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지난주에 인천에서 작업하는 화가 정정엽 선생님을 만났다. 그녀는 지난번에 고대 그리스 기행 전에 같이 참가해서 지중해에 발 담그고 포도주 들이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 실력 있고 탁 트인 작가다. 그런데 나를 보더니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인천 지역의 파출소를 정리 통합하면서 사용하지 않는 곳이 여러 군데 생겼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야 이거 잘 됐구나 싶어서 비어 있는 파출소를 파릇한 젊은 작가들의 작업실로 사용할 수 없는지 문의했단다. 이른바 파출소 프로젝트였다.
파출소라고 하면 우선 밋밋하고 볼품없는 전근대적 실용주의 공간이 떠오른다. 그런 곳을 화가들의 상상력으로 채우고 장식한다고 생각하니 명소랄 것까지야 없겠지만 동네마다 근사한 문화공간이 하나씩 마련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들은 무척 조용한 사람들이다. 하루 종일 인기척도 없이 생각에 잠기거나 말없이 붓을 놀리는 침묵의 천사들이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합창연습을 해서 지역주민들에게 소음공해를 끼치지도 않을 테니, 아마 실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마음 놓고 있었단다.
그런데 빈 파출소 운용문제를 두고 그쪽에서 묵묵부답 몇 달씩 답변을 미루더니 엊그제 그쪽을 지나치다가 들여다보니 비어 있던 그곳에 웬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화가들의 창작공간으로 대여하는 대신 모범운전사들의 쉼터로 사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단다. 그 이름도 촌스러운 ‘파출소 프로젝트’는 영영 물 건너 가버리고 만 것이었다. 공공 건축이나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재활용하자는 이야기는 자주 하지만, 국가차원에서 생색용 전시 행정 차원이라면 모를까 풀뿌리 작가들의 제안은 여간해서 실현되기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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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오르세 미술관도 공공건축이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경우이다. 1900년 파리 박람회 때 오르세 기차역으로 지어졌다가 흉물스럽고 주거 지역에 소음과 먼지를 일으킨다는 이유로 기존 철로를 센 강변으로 옮긴 뒤, 기존 역사는 철거하기로 결정되었는데, 가난한 건 참아도 아름답지 않은 건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한다는 프랑스 시민들의 드센 여론에 밀려서 미술관 건립 쪽으로 가게 되었다. 기차 역사의 기초 구조를 살리는 보존 설계로 현재의 오르세 미술관이 탄생한 것이다. 마침 오르세 기차역의 건축연도가 1900년이니까 넘쳐나는 19세기 중반 이후의 작품들을 전시하면 안성맞춤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지중해의 푸른 파도와 모로코의 햇살을 사랑했던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는 이렇게 말했다.
“화가의 영혼을 훔쳐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의 팔레트를 들여다보아라.”
나는 마티스의 발언을 이렇게 흉내 내고 싶다.
“프랑스 미술의 눈부신 자태를 훔쳐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오르세 미술관을 방문하라.”
오르세 미술관은 천장이 기차역의 천장 골격에다 유리를 씌워서 그런지 무척 채광이 밝다. 꼭 유리궁전에 들어온 느낌이다. 로댕의 <지옥문> 모형과 카르포의 <춤>이 먼저 여행자를 반긴다. 가는 걸음에 교과서에서나 보던 아름다운 작품들이 즐비하다. 유리 구두를 신었다면 모를까, 작품 그림자를 밟기에도 조심스럽다.
가난뱅이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로댕이 좋은 학교 못 가고 프티트 에콜에서 조각 공부를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티트 에콜을 나와 봤자 조각가의 길을 가기는 언감생심, 기껏해야 조각가 공방에서 허드레 일을 대신하는 조수가 되면 인생 잘 풀렸다고 했다. 학교 졸업하면 살림집 베란다 철제 난간, 가로등, 간판 장식 같은 것을 뚱땅거리면서 만들어내는 대장장이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다.
그때 로댕의 숨은 재능과 천재를 일깨우고 조각의 눈의 뜨게 한 선생님이 바로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갓 돌아온 젊은 실력자 카르포였다. 카르포의 <춤> 석고 모형도 오르세 미술관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데, 대리석으로 만든 이 부조의 완성작은 파리 오페라 극장의 정면부에 원작이 붙어있다. 춤은 생명감 넘치는 관능과 경쾌한 움직임이 마치 아폴론의 뮤즈들은 연상케 한다. 뮤즈들이 입을 모아 부르는 노랫소리와 탬버린 흔드는 소리가 귓전을 간질이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한편, 카르포의 제자 로댕이 만든 <지옥문>은 음산한 신음으로 가득하다. 절망과 탄식, 고통과 후회의 뜨거운 바람이 지친 나그네의 그림자를 흩트린다. 스승과 제자의 작품을 나란히 놓고 관찰하니 참 신기한 생각이 든다. 함께 예술의 호흡을 나누었던 두 거장의 대표작이 이처럼 다른 색깔을 낼 수 있다니, 로댕도 걸출한 제자였지만, 카르포도 빼어난 스승이었던 것 같다.
<우골리노>는 지옥문에 포함된 구상이지만 다른 로댕의 작품들이 그런 것처럼 독립작품으로 다시 만들었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석고가 남아 있는데, 로댕이 활동했던 1900년 전후에는 이것이 관례였다. 일단 석고로 만들어서 전시했다가 요행히 구매자가 나타나면 그 다음에 대리석 또는 청동으로 재료를 결정해서 완성하는 것이다. 미리 비싼 재료를 써서 만들어두었다가 팔리지 않는다면 빠듯한 예술가 살림에 여간 낭패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 진정한 조각가는 점토와 석고를 빚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고 여겼다. 진정한 창의는 머리 속의 빛나는 창안에서 나오는 것이지 주물을 굽고 쇠망치를 휘두르며 근력을 쓰는 일은 조수들의 몫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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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골리노는 원래 피사의 백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피렌체와 피사가 적대관계에 놓이자 적국 피렌체와 내통했다가 내란 음모로 탑에 갇혀 죽고 만다. 두 아들과 함께 감금되어서 굶어죽었는데, 어린 아들들이 차례로 죽어가자 자식의 살점을 뜯으며 연명하다가 결국 최후를 맞았다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이탈리아 시인 단테가 지은 [신곡] 지옥편 33장에는 시인과 백작의 만남이 나온다. 단테가 다가서자 우골리노는 고개를 들고 낯선 자를 바라본다. 로댕이 재현한 <우골리노>는 지금 아들의 머리뼈를 붙들고 이빨로 갉아먹는 백작의 모습을 보여준다. 단테는 눈앞에 펼쳐지는 끔찍한 광경에 몸서리치면서 이렇게 기록한다.
“그 죄인은 끔찍한 음식에서 입을 떼자,
뒤통수로부터 갉아먹던 그 머리의
머리칼로 입을 닦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댕은 <우골리노>를 엎드린 자세로 구상했다. 그의 눈빛이 굶주린 승냥이처럼 번득인다. 절망과 증오의 파란 불똥이 야수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이쯤에서 발길을 돌리니 건너편 테라스에 활을 잔뜩 겨냥하고 있는 헤라클레스가 보인다. 로댕의 제자 부르델의 작품 <스팀팔로스의 새를 활로 쏘아 죽이는 헤라클레스>인데, 우리에게도 익숙한 작품이다. 조각은 원래 감상법이 따로 있다. 만져보고 두들겨보아야 원칙인데, 그게 안 된다면 눈에 안 보이는 더듬이를 가지고라도 쓰다듬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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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를 뒤로 쑥 빼고 활줄을 잔뜩 당기고 있는 헤라클레스를 보니, 청춘이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헤라클레스 등 뒤쪽으로 돌아가는 순간 나의 발길이 얼어붙었다. 날카로운 예각을 만들면서 뒤로 젖힌 팔꿈치에서 시작해서 윗팔과 어깨를 거쳐 팔 시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동선이 억센 흐름을 만들면서 곧장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게 아닌가. 이런 기세로 활을 쏜다면 태양이라도 꿰뚫을 것이다.
지금까지 부르델의 헤라클레스를 정면이나 측면에서만 보았지, 작품의 뒤쪽에 이런 멋진 실루엣이 숨어 있을지 꿈에도 몰랐다. 가령 설명서가 까다로운 전자제품을 잘 모르고 쓰다가 우연찮게 요긴한 기능을 발견한 심정이랄까, 이거 땡 잡았다는 기분에 발걸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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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압권이다. 앵그르의 <샘>, 밀레의 <만종> 그리고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등 앞선 시기의 작품들도 볼만하지만, 모네의 <생 라자르 역>, 드가의 <무희>,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올랭피아> 등도 하나 같이 스캔들을 일으켰던 세기의 문제작들이었다. 지금은 교과서에 실리는 점잖은 고전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화가 대접을 못 받던 천방지축들의 끼와 재능이 넘치는 작업들이었다. 파리 변두리의 게르부아 카페에 모여서 담배연기와 한숨으로 하루 종일 탁구를 치고 기성 작가들의 구태를 술안주 삼아 밤을 지새던 살롱전 미역국 전문 인상파 화가들의 일없는 수다가 지금도 들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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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실토하자면, 인상파 패거리 가운데 르누아르는 개인적으로 썩 마음이 당기지 않는 화가였다. 어찌 보면 그의 그림들이 싸구려 키치에 가깝고,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모네 또는 사과 한 알로 파리를 정복한 세잔 등에 비해서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만만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르누아르가 그린 반신 초상 <햇빛을 받고 있는 소녀의 누드>를 보고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뭇잎 틈새를 투과한 봄날의 햇살과 나뭇잎 푸른 그림자가 소녀의 투명한 피부 위를 애무하듯 쓰다듬는데, 순결하기 그지없는 소녀의 표정이 마치 빛의 현신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눈을 그림 가까이 대고 르누아르의 붓질을 뜯어보다가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림에서 몸과 배경의 붓질이 속도가 다른 것이 확연히 보였다. 나의 입술에서 탄식이 흘렀다.
“아, 나의 몸이 르누아르의 붓으로 태어날 수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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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가 키치 화가냐, 아니면 진정한 색채의 개척자냐를 두고 100년 넘게 이어진 미술사학계의 해묵은 논쟁에서 나는 마침내 그가 결코 싸구려 화가가 아니었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도록에 실린 프린트나 슬라이드를 보고 배운 미술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런 작은 깨달음들이 나를 부끄럽게 하고, 또 미술관을 다시 찾게 한다. 지난 번 오르세 미술관에 들렀을 때는 운 좋게도 몬드리안의 초기작들을 모두 모아 놓은 추상 미술의 탄생 특별전을 볼 수 있었다. 형편이 닿는 대로 또 가고 싶다.
첫댓글 딸년이 금속 공예 디자인을 공부 하고 있슴니다, 몇년전 파리 여행중 놀라운 사실을 국제 전화로 알려온 일이 생각 남니다, 미술대 학생 신분이확인 되면 박물관 미술관 입장료는 면제가 된다고 함니다, 국내 학생이던 외국 학생이던 아무나 무료입장. 대단함을 느낄수 있었슴니다. 다시 한번 파리를 여행하고 싶슴니다. 그런데 프랑스 국민들은 싫어요, 사랑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