. 》라고 하였다.
➊ 《발해(渤海)를 뛰어넘어 요서(遼西), 진평(晉平)을 경략(經略)하였다.》 : 여러 사서(史書)에 기록(記錄)된 내용(內容)이다. 그러나 정작 후예(後裔)들이라는 반도(半島)의 사학계(史學界)에서는 이를 제대로 설명(說明)하는 사람은 없다.
반도(半島) 조선사(朝鮮史)의 백제(百濟)는, 발해(渤海)는 넘을 수 없는 벽(壁)이었다. 왜냐하면 “고구려(高句驪)”라는 강력(强力)한 나라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百濟)”가 「요서(遼西) 땅인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 땅으로 진출(進出)하기 위해서는 고구려(高句驪)의 묵인(默認) 또는 야합(野合)이 필수(必須)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驪)가 자국(自國)의 서변(西邊)에 백제(百濟)가 진영(陣營)을 설치(設置)한다면?
☛ 【참고(參考) : ㈠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의하면 : 《백제(百濟)의 진평(晋平) 2군(郡)은, 북평(北平)과 유성(柳城) 사이에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아는 20세기(世紀)의 북평(北平)과 유성(柳城)이 아닌 5세기(世紀)∼7세기(世紀)의 북평(北平)과 유성(柳城)을 말하는 것이며, 유성(柳城)은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고, 《조조(曹操)가 오환(烏丸)을 토벌(討伐)하기 위해 출정(出征)했다가 곤욕(困辱)을 치를 때 나타나 조조(曹操)를 구해 준 전주(田疇)가 향도(鄕導)를 자처(自處)했는데, “전주(田疇)”가 무리를 이끌고 숨어 산 곳이 바로 ‘돈황(燉煌) 서(西)쪽이었다.(瓜州)’라고 사서(史書)는 기록(記錄)했고, “조조(曹操)가 백용퇴(白龍堆)에 오르니 유성(柳城)까지가 200리(里)였다. (上徐无山。登白龍堆。去柳城二百餘里)”》라고 하였다.
㈡ 《“오환(烏丸)은 사막(沙漠)의 가운데(沙漠之中)에 사는 종족(種族)”이라 하였고, “유성(柳城)”은 “선선(鄯善)=누란(樓蘭)”을 말하는 것이고, 백용퇴(白龍堆) 서북(西北)에 포창해(蒲昌海) 북안(北岸)에 있는 ‘고대(古代)의 도회지(都會地)’였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㈢ 《자연환경(自然環境)의 요소(要素)들인 지형지세(地形地勢), 기후대(氣候帶) 및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을 참고(參考)하면 :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 땅은 결코 될 수 없다》라는 것이고, 《사서(史書)에서 말하는 백용퇴(白龍堆), 사막지중(沙漠之中), 유성(柳城), 전주(田疇) 등등(等等)을 살펴보면 : 오늘날의 돈황(燉煌)과 포창해(蒲昌海)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라는 것을 자연(自然)스럽게 알 수 있고,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된다.
㈣ 「유성(柳城)과 오환(烏丸)이 오늘날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 등지(等地)에 있었다」라고 말하는 사학자(史學者)는, ‘영혼(靈魂)=혼(魂)’이 없는 자(者)일 것이다. ‘오환(烏丸)=오환(烏桓)’은, 사막지중(沙漠之中)에 산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건 고구려(高句驪)가 또 하나의 강력(强力)한 적(敵)을 불러들이는 꼴이니, “용납(容納)되지 않는 일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요서(遼西) 땅과 백제(百濟) 땅’이 “발해(渤海)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어져 있었다면 얼마든지 가능(可能)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리적(地理的) 형세(形勢)로 보면 :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아래의 것을 보면, 이해(理解)할 수 있는 기록(記錄)이 된다.
➋ 《초해(草海)를 건너 월주(越州)를 점령(占領)하였다》라고 하였으니,
▪ 초해(草海)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草海又名松坡湖、南海子、八仙湖,位於中國貴州省威寧彝族回族苗族自治縣縣城西南隅,因湖中水草繁茂,故名。草海是中國最大的構造岩溶湖泊,也是貴州省最大的天然湖泊。草海是中國特有的珍稀鳥類黑頸鶴的越冬棲息地,每年有400多隻黑頸鶴到此越冬。1992年草海被批准為國家級自然保護區,全保護區面積為12000公頃,主要保護動物黑頸鶴,保護植物為海菜花。》
「초해(草海)」는, 「오늘날의 귀주성(貴州省) 위녕이족회족묘족자치현(威寧彝族回族苗族自治縣)의 현성(縣城) 서남(西南) 모퉁이에 있는데, 호수(湖水) 내에 수초(水草)가 무성하게 자라기 때문에 그 이름이 되었다」라는 것이며, 「귀주성(貴州省)에서 가장 큰 천연(天然) 호박【湖泊 : 호수(湖水) 가운데 물에 드러난 땅】이라고 한다.」
▪ 월주(越州) : 《越州,中國古代的州,中心在今浙江省紹興市。: 월주(越州)는 절강성(浙江省)의 소흥(紹興)이 중심(中心)이다.》
☛ ‘금상첨화(錦上添花) 기록(記錄)’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臺木)이다. 백제(百濟)가 본시(本是)에 사천성(四川省) 등지(等地)에서 강좌(江左)에 걸터앉아 있게 된 것이, 바로 초해(草海)를 건너 월주(越州)를 점령(占領)했기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內容)이다.
▪ 〈운남성(雲南省)의 동(東)쪽 귀주성(貴州省)의 서(西)쪽에 있는 초해(草海)를 건너서, 호남성(湖南省)과 강서성(江西省)을 돌파(突破)하여 절강성(浙江省)의 소흥(紹興)까지도 점령(占領)해버렸다〉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백제(百濟)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디를 통(通)해서 장강(長江)의 남북연안(南北沿岸) 땅을 점령(占領)하여 강좌(江左)에 걸터앉아 있었다」라는 옛 기록(記錄)을 이제는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즉(卽), 북사(北史) 백제(百濟) 편에 대해 여러 번에 걸쳐 우리 카페(Cafe)에 게재(揭載)하였는바 : 참고(參考)하기 위해 논거(論據)와 그 해설(解說)을 복습(復習)해야 한다.
➥ 「북사(北史) 백제(百濟)」 편(篇) 원문(原文) :
《「自 晉, 宋, 齊, 梁 據 江 左, 【註釋 31 : 自 晉 宋 齊 梁 據 江 左, 諸 本 「左」 下 衍 「右」 字, 據 周 書 刪】 亦 遣 使 稱 藩, 兼 受 拜 封。 亦 與 魏 不 絕。: 진(晉), 송(宋), 제(齊), 양(梁)이 ‘강좌(江左)=강동(江東)’에 의거(依據)하고 있을 때, 【註釋 31 : 진(晉), 송(宋), 양(梁)이 ‘강좌(江左)=강동(江東)’에 의거(依據)하고 있을 때(차지하고 있을 때)의 “강좌(江左)”의 「左」자(字)는, 여러 판본(諸本) 아래에는 「右」자를, 주서(周書)에 의거 해 삭제(削除)하였다】또한 사신(使臣)을 보내어 번(藩)이라 칭하면서, 겸하여 봉함을 받았다. 또 위(魏)와도 끊어지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자세(仔細)하게 풀어보자.
➨ 「自 晉, 宋, 齊, 梁 據 江 左, 【註釋 31 : 自 晉 宋 齊 梁 據 江 左, 諸 本 「左」 下 衍 「右」 字, 據 周 書 刪】 亦 遣 使 稱 藩, 兼 受 拜 封。 亦 與 魏 不 絕。: 진(晉), 송(宋), 제(齊), 양(梁)이 ‘강좌(江左)=강동(江東)’에 의거(依據)하고 있을 때, 【註釋 31】…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문제(問題)는 “주석(註釋) 31”이다. 즉(卽), 《註釋 31 : 自 晉 宋 齊 梁 據 江 左, 諸 本 「左」 下 衍 「右」 字, 據 周 書 刪 : 진(晉), 송(宋), 제(齊), 양(梁)나라가 ‘강좌(江左)=강동(江東)=장강(長江)의 동(東)쪽’에 근거하고 있을 때… …제본(諸本) 곧 서로 다른 부분이 있는, 여러 가지의 사본(寫本)·간본(刊本)에 “좌(左)” 아래에 “우(右)”가 있었으나, 주서(周書)에 의거 삭제(削除)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제본(諸本)에는 왜 “서(西)”쪽을 가리키는 “우(右)”자(字)가 기록(記錄)되어 있었을까?」
㈠ 「강우(江右) : 강서(江西) 땅에는, “진(晉), 송(宋), 제(齊), 양(梁)”나라 등이 있었고,
㈡ 「강좌(江左) : 강동(江東) 땅에는, “백제(百濟)가 걸터앉아 있었다”」라는 것을… …숨기고, ‘반도(半島) 백제(百濟)’로 만들기 위한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이 아니었을까?
㈢ 「진(晉), 송(宋), 제(齊), 양(梁) 등의 나라가 ‘백제(百濟)’로 사신(使臣)을 보내어 번(藩)을 칭(稱)하며, 봉(封)함을 받았다. 위(魏) 역시(亦是) 끊이지 않았다」라고 수정(修正), 즉(卽),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 「백제(百濟)는 강좌(江左)에 걸터앉아 있었다」라는 것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연결(連結)해보면 :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 말하는 내용(內容)과 딱 맞아떨어진다.」
‘남제서(南齊書)’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제왕(諸王), 제후(諸侯), 태수(太守)’들에 대한 기록(記錄)과 설명(說明)이 한 치의 오차(誤差)도 없이 맞물려 있다. 이게 바로 역사(歷史)다.
즉(卽),「우현왕(右賢王)·좌현왕(左賢王)·면중왕(面中王)·도한왕(都漢王)·아착왕(阿錯王)·매로왕(邁盧王)·매라왕(邁羅王)·벽중왕(辟中王)·팔중후(八中侯)·불사후(弗斯侯)·불중후(弗中侯)·면중후(面中侯)·정로장군(征虜將軍)·안국장군(安國將軍)·무위장군(武威將軍)·광위장군(廣威將軍)·진무장군(振武將軍)·양무장군(揚武將軍)·도장군(都將軍)·건위장군(建威將軍)·광무장군(廣武將軍)·선위장군(宣威將軍)·관군장군(冠軍將軍)·보국장군(輔國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영삭장군(寧朔將軍)·건무장군(建武將軍)·부마도위(駙馬都尉)·서하태수(西河太守)·광양태수(廣陽太守)·대방태수(帶方太守)·조선태수(朝鮮太守)·광릉태수(廣陵太守)·청하태수(淸河太守)·낙랑태수(樂浪太守)·성양태수(城陽太守)」등(等)에 있어 : 이것은 언급(言及)된 일부(一部)에 한(限)하는 것이다.
결과적(結果的)으로, “백제(百濟)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왕조(土着王朝)였다”라는 것에 이의(異議)가 있을 수 없다.
(13-13) 《新羅[則]鯨濤萬里, 陳雄兵於明石, 刑白馬而盟赤關. : 신라(新羅)는 ‘1’만 리(萬里)의 거대한 파도를 넘어, 명석(明石)에 뛰어난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백마를 잡아 적관(赤關)의 맹세를 받았다.》라고 하였는데,
명석(明石)이라는 지명(地名)은, 일반적(一般的)인 지명(地名)이 아니다. 명석(明石)을 찾다 보니… …「일본(日本)의 병고현(兵庫縣)의 ‘아카시’시(市)라고 한다. 이곳은 일본(日本)의 근기(近畿) 지방에 있는 현(縣)에 속한 명석해협(明石海峽)에 있는 지명(地名)」이라는 설명(說明)이 있다. 물론(勿論) 오늘날의 열도(列島) 일본(日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도(半島) 경상도(慶尙道) 바닷가에서, 열도(列島)의 명석(明石)은, 까짓 ‘1,300리(里)’ 정도(程度)에 불과(不過)한 것인데, 무슨 얼어 죽을 ‘1’ 만리(萬里)? 열도(列島) 땅… …“열도(列島)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 진평왕(眞平王) 5년(年) 조(條)에 : “왜사(倭史)에서 보충(補充)했다”라는 말과 함께 : 《신라(新羅)가 왜(倭)의 서변(西邊)을 토벌(討伐)하였다【新羅。伐倭西鄙。倭史補】》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건 왜곡(歪曲), 조작(造作)일 가능성(可能性)이 크다. 왜냐하면 “신라(新羅)는 서(西)쪽 반도(半島)에, 왜(倭)는 동(東)쪽 열도(列島)”라는 조작(造作)된 역사해설(歷史解說)에 맞춰, “첨삭(添削)”되었을 가능성(可能性)이 크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사(倭史)라니… …“왜사(倭史)”라는 사서(史書)는 없다.
➥ 명석(明石) : 《明石市(日語:明石市/あかしし,羅馬化:Akashi shi)是位於日本兵庫縣南部瀕臨明石海峽的城市,現為中核市.》
○ 규원사화(揆園史話)는, 민족사서(民族史書)임에 틀림이 없다. “위서(僞書)다, 진본(眞本)이다”라고 호들갑을 떨어보아야 남는 것이 없다. 중요(重要)한 것은, 그 기록(記錄)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설명(說明)했지만, 여타(餘他)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을 뒷받침하고 있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했음을 알 수 있다.
➨ 「조선왕조(朝鮮王朝)【조선(朝鮮)을 이루었던 여러 왕조(王朝)를 총칭(總稱)함.】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주인공(主人公)이었으며, 서방(西方), 북방(北方)의 접경지대(接境地帶)에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었다」라는 조선인(朝鮮人)의 절규(絶叫)는, 시공간(視空間)을 뛰어넘어 진실(眞實)임을 입증(立證)하고 있다.
2026년 04월 12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규원사화'를, 위서냐? 진본이냐? 하는 문제는 : 흔한 비유로 : '나무만 보고 그 숲을 보지못하는 어리석음이다'라고 표현할 만하다.
핵심은,
북애자의 규원사화 만설편에 기술된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 바로 동이(東夷), 구이(九夷)며, 한(韓)이었다는 東方(동방) 땅에 살고 있었던 많은 여러 동이족의 역사를 직설로 담고 있는 것이다.
동국(東國)의 여러 사서에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중원대륙왕조'였음을 직설적으로 그려낸 역사서는 없다고 보아진다.
"위서? 진본?"을 끄집어내어 위서로 몰아부치는 자들이 바로 일제시대에 일제에 부역한 대표적인 친일사학자들이다.
* 일제(日帝)는 반도를 통치할 때에, 조선의 사서,민족의 사서, 개인문집까지도 재편집, 재편찬을 거쳐 유포시켰다.
특히 수많은 유물유적, 왕릉발굴, 금석문등등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롤 많은 유물유적들이 갑자기 떼로 발견되고, 발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유물유적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 시기에 모조리 눈을 뜨고 일제학자들에게 신호를 보낸 것은 아닐터이다.
* 철저한 기획과 실행으로 반도 땅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 필자는 1977년 7월 25일에 초판으로 발행되고, 1996년 5월 30일에 십쇄 발행된 : 교역자 이병도. 을유문화사의 삼국사기 원문과 번역본을 가지고 있다. 그곳의 지명은 철저하게 반도 땅으로 추정되어 있고,
애매모호한 것은 일본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곳으로 추정해 놓았다.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들은 모조리 미상(未詳)으로 만들어 놓았다.
* 5000년을 이 반도 땅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다는 엣 왕조와 그 백성들은 모조리 문맹이었다는 말과 같다.
허기야 1900년대의 이 땅의 문맹율이 90% 이상이었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놀랍게 한다.
이러한 실정은 곧 "이 반도 땅을 통치한 군주이하 관리들과 양반, 중인(中人)까지 합해야 10% 미만되는 자들이 90% 이상의 백성들을 지배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 90% 중에는 노비(奴婢) 가 40-50% 이상을 차지했음을 주지의 사실이다.
* "친일사학자 이병도"는 이러한 것들을 알고, 삼국사기를 번역 역주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명을 모조리 이 땅에 집어 넣었다는 가설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친일사학자들 광적인 절규를 : 복애자의 규원사화는 철저히게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 규원사화에서 기록된 내용은, "반도 땅에서 불가능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백제(百濟)가 초해를 건너 월주(越州) 를 점령했다"는 말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백제가 "오늘날의 강좌(江左)의 월주를 쳐서, 占領(점령)했다면 : 그때부터 백제의 강토가 되었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오월(吳越)을 쳤다"는 이 말은, 반도 고구려에서는 불가능한 지형지세다.
[한 가지 가설은 존재한다 : 오늘날의 트럼프처럼 몇 척의 항공모함과 외국의 기지를 이용한 항공전력으로 이란을 초토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 이러한 이야기는 헛소리뿐인 것을... ...인간의 힘으로 당시에는 불가능했던 거다.
* 결국,
백제와 고구려는 기마(騎馬)와 보병(步兵)군 집단을 보내어 쳤고, 점령해버렸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반도 조선왕조를 줄기차게 주장하며, 남한 땅 이곳 저곳을 파헤치며 유물유적을 찾고 있는 꾼들이 있다. 그러나 여지것 결정적인 부장품을 찾았다는 소식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이 땅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다.
* 우리도 이제는 변화에 반응해야 한다.
언제까지 사대주의자들에 손에 민족과 나라의 운명을 맡겨야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