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사람

인연                                                                                                                                                                            이은영     눈빛이 반짝이는 그녀를 처음 만났던 곳은 졸업을 앞두고 있던 해 학교 앞 탁구장이었다. 단정한 교복차림에 입을 앙다문 소녀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공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한 참을 그렇게 서 있던 소녀는 우리에게 탁구 시합을 제의했다. 그녀의 당돌함에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친구들 중 가장 실력이 좋았던 하나가 그녀와 시합을 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 우리는 점심시간이 되면 학교 정문 앞 분식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는 습관처럼 한두 시간씩 탁구장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운동을 즐기기 보다는 앞날에 대한 답답한 가슴을 그렇게라도 해소하지 않으면 무척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 무위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처음 만난 여고생으로부터 한게임 대결을 하자는 맹랑한 요청은 조금은 허무주의였던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게임이 끝나자 소녀는 오늘 국문학과에 입학 면접고사를 치르러 온 학생이라고 간단히 자신을 소개 했던 것 같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대기실에서 오전을 보냈다고 했다. 오후까지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점심을 먹을 수가 없어 탁구를 치러 왔던 모양이다. 어느 해인가 졸업을 하고 모교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녹음이 짙어져 가는 5월, 학교는 변함없는 젊음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신록의 향기를 맡으며 캠퍼스 구석구석 묻어 있는 추억에 젖어드는 순간, 어디선가 왕왕거리는 확성기 소리가 발걸음을 잡아당겼다. 시계탑 앞 광장에서 키가 작고 다부진 여학생이 메가폰을 들고 시국의 부당함과 총장 퇴진을 외치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반짝이는 그 눈빛. 나를 잡아끄는 그 눈빛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기억을 더듬다 그만 소리 없는 웃음이 났다. 세월이 한참 흘렀다.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막내가 하루는 점심 식단표 한 장과 급식도우미 안내장을 들고 왔다. 날짜를 잊지 않고 당번 날이 되자 점심시간에 맞추어 급식소로 향했다. 마침 급식소 앞에서 우리 반 수레를 밀고 나오는 도우미 엄마를 만났다. 분명히 깊이 각인된 반가운 얼굴인데 어디서 보았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긴 복도를 그녀가 끄는 수레를 뒤에서 밀며 그녀와의 기억을 찾기 위해 머릿속을 분주히 헤매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동그스름하고 짧은 퍼머 머리, 뽀얀 얼굴……. 반찬 투정을 하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고루고루 먹어야 한다며 덜어주다 20년도 더 지난 기억과 은테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이 교차했다. 나이가 마흔을 훌쩍 넘어서도 난 혼자서 밥이 먹기 싫어 점심을 자주 거른다. 식당 앞을 지나다 우연히, 커다란 유리창 안쪽에 혼자서 음식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허허해진다. 막상 혼자 음식을 앞에 두고 앉으면 누군가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아 편하게 먹을 수가 없다. 가끔씩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때, 어떤 일로든 초조하게 대기실에서 내 순서를 기다릴 때면 학교 앞 탁구장에서 만났던 그 소녀가 문득문득 생각이 났다. 격정적인 젊은 시절을 보냈을 그녀가 아직도 혼자서 밥을 먹지 못해 탁구장을 서성이고 있을는지. 급식 도우미를 하고 며칠이 지나자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파트 상가 지하에 있는 교회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기를 청했다. 혹시 그녀가 나를 알아보았을까 하는 반가움에 그러마 하고는 상가로 갔다. 그동안 수시로 상가를 드나들었지만 한 번도 지하에 있는 교회로 내려가 본 적은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비록 낡은 건물이지만 소박하게 차려진 실내가 작고 아담한 교회였다. 조용한 실내는 흠잡을 곳이 없이 깨끗하고 물건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걸레질을 하고 있던 그녀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손짓을 한 후 뒷정리를 마저 마치고 돌아왔다. 받침 없이 차 두 잔을 들고 나타난 그녀는 스스럼없이 내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이들 학교 다니는 이야기며 동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기대와 실망이 오가고, 새로운 상상이 펼쳐졌다. 그러다 그녀는 말 꼬리를 돌리면서 “글을 쓰신다면서요?” 하고 물었다.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교회 문화센터에서 여름방학 동안 어린 학생들 공부를 좀 부탁해도 되겠느냐고 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제안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처해하며 생각을 좀 해보기로 하고 일어섰다. 순간 그녀의 반짝이던 눈빛이 수줍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오래전 내가 보았던 눈빛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싱거운 웃음을 지으면서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혹시 점심 하시지 않았으면 같이 식사하고 가세요… 사람들이 같이 밥을 세 번만 먹으면 정이 든다고 하던데요. 그러면 우리는 벌써 두 번째 잖아요…….” 갑자기 오래 동안 참았던 시장기가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