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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유학의 사상적 분화 과정
고려말에 수용된 성리학이 조선의 건국이념이자 통치원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는지를 간략하게 정리함.
조선 전기의 정치사를 조망할 경우 이 시기를 주도한 대립적인 주 정치 세력은 훈구파와 사림파라고 할 수 있다.
훈구파는 정치적 속성이 매우 강한 세력으로 정치지향성과 권력 지향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것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과거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학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반면 사림파는 학문세력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으며, 경학 중에서도 성리학의 본원과 그 현재적 의미를 성찰하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는 학자들이 그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모인 하나의 학단이라고 보는 것이 주류이다.
훈구파는 국가 통치의 기본 메커니즘을 ‘일군만민관(一君萬民觀)’에 기초한 ‘제민지배(齊民支配)’에서 구하는 왕권을 강화하는데 있고, 사림파는 「춘추」의 상하 신분적 지배 이데올르기와 대의명분에 기초한 중층적 지배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관학파인 정도전, 권근 계열이 여말 선초의 학계․정계를 지배하면서 현실을 중시하여 상황에 대응하는 창의적인 변혁을 강조하고, 관념적인 의리보다는 인간의 자율적이고 의지적인 측면을 중시하고 문화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학풍 역시 사변적 측면보다는 실용적이고 공리적 측면을 중시하고 경세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관학파의 가장 큰 역할은 조선 창업의 정치이념을 확립한 것이다. 정도전을 비롯한 관학파는 불교도교 및 무교 등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오직 유학으로써 국가의 통치 질서와 민속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숭유억불을 표방하였다.
관학파 학자들은 천명사상을 통하여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 하였다. 정치권력의 근거는 천명에 있기 때문에 통치자는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항상 천명에 따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런 인식에 근거하여 관학파는 천명은 민심을 통하여 확인되며 천심을 현세에 구현하는 정치적 대리자인 군주는 민의의 생육을 책임져야 하는 공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만약 이 같은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민심이 이반하고 결국은 천심의 상실로 귀결된다. 정치는 어디까지나 민을 위하고, 민을 근본으로 하고, 민을 사랑하고, 민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이 나라의 근본이므로 민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민본사상을 통치자에게 요청되는 도덕규범이다.
관학자들은 통치의 주체에 조선은 군주 국가이기 때문에 군주가 통치의 주체가 됨은 당연하다 여겼다. 그러나 유덕하고 현능한 자에 의한 통치를 지향하는 유교적 관점에서는 군주의 역할이 제한 될 수밖에 없기에 국왕의 역할에 대해서 관학파 유학자들은 재상중심론과 군주중심론이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재상중심론은 ‘선왕지제(先王支制)’로 이해되었으며, 군주중심론은 ‘시왕지제(時王支制)’로 이해되었다. 선왕지제는 유교의 이상인 중국 고대의 정치제도이며, 주례(周禮)에 구현된 권력주조이다. 여기서는 재상을 정점으로 하여 업무가 분화된 관료체제가 행정의 실무를 맡고, 국왕은 정치에서 초연한 상징적 존재에 가까웠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과 태종의 육조직계제는 각각 재상중심론의 선왕지제와 군주중심론의 시왕지제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개국주도파인 정도전이 재상중심론인 선왕지제를 구상하였다면 하륜․변계량․양성지 등 개국 후 참여파는 군주중심론의 시왕지제를 주장하였다. 관학파 유학자들은 언로(言路)의 개방을 통한 공론에 입각한 통치를 강조하였다. 언론의 개방은 군주의 독산과 독재를 예방하고 민의와 민정을 상달시킴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사림파는 「춘추」에 투영되어 있는 군신간의 지배-복종을 대의명분으로 삼는 이데올르기를 가지고 왕조의 정치를 보다 이념적이고 이상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희가 구상한 중층적 지배구조 위에 군주를 안주케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성종조 사림파의 초기적이고 미숙한 개혁론에서 제기된 방안이나 중종조의 개혁정국에서 제기된 본격적인 개혁론들은 모두 그런 이념과 이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지치(至治)’ 곧 ‘요순삼대지치’의 실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군주는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 군주의 학문과 덕성 함양에 힘을 기울였다. 모든 구체적인 개혁안들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절차로 직면하였으며 그 결과는 네 차례에 걸친 사람파의 피화로 현실화하였다.
사람파가 ‘음사(淫祀)’로 규정한 기왕의 사전체체(祀典體制)를 청산하고 그 자리에 성리학적 사전체제를 앉히는 일은 왕조 신민의 의식체계를 바꾸는 매우 획지적인 개혁에 속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개혁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성리학의 이해체계를 조선의 풍토와 조선인의 체질에 맞게 변통하고 이를 널리 보급하는 것은 응당 수반되어야 할 노력이었다. 그리하여 실천적, 실용적 수준의 조선성리학을 ‘리기심성론(理氣心性論)’ 수준의 형이상학으로 끌어 올리는 것은 사림파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과제의 하나였다.
서경덕은 우주가 겸선악의 기로만 충만해 있다는 일기장존론(一氣長存論)을 근거로, 현실의 모순은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해 현실 개혁보다는 안빈낙도의 처사적 삶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반해 조식은 순선의 리(理)와 가선가악(可善可惡)의 기(氣)는 대립적 관계에 있으며 리(理)의 부각을 위해 악(惡)에 흐를 가능성이 있는 기(氣)는 궁극적으로 소멸되어야 한다는 리기분대론(理氣分對論)을 토대로 적극적인 개혁의지를 표명하며 모순 된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면모를 나타냈다. 또한 이황은 리(理가) 절대성과 작용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리․기는 서로 올라타고 따르는 관계에 있다는 리기수승론(理氣隨乘論)에 입각해, 모순 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탄력적인 현실 대응 자세를 확립하고 있었다. 한편 이이는 리(理)의 보편성은 인정하되 기의 작용성만 보장하는 가운데 기발리승(氣發理乘)․리통기국(理通氣局)을 골자로 한 리기묘합론(理氣妙合論)을 토대로, 모순 된 현실에 대응하기보다는 통합에 목표를 둔 포용적 자세를 견지했다. 또한 성혼은 리(理의) 주재성을 용인한 가운데 理․氣의 동반적 작용성을 부각한 리기일발론(理氣一發論)을 근거로, 분별과 포용을 융합하기 위한 자세를 지향했다.
이것이 바로 화담학(花潭學)․남명학(南冥學)․퇴계학(退溪學)․율곡학(栗谷學)․우계학(牛溪學)의 학문적 성격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고, 그들의 학풍을 계승하는 학파의 분화를 초래하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이것이 조선중기 사림파의 분화와 당쟁의 시발이다-
남명학파는 분대론의 세계관에 근거한 군자소인론의 정치운영론을 제시하며 군자인 사림의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소인인 훈척세력의 잔재는 철저하게 척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함께 퇴계학파는 원칙적으로 수승론에 입각한 조제탕평론을 내세우며 사림의 지배에는 원칙적으로 동조하면서 정치세력 내부의 군자 선별을 통한 역학관계를 강조했다.
반면 이이가 보합론의 정치운영론을 제시하고 나섬으로써 사림의 정치적 분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보합론은 사람의 동질성을 앞세운 통합에 주되 목표를 둔 것이기는 하지만, 정치적 우열만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비를 우선 하는 남명․퇴계 학파의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사림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하게 된 것이 여기에 있다.
성혼의 리기일발론은 그러한 사림의 분열 상황을 타개하고 통합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가 이이와 논변을 전개하는 동안 묘합론에 수긍하면서도 이황의 수승론을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한 배경도 그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사림의 통합을 추구하는 보합론을 본질로 하기 있기 때문에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 및 정치적 결속에 기여하게 된다.
성리학 사상이 지향하는 미래적 가치와 현실의 집권세력이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 사이에는 간극이 늘 존재해 왔다. 이양자의 갈등이 곧 정치적 변란으로서의 사화로 형상화되어 여러 차례 나타났다. 특히 문정황후 수렴정치기의 불안전한 정치적 분위기는 훈구파․사림파 사이의 갈등뿐만 아니라 사림파 내부의 갈등까지 유발하게 하였다. 곧 재조사림과 재야사림 간의 ‘출처거취(出處去就)’를 둘러싼 논쟁이 그 가운에 하나였다. 이는 부도덕하고 혼탁한 정치적 환경에서 출사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처신인가 아닌가의 문제로만 수렴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곧 ‘출처’와 ‘거취’라는 행위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유발하게 한 철학의 문제로까지 확대해서 풀이될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원적 논점들은 후일 붕당정치 전개과정에서 더욱 강화되고 확장된 모습으로 재등장하게 된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황과 조식의 현실 대응방식의 차이에 연유하는 이 갈등은 선조․광해군 대의 남인과 북인의 정치적 사상적 대립, 갈등의 진원이 되었던 것이다.
남인은 영남지역의 남인과 근기지역의 남인으로 대별할 수 있다. 두 집단은 학문적 관심이나 현실에 대한 대응자세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영남 남인으로는 유성룡․김성일․정구 등 이황의 직전제자 그룹과 그 다음 세대로 장현광․정경세․김응조․홍여하․이현일․정만양 형제 등을 들 수 있다.
근기 남인의 경우에는 이황의 영향 정도보다는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체계에 비판을 가한 점에 특징이 있었다. 허목의 육경고학, 윤휴의 주희 비판, 유형원의 변법논리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들은 주자학을 절대시한 서인들 또는 남인 일부와 일정한 인식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를 모집단으로 하는 북인은 조선 중기 사상사에서 가장 개성 잇는 학풍을 소지한 세력이라 할 수 있다. 학문적 연원이 되는 조식이나 서경덕이 현실 비판자의 위치에 있었던 처사적 삶을 살았던 만큼 권력의 중심에 섰을 때도 북인들은 현실에 대한 타협과 공존보다는 비판에 더욱 치중하였다. 광해군대를 정점으로 중앙정계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즉위라는 변수에 의해 획득된 것이므로 지지기반이 약한 ‘소수정권’에 머물렀다. 특히 왕통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폐모살제’라는 의리, 명분상의 반발에 부닥쳤고, 남인과 서인들이 ‘타도북인’을 외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들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거의 몰락하게 된다. 폐모론에 적극동조하지 않은 소북 가운데 재국으로 명망이 있던 인재들이 살아남아 인조정권에 참여하였고, 북인의 사상과 학풍은 윤휴․허목 등 근기 남인과 실학자인 이익․유형원 등에게 일부 계승됨으로써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다.
17세기 후반 형성된 노론은 조선 중․후기를 주도하는 정파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는데, 산림계열의 이념에서 정치명분을 구하였고, 척신으로 대표되는 중앙의 벌열세력들이 구성의 주축을 이루었다. 노론의 정치사상의 골격은 송시열에서 마련되었고, 주희 도통론과 대명의리론을 표방하였다. 유력한 정파로서의 지위를 점유해갔던 노론은 18세기 정치․사회적 변동에 직면하여 내부의 변화도 진해되었는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서울의 급속한 도시화와 경향 분기의 심화 그리고 사림질서를 부정하고 이에 대신하여 본격화하기 시작한 탕평책의 시행 등 새로운 상황은 노론 내부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배경위에 촉발된 호락논쟁은 노론 내의 문파 분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송시열의 이념체계를 충실히 조술한 것은 호서지역에 기반을 둔 호론으로 권상하․한진원 등을 주요 계보로 한다. 낙론은 김창협․이재 등을 중심으로 서울 학계의 학풍을 대표하며 18세기 이후 중앙정국에 노론의 주류를 형성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노론의 의리론을 공유했지만, 그 이면에 박학과 개방적 학풍을 지니고 있었다.
호․낙의 두 계열은 경세론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호론은 민생의 위기 해소를 호포론을 우장하였고, 엄격한 군자소인론을 통한 노론 의리를 중심으로 조제를 거부하고 노론만의 정국운영을 주장하였다. 낙론은 노론 의리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되 소론과 남인도 재주에 따라 등용하는 조제론적 방안을 개진하였다. 또한 사회대책으로 균분과 대동의 기치를 내세워 균역의 실현을 위한 결포론과 서얼 허통 등을 제기 하였다. 낙론은 상대정파에 대한 선별적적 포용이라는 기치를 걸고 자신들의 정치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고, 탕평정국에서 노론의 주류로 활동할 수 있었다.
16세기 말 이래 군주들이 체화하는 저치사상은 군주의 특수한 지위와 결부하여 ‘군주성학론’의 이름으로 제시되었다. 군주 성학은 군주가 성인의 능력을 갖출 수 있는 이론과 밥ㅇ법을 제기한 학문론이었는데, 조선 전기 이래 계속 강조되어 오다가 동서붕당기에 이르면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형식으로 구체화되었다.
「성학십도」에서 제시하는 군주성학론은 거경(居敬)을 통한 군주의 족자적인 수시(修己)를 중시하였으며, 또 치인(治人)보다는 수기에 더 치중하는 특성을 보였다. 반면 「성학집요」에서는 군주의 수기과정에서 신료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함을 강조하였으며, 성학의 학습과정에서 수기와 함께 치인의 과제를 동시에 중시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성학십도」에 비해 「성학집요」의 군주성학론은 치인의 과제를 더 중시하고 군주 학습에서의 신료의 개입을 더 개방한 점이 특성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17세기 들어와 이전보다 정쟁이 격화되고 사성의 변화가 여러 면에서 일어나면서 군주성학론도 여러 형태로 분화되었다. 이황과 이이 두 사람이 체계화했던 군주성학론은 후학들에 의해 여전히 계승되고 주목되며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지만, 이때의 정치상황을 반영하며 군주성학론 도한 새로운 내용과 체계를 갖추며 발전하였다. 주자학에 절대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서인․노론계의 송시열,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대했던 북인계 남인의 윤휴 정치적 보합과 탕평을 강조했던 박세체 등은 각기 족자적인 내용의 군주성학론을 제시하였다.
송시열은 이이의 군주성학론을 계승하면서 한층 더 그 내용을 강화하였다. 그의 군주성학론은 군주의 한 마음에 정치의 성패, 치란(治亂)이 결정되므로 성학학습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의 ‘군주일심성패론(君主一心成敗論)’으로 압축 할 수 있다. 군주의 마음이 정치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주장의 실내용은 군주가 공론을 긍정하고 수용하여 공론에 따라랴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군주의 판단과 행동에서 군주의 독자영역을 크게 인정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이 견지에서 정령의 집행과 백관의 총령을 현인 재상에게 맡겨야 한다는 재상정치론을 제시하였다. 송시열의 군주성학론은 신료가 천리와 인용을 경계로 군주를 압박하여 군주권을 제한하고 통어하고자 하는 메커니즘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윤휴는 주자의 주요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근거로 효치론의 군주성학론을 제시하였다. 효치론은 「효경(孝經」에서 원용한 정치론으로, 여기에는 국가를 일가로 여기고 군주는 그 가부장으로 그리고 백성은 그 일가의 구성원으로 생각하였으며, 효의 실천을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군주의 지위와 역할이 그러하므로 군주성학은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리기심성론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그는 군주가 나라를 제대로 유지하고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것이 효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군주의 적극적 사공을 강조하는 의식이 여기에 깔려 있다.
박세체는 격화되는 정쟁을 약화시키고 청에 대한 복수의 대의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적 과제라는 생각 위에, 군주권의 강화와 그에 기반 한 탕평정치를 구상하였다. 그는 이와 연관하여 군주성학의 방법을 모색하였으며, 이황이 중시했던 ‘주경(主敬)’의 방식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군주의 학습과 덕성의 함양, 군주로서의 자질을 기름에 있어서 신료들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군주의 독자적인 노력과 수양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이 거기에 가로놓여 있었다. 18세기로 들어서며 박세채의 논리는 영․정조의 정치사상 형성에 큰 자극이 되었으며 또 탕평정치를 이끌어 감에 주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2. 사림의 분화로 나타난 조선 각 시대 주요 당인들
정당(당파) |
주요 당인 |
비고 |
선조 때 | ||
동인 |
기효원, 김우옹, 유성룡, 허엽, 이산해, 정유길, 정지영, 우성전, 이발, 김응남, 송응개, 송응형, 허봉, 박근원, 정대년, 윤승훈, 이기, 김귀영, 홍적, 노수신, 정극례, 백유양, 노식, 노직, 송언신, 이호민, 홍여순, 남이공, 이원익, 이홍로, 정온, 정개청, 기자헌, 유영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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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 |
이이, 성혼, 심의겸, 박순, 김계휘, 정철, 윤두수, 윤근수, 구사맹, 홍성민, 신응시, 백유함, 박점, 이해수, 구봉령, 조헌, 구성, 조흡, 송익필, 이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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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
유성룡, 이원익, 이덕형, 이수광, 윤승훈, 이광정, 한백겸, 김우옹, 정경세, 김응남 |
대서인 온건파 |
북인 |
이산해, 유영경, 기자헌,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 홍여순, 임국로, 이이첨, 정인홍, 남이공, 김개국, 이기, 문홍도, 채겸길, 정영국, 이경국 |
대서인 강경파 |
광해군 때 | ||
대북 |
이산해, 정인홍, 이이첨, 박건, 기자헌, 이경전, 유효림, 허균, 홍여순 |
광해군 지지 |
소북 |
유영경, 김개국, 유몽인, 남이공, 남이신, 박승종 |
영창대군 즉위 지지 |
골북(骨北) |
이산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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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북(肉北) |
홍여순, 이이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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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북 |
정온, 정창연, 이명, 유몽인 |
인목대비 폐위 반대 |
탁소북(濁小北) |
유영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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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북(淸小北) |
남이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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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때 | ||
서인 |
이귀, 김류, 김자점, 신흠, 이경석, 김사용, 김상헌, 홍서봉, 구굉, 이괄, 이경홍, 이안눌, 오윤겸, 조익, 윤방, 심지원, 조석윤 |
반정주도 집권당 |
남인 |
이원익, 정경세, 이성구, 목성선, 조경, 이준 |
연립정권에 참여 |
소북 |
남이공, 남이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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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서(攻西) |
이귀, 김류 |
대남인․소북 강경파 |
청서(淸西) |
김상헌, 신흠 |
대남인․소북 온건파 |
노서(老西) |
김류, 김상용, 김상헌 신흠, 오윤겸 |
서․남인 연합정권 주장 |
소서(少西) |
이귀, 나만갑, 유백중, 권도, 정홍명, 강석기, 최명길, 장유 |
서인 단독 정권 주장 |
원당(原黨) |
원두표, 이행진, 민광훈 |
|
낙당(洛黨) |
김자점, 변사기 |
|
효종 때 | ||
서인 |
김육, 송시열, 이경석, 최명길, 장유, 이시백, 심지원, 이유태, 송준길, 윤원거, 윤선거, 조석윤, 이상진, 이상일, 조복양, 이서상, 조익, 민정중, 김수항, 김만, 정두경, 박장원 |
집권당 |
남인 |
조경, 목성선, 허목, 윤휴, 권시, 민점, 심대부 |
연합 정권내 소수파 |
한당(漢黨) |
김육, 조익, 이시백, 신면 |
대동법 실시 주장 |
산당(山黨) |
김집, 송준길, 송시열, 이유태, 김익희 |
대동법 실시 반대 |
현종 때 | ||
서인 |
송시열, 송준길, 정태화, 이경석, 심지원, 이유태, 유계, 윤증, 박세채, 원두표, 김수항, 김수흥, 이경억, 민정중, 김만중, 박세당, 김좌명, 김석주, 이은상, 이시백 |
|
남인 |
허목, 허적, 윤휴, 윤선도, 권시, 조경, 홍우원, 권대운, 도신징, 이옥, 이원정 |
|
숙종 때 | ||
서인 |
송시열, 김수항, 민유중, 민정중, 이단하, 송준길, 남구만, 김석주, 이상진, 신여철, 김익훈, 이사명, 박세당, 박세채, 박태보, 권상하, 김춘택, 여성제 |
|
남인 |
허목, 허적, 윤휴, 목성선, 유혁연, 허새, 허영, 이원정, 유명견, 이현일, 권대운, 민암, 남하정, 정시한, 이관징, |
|
청남(淸南) |
허목, 윤휴, 권대운, 이운정, 권대운, 오정위, 홍우운, 이중환, 권중경, 오정창, 오정위, 조사기, 이무, 이수경, 남천한, 남천택, 권해, 이봉징 |
대서인 강경파 |
탁남(濁南) |
허적, 민희, 민암, 우명견, 김휘, 목래선, 심재, 민종도, 유명천 |
대서인 온건파 |
노론(老論) |
송시열, 김수항, 민정중, 송준길, 김석주, 이이명, 이관명, 김익훈, 이단하, 이유태, 이상, 권상하, 김창협, 김춘택, 한중혁, 김창집, 김만중, 여성제, |
대남인 강경파 |
소론(少論) |
윤증, 박세채, 남구만, 최석항, 나량좌, 조지겸, 박태유, 박태보, 오도일, 윤지완, 권상운, 조택억 |
대남인 온건파 |
경종 때 | ||
노론 |
이이명,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 민진후, 김용택, 이천기, 이희지, 조성복, 민진원 |
연잉군(영조) 지지 |
소론 |
최석항, 유봉휘, 이광좌, 조태구, 조택억, 김일경 |
경종 지지 |
남인 |
이중환, 심단, 오광운 |
|
영조 때 | ||
노론 |
민진원, 홍인한, 이의연, 조관빈, 정호, 김상로, 김귀주, 홍치중, 이관명 |
|
소론 |
이광좌, 조태억, 유봉휘, 조현명, 오명항, 최석항, 이종성, 박문수, 최규서, 송인명, 조문명, 이광사, 서명선, 박필현 |
|
남인 |
채제공, 이가환, 이승훈, 이중환, 이현일, 오광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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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소(峻少) |
김일경, 목호룡, 유봉휘, 이인좌, 박필현, 정세윤, 이유익, 정희량 |
영조 즉위 부인 |
완소(緩少) |
이광좌, 조태억, 조문명, 송인명 |
영조 즉위 인정 |
시파(時派) |
최석항, 홍봉한, 홍국영, 서명선, 서지수, 조진도 |
사도세자 죽음 동정 |
벽파(僻派) |
김상로, 홍인한, 정후겸, 김귀주, 김한록, 홍상범 |
사도세자 죽음 당연시 |
탕평파(蕩平派) |
조문명, 송인명, 조현명, 정석오, 이주진, 이광덕, 박사수, 홍치중, 김재로, 오광운, 채제공 |
노․소․남인 병용주장 |
정조 때 | ||
벽파 |
김상로, 김한구, 홍계희, 심환지, 김종수, 김귀주, 김한록, 홍상범, 홍계능, 김관주 |
|
시파 |
홍국영, 홍봉한, 윤행임, 유언호, 정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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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
채제공, 김치인,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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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파(信西派) |
이승훈, 정약종, 윤지충, 권철신, 정약용, 윤행임, 황사영 |
서학 신봉 |
공서파(攻西派) |
홍의호, 이기경, 목만중, 홍낙안 |
서학 공격 |
탕평파 |
채제공, 김종수, 이기양, 정약용, 이익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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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사후 순조 조부터 세도정치가 나타났는데 순조 연간 대표적인 세도가는 반남박씨 박종경, 안동김씨 김조순, 풍양조씨 조만영 등이다.
안동 김씨 60년 세도의 기반은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의 충절에서 비롯되었으며, 두 사람의 이어 손자 김수흥, 김수항이 영의정에 오르며 그 아들 대에 김창협이 학문으로 대성하고 그 동생 김창흡 역시 명망 있는 학자가 되어 이른바 ‘6창’ 시대를 열러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의 발판을 다진다.
3. 조선 전기 공신 (괄호안은 본관, 출신)
가. 태조 1년(1392), 개국공신(52명), -역성혁명의 공신
일등공신 |
배극렴(裵克廉:京山),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安東), 정도전(鄭道傳:奉花), 이제(李濟:星州), 이화(李和:태조의 이복동생), 정희계(鄭熙啓:慶州), 이지란(李之蘭:淸州), 남은(南誾:宜寧), 장사길(張思吉:安東), 정총(鄭摠:淸州), 조인옥(趙仁沃:漢陽), 남재(南在:宜寧), 조박(趙璞:平壤), 오몽을(吳蒙乙:寶城), 정탁(鄭擢), 김인찬(金仁贊:楊根) |
이등공신 |
윤호(尹虎:平壤), 이민도(李敏道,중국인), 박포(朴苞:竹山), 조반(趙肦:白州), 조영규(趙英珪:新昌), 조온(趙溫:漢陽), 조기(趙琦):白州), 홍길민(洪吉旼:南陽), 유경(劉敬:江陵), 정용수(鄭龍壽), 장담(張湛:德水), 조견(趙狷:平壤), 황희석(黃希碩:平壤) |
삼등공신 |
안경공(安景恭:順興), 김균(金稛:慶州), 유원정(柳爰廷:文化), 이직(李稷:星州), 이근(:固城), 오사충(吳思忠:영일), 이서(李舒:홍주), 조영무(趙英武:한양), 이백유(李伯由:전주), 이부(李敷:공주), 김노(연안), 손흥종(孫興宗), 심효생(沈孝生:순천), 고려(高呂:제주), 장지화(張至和:인동), 함부림(咸傅霖:강릉), 한상경(韓商敬:청주), 임언충(任彦忠), 황거정(黃居正:창원), 장사정(張思靖:안동), 한충(韓忠:개성), 민여익(閔汝翼:여흥) |
나. 정종 즉위년(1398), 정사공신(29명) -제1차 왕자의 난 공로자
일등공신 |
이화, 이방의(태조의 2남), 이방간(태조의 4남), 이방원(태조의 5남, 태종), 이백경(淸州), 조준(태종의 사돈), 김사형, 이무(단양), 조박, 하륜,(진주), 이거이(淸州, 태조의 사돈), 조영무 |
이등공신 |
이양우(전주), 심종(淸松, 태조의 사위), 이복근(전주, 태조의 손자), 이지란, 장사길, 조온, 김균, 박포, 정탁, 이천우(全州), 장사정, 장담, 장철, 이숙번(안성),신극례(영산), 민무구(여흥, 태종의 처남), 민무질(여흥, 태종의 처남) |
다. 태종 1년(1401), 좌명공신(46명) -제2차 왕자의 난 및 태종 즉위 공로자
일등공신 |
이저(淸州, 태조의 사위), 이거이, 하륜, 이무, 조영무, 이숙번, 민무구, 민무징, 신극례 |
이등공신 |
이래(경주), 이화, 이천우 |
삼등공신 |
성석린, 이숙(전주), 이지란, 황거정, 윤저(칠원), 김영렬, 박은(나주), 윤곤(파주), 박석명(여천), 마천목(장흥), 조희민, 유기, 조박, 조온, 권근(안동), 이직, 유량(문화), 조경, 김승주, 서익, 홍서, 윤자당(안성), 이원(철원), 이승상(경주), 김정경, 서유(이천), 이종무(장수), 이응(영천), 심구령, 연사종(곡산), 한규(청주), 김우(희천), 문빈, 윤목 |
라. 단종원년(1453), 정난공신(43명)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운 공로자
일등공신 |
수양대군, 정인지(하동), 한확(청주), 박종우(운봉, 태종의 사위), 김효성(연산), 이사철(전주), 이계전(한산), 박중손(밀양), 최항(삭녕), 홍달손(남양), 권람(안동), 한명회(청주) |
이등공신 |
권준(安東), 신숙주(高靈), 윤사윤(坡平, 수양대군의 처남), 양정(淸州), 유수(文化), 유하(文化), 봉석주(河陰), 홍윤성(懷仁), 곽연성(淸州), 엄자치, 전균(환관) |
삼등공신 |
이홍상(慶州), 이예장(全義), 성삼문(昌寧), 김처의(연산), 권언(安東), 설계조(沃川), 유사(文化), 강곤(信川), 임자번(나주, 천민), 유자환(영광), 권경(安東), 송익손(驪山), 홍순손(南陽), 최윤, 유숙(文化), 안경손(안산), 한명진(淸州, 한명회의 동생), 한서구(淸州, 한명회의 육촌), 이몽가(驪興), 홍순노(南陽) |
마. 세조 원년(1455), 좌익공신(46명) -세조 즉위 공로자
일등공신 |
이증(세종의 서자), 이연(세종의 서자), 한확, 윤사로(坡平), 신숙주, 한명회, 권람 |
이등공신 |
정인지, 이사철, 윤암(坡平, 태종의 사위), 이계린(韓山), 이계전, 권반(安東), 강맹경(晋州), 윤형(坡平), 최항(朔寧), |
삼등공신 |
권공(安東), 이정석(陽山), 정창손(東萊), 황수신(長水), 윤사윤, 권자신(安東, 문종의 처남), 박원형(竹山), 구치관(綾城), 홍윤성, 성삼문, 조석문(창녕), 이예장원효연, 한종손(淸州), 박강(반남), 황효원(상주), 유자운(무송), 이극배(廣州), 이극강(廣州), 권개(安東), 한계미(淸州, 한명회의 사촌), 조효문, 최유(全州), 이휘(陽城), 정수종(河東), 조득림(천민), 김질(安東) |
아. 세조 13년(1467), 적개공신(45명) - 이시애의 난 정벌 공로자
일등공신 |
이준(세종의 손자), 조석문, 강순(信川), 어유소(忠州), 박중선(順天), 허종(孔岩), 윤필상(파평), 김교(善山), 남이(宜寧), 이숙기(延安) |
이등공신 |
김국광(광산), 허유례(양천), 이운로, 이덕양(전의), 배맹달, 이형손(가평), 이조생(함평), 이서장(전의), 김순명(청풍), 김관(언양), 구겸(綾城), 박식(고성), 김백겸(광산), 어세공(咸從), 오자치(나주), 정승로, 장말손(仁同), 손소(경주), 오준손(豆源), 심응, 윤말손(함안), 김면(광산), 맹석흠(신창) |
삼등공신 |
이부(세종의 손자), 이종(전주), 한계미, 의형(宜炯, 寶城), 민발(여주), 오자경(보성), 최유림(수원), 우공(단양), 정종(동래), 정준(草溪), 이양생(경주), 차운혁(연안) |
사. 예종 즉위년(1468), 익대공신(39명) -예종 즉위와 남이 옥사 관련 공로자
일등공신 |
유자광, 신숙주, 한명회, 신운(여흥, 환관), 한계순(한명회의 사촌) |
이등공신 |
이침(세종의 12남), 이서(세조의 3남), 이부, 이준, 심회(청송), 박원형(죽산), 정현조(河同, 정인지의 아들), 이복(정종의 손자), 이극중(광주),박지번(죽산) |
삼등공신 |
정인지, 정창손(동래), 조석문, 한백륜(청주), 노사신(교하), 박중선(순천), 홍응(남양), 강곤(신천), 조득림(노비출신), 신승선(거창), 권감(안동), 어세겸, 윤계겸(파평), 정효상(겨우), 군찬(안동), 조익정(풍양), 안중경(한관), 서경생(환관), 김효강(수원), 이존명(환관), 유한(성주), 한계희(한명회의 사촌), 강희맹(진주), 이존(환관) |
아. 성종 2년(1471), 좌리공신(75명) -성종 즉위 공로자
일등공신 |
신숙주, 한명화, 최항, 홍윤성, 조석문, 정현조, 윤자운, 김국광, 권감 |
이등공신 |
이정(전주, 월산대군), 이침, 정인지, 정창손, 심회, 김질, 윤사흔(파평), 한계미, 한계회, 송문림(려산), 구치관, 한백륜 |
삼등공신 |
성봉조(창녕), 노사신, 강희맹, 임원준(임사홍의 부친), 박중선, 이극배(경주), 허응, 서거정(달성), 양성지(남원), 김겸광(광산), 강곤, 신승선, 이극중, 한계순, 정효상, 윤계겸, 한치형(청주), 이숭원(연안) |
사등공신 |
김수온(영동), 이석형(연안), 윤필상, 김순명(청풍), 유수, 어유소, 함우치(강릉), 이훈(한산), 김길통(청풍), 의형, 우공, 김교, 오백창(두원), 박거겸(밀양), 이철견(경주), 한치인(청주), 구문신(면천), 이숙기, 정난종(동래), 정숭조(하동), 이승소(양성), 한치의(청주), 한보(청주), 이수남(전의), 신정(고령), 유지(문화), 심한(청송), 허종, 황효원, 신준(신숙주의 손자), 이영은(한산) |
자. 중종 즉위년(1505), 정국공신(117명) -중종 즉위 공로자
일등공신 |
박운종(순천), 성희안(창녕), 유순정(진주), 유자광, 신윤무, 박영문(함양), 장정(적수), 홍경주(남양) |
이등공신 |
이효성(전주), 심순경(청송), 변수(원주), 최한홍(경주), 윤형로(파평), 조계상(창녕), 유순(문화), 김수동(안동), 김감(연안), 이계(전주), 이계남(평창), 구수영(능성), 이세 |
삼등공신 |
고수겸(개성), 심형(풍산), 정미수(海美), 유세웅(興陽), 유계종(진주), 윤사정(파평), 이침, 이식(碧珍), 민회발(驪興), 민회창(여흥), 허상(陽川), 장온(단양), 구현휘(綾城), 심정(풍산), 백수장(해미), 이극정(경주), 이석번(아산), 이함(덕수), 김우증(淸風, 김식의 6촌), 이손(광주), 신준(신숙주의 손자), 황탄(장수), 박건(밀양), 송질(여산), 강혼(진주), 한순(청주), 유경(흥양), 김수경(김수동의 동생), 정윤겸(草溪), 김경의(강릉) |
사등공신 |
변준 외 64명 |
4. 조선 전기의 피화자 (괄호안은 본관, 출신)
1392년 - 태조가 <즉위교서>로 처벌한 조선 개창 반대자 (53명)
직첩 회수 장(杖)100, 귀향 |
우현보(丹陽), 강희백(진주), 이숭인(경산), 조호(한양), 김진양(경주), 이확, 이종학(韓山, 이색의 아들), 우홍득(우현보의 아들) |
직첩 회수 장(杖) 70 귀향 |
최을의(전주), 박흥택, 김이, 이래(경주), 김무, 이종선(이색의 아들), 우홍강(우현보의 아들), 서견(이천), 우홍명(우현보의 아들), 김첨(광산), 허응, 유향, 이작, 이신 최관(해주), 이사영(용인), 유기, 이첨(신평), 우홍부(우현보의 아들), 강여, 김윤수 |
직첩회수 지방 방치 |
김남득(고령), 강시(진주), 이을진(장수), 유정현(문화), 정우, 정과, 정도, 강인보, 안준, 이당, 이실 |
고향 안치 |
성석린, 이윤굉, 유혜손(文化), 안원(순흥), 강회중(진주), 신윤필, 성석용(성석린의 동생), 전오륜(旌善), 정희 |
태조7년(1398), 정종 2년(1400) -왕자의 난 피화자
1차 왕자의 난 |
이방석(전주), 이방번, 정도전, 남은, 심효생, 변중량 등 |
2차 왕자의 난 |
이방간, 이맹종(이방간의 아들), 박포 등 |
단종 1년(1453) - 계유정난 피화자
단종 옹호자 |
김종서(順天), 황보인(永川), 정분(진주), 조극관(양주), 조수량(조극관의 동생), 조번(조극관의 사촌), 민신(여흥), 허후(하양), 이용(안평대군) |
세조 3년(1457) -단종 복위 사건 피화자
사육신 |
박팽년(順天), 성삼문, 유성원(문화), 유옹부(杞溪), 하위지(진주), 이개(한산) |
기타 관련자 |
성승(창녕, 성산문의 부친), 이유(금성대군), 이보흠(永川), 박중림(박팽년의 부친), 정종(해주, 문종의 부마), 정보(연일, 정몽주의 손자) |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피화자
사형 |
김종직(선산), 김일손(김해), 권오복(예천), 권경유(안동) |
귀향 |
이목(전주), 허반(양천), 강겸(진주), 표연말(신창), 홍한(남양), 정여창(하동), 이총(전주), 강경서(진주), 이수공(광주), 정희량(해주), 정승조(경주), 이종준(광주), 최부(탐진), 이원(경주), 이주(고성), 김굉필(서흥), 조의(창녕), 박한주(밀양), 임휘재(풍천, 임사홍의 아들), 강백진(신천), 유정수(문화), 이계맹, 강혼(진주) |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피화자
부관 참시 (剖棺斬屍) |
윤필상, 한치영,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희, 이파(한산), 김승경(경주), 남효온(의령), 김천령(경주) |
사형 |
이극균(광주), 성준(창녕), 이세좌(광주), 권주(안동), 박한주, 이수공, 이총, 최부, 이원, 김굉필, 이주, 강겸, 강형(진주, 강겸의 형),, |
중종14년(1519) -기묘사화 피화자
기묘팔현 (己卯八賢) |
조광조(한양), 김정(경주), 김식(청풍), 안당(순흥), 이장관(벽진), 정광필(동래), 기준(행주), 신명인(평산) |
유배자 |
김구(광주), 한충(청주), 윤자임(파평), 박세희(상주), 유용근(진주), 정응(동래), 최산두(광양), 박훈(밀양), 정완(연일), 이경(태종의 서손) |
간직 삭탈자 |
이자(한산), 최숙생(경주), 유운(문화), 문근(감천), 신광한, 박영, 유인숙(문화), 이성동(인천), 이청(한산), 공서린(창원), 이약빙(광주), 이충건(성주), 김안국(의성), 김정국(김안로의 동생), 권벌, 김세필(경주), 이희민(합천), 구수복(능성), 조언경(창녕), 안처순(순흥), 유성춘(선산), 김광북(상주), 양팽손(청주), 이윤검, 하정 김태암(보은), 이구(성주), 이연경(광주), 경세인(청주) 등 |
명종 즉위년(1545) -을사사화 및 양재역 벽서 사건 피화자
사형 |
윤임(파평), 유관(문화), 유인숙 |
유배 후 사사, 유배 혹은 관직 삭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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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벌, 이언적(驪州), 백인걸(개성), 정희동(동래), 박광우(상주), 김저, 송희규(이로), 유희춘(문화), 김난상(청도), 이언침(연안), 민기문(여흥), 곽순(현풍), 이림(함안), 이덕응(성주), 이휘(성주), 정욱(동래), 이중열(광주), 나식(안정), 나숙(나식의 동생), 정유침(연일), 정자(정유침의 아들), 이약해(광주), 정원(동래), 한숙, 한주(한숙의 동생), 한호, 성세창(창녕), 이문건(성주), 신거관(거창), 이수경(경주), 송인수(은율), 심령(청송), 노수신(광주), 이염(성주), 정황(昌原), 권을정(안동), 이담(용인), 안경우(광주), 이진(함안), 황박(장수), 김진종(선산), 윤강원(남원), 윤충원(남원), 안함, 박승임(밀양), 김충갑(안동), 유경심(풍산), 구수남(능성), 송순(신평), 박민헌(함양), 유창문(진주), 최개국(충주) |
# 참고도서 : 한국유학사상대계 / 조선 당쟁사 1,2 /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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