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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 태동 역사 - 30 - 점점 더 광명으로 나아가는 길과 재림교회의 교육의 장 이 열려짐
점점 더 광명으로 나아가는 길과 재림교회의 교육의 장 이 열려짐
재림교회가 온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더 있었다. 재림교회의 초창기의 지도자들은 재림교단이 갖고 있는 28개의 교리 중에 2번째의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와 4번째 교리인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한 신성과 5번째의 교리인 성령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체의 요소를 제대로 믿지 못하였다. 이렇게 된 근본 요인은 조수아 하임즈가 크리스챤 커넥션 교회의 영향을 받았던 탓에 처음에 믿었던 삼위일체의 개념을 비성적으로 믿으면서 아버지 하나님만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고, 독립된 존재이며, 영원하다고 하였으며, 성령을 하나님의 권능과 에너지 및 거룩한 영향력으로만 믿으면서 인격체로서의 하나님은 배제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죠셉 베이츠와 재임스 화잇에게 그대로 물러졌다. 재임스 화잇은 1846년에 삼위일체를 구식의 비성서적 삼위일체 교리로 말하고, 1869년에는 구식의 엉터리 삼위일체 교리하고 말하였으며, 앤드류스도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과거 영원한 어느 시점에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라는 말을 하였다. 유라이어 스미스도 1865년에 그리스도는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하고, 1898년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시작이 없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삼위일체를 부인하였다. 이런 중에 엘렌 화잇 여사만이 삼위일체에 대하여 개인적 사견을 언급하지 않은 채로 점차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된다.
재림운동 초기의 지도자들을 모두 삼위일체에 대하여 부정적 견해를 취한 반면, 1888년 새로운 개혁 사상을 들고 나온 이들은 어떠하였는가? 이중에 왜고너 목사는 1890년에⟨그리스도와 그의 의⟩라는 책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지만, 그때가 거의 무한한 시간 전이었기 때문에 유한한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사실상 시작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발언은 유라이어 스미스의 발언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하여 애매모호한 말을 할 무렵, 하나님께서는 엘렌 화잇 여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에 관한 출처를 알게 하기 위한 정로의 계단, 산상수훈, 실물교훈, 시대의 소망, 치료봉사의 책을 연달아 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연구하도록 하였고,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으로써의 삼위에 대한 개념으로 인도하였다.
위에서 보게 되는 것처럼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것도 초기 재림성도들은 성령의 인격과 그 분의 완전한 신성을 깨닫지 못함에 따라 1890년대에 엄청난 화를 당하였다. 따라서 1890년대에는 성경과 그리스도의 대하여 많은 저술 활동이 있게 되었다. 구원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할이 지배적인 영향을 갖고 있었다. 이런 영향 때문에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토론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강조하던 무리들로는 웨슬레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치유와 승리의 삶에서와 오순절 교회가 등장하여 성령의 역사에 크게 강조하였으며, 또 다른 분야에서는 진보 성향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내재성과 같은 영적인 이론으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라고 하는 범신론적인 철학 사상이 교회에도 등장하였다. 재림교회 내에서도 이에 대한 견해가 없었으므로 거룩한 육체운동과 범신론 사상이 유포되어 교회가 혼동 속으로 빠지게 되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신성에 대하여 성경을 통하여 스스로 발견하도록 하셨다.
일찍 초기의 재림신자들이 삼위일체의 교리를 갖지 못한 원인은 삼위일체의 교리가 배도한 교회의 산물이라는 반 중세기적 사상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이런 중에서도 엘렌 화잇이 그것에 대한 태도에 변화를 꾀하게 된 것이다. 엘렌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글 속에서 그와 같은 일체의 개념을 갖는 사상을 많이 술회하였다. 예를 들면, 전도법 615쪽에는 하늘에는 아버지와 아들, 성령 등 삼위가 계신다, 616쪽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및 성령 등 영원한 하늘 존재들, 동 617쪽에는 성령을 신성의 제 3위라고 불렀다. 그리고 616쪽에서는 성령은 하나님과 같은 위상에 놓았다. 엘렌 화잇은 1890년대에 재림신자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발언은 예수의 생애에 대하여 시대의 소망에 기록된 “그리스도 안에는 원래적이고 빌려오지도 파생되지도 않은 생명이 있다고 한 말씀이다. 엘렌 화잇은 이러한 말씀을 발함으로 재림교회를 기독교화려는 입장에 섰으며,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이론을 발전시켜 나간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그 사실을 인식하도록 하였었다.
하나님의 선지자 엘렌 화잇 여사의 그리스도에 대한 위의 발언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파장을 가져온 발언으로 앤드리안슨 같은 분은 많은 의혹을 가짐으로써 위의 말이 엘렌 화잇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로 믿지를 않았었다. 화잇 선지는 교회 내에서 계속 삼위일체를 부인하려는 이들이 있는 중에서도 위의 사상이 성경적임을 고수하여 나갔다. 이로 인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회복하여 나아가고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계기 마련을 하였다. 재림교회 내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에 대한 채택은 1931년에 가서야 다니엘스가 대총회장직을 맡고 있었을 때에 최초로 성명을 발표하였다. 1919년 총회에서도 심각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때에, 다니엘스 대총회장은 이런 이론에 대해서는 표결에 붙일 수가 없다고 말함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려 하였다. 대신 시대의 소망을 읽어 성경을 깊이 읽도록 권장하였다. 교리로 책정하기까지는 1950년에 들어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삼위일체에 대한 부인 운동은 2000년에도 일부에 의해서 재기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의 집단이면서도 저들을 보호하고 유일한 백성으로 이끌어나가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도 이처럼 전통에 대한 강한 주장으로 화합시켜 나아가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도 주지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바다.
1888년에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사상과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그를 바라보아야한다는 기별이 주창되었으나, 이 당시 백성들의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의미와 그리스도가 유일한 소망이요 구원이다 라는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백 명 중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였다. 이런 중에서 1891년 화잇 부인과 존즈와 왜고너는 전국을 순회하며 백성들과 목회자들에게 믿음의 의를 전하였다. 화잇은 호주로 떠났고, 왜고너는 영국으로, 존스와 프레스코트는 미국에서 그 기별을 계속 전하였다. 그 후에 올슨과 어윈이 이끄는 대총회에서도 그 기별을 전할 기회를 줌으로써 긍정적인 반응을 보았었다. 1897년에 존wm는 리뷰 앤드 헤랄드지의 편집자의 일도 맡았었다. 그는 1890년대까지 꾸준하게 복된 소식을 교회에 전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1889년 미네아폴리스 집회 후에 개혁사상을 가졌던 몇 분들에게는 정말로 바쁜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 결과가 기대에 미칠 만큼 큰 효험은 없었다. 단지 군데 군데에서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나타났고, 그리스도의 의 가운데서 새로운 자유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가졌던 집회는 과거의 그 어떠한 집회에서보다 유익한 모임을 가졌다고 기쁜 심정과 그 시간들이 저들의 일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고 회상한 이들이 있었다. 1899년에 왜고너는 자신이 1888년에 전한 그 기별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그후 4일이 지나서 존즈는 리뷰지에 “나는 오히려 성도들이 계명을 무시하고 예수 믿음만 가르치는 극단으로 흐를까 두렵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게 14:12의 말씀을 깊이 다루면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라고 호소하였다. 화잇 선지는 재림신도가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의 집회에서 파생된 위기로 3개월에서 5개월짜리 목회자 훈련소를 폐쇄하라는 조언을 가함으로써 더욱 더 필요한 것들을 배워야 할 길을 터놓았다.
교회란 새로운 운동이 휩쓸고 지나가면 많은 변화와 후유증이 있게 마련이다. 대총회장을 역임하였던 버틀러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개혁사상이 대두된 것에 대하여 마치 도륙당한 느낌이었다고 하면서 곧 이어 대총회장직을 사임하고, 부인은 시골로 가서 오렌지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엘렌 화잇에게 편리함으로 진리의 원수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강경한 비난을 보냈다. 화잇 부인은 여러 탄원의 말로 그를 종용하였으나, 그는 끝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시종여일하게 대하면서 그는 4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매 목회자 신임에 대한 문제가 통보되었을 때에, 신임서 회수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의 목회자 자격을 연장하였다. 그는 사임한 후 만 4년 만에 처음으로 설교를 하였으며, 그는 하나님이 왜고너와 같은 인물을 사용하여 갈라디아서 논쟁을 교단에 소개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면서도 그가 믿음의 의와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어 선을 이루려고 하였던 바는 인정할 준비가 되었다고 하였다.
버틀러는 고집불통의 사람이었으나 후에 회개하였다. 1894년 존스를 플로디아 장막회에 불러다가 말씀을 하도록 요청하였다. 1901년에 부인과 사별하고 플로리다 합회장이 되었다가 1902년부터 1907년까지는 남부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1918년 84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엘렌 화잇은 1903년에 열린 대총회에서 나는 버틀러 형제가 다시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을 알고 있으며, 여러분 모두가 그가 겪은 시련을 이해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고, 하나님은 초기 재림운동의 머리가 센 선구자들이 당신의 사역에 참여하기를 바라며, 이분들이 우리와 함께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버틀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으로 심신이 건강한 사람으로 변신되었다는 하지만 1888년에 발생한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못마땅한 면이 있었다. 1909년 대총회장 다니엘스에게 자신은 존스와 왜고너의 기별에서 어떤 빛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그의 생애의 좌우명은 여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엘린 화잇 선지는 이러한 사람이라 하여도 그는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이며, 나는 그가 사명을 다하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글을 보냈다. 한 시대의 유명인사였던 유라이어 스미스도 1888년에 대총회 서기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리뷰지의 편집장 자리는 유지하면서 1897년까지 그 자리를 고수하였다. 그러다가 존즈의 눈부신 활약으로 밀려나 1897년에는 존즈가 편집장이 되고, 스미스는 부편집장으로 물러섰다. 스미스는 자신의 위치가 격감되어 엘렌 화잇이 존스와 왜고너의 사상을 지지하자 스미스는 화잇에 대하여 불신하는 입장에 빠졌으나, 엘렌은 스미스와 반목을 갖지 않았다. 엘렌 화잇은 그에게 계속 권하매 1891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 그리스도 반석에 떨어지는 경험을 가졌다. 그러나 그가 온전히 반석에 깨어지는 경험을 갖지 못한 채로 여전히 율법주의적 경향을 지녔으나 1901년에는 다시 그를 리뷰지의 편집장에 임명하였다. 이때에 엘렌 화잇 여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존즈가 편집장이 되고 자신이 부편집장이 되었을 때에, 그가 지닌 상처는 엄청난 것이었으나 이제 다시 회복된 위치로 나아갔을 때에 화잇 역사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갈라디아서 논쟁을 재기하였다가 그 일로 인하여 편집장에서 해고되는 불운을 가졌다가 이듬해 1903년 70세로 주 안에서 영면하게 되었다.
존즈와 왜고너는 1888년의 모임 후에 승승장구하여 신임 대총회장의 신임을 얻어 재림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하면서 많은 집회를 가졌고, 1897년까지는 많은 활동을 하여 나아갔다. 그러나 저들이 한때는 열성적으로 하나님의 기별을 외치면서 승리하는 기세를 펼쳐나가다가 두 사람 모두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왜고너는 범신론에 빠졌고 또한 여자 문제에 휘어말렸으며, 존즈는 대총회장 자리를 넘나보면서 권력투쟁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1907년에는 존즈는 엘렌과 재림교단과의 철천지원수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상의 경우에서 무엇을 보게 되는가?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교회에 보내온 기별을 명심하게 한다. 믿음의 세계는 한 번의 승리로는 궁극적인 영원한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이기심과 명예를 버려야 하고, 죄악의 올무에 걸리지 말아야 하는 교훈을 주고 있다.
미네아폴리스 대총회는 재림교회의 역사의 큰 하나의 전환점을 일으킨 시점으로 성경을 교리와 신앙생활의 유일한 중심으로 받아들여 예수를 높이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은혜를 재림교회의 신조로 삼고, 율법을 제 자리에 얹혀놓고, 삼위일체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가져 인격을 갖춘 성령 등의 중요 주제에 대하여 연구를 깊이 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계 14:12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갖게 된 것이다. 마귀가 복음의 핵심인 예수의 믿음을 무시하려던 때에 이것을 재발굴함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준 것이다.
1890년에 재림교회에서 가장 힘 있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된 분 중에는 1885년에 젊어서 베틀크릭 대학 총장이 된 프레스코트란 분이 있었다. 그는 1890년에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는 제목의 글을 보고서 자신의 생애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그가 발견한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품성을 본받기에 실패한 고로,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는 권고의 기별을 보냈다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로서 그 놀라운 기별을 받지 않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본인 자신은 그 기별을 받아들여 벅찬 감격으로 여러 번 눈물을 닦아 그후 완전히 다른 생애를 살게 된 것이다. 1890년 12월 23일자 리뷰 헤랄드지에 나타난 기사에는 “교회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열어 죄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감동을 받지 않으며, 재능이 있는 자나 경험이 풍부한 자라도 밝은 의의 태양 빛으로 나오지 않으면 빛을 전할 수가 없다.” … “하나님의 백성이 빛을 발하면 교회와 세상에 예수님을 드러낼 것이고, 우리의 의 되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스스로 갈 길을 가려는 자나 하늘로부터 내려와 온 땅에 영광의 기별을 전하는 천사의 무리를 따르지 않는 자는 버림받을 것이다. 그들이 없이도 하나님의 사역은 성취될 것이며, 그들은 승리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할 것이다.” 재림신자가 된 이들 중에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 이들은 열심히 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였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들어오면 프레스코트와 같이 사람을 변화시키며, 재림교단의 교육까지도 변화시킨다. 그가 베틀크릭 대학의 총장이 된 이후 제칠일안식일교회 교육협회장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유니온 칼리지와 왈라 왈라 대학의 학장도 역임하였다. 그는 재림교회의 교육에 변화를 주도한 인물로 교육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 중에는 종교교육의 강화로 성경 과목을 가르친 일이다. 학업 기간 동안에 모든 성경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결정으로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고 인류의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 1893년 열린 하버 스프링스 연수회에서 첫 시작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 모셔야만 우리의 삶과 교회가 크게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에 달려 있음이 교육으로 크게 작용함을 알고 성경을 교육 과정에 도입하게 된 것이다.
재림교회의 교육기관을 개혁하는 첫 번 계기는 1891년 여름에 개최된 스프링스 교육 연수로부터 시작되었고, 엘렌 화잇과 자신의 아들 W.C. 화잇과 호주로 떠나 그곳에서 1900년까지 머물면서 시작이 되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호주의 아본데일 대학에서 아본데일 기독교 사역자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곳은 미국의 보수적인 재림운동 선구자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개혁에 별반 무리가 없이 진행되었다. 이처럼 엘렌 화잇은 새로운 차원의 재림교회 학교를 설립하여 아본데일을 실물교훈으로 모범의 학교가 되게 하였다. 아본데일의 두 가지 목표로는 첫째가 학생들을 개심하게 하고, 품성을 개발하게 함으로 교육의 목적이 개인에게 영생을 위해 준비시키는 일이었다. 둘째 목표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현지 사회와 전세계 선교사업을 감당할 수 있게 함이다. 이는 학문적 성향을 다루었던 학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면을 추구하면서 우리의 자녀들을 주님 곁으로 인도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1890년대에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엘렌 화잇은 미국 본토를 떠나 호주란 외딴 곳에서 장차 교육을 통하여 교회가 걸어가야 할 방향 모색을 위하여 많은 고민의 밤을 보내면서 씨름을 하였다. 화잇 선지는 20년 동안 재림교회가 침체된 교육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기 위하여 그 동안의 시행착오의 탈을 벗고 학교가 개인의 영성개발과 선교사업에 방향을 잡아 실제적인 교육을 시행하도록 할 것이었다. 그래서 세워진 계획을 시행하기 위한 일이 1894년부터 1899년 사이에 신속히 이루어졌다. 우리가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슨 발전이 있으려면 시간이 걸림을 보게 한다. 하나의 원칙이 정하여지는 것도 그저 우연히 되지는 않는 법이다. 교육의 참다운 목적이 정의되는 일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성경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인 기초에서 밝히고 있다. “성경은 학교에서 다른 과목을 배우는 중간에 양념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성경 자체가 교육의 근본이 되어야 하고, 정규 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하고, 교육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 진정한 영적 성장이 가능하다. 학생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먹고, 그의 보혈을 마심으로써 진정으로 경건한 성품을 계발하게 된다. 영혼을 늘 주의 깊에 살펴서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을 연구하며, 늘 빛 가운데 거닐어야 한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지식을 얻은 것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길이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을 닮아가는 여정이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될 수 없음을 보이고 있다. 세상에서 교등교육이란 것을 성경에서 찾지 않고서는 아무런 유익함이 없다.
우리는 호주의 아본데일이 기독교 교육과 교육에 관한 특별 증언을 모으기 위하여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하여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화잇 선지가 교육에 대한 이론을 집대성하기 위하여 프레스코트와 함께 교육에 대하여 심층 토론을 하여 자신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까치게 하였다. 화잇 선지는 교육의 실제 장소가 도시보다는 시골 지역이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도시의 위험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실무를 충분히 익힐 수 있도록 전세계에서 본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1890년대에 일어났던 재림교회의 교육 발전상 특이한 일은 초등교육운동이다. 1890년대 중반만 해도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육에 치중하였지 초등학교에 대한 관심에는 부재하였던 현상이 초등학교에 대하여 강화되면서 교회가 있는 지역이라면 학생이 6명이 된다 해도 학급을 설치하여 여러 곳에 학교가 신설되어 재림신자들은 부모와 연합하여 자녀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을 장려하여 하나님을 믿는 교사를 채용하여 자녀들이 선교사가 되도록 교육시키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학교 사업이 서더랜드와 피시 메이건과 같은 사람이 개혁의 주체로 화잇 선지자의 권면을 따라 실행에 옮겨 베틀크릭 대학을 시골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 다음에는 이곳저곳에 초등학교가 우후죽순처럼 돋아나서 학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중고등학교에 이어 대학도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 교육 시설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경위가 서너랜드와 피시 메이건이 베틀크릭 대학의 좁은 곳을 미시간 주 베리언 스프링스의 광야 지역으로 옮겨 1900년 임마누엘 미셔러니 칼리지란 이름으로 바꾸고, 또 다시 힐즈버그 대학을 하우엘 마운틴으로 옮겨 태평양 유니온 대학으로 바꾸면서 대학 부지를 확보하면서 재림교회의 교육사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화잇 선지는 이렇게 하여 ‘교육’이라는 책을 1903년에 출판함으로 재림교회의 교육의 제도적 이념을 확립하여 전인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교육의 참 이상을 드높인 인류에게 끼친 최대의 업적을 이룩하였다. 교육이라는 책에서 교육은 하나님과 타인을 위해 봉사함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09쪽에서는 “비록 죗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으나 최고의 기쁨과 최고의 교육을 봉사로부터 온다. 죄가 없는 하늘에서도 봉사를 통해 최고의 기쁨과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교육이 이 세상에서도 내세로도 이어질 것인바 그 중심 사상이 타인을 위한 봉사에 두고 있음을 알게 한다.
카스다에서 발췌분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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