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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제1주일
✠ 루카 4,1-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십니다.
"빵" 과
"권세" 와
"영광"에 관한 유혹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이
바로 이런 유혹과 갈등들을 만나면서 살아가는 곳,
또 다른 광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가 가장 약한 틈을타 우리가 의식 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안으로 스윽
들어오는 유혹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또다른 광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광야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으며,
자신의 욕구를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유익을 위한 선택을 하면서 살라고 하시는 듯 합니다.
과연,
우리의 삶의 현장은 광야입니다.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이 세상안에서 예수님처럼
다른이를 향한 사랑에 마음을 열고,
이웃을 돌아보는 자선을,
물질이 모든것을 해결해주고, 영원할것 처럼 으스대는
이 현실에서 마치 그것들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 할수 있을듯 술렁이는 세상 분위기 속에서 하느님만이 영원하심을 믿는 기도를,
건강과 육신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안 가리고 먹으며 온갖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명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을 잊는 희생, 이런 단식을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이 사순절기간 동안
우리의 생활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그 분 뜻에 얼마나 부합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는 시간이 된다면, 우리가 참으로 그분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하는 시간을 향해가게 되지 않을까요?ㄷ
참으로 매일 부활하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주 너희 하느님을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정 루치아 수녀님)
3월9일 [사순 제1주일]
루카 4,1-13
광야는 ‘이것’ 하나 찾는 장소이다
사순은 주님 앞에 서기 위해 우리 안에 합당하지 않은 무언가를 제거하는 시간입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일까요? 헤라클레스 신화로 시작해보겠습니다.
헤라클레스는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와 뛰어난 미모와 지혜를 지닌 인간 여성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의 영웅입니다.
제우스의 정실 아내 헤라는 제우스의 여러 외도로 태어난 자식들을 매우 싫어했는데, 헤라클레스의 경우에도 특별히 더 큰 분노를 보였습니다.
제우스는 헤라클레스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 헤라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그런데 빠는 힘이 너무 세서 억지로 떼어내야 했습니다.
그때 분출한 젖이 은하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분노한 헤라는 헤라클레스를 인간 세상으로 보내어 인간으로 살게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헤라는 헤라클레스에게 광기를 불어넣어, 그가 아내 메가라와 자녀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헤라클레스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안겼습니다.
그는 이에 대한 속죄를 결심하고, 델포이 신탁을 찾아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지 물어보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유명한 ‘12가지 과업(노역)’이었습니다.
이 열두 가지 과업을 모두 완수함으로써 헤라클레스는 죄를 씻고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12가지 사명을 완수하는 중에 머리가 여러 개인 괴물 히드라도 쳐부숩니다.
헤라클레스는 조카인 이올라오스의 도움을 받아 히드라의 목을 자른 뒤 불로 지져 재생을 막는
전략으로 괴물을 무찔렀고, 히드라의 독을 얻어 화살에 바름으로써 강력한 무기를 확보했습니다.
12가지 노역을 마친 뒤에도 헤라클레스는 신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다양한 영웅적 모험을 이어갔습니다.
아내 데이아네이라는 켄타우로스 네소스의 계략
때문에 헤라클레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네소스는 헤라켈레스에 의해 죽어가면서 히드라의 피가 사랑을 영속시키는 ‘묘약’이라고 말해줍니다.
데이아네이라가 ‘사랑의 묘약’이라고 여겨 헤라클레스의 옷에 바른 독이 그의 살갗에 닿아
끔찍한 고통을 일으켰고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자, 헤라클레스는 스스로 장작더미 위에 오릅니다.
떠밀리는 죽음이 아닌 산 채로 자신을 화장시키는 능동적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헤라클레스가 불길에 몸을 던지자, 제우스는 그의 영혼을 올림포스로 데려가 오랜 고통에서
해방했습니다.
이로써 헤라클레스는 신들 사이에 올라 불멸의 존재가 되었으며, 그를 괴롭히던 헤라 또한 그를 올림포스의 정당한 신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삶을 상징하기도 하고 우리가 어떻게 신이 될 수 있는지도 알려줍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함으로써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에사우에게 다가서기 위해 자신이 평생 해 온 사명의 완수만으로 충분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겸손’을 회복했어야 합니다.
그래서 천사와 밤새 씨름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자기 교만을 태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발을 절뚝일 수밖에 없었고 에사우 앞에서 일곱 번이나 엎어져 “당신 얼굴을 보는 것이 하느님 얼굴을 뵙는 것과 같습니다.”라며 그를 경배합니다.
이에 선물 때문이 아닌 그의 겸손함을 보고 에사우는 야곱을 자신의 땅에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명을 수행하기 전에 광야에서 세 유혹과 싸우기 위해 단식하며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 위함입니다.
자신을 불 속에 던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예수님을 인간성인 세속-육신-마귀를 태워버립니다.
결국 광야의 사순절은 우리가 기도-자선-단식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기 위해 겸손해지는 목적으로 행하는 인간이 신이 되는 과정입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단식하고 있었습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제가 6끼를 굶고 느낀 것은 ‘이틀 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제가 뭐 대단하다고 예수님께 무언가를 해드린다고 착각했을까요?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나의 뜻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되고 자선을 통해 나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며 단식을 통해 하느님께서 양식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 존재도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속에서 유일하게 남는 이 ‘겸손’을 찾는 일이 사순의 의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9일 [사순 제 1주일]
복음: 루카 4,1-13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으로 인해 강건합니다!
젊은 시절, 심각한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참다 참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꼬박 일주일간 링거주사에만 의지한 채 단식을 했습니다.
담당 간호사님은 매정하게도 제 침대 앞쪽에 ‘절대 금식’ 이란 팻말을 달아놓았습니다.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이틀간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습니다만 사흘이 지나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매끼 식사 시간은 제게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옆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분이 병원 밥투정을 하면서 딱 한 숟가락만 뜬 식판을 물리며 ‘그냥 내어가라’ 할 때,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는 ‘저런 저런!’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배가 출출해지는 9시 뉴스 시간 때마다 통닭이다, 족발이다, 몰래 야식을 즐기는 날라리 환자들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야속한 사람들이 다 있던지요.
‘절대 금식’이란 표시판 때문인지 한번 먹어보라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 생리 구조상 하루 세 끼 식사는 지극히 기본적인 것입니다.
단식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 욕구인 식욕에 통제를 가함으로써 목표하는 특정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이어트나 건강진단, 질병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단식은 하나의 목적성을 지닙니다.
사순시기 동안 그리스도 신자들은 작은 몸짓이지만 단식을 통해서 예수님 수난에 상징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 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 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막 걷기 시작한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 중에 악마로부터 받는 유혹도 많겠지만,
그 여정이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공생활이라는 큰일을 앞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가셔서 40일간의 긴 단식침묵 개인 피정을 실시하셨습니다.
피정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진정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어디 있는지 헤아리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빵과 권력과 재물이라는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용감히 맞서 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피정을 보면 우리의 사순절이 어떠해야 하는지 즉시 답이 나오는군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무질서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1주일 강론>
(2025. 3. 9.)(루카 4,1-13)
<유혹이 올 때, 누구든지 기도하지 않으면 백전백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13).”
1)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6-18).”
이 말은, 예수님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 유혹을 똑같이 받으셨고, 그래서 우리의 처지를 잘 알고 계시고, 우리를 가엾이 여기셔서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천사들과는 달리 유혹에 잘 넘어가는 나약한 존재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악마의 유혹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죄는 유혹에 넘어갈 때부터 시작됩니다.
혹시라도 “나는 절대로 유혹을 받지 않는다.” 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퍼센트
교만하고 어리석은 위선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신다는 말은, 유혹을 받을 때 예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도움 받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일에 관한 말씀,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라는 말씀은(마르 9,29), ‘유혹’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만일에 기도하지 않고 자기 힘만으로 유혹을 물리치려고 시도한다면, 그 시도는 ‘백전백패’로 끝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루카 17,1-3).”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유혹’입니다.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일어나야 한다.”가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것보다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고, 남을 유혹하는 자는 매우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데, 남을 유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의도적으로 유혹하는 것은 사탄과 같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즉 유혹하려는 의도로 한 일이 아닌데도 결과적으로 유혹한 것처럼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좋은 것을 찾지 말고 남에게 좋은 것을 찾으십시오.
누가 여러분에게 ‘이것은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하고 말하거든, 그것을 알린 사람과 그 양심을 생각하여 먹지 마십시오.
내가 말하는 양심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입니다(1코린 10,24.28-29ㄱ).”
<여기서 ‘제물로’ 바쳤던 음식은,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의 제물로 바쳤던 음식을 뜻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또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이것은 괜찮아.” 라고 말한 것 때문에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죄를 짓게 된다면, “괜찮아.” 라고 말한 사람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남을 유혹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들 가운데에서 두 번째 유혹은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더 심각한 유혹이 됩니다.
“세속의 권세와 영광은 내가 받은 것”이라는 사탄의 말은 거짓말이지만, 그런 것을 욕심내고 집착하다가 구원의 길을 걷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결과적으로 사탄이 바라는 대로 사탄을 섬기는 것과 같은 ‘죄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