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전세계인구 22%인 19억명이 이슬람교인으로 기독교인구 23억에 이어 2위의 신자수를 확보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창시자인 마호메드는 570년경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된 그는 부유한 과부를 주인으로 상업에 종사하다가 나중에 10년 이상의 여주인과 결혼해 경제적 안정을 찾는다. 610년경 마호메드는 종교적 체험을 하게되는데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는 回心체험후 철저한 유일신 교도가 되었다. 아랍부족중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쿠라이시 부족(마호메드의 가문)에게 예언자로서 유일신을 선포할 사명을 받았다. 다신교를 숭배하던 쿠라이시부족들은 흑석(우주에서 온 운석)을 모신 카바신전과 메카가 지방예배 중심지로서 지위를 상실하고 경제적 이익을 잃을까 우려하여 마호메드의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북쪽 야트립(현재의 메디나)의 지도자들이 마호메드와 그 추종자들을 받아들였다. (622년, 헤지라)
이 해 (622년, 헤지라)를 이슬람교의 원년으로 삼는다. 마호메드는 메디나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개종자집단을 종교적공동체인 동시에 정치적 공동체로 조직하고 쿠라이시부족이 장악하고 있던 메카를 630년에 장악하고 메카에 개선한다.
이슬람이란 복종을 의미하는데 알라신에 대해 절대적 복종을 요구한다. 마호메드는 쿠란을 종교적 권위의 궁극적 원천으로 선언했지만, 히브리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신약성경을 거룩한 영감에 의해 기록된 책으로 인정하였다. 마호메드는 그리스도교의 최후 심판의 교리, 부활사상과 그 후의 보상, 징벌의 교리, 천사에 대한 믿음 등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교는 성사나 사제가 없다. 이슬람은 알라의 지배 아래 세계를 단일한 신앙공동체를 통일시킬 것을 열망했다.
이슬람교의 정복
범세계적 영향력 확대를 위한 이슬람의 움직임은 마호메드가 사망한 뒤에 시작되었다. 정통칼리프 시대(632~661), 선거 또는 추존에 의해 칼리프선출
1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632~634), 아랍의 여러 부족에게 군사적 활동 개시, 아라비아 영역을 넘어 북쪽으로 확대
2대 칼리프, 우마르(634~644) 안티옥.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점령(636), 페르시아 점령(637),
3대 칼리프, 우트만(644~656) 우마이야 가문출신인 우트만이 656년 폭도에 의해 피살, 이집트 침입(646), 페르시아 제국 정복(651)
4대 칼리프, 알리(656~661) 마호메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칼리프로 선언했으나, 우마이야가문이 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그 후 알리는 살해되고 우마이야 가문출신이 칼리프가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가 출범(661년) 알리의 추종자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시아파로 결속하였다.
이슬람제국의 첫번째 왕조, 우마이야왕조(661~750)시대
1.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에는 선거에 의해 칼리프를 선출했으나
2. 4대 칼리파 알리 이후 칼리파가 된 무아위야는 후손중에서 칼리파를 정하도록 하여 우마이야왕조(661~750)가 출범하였다. 우마이야왕조는 지금의 시리아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정하고 동으로는 당나라와, 서로는 이베리아 반도 서고트왕국까지 차지하였다. 우마이야왕조는 정치,행정은 비잔티움요소를, 재정적 제도는 페르시안요소를 받아들여 자기들 나름의 제도를 갖추었으나, 비잔티움 관리들을 계속 임용하는 등 비잔티움의 계승자처럼 행동하였다. 우마이야왕조는 지중해 세계의 지배와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힘을 쏟았다. 717년 비잔티움에 대한 대공세가 실패로 끝나자 급격히 세력이 약해졌다.
3. 압바스왕조(750~1258, 1261~1514)
750년 압바스왕조가 나타나면서 우마이야왕조는 에스파냐에서만 지배권을 유지했다. 압바스왕조는 수도를 다마스커스에서 페르시아의 옛수도 바그다드로 옴겼다. 우마이야왕조가 비잔티움을 정복하려하는 등 서방지향적이었던 반해, 압바스왕조는 페르시아의 후신임을 자처하는 등 동방지향적이었다. 초기 이슬람제국이 짧은 시간에 광대한 영토를 정복할 수 있었던데는 동로마제국과 사산페르시아 국가간에 오랜기간에 걸쳐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많은 전쟁비용을 부담시켜 민심이반 현상이 있었고 국력이 소진되어 있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압바스왕조는 비잔티움과 페르시아 정복지 국민들에게 종교, 민족 등에 따른 차별을 두지 않고 관용정책을 펼쳐 문화, 예술이 전성기를 이루는데 기여토록 하였다. 특히, 900년경에서 1250년경까지 비잔티움과 페르시아의 문화를 잘 이어받아 문명을 꽃피웠다.
이슬람문명은 초기부터 이례적으로 세계주의적이고 역동적이었다. 서유럽에 뿌리를 비잔티움전통과 중동에 뿌리를 둔 페르시안전통을 받아들인데다가 극동과 서유럽 사이 원거리무역의 교차로에 있었다. 여기에 평등주의와 관용의 전통 때문에 종교, 민족에 따른 차별이 없이 관리로 임용될 수 있었고 특히, 지혜의 집이라는 특수한 교육, 연구기관을 설립하여 비잔티움, 페르시아문명을 번역토록하고 과학, 수학, 천문학, 의학, 연금술 등의 연구를 장려하여 후에 서유럽에 전달함으로써 르네상스의 출발의 계기가 되었다.
압바스왕조는 중세 유럽보나 문명이 훨씬 앞서 있었으나 1258년 몽고제국의 일한국에 멸망하였고, 그 후손들이 카이로로 퇴각하여 카이로압바스왕국(1261~1514)이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1514년 오스만제국에게 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