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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혼과 예술 원문보기 글쓴이: 일송정
청하(靑荷) 성기조 선생님과 나와 이관용(李寬鏞)
글 김광한
제가 청하선생님을 만난 것은 92년 겨울이었습니다. 벌써 16년이 넘었어요. 그 당시 지금은 세상에 없는 글 잘쓰고 마음 착한 제 친구 이관용이 인사를 시켰기 때문이지요. 이관용과 저는 같은 서울 출신이고 잡지사에서 함께 근무를 했기 때문에 무척 친하게 지냈어요. 그가 독신으로 살았기에 무척 정에 굶주렸지요.
그래서 저는 잡지의 편집장을 할때마다 그의 글을 연재 시켰지요. 그래야만 만날 기회가 더 생기고 술잔을 기울일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그는 제 호의에 언제나 고맙게 생각했어요.그는 주간지 기자로 있다가 그 주간지가 당국에 의해 폐간이 되자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 활동을 했어요. 글이 무척 세련이 되어있고 감정이 풍부해서 나오는 책마다 베스트 셀라가 됐어요. 바라밀, 풍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설을 썼어요.저는 이 친구가 당시에 무척 부러웠는데 관용이가 자네도 글을 쓰면 나보다 더 잘 쓸거라면서 용기를 부축였어요.
,그래서 문단에 나올려면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했더니 추천을 받고 문학지에 데뷰를 해야한다면서 청하선생님을 소개 했어요. 그 겨울에 청하선생님과 저는 광화문 서린호텔 커피숖에서 만나게 됐어요. 관용이가 선생님에게 "이 친구가 글을 곧잘 쓰는데 뒤에 꼬리표 붙을 것좀 만들어달라고" 청했어요. 즉 어느 문학지의 추천을 받게 해달라는 것인데 마침 청하 선생님이 당시 "시와 시론"을 발행하고 계셨어요. 청하 선생님은 선뜻 제게 원고 백장만 써오라고 해서 그 이틑날 바로 보내 드렷지요. 한달후 소설 당선이란 편지가 오고나서부터 제 글 이력은 시작이 됐어요.
그후 시와 시론과 인연을 맺어서 그 책에 매번 글을 썼어요 고마운 일이지요. 그 이듬해 청하선생님의 회갑연겸 저서 봉정식이 프린스 호텔에서 열렸어요. 선생님에 대해 몇자 쓰라고 해서 "또 다른 길목"이란 책에 제 나름대로 본 청하 선생님을 게재 했어요.248인이 본 청하 성기조 선생님이란 제목이 붙었어요. 이러구러 세월이 흘러서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어요.저를 문단에 이끌어준 이관용이가 강원도 홍천 자신의 서재 뜰에서 연기에 질식이 되어 죽었다는 소식이에요. 그래서 이틑날 시외 버스를 타고 홍천 아산 중앙병원 영안실로 갔어요. 청하 선생님에게 관용이 소식을 알리자 선생님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선을 통해 들려와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요.영안실에 가니 문상객이 몇이 되질 않았어요. 그 문상객들도 밤이 되면 모두 떠날 것같아서 저는 관용이가 어린 시절에 천주교에서 영세해서 시몬이란 세례명을 가진 것을 알고 산꼭대기 에 있는 홍천 성당으로 가서 보좌 신분에게 이야기 했어요.
우리 형제 죽었다고요. 그 착하고 착한 친구가 죽었다고요. 장가도 못가고 죽었다고요.신부님에게 연도(煉禱)를 부탁했어요. 그의 외로운 영혼을 지켜주기 위해서였어요.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오면서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 몰라요.
그 이후부터 정말 저는 많은 글을 썼어요.소설 책만 28권을 썼으니까 참으로 많이도 썼어요.물론 베스트 셀러 된것은 없지만 보람이 많지요.모두가 청하 선생님과 괸용이 덕분이지요. 몇년 지나서 "문학의 즐거움"이란 문학 사이트에 저는 죽은 관용이를 위해서 홈페이지를 개설해 주었어요 지금도 그의 홈페이 지가 있어요.
청하선생님을 찾아 뵙지는 못했지만 항상 생각을 하고 있어요. 며칠전에 선생님 에게 메일이 왔기에 이렇게 들어왔어요. 저역시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이렇 게라도 만나게 되니 이승에서 반가움이 더할까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관용의 연예부 기자 시절
청년 시절
이관용의 사진 몇장을 올립니다.오른 쪽 맨끝이 이관용.왼쪽이 정현웅이라고 마루타란 소설 쓴 친구 가운데가 김학진목사에요. 제 출판기념회 때 등촌동 성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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