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교
-이동진 선생님께서 쓰셨습니다~
커다란 손
상교는 아무에게나 불쑥불쑥 손을 잘 내민다
그의 손은 누구라도 덮고 누울 만큼 커서 좋다
보자기 같이 온갖 것을 다 담아내는
그의 손은 아랫목 처럼 따듯해서 좋다
가늘고 긴 상교의 손에는
언제나
철 따라 아름다운 것이 들려져 있다
어떤 때는 노랑 장미가 피어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프리지아
그리고 어떤 때는 멸치볶음
- 제가 붂은 거에요 잡숴 보세요
가끔은 새로 나온 동화책이나 동시집
마치 미안하기라도 하다는 듯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린다
상교의 손은 깊어서 좋다
그의 손은 무엇이든 퍼 나르는 삽을 닮았다
그래서 호주머니에서 꺼낸 그의 손에는
하다못해 쓰던 지우개 하나라도 담겨져 있다
그렇게
상교의 손은 하얀 옥양목 이불 홑청을 편듯 넓고 크지만
상교의 손은
해탈한 스님이 마음을 열듯 구석구석 감출 것이 없는 편안한 손이다
그래서 그의 손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부처님 손 같다
따듯한 손
눈물 나는 손
하얀 손수건
아직 아이들이 방학을 하지 않은 철이라 공항은 한산했다
- 뭐 하러 나와? 끝에서 끝인데
개도 가고 소도 가는 미국엘 가는데 일부러 공항까지 나온다는 일이 오히려
멋쩍고 쑥스러운 일이었다
-이 거 조카들 용돈인데 언니 만나면 전해주세요
상교는 커다란 손에 들었던 조카들 용돈 봉투를 내밀며 말문을 열었다
- 소윤이 아빠는 어떠셔? 좀 괜찮으신가?
소윤이 아빠가 위암 진단을 받고는 그 좋아하던 바둑도 멀리한 채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제법 된 것 같아 안부를 했는데
상교는 그 말에 창 밖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는 잠시 아무 대꾸도 못하고 섰던 상교가 대답 대신 눈물을 쏟아낸다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걸 괜시리 물어봤나 싶어 나도 상교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상교에게서 받은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 안 좋아요
몸에 있는 열 탓인지 아니면 먹은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는 힘이 떨어져 그런지
소윤이 아빠는 열흘 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힘들어 한다며 상교는 다시 눈물을 찍어냈다
- 오래 갈 것 같지 않아요
병 수발에 지쳐 초췌해진 상교는 입에 침이 말라 더 말을 잇지 못했다
- 제가 가끔씩 그 이 통장에 돈을 넣어줬어요. 남자가 어떻게 용돈이 필요하다고 일일이
다 말을 하겠어요 때로는 말 못할 일도 있을 것 아니에요.
- 그랬어? 야! 정말 말만 들어도 멋지다. 진짜 부러운 일인걸
어쩌다 만나면 상교는 가끔씩 집안 이야기를 하곤 했다
소윤이 아빠가 건강했을 때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아마도 내가 소윤이 아빠와 동갑내기였기에 입에 올렸을 말들이었다
- 언니 만나걸랑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마세요 괜한 걱정만 할 거에요
그림 공부를 한 상교의 언니 이상경은 상교에게는 언제나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 놓은
초상화같이 다가갈 수 없는 영원한 상징적 존재였다
- 우리 언니 이쁘죠?
하지만
예술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다
상교는 언제서부턴가 혼자서 색연필과 물감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 내더니
그림쟁이들도 하기가 쉽지 않은 개인 전시회까지 가졌다
누가 알아 주건 안 알아 주건 그런 일 따위는 상교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옷깃을 스친 인연
상교는 위도 아래도 없이 사람을 좋아했다
상교는 그가 신는 신발 문수만큼 발이 넓어 그가 만나는 사람은 글을 쓰는
사람 뿐만이 아니라 온갖 계층의 문화인들이 망라된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이 많아 오히려 상교는 고독하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만나면서도 상교가 만나는 사람들을 적어 둔 그의
치부책에는 내 이름은 올라 있지 않다. 이유가 있다면 단지 내가 술을 먹지 못한다는
일일 뿐일 게다.
그러니 나는 어쩌다가 일 년에 한 번 쯤 상교가 전화를 했을 때나 그를 만나 볼 수
있었는데 어렵사리 그를 만나고도 고작 점심밥이나 먹는 일이 전부였다.
그것도 요 근자에는 오랜 동안 연락마저 두절되어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니 상교와 만나면 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드물었다
그리고 설혹 그가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해도 내가 잘 못 알아들으니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는 자연히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들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상교를 만나면 나는 그가 입을 열어 던져 오는 이야기를 그냥 듣고 있기만
하면 되었고 그러노라니 둘이 만나면 상교도 나도 별로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교가 나에게 꾸준하게 연락을 한 것은 내가 그가 쓴 동화책
<옴팡집 투상이>에 그림을 그려 주면서부터 맺어진 인연을 상교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막상 지내 놓고 보니 상교는 나 말고도 그렇게 맺은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을 빠짐없이 소중하게 지키며 살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다
그런데 나와는 평소에 그렇게 말 수가 많지 않던 상교가 말이 좀 많아지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 때가 바로 상교네 둘째인 예쁜 떼쟁이 민지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도시락을 싸 주면 으례 학교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민지가
담임 선생과 마찰을 빚으며 학교 생활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큰 어려움을 몰랐던 상교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꽃 같은 소윤이와 민지가 그 나이가 되도록 잘 키웠고 두 아이가 자라는 것을 이야기 삼아
여러 권의 동화를 쓸 만큼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많았으면서도 막상 당하게 되는
어려운 일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일이 되고 보니 상교는 허둥대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세상 사는 일에 놀 것이 많아지면서 어른들은 문제아가 많아졌다고 말들 하지만 가만히
드려다 보면 문제아 못지 않게 학교 안에는 문제 선생이 많아진 것도 분명한 일이다
학생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해 학교에 가지 않으면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할
선생이나 학교에서는 별 반응이 없다고 했다
상교는 그런 학교의 무관심에 더 속상해 했다
상교는 가끔 나에게 전화를 해서는 동화를 쓰듯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자식 키우는 일에
푸념을 했는데 상교가 그 일로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은 내가 한 때 선생을 한 일이 있기에
그래도 무엇인가 얻어 들을 것이 있나 해서였다
민지 일로 상교는 글 쓰는 일도 접은 채 민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분꽃에서는 분꽃씨가 열린다던가?
잠시 제 길을 찾지 못해 흔들렸던 민지는 시방 엄마의 뒤를 이을 작가가 되기 위해
대학을 다니며 문학수업을 쌓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세월이 지나며 모든 것은 얇아지고 작아졌다
갯수도 줄어들었다
과자봉지 속의 과자도 줄어들고
반창고 두께도 반으로 얇아지고
한 입에 넣으면 목이 메던 찹쌀떡도 메추리알만 해졌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얇아지고 작아지며
우리네 양심도 오그라들고 인심은 말라붙었다.
오직 두꺼워 진 것은 서로 간의 불신이고
넓어지고 커진 것은 우리네 뻔뻔스러움과 욕심이다
하지만 상교는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것과 상관없이
한결같이 글로써만 자기 생각을 이야기 하지
다른 치장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교에게는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다
키가 크고 손이 크니 발이 큰 것 외에
눈에 띄고 드러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는 시계도 없고 반지도 없다
그의 옷은 언제나 검소하고
철 따라 길어졌다가 짧아질 뿐 달라지는 것이 없다
그래서 그의 옷 빛깔은 늘 눈부시지 않은 무채색이다
그가 즐겨 신는 신발도 거의가 운동화다
세상에서 돌아가는 유행이란 애당초 그에게는 관심 밖이다
그래서 상교는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의 보석은
석류처럼 모두 그의 마음 속에 담아 가지고 다닌다
가끔 글을 읽는다
글 쓰는 누가, 글 쓰는 누구를 생각하며 쓴 글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칭찬이 지나쳐 오히려 욕이 될 것 같고
당사자마저 민망해 할 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아슬아슬 해서 발바닥이 간질간질 하고
가슴이 조마조마 해지는
화려한 글이다
하지만 상교에게는 그런 아름다운 글이 어울리지 않는다
인사동 하늘
상교는 늘 인사동에서 사람을 만난다 그래서 그의 머릿속에는 인사동 골목 골목이
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그는 둥근 사람을 만나면 둥근 바람이 되고 네모난 사람을 만나면
네모난 바람이 된다.
하지만 그가 높은 사람을 만나건 낮은 사람을 만나건
그는 항시 낮은 바람이다
그래서 인사동 하늘에는 이상교가 있다
작가 이상교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아버지 사업장이던
강화도에서 자랐다.
세상이 인정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동화작가이자 동시를 쓰고 그림도 잘 그려서
이즈음 그가 내는 책은 모두 그가 그린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상교와 나는 30년지기다
이 글은 이상교 선생이 계간지 '시와 동화'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동화작가로 소개 될 때
상교를 위해서 짤막하게 쓴 이상교 평전이다
상교는 따듯한 마음을 가졌다.
작성자 이동진
첫댓글 우연히 검색을 하다 이상교선생님에 대한 글을 발견했습니다
반가워서 옮겨왔습니다~
^^
좋은 자료를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쌤의 대한 글을 읽으니 좋아요~♡
이동진 선생님은 알고보니 제 언니외 경기도 내 고등학교 미술교사 모임에 함께 였네요. 세상은 넓고도 좁음. ㅎ
선생님에 대해 존중하시는 마음이 담겨 있는 듯 해서
따뜻하게 전해 왔습니다~^^
선생님의 진솔한 삶을 가만히 들여다봐주시니 읽는 이들도 미소를 짓게 됩니다^^
저는 글로만 알고 있던 이상교선생님을
우연히 인터넷 검색 중
이 카페를 알게 되어 가입하게 되었는데
글과 삶이 일치하시는 것 같아 더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