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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우리 어렸을 적에 - 그때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며칠전 협맘님의 요청으로 김소월의 진달래꽃 영역시를 올리면서 진달래꽃 이미지를 첨부할때도
그랬지만.. 창진엄니님께서 폰앨범에 올려주신 진달래꽃을 보니.. 옛날 어렸을 적 참꽃이라 부르며
따먹던 시절이 떠오르는군요. 우정식님께서도 댓글에서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려주셨고..
(옛날 어렸을 적 추억을 불러일으킨.. 창진엄니님께서 폰앨범에 올려주신 참꽃)
저와같이 부산에 거주하는 변호사로 중학교 선배님이 한 분 계신데.. 이분이 아주 조그만 카페에다
"옛날 우리 어렸을 적에" 시리즈를 수년에 걸쳐 올리시고 계십니다. 조금만 다듬으면 책으로 내놓아도
전혀 손색없을 글이건만.. 원체 욕심이 없는 분이시지요. 그 글 중 몇 편을 우리 카페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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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우리 어렸을 적에 (17) | 그때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 2008.03.26.
오늘 아침에는 어머님을 뵈러 가기 위하여 누님과 함께 도시고속도로로 차를 올렸더니 정과정 주위
산자락과 수영터널 입구에는 울긋불긋한 참꽃(진달래)이 만개해 있었고, 터널을 빠져 나오자 도로 가
우측 산 언저리에는 마치 노란 별을 수 놓은 추렴을 여러겹 드리어 놓은 듯 개나리가 만개해 있었다.
아, 그 옛날 지금쯤 노루실 앞 뒷산에는 참꽃이, 또 동네 앞 개울가에는 개나리꽃이, 현재 집 옆에는
살구꽃이, 찬물샘(새미)에는 개복숭아꽃이.우리 못밭에서는 풍개꽃과 매실꽃이 만개해 있었으리라.
찬겨울을 나느라 지친 노란 초가지붕은 약간 수척한 행색을 하고 있을 것이고, 등에 걸친 거적을 벗
어 던지고 외양간에서 나온 황우는 크윽크윽 콧김을 내뿜으며 진한 봄내음을 만끽하고 있었으리라.
아, 지금 내 눈앞에는, 파아란 보리밭과 그 위로 가물거리며 피어 오르던 아지랭이가 , 우리 집 앞 개
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그 노랗고 노오란 개나리꽃들이, 해동한 양지바른 개울가에 콩나물처
럼 노랗게 머리를 내미는 수많은 노란 꼬마리 새싹들이, 그리고 귀 엽고 귀여운 어린 강아지 꼬리 마
냥 복슬복슬한 버들강아지가 마치 한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지고 있다.
우리는 그때 학교를 오다가다 개울가에 있는 버들강아지를 한움큼씩 따다 먹었고,소꼴을 베러 갔다
가 찔레 새순을 많이 꺽어 먹기도 했다. 솟질어른도 소꼴을 많이 뜯으러 다니신 모양인데 그시절 우
리들은 새싹이 돋기 시작하면 소쿠리를 들고 소꼴을 뜯으러 다녔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당시 소는
한 집안의 큰 자산이었으므로 형편이 좀 넉넉한 집안에서는 아이를 소머슴으로 두기까지 할만큼 소
는 아주 귀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농사일을 마친 소에게는 겨울내내 소죽(여물을 뒹겨와
버무려 가마솥에 끓인 것)을 정성껏 끓여 먹이다가 봄이 되면 일찍 돋아나는 풀을 뜯어 이를 여물에
섞어 먹였다. 소는 겨울내내 마른 짚만 먹다가 향기로 운 봄나물(소가 이른 봄에 먹는 풀은 대부분 봄
나물로도 쓰였다)이 양념으로 첨가돠면 코를 벌렁벌렁거리면서 구시를 핥고 또 핥아 먹었던 것이다.
이른 봄에 나는 소꼴(소풀)은 주로 박나물(개망초), 보리뱅이, 씀바귀,냉이 등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어
린 새싹을 뿌리채 뽑아 이를 씻어 여물로 쓰기도 했다. 소꼴을 뜯어러 갔다가 서로가 뜯은 소꼴을 얼
마씩 타놓고 낫치기(낫꼽기)를 하여 멀리 낫을 꼽는 사람이 타놓은 소꼴을 모두 가져가는 놀이도 참
많이 했다. 현재는 게임 도중 지지 싶으면 낫 돌려치기를 하여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키곤 하는 바람
에 우리는 현재와는 미리 낫이 한바퀴 이상 돌아 꼽히면 무효라는 협정을 맺어 놓고 이 게임을 하곤
했다.
그때 우리는 참꽃을 많이도 따 먹었다. 지금이야 수풀이 우거져 참꽃이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때
는 온 산이 민둥산이다 보니 동네에서 보면 산에 핀 참꽃 색깔까지도 훤히 다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함박송이 참꽃을 한아름씩 따서는 붉은 암술을 떼어 누구 것이 여문지 내기를 하기도 하고 정지(부억
) 솥 위 벽에다가 꽃을 꽂아 놓기도 했다. 그때 우리들의 입술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푸르죽죽한
참꽃물이 배어 있었다. 그때 우리에게 참꽃은 군것질이 아니라 봄이 오면 당연히 먹어야 하는 하나의
음식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른 봄 앞산에 참꽃이 피게 되면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마치 새
봄을 맞는 통과의례인냥 서둘러 산으로 올라 가서는 송이채로 한 입에 넣어 우둑우둑 따 먹곤 했던
것이다.
참꽃과 버들강아지 다음 우리들의 먹거리는 피기였다. 그때는 민둥산이 대부분이라 산과 들에 피기
가 참 많았다.우리들(나, 규태, 현재, 해목이)이 초등학교 한 4학년때쯤 하교길에 홈골에 있는 길 바로
위 산에서 정신없이 피기를 뽑고 있는데 웬걸 저 밑 운정못 쪽 에서 제복 입은 경찰관 한 사람이 올
라 오고 있지 아니한가.산에 올라 가 피기를 뽑는 것도 죄가 되는 줄로 알았던 우리들은 큰일났다 싶
어 애써 뽑은 피기를 전부 다 내던지고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경찰관에게로 가서 넙죽 절을 하였다.
나는 그때 경찰관을 생전 처음 보았으나 그 사람이 입은 제복과 제모로 보아 이 사람이 경찰관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콩닥거리는 듯하다.
아, 온 논두렁과 산에 하얗게 일렁이던 피기(삐비)꽃의 모습은 이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아이러니
컬하게도 이러한 피기꽃의 고운자태는 급속한 이농현상과 산림녹화로 인하여 깊고 깊은 또 다른 자
연속으로 회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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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우리 어렸을 적에 (18) | 그때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 2008.04.09.
아침에 운동 (운동이라야 내가 늘 해오듯이 걷거나 조용히 숲과 함께 노는 것이다)하러 앞산(금련산)
에 갔다가 비를 만났다.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는 걸로 보아 비가 제법 올 모양이다. 제법 파랗게 자
란 사방오리나무 잎에 소곤소곤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착 가라앉는 기분이다. 아무도 없
는 내만의 곳에서 이 빗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걷다 보면, 어느 새 나 자신도 대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
린다. 원래 우리도 이 대자연의 일부가 아니었던가. 이 빗소리에 무한한 우주의 정적과 위대한 대자
연의 숨소리가 묻어 나오고 있다.
지금쯤 시골에는, 집옆에 있는 상추밭(채전밭)에 울타리를 치고 그곳에 상추나 봄배추, 쑥갓, 토란, 오
이, 가지 등을 심거나, 갈아 엎어 놓은 논에 물을 가두어 그곳에 못자리를 만들고 있으리라.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머리에는 대로 만든 삿갓을, 등에는 짚으로 만든 도롱이를 쓰고, 논에 물을 가
두거나 못자리를 만들던 농민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이야 거의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때는 우
산이 귀하던 때라 집집마다 삿갓과 도롱이가 있었고, 심지어 비가 오면 이들을 쓰거나 걸치고 초등학
교에 다니던 아이들도 있었다. 특히 해목이는 선친께서 대나무 세공품을 만드셨기 때문에 소먹이러
가거나 등교할때 삿갓을 많이 애용하곤 했다
노루실은 주위 다른 동네보다도 표고가 높은데다가 야트막한 산지로 둘러 쌓인 분지 지형으로 천수
답(봉답)이 많다 보니, 봄과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려야 벼농사가 잘되곤 했다. 비가 어지간히 오더라도
금방 다 아랬쪽으로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릴때 가뭄이 들어 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어른들의 한숨소리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그
런지 나는 지금도 비를 좋아하는 편이다.
나는 비, 그 중에서도 메마른 대지를 촉촉히 적시는 단비와 이른 봄 새생명을 일깨우는 봄비를 가장
좋아한다. 마른 대지가 빗물에 젖으면서 솔솔 풍겨오는 그 향긋한 흙 내음과 봄비에 젖은 그 연두빛
새싹들을 좋아한다.
여름 가문 뒷끝에 내리는 장대비에 와 닿는 빗방울의 그 알알한 촉감과 내 몸 구석구석을 스며드는
빗물의 감촉에서, 나는, 내 몸둥아리가 대자연의 일부라는 그 평범한 진실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아, 그것은 바로 희열이자 환희였다. 그기에는 그 무엇에게도 속박받지 않는 가장 원초적인 자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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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우리 어렸을 적에 (19) | 그때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 2008.04.30.
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 더 해보자.
옛날 우리 어렸을 적에는 소나기가 자주 많이도 내렸다.
갑자기 꽈르르 쿵쿵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냉기서린 바람이 들이치고 멀쩡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
워지면서 우두두둑 소나기가 쏟아지곤 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바깥에서 일을 하거나 소를 먹이다가 습기를 머금은 냉기가 코끝을 스치면, 아 소나기
가 내릴 것 같구나 하는 것을 육감적으로 느끼고 고개를 들어 저 동쪽 운정 못 위 하늘을 바라보면,
으례히 희미한 천둥소리를 동반한 검은 먹구름이 몰려 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시퍼런 번갯불이 쿠르르 쾅쾅 굉음을 내면서 번쩍번쩍 사정없이 구름을 찢어대고, 스산한 냉기를 품
은 한줄기 바람들이 휘이익 휘이익 노루실 골짝을 들이치면, 동녘에 있던 먹구름이 삽시간에 하늘을
뒤덮으면서 굵은 소낙비를 후두두둑 떨어 뜨리곤 했다.
한 여름 햇볕에 데워진 마당에 굵은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면, 고운 흙먼지가 일어나면서 짙
은 흙냄새가 풀풀 날리는 듯 하다가 눈 깜짝할 새 마당에는 마치 물동이로 퍼 부은 듯 빗물이 넘쳐
흐르곤 했다.
천둥이 몹시 심하게 치는 날에는 축담에 화로를 꺼내 놓고 생풀 등을 태워 연기(피뢰연)를 피우기도
했는데, 이는 벼락은 연기를 피한다는 옛사람들의 말씀에 따른 것이었으나 그기에도 과학적인 근거
가 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천둥소리가 지축을 흔들던 그 옛날, 그러니까 내가 열 너댓살쯤 되었을 적 어느 한 여름 날 한 낮에,
노루실 동네 한 복판에 있는 무덤 앞에 있던 장송에 벼락이 떨어져 그 나무에 매어 놓은 암소 한 마
리가 즉사한 적이 있었다. 당시 벼락이 친 이유가 소 목에 매달아 놓았던 요령(요롱)때문이었는 말도
있었고, 키가 큰 장송 때문에 그랬다는 말도 있었다.
직접 목격한 사람의 말로는, 시퍼런 벼락이 소나무 껍질을 벗기며 장송을 빙빙 휘감으면서 아래로 내
리 꽂이자, 그 밑에 있던 소가 외마디 비명소리를 내면서 위로 붕 솟구쳤다가 쓰러졌다고 했다. 당시
듣기는 말로는, 소주인은 가난한 농부로서 푼푼히 애써 모은 돈으로 소 한 마리를 사서 기르고 있었
다고 했다. 안타깝기 짝이 없었으나 다행스럽게도 벼락 맞은 소와 나무는 약용으로 귀히 쓰인다는 소
문에 주변이나 멀리서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이 쇠고기를 많이 사감으로서 그리 큰 손해는 보지 않았
던 듯했다.
벼락 맞은 장송은 그 뒤 시름시름 앓다가 고사를 해버렸고, 당시 부지런하시기 짝이 없었던 우리 할
아버님께서는 이 나무 밑둥과 뿌리를 캐내어 밑둥부분은 속을 파내어 절구통을 만드시고, 나머지 부
분은 관솔로 모아 두시거나 땔깜으로 쓰게 하셨다. 이때 모아 둔 관솔은 밤에 통시를 드나들때나 불쏘
시개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소나기가 내리고 난 후나 소나기가 내리던 중이라도 빗물의 양이 많아지면 물꼬를 트기 위해 삽 한
자루를 들고 밖으로 나서야했다. 논에 큰물이 들면 논두렁이 터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논
은 동네 주변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물꼬를 보기 위해서는 온 동네를 한 바퀴 돌아야 했다. 장대같
은 소낙비를 맞으며 이 논 저 논을 돌다 보면 온 몸은 금방 빗물에 흠뻑 젖어 버린다.
아, 나는 지금도 그때 내 온 몸 구석구석을 스며들던 빗물의 감촉을 잊을 수가 없다. 오감으로 느끼던
이 빗물의 촉감은 가장 원초적인 쾌감이었고, 그때 나는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가장 원초적인 자
유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농사를 지을 때) 이후로 한번도 이러한 쾌감과 자유를 느껴본 적이 없
었던 듯 하다. 나는 그때가 그리워 어느 한 여름 소낙비가 쏟아 지던 날, 집사람의 만류를 뿌리치고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우리 아파트 앞산에 올라 간 적이 있었으나 그 옛날에 느꼈던 빗물의 오감
을 느껴 볼 수는 없었다.
아마 그동안 내 몸뚱아리와 정신이 변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 초가지붕 처마끝에서 마치 기인 고드름을 타고 내리는 듯 하염없이 줄줄 흘러 내리던 빗물과, 피
뢰연을 피워 놓고 대청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낙숫물을 바라 보던 그 시절 우리 가족들의 군상들이 눈
앞에 아른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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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우리 어렸을 적에 (20) | 그때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 2008.05.06.
소나기가 한바탕 야단을 떨고 지나 가고나면, 어디서 왔는지 처마 밑 물길 흐르던 마당에는 굵고 큰
미꾸라지가 꾸물꾸룰 기어 다니고. 그늘진 골목길에는 징거러운 두꺼비가 어슬렁 어슬렁 기어다니곤
했다.
그때 우리는 미꾸라지가 빗물을 타고 하늘로 솟아 올랐다가 떨어졌던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 큰 용
도 하늘로 날아 오른다는데 하물며 이 작은 미꾸라지야 그게 대수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물론 백
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솟질어른과 아재야님은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더라). 그러나 실은 갑자기 큰
물이 져 내려오자 도랑에 있던 미꾸라지들이 그 물길을 따라 마당으로 기어 올라 왔던 것이다.
옛날 그때 노루실에 그렇게 많던 미꾸라지가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때는 미꾸라지 잡
이용 소쿠리를 들고 나가면 잠깐동안 한 떼꺼리의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노루실에서 잡히는 미꾸라지는 다른 동네의 뻘에서 잡히는 미꾸라지와는 달리 잡아 바로 추어탕을
끓여도 맛이 좋았다. 뻘에서 잡히는 미꾸라지 추어탕은 색깔이 검고 맛이 텁텁했으나, 노루실에서 잡
히는 자갈 미꾸라지 추어탕은 색깔이 맑고 그 맛이 담백했던 것이다.
당시 미꾸라지가 지천으로 잡히던 상남에 사시던 우리 고모부님께서는 추어탕을 잡수시고 싶어 일부
러 처가에 오시기도 하셨다.
내가 결혼한 뒤 몇년 동안은 노루실에서 명절을 쇠었는데, 우리는 특히 추석 전날 저녁에는, 거의 반
드시 우리가 직접 잡은 얼마간의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여 먹었다. 호박닢 등 약간의 푸성귀만을 넣
고 끓인 추어탕이었지만, 우리 집사람은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샌가 그 많던 민물새우가 사라지더니, 이제는 노루실에도 미꾸라지가 거의 자취를 감추
어 버렸다고 한다. 벼논에 제초제가 남발되고 전에는 거의 한마리씩만 키우던 소가 이제는 집집마다
서너마리씩 늘어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가축의 똥오줌이 전량 두엄(거름)으로 재활용되었으나, 이제는 집집마다 축사에서 가축의
분뇨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어디서 배웠는지 미끼를 넣은 패트병이 사시사철 온 도랑에
깔려 있으니 어찌 미꾸라지들이 살아 남을 수 있었겠는가.
그 옛날 우리와 우리들 누이들이 그랬듯이 백조가 즐겼다는 미꾸라지잡이도 이젠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듯하다.
두드러기(알레르기)때문에 불쌍하게도 나와 누나와 내 동생은 어릴 적 네발 달린 고기를 잘 먹지 못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의 대부분 채식에 의존하였고, 추어탕은 우리들에 대한 거의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던 것이다. 마치 호랑이가 푸성귀를 찾듯이 단백질이 부족했던 그때 우리들은 이를 보
충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미꾸라지를 잡으러 다녔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때 누가 무엇인가를 먹고 있기라도 하면, 그 무었보다도 그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슬프기
짝이 없게도 그때 우리들의 현실은 그랬다. 지금은 하잘 것 없는 박상(튀밥) 하나, 고구마 한 조각, 밤
한 톨, 떫은 생감 한 입이지만 그때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다 관심을 가지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소나기가 한바탕 내리고 나면, 금방 누런 도랑물이 철철 흐르다가도 얼마 안되어 도랑에는 맑고 깨끗
한 물이 졸졸 흘렀다.
우리는 거기서 세수도 하고, 걸레도 빨고, 소죽물도 기르고, 등말(등멱)을 치기도 했다. 그때는 온 들
과 산이 민둥산이니 조그만 비에도 토사가 흘러내리다 보니 물이 정화가 되어 아주 깨끗했다. 지금이
야 봉답과 밭들이 묵어나고 온 산이 수풀로 우거져 있다
보니, 비가 어지간이 내려도 도랑물이 잘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지금 시골의 도랑은 온통 꼬마
리풀 등으로 덮여 있고, 군데군데 고여 있는 물은 물고기가 잘 살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오염이 되어
있어, 개울에 내려가 손을 씻기조차 겁이 날 정도이다.
초등학교 다닐때 보던 운정 강변은 `모래알로 밥을 짓고`라는 노랫가사처럼 놀기 좋은 곳이었으나, 이
제는 그렇지 못하다. 노루실 못에 지천이던 논고동들도 이제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고 한다.
이른 새벽, 물 빠진 노루실못에서 동생과 함께 눈을 비비며 논고동을 잡던 때가, 그 때 저 동쪽 하늘
을 붉게 물들이던 여명이 우리들의 등을 비추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무심한 세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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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우리 어렸을 적에 (21) | 그때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 2008.05.13.
옛날에는 라디오가 귀했다.
우리집에는 내가 중학교 다닐때 무안 만물상회서 그것도 보리매상을 대고나면 주기로 하고 할부로
구입했다. 금성사 제품으로서 높이가 약 20센티미터, 폭이 약 40센티미터 정도되고, 외관은 하얀색의
플라스틱으로 된 것이었다.
이 라디오가 보급되면서 ``야 언제부터 장마가 온단다, 태풍이 온단다``라는 일기예보가 인구에 회자
되었지, 그 전에야나 뉘 할 것 없이 하늘이 하는 일을 어찌 미리 알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 보니 등하
교길이나 소먹이러 갔다가 비를 만나게 되면 비를 맞는 것 외에는 달리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마당이나 지붕 등지에 곡식 등을 널어 놓고 집을 나갔다가 비를 만나게 되면 낭패가 났다. 비
가 한방울씩 내릴 기미라도 보이면 만사를 제쳐 놓고 급히 집으로 뛰어 와서는, 마당이나 지붕에 널
어 둔 깨나 고추를 쓸어 담고 마당 한켠에 널어 둔 두엄을 헛간에 끌어 모았다. 그때 우리들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이런 일들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이 땅에 살아 왔던 우리 민족은 이런 비설거지를 수천년간이나 해왔고, 이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
을 뿐 지금도 그러하다.
나도 물론이거니와 우리 민족은 타 민족보다 비교적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가 협
소한 반도(국토)나 수천년간 당해 온 잦은 외침때문에 그렇다는 이도 있다. 3면이 바다인데다가 좁은
국토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는 과정에서 또는 잦은 외침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전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이와같은 우리민족의 유전인자가 형성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이러한 성격은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한다.
4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고래로부터 오곡 위주의 농경생활을 영위해 왔고 또 이를 숭상해 왔다.
4계절이 뚜렸하다 보니, 파종과 김매기와 수확 등 농사는 시의적절하게 행해져야지, 게으르거나 방심
하여 그 시기를 놓쳐버리기라도 하면 한 순간 피농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초복을 전후하여 하
루 앞에 심은 벼는 알이 여무나, 하루 뒤에 심은 나락(벼)은 쭉정이가 되는 것을 직접 겪고 목격한 바
도 있다. 24절기의 존재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우리 민족의 급한 성격은, 우리나라의 경제를 급속도로 발전시키게 된 원
동력이 되어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적을 만들어 냈다.
진짜 성질 급한 양반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옛날 우리가 살기 훨씬 그 이전 미리벌 정곡부락에 아주 급한 성격을 가진 노인이 한 분 살고 있었
단다. 이 분은 평소 다른 사람보다도 성격이 급하고 날쌔어야 재산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
던터라, 사위도 당연히 성격이 급한 사람을 삼아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디 자기만큼
성격이 급한 사람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 그러던 중 어느 날 장에 갔다가 그늘에 앉아 땀을 들이고 있
는데, 어떤 사내가 허리춤을 움켜지고서는 급히 그 부근에 있는 통시로 뛰어 가는 것이 아니가.
이 노인은 저 놈이 와 저래 급히 뛰어 가는 가 싶어 통시 안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으니, 아 이 놈이
통시에 들어 가자마자 허리춤에서 주머니 칼을 하나 꺼내더니 대뜸 허리띠를 싹뚝 잘라버리고는 바
지춤을 내려 볼 일을 보는 것이 아닌가.
야 이놈 성격 하나 정말 급한 놈이구나, 이 놈은 우리 딸 절대 굶기지는 않겠다 싶어 즉시 그 집안을
찾아가 청혼을 하여 딸을 시집 보내었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린 뒤 사흘 째 되는 날 밤, 딸의 비명소리가 들려 달려가본 즉슨, 딸이 결혼식을
올린지 사흘이 되었는데도 애기를 낳지 않는다며 사위가 몽둥이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는 너댓 살 무렵, 당시 찬이(규태)의 삼촌이 갖고 다니시던 조그마한 일제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던 사람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도는 듯하다. 그 속에서 분명히 사람소리가 났
으매, 그 누가 그 속에 사람이 들어 있지 않다고 믿었겠는가.
우리들의 누이들이 귀를 쫑그려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 나오던 대중가요를 받아 적던 그때 그 시절은,
이제 머언 먼 동화 속의 얘깃거리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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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필경 우리동네 연못은 지실연못인데.....(충북충주시 산척면)
위글을 읽노라니....
어찌 내 어린날의초상일런지요.
노루실못은 무안에있군요.
우리동네 지실연못에도 논우렁.미꾸라지, 참붕어등등 많았는데.
한여름 가뭄이 심한 해에는 연못의 물이 다 말라 붕어가 우루르했었는데...
내 어린날의 초상.. 동감입니다. 동성맘님!
노루실못이나 지실못이나
이젠 우리들 추억 속에서
어린날의 추억을 담고있는
마음의 연못이네요..
이 선배님의 노루실 못사랑 참 대단해서
몇 편의 글이 더 있던데..
것도 다음에 한번 올려볼까요
참 여기 무안은..
경남 밀양의 무안입니다.
사명대사의 탄생지라 알려져있죠.
천천히 몇일을 두고 읽어 봐야 겠어요. 오늘은 시간이 좀 부족하고요... 단, 중간 이미지컷중에 저희는 "삐비"라고 부르는 풀을 뽑아 속에 있는 고운 솜을 발라먹곤 했거든요. 난중에는 쫀득한 껌이 되었다가, 결국은 작열하게 녹아 내리곤 했지요... 보기만 해도 재밌네요. 감사합니다.
윤창맘님, 봉사활동으로 많이 바쁘시죠.
머리 숙여집니다.
삐비라는게 방언이 많을것 같아요.
저희는 삘기. 필기, 피기..
대충 제맘대로 불렀던것 같아요.
그 위 이미지 찔레도 까먹었고
삘기도 까먹고..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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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맘님, 찾아보니 표준어가 "띠"이군요
띠의 다른 이름은 새, 삘기, 삠비기, 삐비, 모침, 모초,
백모(白茅: 본초경집주), 백모관(白茅菅: 도홍경),
사모(絲茅: 본초강목), 만근초(萬根草: 철령현지)라고도
부르며 지방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기대에 부응하고자
후속타..
올려놓았습니다^^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하게 생각나는 어린날 모습....
잊은 적도 없고 머리속에서 잊혀진 것도 아닌데도 마치 잊고 살아온 것처럼 아련한...
그 어린 시절...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저 자연속에서 먹거리와 놀이까지 해결하고 살았던 참으로 가난했던 시절...
앵두,아카시아꽃, 찔레, 산딸기, 머루, 오디, 밤, 버찌...등을 따 먹으면서
제기,자치기,사방치기, 구술치기,딱지치기,고무줄 놀이, 술레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놀이로 신나게 놀다가
굴뚝에서 피어나는 하얀 연기를 보면서 친구들과 헤어졌던 그 시절...
마른 나무가지에 연푸른 빛이 도는 봄을 재일 좋아하는 이밤 잠시 추억에 잠겨봅니다..
연푸른 빛이 도는 봄..
어린시절을 색채로 표현한다면
저 표현이 딱 어울릴듯 합니다.
협맘님, 시간이 흐를수록..
어린시절의 기억이 더 선명해짐은
무슨 이유일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