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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조선왕실의 의녀
이장희 추천 0 조회 45 15.02.04 16: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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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의녀

 

의녀는 언제, 왜 탄생했을까 ?

 

 

 

 

 

글˚한희숙 (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조선시대 의녀의 탄생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는 내외법(內外法)이 의식주 모든 면에 적용되었고 특히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듯이 의술 행위에 있어서도 남녀유별을 규정하는 내외법이 지켜졌다.

우리나라 의약의 역사는 수천 년간에 걸쳐 발전해 온 것이지만, 고려시대까지는 여의나 의녀에 대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외법이 시행된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여성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의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의녀들은 당시 최고의 전문직 여성이었다. 가장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이었다. 그러나 양인과 천인, 양반과 상놈의 신분적 차이가 있던 시대에 의녀들은 양반들로부터 상놈으로 차별을 받았다.

 

남녀유별의 시대에는 의녀가 필요해.

 

조선을 건국한 지배세력은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하는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고려왕조의 멸망 원인 가운데 하나를 당시 여성들의 풍기문란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들은 자유로운 여성들 대신 성리학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을 만들기 위해 사대부 여성들의 집 밖 출입과 남성 접촉을 어린 나이부터 엄격히 통제하였다.

안과 밖, 여자와 남자의 활동 공간을 엄격히 구분하는 내외법을 통해 집안 내의 정숙하고 조신한 여성을 만들고자 하였다.

 

조선왕조가 건국되는 해(1392)에 대사헌 남재(南在)는 ‘문무양반의 부녀들은 부모, 친형제, 친자매, 친숙부, 친외숙, 친이모 등을 제외하고는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여 풍속을 바로 잡자’고 하였다. 남재는 사대부 부녀들이 만날 수 있는 남성의 범주를 극도로 제한하였다.

또한, 지배층들은 부모를 추모하는 법회를 막론하고 당시 여성들의 사찰 왕래를 못하도록 하였다. 부녀자의 사찰출입을 금지한 것은 억불숭유정책의 목적보다도 부녀자들의 실절(失節)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또 여성들이 가끔씩 있는 성대한 국가 행사를 보기 위해 외출을 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남성들과 어깨를 스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약장(藥欌): 조선 . 세로27.4×가로100.5×높이138(cm). 나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내외법은 병을 치료하는 데에도 적용되었다. 부인들이 남자 의원이 진찰할 때 수치스러워 자신의 몸을 보이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역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남자 의원들이 부인들을 진맥할 때에는 장막을 치거나 문 사이로 손목만을 내미는 모습이 재연되고 있다. 심지어는 부인의 살결에 남자 의원들의 손이 닿는 것을 꺼려 맥을 보는 팔목 위에 엷은 명주 수건을 덮거나 팔목에 실을 매어 문밖에서 맥을 짚는 극단적인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과연 이러한 방법으로 얼마나 정확하게 맥을 짚을 수가 있었을까.
고려사회에서는 별로 문제시되지 않았던 남자 의원들의 여성치료가 조선사회에서는 새로운 문제로 제기되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 중에서 - 의녀들이 얼굴을 가린채 말을 타고 왕비를 수행하고 있다.

 [출처:2011년 2월 7일 체결된 프랑스 - 한국 간 합의문 및 프랑스국립도서관과 국립 중앙박물관간 체결된 약정에 따라 귀환한 의궤"]

 

의녀의 설치과정은?

 

태종 6년(1406) 3월에 제생원의 지사로 있던 허도(許?)가 의녀를 설치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는 양반 여성들이 아파도 자신의 몸을 남자 의원에게 보여주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치료받기를 꺼리며, 그러다가 심지어 죽는 일까지 생겨나니 창고나 궁궐 내 관아의 어린 여자아이 열 명을 골라 맥박과 침, 뜸의 치료법을 가르쳐서 부인들을 치료하게 하자고 하였다. 여성 직업인으로서 의녀가 처음으로 탄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전에 남의에게 진료를 받아왔던 의료 행위가 사라지고 여성들은 1차적으로 여성에게 진료를 받게 되었다.

 

태종에게 의녀 양성을 제안했던 허도는 다시 세종에게 여의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하였다. 교육을 시키는 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도 안되고 너무 많아도 안된다. 관아의 여자 종 가운데 10세에서 15세 이하의 총명한 어린 여자 아이를 뽑아서 의녀 교육을 시행하였다.

세종은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이지만 여성에 대한 통제를 본격적으로 심화시킨 왕이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교 윤리 서적의 편찬과 보급에 노력하였고,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여 여성의 정절을 더욱 강조하였다. 세종
대에 들면서 남녀유별은 더욱 심화되었고, 여성의 치료를 위해 의녀 양성이 본격화되었다.

 

의녀가 소속된 의료기관은?

 

의녀는 소속기관에 따라 크게 혜민서 의녀와 내의원 의녀로 구분되었다. 혜민서는 궐 밖에 있었기 때문에 궐 안에 있는 내의원, 즉 내의사(內醫司)와 구분하여 외의사(外醫司)라 했다. 그래서 내의원에 소속된 의녀를 내의녀라 하였고, 혜민서 소속의 의녀는 외의녀라고 하였다.

혜민서가 서울의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기관인데 반해 내의원은 왕을 비롯해 궁궐의 왕실 가족들을 위한 최고의 의료기관이었다. 내의녀가 혜민서 의녀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났고,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였다.

 

의녀는 관아의 여종 출신

 

의녀는 신분적으로 최하위계층인 관아의 노비 출신이었다. 당시의 관비(官婢)는 국가재산이며 물건처럼 취급되었다. 남녀의 자유로운 접촉을 금지하는 당시의 이데올로기는 의녀의 선발과정에도 적용되었다.

사대부 여성들은 문밖 활동이 거의 금지된 집안 내의 보호 대상이었던 반면에 노비와 같은 천인은 남녀가 서로 섞여서 일하였다. 당시 집 밖에서 남성들과 접촉하면서 일을 하는 것은 상것들, 즉 천한 여성들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의녀들은 기본적으로 천인인 여종으로 충당되었다. 이들은 남녀유별, 내외법 등의 이데올로기에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관아의 여종들은 국가 소유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필요한 수만큼 선발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국가에서 지정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보내져서 일해야 했다. 능력이나 자질보다 신분이 먼저 고려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의녀는 어떻게 전문화되어 갔나 ?

 

전문성을 중심으로 구분된 의녀

 

의녀들은 진맥, 침과 뜸, 약을 중심으로 전문화되어 갔다. 맥을 짚는 것과 침과 뜸을 놓는 것, 명약처방은 의녀들이 배워야 할 기본 임무였고, 그 전문성을 중심으로 맥의녀, 침의녀, 약의녀로 구분되었다.

 

맥의녀는 이름 그대로 환자의 맥을 짚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의녀이다. 약방제조의 명에 따라 의녀는 환자의 맥을 짚고 그 상태를 파악하고 의원과 의논하였다. 침의녀는 침술을 전문으로 하였다. 침은 침을 놓을 혈 자리를 찾고 그곳에 침을 놓기 때문에 직접 여성의 몸에 손이 닿아야 하며 환자는 몸을 보여야 했다.

요즈음 같으면 연고를 바르거나 약을 먹으면 될 것 같은 부스럼 병에도 당시에는 침을 놓았다. 침자리는 의녀가 독단으로 결정하기도 했지만, 의원의 지시에 따라 침을 놓기도 하였다. 약의녀는 약의 조제와 시중에 힘썼다. 대개 약을 짓는 일은 의녀들이 직접 하지 않고 의원에게 환자의 증상을 얘기한 뒤 의논해서 약을 조제한 후, 정성껏 달여서 환자에게 올렸다.

 

 

침금동상
침을 놓는 자리를 정확하게 표현한 동상이다.높이는 86.0Cm, 머리둘레는 37.8Cm, 어깨폭은 22.5Cm, 팔길이는 40.0Cm 규모다. 2:1의 축적비율로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의녀의 의료 활동과 간호·간병

 

의녀들이 의료 활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의녀의 의료 활동은 진맥을 통한 진찰과 침놓기, 뜸놓기, 명약 등을 기본으로 조산, 간호, 간병 등 다양하였다. 치료와 간호, 간병을 동시에 한 것이다.

 

의녀가 환자를 진맥하여 증상을 의원에게 말하면 의원들은 의녀의 말에 따라 치료방법을 의논하여 병을 치료했다. 의녀들은 왕을 비롯하여 왕실식구들이 아플 경우 그들을 진료하고 간호하기 위해 항상 대기하였다.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왕실식구들의 병에 의녀들은 시녀의 말을 참작하여 진찰하고, 침을 놓고, 뜸을 뜨고, 간호하고 간병을 하였다. 그리고 매우 드문 경우였지만 세자빈이나 공주가 중국에 갈 때, 혹은 왕비나 왕세자빈을 맞이하는 국혼이 있을 때, 왕비의 친잠례가 있을 때에 그들을 수행하였다.

 

 

특설 의료시설에 파견되는 의녀들

 

의녀들은 그때그때 일을 당하여 설치되는 특설의료관청에 파견되었다. 해산 일을 맡는 산실청과 호산청, 시약을 하는 시약청, 종기를 담당하는 치종청 등에 파견된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내의원 의녀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의녀들이 파견되었다. 의녀들은 왕비가 출산할 경우에는 산실청에, 후궁이 출산할 경우에는 호산청에 배치되어 왕실여성의 출산을 도왔다. 산모의 옆에서 산모의 건강과 식사, 갓 출생한 아기의 건강과 수유 상태에 대해 자세히 살피고 의원에게 알리며 조치하였다. 공주나 옹주의 출산도 도왔다.

 

의녀들은 시약청에 파견되었다. 시약청은 왕의 약을 조제하는 기관으로 내의원에 있었다. 여기에 약의녀가 소속되어 의원의 약 조제를 도왔다.

 

의녀들은 종기를 다스리는 치종청에도 파견되어 종기를 치료하였다. 종기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지금은 외과 수술로 쉽게 종양을 도려내지만, 당시에는 신체에 칼을 대는 것은 불효에 해당되어 외과 수술을 하지 않았다. 대신 침으로 곪은 종기를 터뜨리고 새살이 돋아나도록 치료를 했다. 특히 태종, 세종, 세조, 중종, 숙종 등은 종기로 고생하였고, 문종, 성종, 효종, 현종, 정조 등은 종기 때문에 죽었다. 종기는 당시 가장 위험한 질환 중의 하나였다 .

 

 

청금상련(廳琴賞蓮), 혹은 연당야유(蓮塘野遊)라 불림. ‘혜원풍속도첩(蕙園風俗圖帖)’ 중에서, <간송미술관 소장>

 

 

의녀는 직업상 어떤 대우를 받았나

 

의녀들은 의학 지식과 기술, 능력과 지위, 역할과 시기에 따라 그 처우가 달랐다. 그러나 대략 의녀에게는 쌀, 포 등의 급료가 주어졌으며, 이 외에 의료 활동이 뛰어나면 그 공로로 여러가지 포상이 주어졌다. 곧 보너스를 받았는데, 쌀만 받는 경우, 쌀과 포를 받는 경우, 신분해방 즉 면천이 되는 경우, 심지어 면천에다 쌀과 포까지 받는 경우 등 다양하였다. 또 복호라하여 조세나 요역부담을 감면받거나 면제받았다. 면천은 잘 주어지지 않았지만, 왕이나 왕실 식구들의 큰 병 치료에 큰 공을 세우면 받았다.
의녀가 되는 과정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평생을 노비로 사는 것보다는 나았다. 의녀들은 국가로부터 경제적인 혜택을 받았고 일부는 능력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의녀들은 남녀차별과 신분차별로 의원들보다 매우 낮은 차별대우를 받았다. 의녀들은 궁녀나 기녀와 달리 검은 비단 가리마(족두리)를 썼다.

신윤복이 그린 그림에서 가리마를 쓴 의녀가 기녀들과 함께 양반들과 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의녀들의 직급은 어떻게 구분되었나?

 

의녀들은 사환의녀, 내의녀, 어의녀, 차비대령의녀, 수의녀 등 다양한 칭호와 직급을 가졌다. 사환의녀는 자신보다 더 높은 의녀를 따라다니며 보조나 심부름을 하며 의술을 배우는 의녀들이다.

내의녀는 내의원 의녀로, 내의원 의원에게 의서 및 진맥, 침술 등을 계속 배우는 수련의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내의원에는 모두 22명의 의녀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10명이 상급의녀 즉 차비대령의녀로 뽑혔고, 나머지 12명 중 침의녀가 11명, 맥의녀가 1명이었다. 이들은 차비대령의녀 중에 빈자리가 생겼을 때 승차되었다.

차비대령의녀 즉 차비의녀는 왕의 병환이나 왕실 식구들의 병환에 즉각 투입하기 위해 대령하고 있는 의녀를 뜻한다. 차비대령 의녀는 의녀 가운데 의술이 좋고 지위가 높은 의녀로, 원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차비의녀는 내의녀보다 급료를 더 많이 받았고, 여러 가지 수입도 더 많았다. 의녀 가운데 제1인자는 어의녀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을 치료하는 의사를 어의라 했듯이 어의녀는 어의를 보좌하며 왕의 병을 진찰하고 간호하는 의녀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녀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의녀는 수의녀(首醫女)로 의녀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일부. 의녀에 대한 기록을 싣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이름을 남긴 유명한 의녀들

 

조선시대 이름난 의녀들은 누구일까?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관찬사서에는 많은 의녀의 이름이 보인다. 그냥 이름만 나열된 의녀가 있는가 하면 왕의 은총을 받은 의녀도 보이고 특별한 의술을 가진 의녀들도 보인다. 조선시대 의녀들 가운데 이름난 인물들은 누구일까?

 

?중종 대 대장금 :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의녀는 대장금일 것이다. 대장금은 실존 인물로 중종 때 최고의 의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실록에는 장금이라는 이름과 대장금이라는 이름이 동시에 보인다.

이 둘은 같은 인물일까, 다른 인물일까? 현재로써는 대답하기 어렵지만, 이름난 의녀임은 사실이다. 어쨌든 ‘대’가 주는 의미는 뭔가 평범하지 않다. 대장금은 실록 기록만 보더라도 29년 동안 나타나는데 실제는 훨씬 더 긴 기간 동안 의녀 활동을 했다. 대장금은 명실 공히 궁중의 어의녀이자 왕을 돌보는 수의녀였다.

그녀가 한 일은 해산을 돕는 일, 왕실여성의 병을 돌본 일, 왕의 병을 돌보며 대변, 소변의 불통을 진료하는 등 매우 다양하였다. 대장금은 중종 옆에서 간호사 역할 뿐만 아니라 한의사로서의 역할도 했다. 몸이 약했던 중종은 오랫동안 앓아오던 풍증과 그에 따른 합병증, 종기 등으로 고생하였는데 자신의 병간호를 대장금에게 맡겼다. 이후 중종의 승하와 함께 대장금에 관한 기록도 사라졌다.

 

 

뮤지컬 대장금 포스터. 조선 중종대 최고의 의녀였던 대장금이 주인공이다.

 

 

?성종 대 장덕, 귀금, 분이 : 장덕은 성종 때에 유명한 제주도 출신 의녀였다. 그녀는 치통과 충치를 잘 고쳐서 도성 안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눈이나 코 등에 나는 부스럼 제거에도 특별한 능력을 보여 성종이 그를 매우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의술을 보급하기 위해 의녀를 붙여 배우게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죽을 무렵에 그 기술을 자신의 여종인 귀금에게 전해 주었다.

 

귀금도 부스럼을 제거시키는 기술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기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성종은 귀금이 기술을 숨긴다 하여 의녀로 삼아 그 기술을 널리 전하고자 두 의녀로 하여금 따라다니게 하였다. 귀금은 일곱 살 때부터 이 기술을 배워 열여섯 살 때 완성하였다. 근 10년 동안 의술을 익혔던 것이다.

 

분이도 황을이라는 의원에게 의술을 배웠는데, 황을은 특히 독에 중독된 병을 잘 다스렸다. 당시 황을은 의술을 숨기고 있다가 세 차례나 형문을 당한 다음에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쳤다. 의녀 분이의 기술도 남달랐으나, 스승인 황을만은 못했던 것 같다.

 

?선조 대 애종과 선복 : 애종은 선조 때 의술이 특별히 뛰어난 의녀였는데 행실이 바르지 못했던지 선조가 궐내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선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방의 강청으로 입진하여 대비를 간호하였다. 이후 애종은 내의녀의 명부에서 삭제되었는데, 그녀가 실제 창녀였는지 음탕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선조는 그녀의 행동을 괘씸하게 생각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항복은 내의녀들의 대가 끊기게 되었으니 애종을 다시 불러 의녀들을 가르치게 하자고 했다. 애종은 행실은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의술은 매우 인정을 받고 있었다.

 

선복은 시의녀로 유명하였다. 선조 7년(1574) 윤12월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가 많이 아프자 대비를 간호하였다. 그런데 인순왕후가 승하하자 의관들과 함께 탄핵을 받고 옥에 갇혔다가 공회빈이 아프자 곧 석방되어 그를 진찰하고 간호하였다.
이 의녀들 외에도 조선시대 자료에 이름이 보이는 의녀들은 많다. 연산군은 의녀 강금을 궁중에 불러들여 총애하였고, 영조 때 송월은 침술로 이름을 떨쳤다. 치료의 공으로 상을 받은 의녀들은 매우 많았다 .

 

 

후원유연(後園遊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의녀들은 의료 행위 외에 어떤 일을 했을까

 

의녀들은 본업인 의료, 간호활동 외에 여러 가지 잡무에 불려 다니며 시달렸다. 그것은 의녀들이 천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잡무에 종사했을까.

 

?기녀 활동 : 의녀들은 각종 연회나 잔치에 불려 다니며 기녀활동을 했다.
이들을 의기(醫妓) 또는 약방기생이라고 불렀다. 특히 성종 말경부터 의녀들은 기생들처럼 남성들과 어울렸고 연산군 이후 이러한 관행은 더욱 심해졌다.
연산군은 잔치를 열 때 젊은 의녀 수십 명을 뽑아 단장시켜 기녀들과 함께 연회에 참석도록 하였다. 의녀들은 궁궐 안의 연회나 각 관청의 연회, 양반 관료들의 연회 장소에 자주 불려 다녔다. 이에 중종은 의녀들이 연회에 참여하는 것을 법으로 엄하게 금하였으나 이미 한번 흐트러진 풍기는 좀처럼 시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의녀들은 국가의 대소 연회나 양반들의 잔치에 흥을 돋우기 위해 불려 다녔다. 이같이 기녀의 일을 함으로써 약방의녀들을 천시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여형사 활동 : 의녀는 요즘 여형사와 같은 일을 하였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수사하고 탐문하는 간심(看審)활동을 하였다. 간심은 수색과 비슷한 일로 의학상의 기초지식을 이용하여 자세히 살피는 일이다.

특히 여성과 관련된 구타나 살인사건 등 여성의 몸을 조사하고 여성의 시체를 검시하여 사건 담당기관에 보고하였다. 지금도 경찰서에서나 공항 출국 시 여성은 여경이 몸을 검색하거나 탐지하는 것처럼 남녀유별이 존재했던 조선시대에 여성이 여성의 몸을 수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의녀의 수색활동은 사헌부나 의금부의 지휘 하에 행해졌다. 의녀들은 혼인하는 집에 찾아가 사치품이나 부정한 폐물, 예물을 조사하였고, 안방과 같은 여성 공간이나 여성범죄자를 수색하였다.
상궁이나 일반 궁녀들을 체포하거나 수사할 때도 의녀들이 했고, 드문 경우지만 왕실여성이 사약을 받을 경우에도 따라가 죽음의 여부를 확인하였다. 의녀들은 죄인의 체포는 물론 첩보수집과 같은 형사 역할을 한 것이다. 이것은 의녀가 의학적 전문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수사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시종(侍從) 역할 : 의녀들은 궁중 여성들과 관련된 여러 일에도 동원되었다. 왕비가 친잠례를 행할 때에 시종을 하였고, 왕실 여성의 상례에도 동원되어 시위하였다. 왕비나 대비의 행차에 의장을 받들거나 의례를 거행하는데 시종하였다. 의녀들은 글을 알았기 때문에 죽은 궁인의 제문을 언문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기녀들에게 글과 시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의녀들은 실력 차이에 따라 실제 활동이 매우 다양했다. 그러나 의녀들은 당시 최고의 전문직 여성들이었으며, 의료 활동뿐만 아니라 매우 다양한 일을 수행했던 팔방미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한국문화재재단 - Korea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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