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가장 위대한 종교 : 친절(親切)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U. C. Berkeley)의
심리학과 교수인 감정 심리학자 켈트너(Dacher Keltner)는
사람들이 친절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저는 어렸을 때 가난한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위생 상태가 안 좋았고, 건강도 안 좋았고, 사회 서비스를 받기도 어려웠습니다.
대학 진학률도 낮고, 평균 수명도 짧아요.
그런데 신기한 건, 그 가난한 사람들이
이웃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고,
부족한 소득을 아껴서 종종 기부도 했다는 겁니다.
먹고살기도 힘든 가난한 사람들이 친절하고, 남을 존중하는 이유는 뭘까.
저는 아주 운이 좋게도 좋은 대학(스탠퍼드)에 가서
지금은 좋은 직장을 가지게 됐지만, 되돌아보면
제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에는 심지어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어떤 누군가의 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착한 마음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걸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렇다. 나란 존재가 태어나서 어른 될 때까지
수많은 인연의 도움을 받고 살아왔다.
거창한 종교적 교리나 이론을 떠나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정심과 친절한 행위 덕분이다.
각자 조용히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에
도움을 준 고마운 분을 떠 올려 보면 당장 알 수 있다.
개인, 사회, 국가까지 결정적인 인연의 도움이 있다.
이런 고마운 인연에 은혜를 갚는 일이 문화처럼 일상화 될 때
자신과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운 곳이 된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親切)이다.
친절은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사람끼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 대해 보다 따뜻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친절과 따뜻한 보살핌이 진정한
‘사람 사는 세상’을 이루고, 믿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대상마다 그가 곧 내 복밭(福田)이고
선지식임을 알아야 한다.
그 때 그 곳에 그가 있어 내게 친절을 일깨우고
따뜻한 배려를 낳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국은 어디이고 지옥은 어디인가.
이웃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면서 만족할 줄 알고
오순도순 살고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일 것이고,
아무리 가진 것이 많더라도 마음 편할 날 없이
갈등과 고통 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 아니겠는가.
똑같은 천성(天性)을 가진 사람인데 종교로 편 가르고,
지역으로 편 가르고, 학벌로 편 가르고, 직업으로 편을 가르고,
심지어 집 크기로 편을 가르는 사람은
자기 수준에서 자기 아집에 빠진 사람들이다.
거짓되고 잘못된 고집은 자신과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수많은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
천동설이 2,000년간 진리로 받아들여져
수많은 사람이 거짓과 가짜의 희생양이 되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종교의 이름 아래 무고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잔인한 행위가 저질러졌는지 한번 되돌아볼 일이다.
수천만의 선량한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산 채로 불태워졌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본래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꽃씨를 일상적인 행을 통해서
가꾸어 나가면 그것이 시절 인연을 만나 꽃 피고 열매 맺는 것,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본래 우리 마음 가운데 깨달음이 갖춰져 있다. 본래 밝은 마음이다.
한눈파느라고, 불필요한 데 신경 쓰느라고 제 빛을 발하지 못할 뿐이다.
오직 한 곳 한 쪽만 보고 살던 옹졸한 사람이
사방팔방을 보며 넓고 큰마음으로 사는 것이 깨달음이다.
친절은 두 존재의 연결이며, 가까워지려는 소망이고,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를 타인과 나누려는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친절은 행복한 삶을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달라이 라마는 불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친절한 마음’이 곧 불교라고 말합니다.
나란 존재는 이 세상 수많은 존재 덕분(德分)에 이렇게 살고 있다.
수많은 존재 덕분에 살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친절하게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내가 세상에서 받은 친절에 대해
그 고마운 덕을 잊지 않고 기리며 살아야 할 일이다.
법정스님 글 인용
출처 : 가장 행복한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