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숨(ad sum)쉬는 걸 깜빡했습니다."
찬미예수님! 국제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에도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8월을 맞이했습니다. 일본 가톨릭 교회는 매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의 날부터 15일 종전기념일(광복절)까지를 '평화 주간'으로 지내며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와 각종 기획을 통해 전
쟁의 참흑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시기를 지냅니다. 우연히도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에 인류 사상 첫 원자 폭탄이 지
상에 떨어졌고,성모 승천 대축이레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결코 우
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성모님께서도 몽소승천하시어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의 긴 순례의 여정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일본에게는 패전(종전)의 날이지만 한국에게는 광복의 날인 성모 승천 대축일을 일본에서 지내고 있
는 한국인으로서 조금은 복잡한 심정이 들기도 하지만 양국이 서로 한마음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조금 더 성장하리라 믿습니다. 지난 호의 이양기를 이어 갈까 합니다. 유쿠하시에서 지내는 중 예기지 못한 몸과 마음의
병을 앓고 좌저한 저를 다시금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것은 산속에서늬 심호홉이었습니다. 두 달의 휴직 기간 중 처음엔 문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약물 치료를 통해 서서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그때부터 의사 선생님의 조언대로 아침 햇볕을 쬐기
위해 마냥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일본에 온 이래로 그토록 좋아했던 산에 한번도 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저는 무작적 산으로 향했습니다. 인적
이 드문 고요한 산속에는 피조물의 생기가 감돌았고 선선한 산바람은 저의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
니다. 특히 수백 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굳건하게 자란 아주 덩치 큰 나무를 끌어안았을 때 저는 거친 세월의 풍파를 이겨 낸 산나
무의 인내와 용기를 느꼈고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매일같이 산속 피조물의 생기가 저를 산으로 향
하게 했고, 거친 세월 속에서도 하느님 안에서 초연하게 자기 생명의 빛을 발하고 있는 피조물과 함께 깊은 숨을 쉬며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휴직 기간 중 산길을 걸을 때는 예수님께서 홀로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셨다는 성경 구절이 문득 떠오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마태 14,23) 결코 지치지 않으실 것만
같은 예수님도 어쩌면 산속에서 하느님의 숨(루아흐)을 쉬며 기도와 쉼을 통해 구원사업을 완성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셨던게 아닐까요 사제품을 받을 때 앗숨(ad sum.예. 여기 있습니다.)했는데, 지내다 보니 '앗, 숨 쉬는 걸 있고 있었어.'가 되어 버린 게 병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 유쿠하시로 복귀한 저는 매주 하루는 휴일로 정해 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몸을 움직이기 버거운 때에도 산에 오르면 몸이 오히려 가벼워졌습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산 정상에서 홀로 미사를 드리곤 했는데 그 내밀한 기도의 신간들이 저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르멜 수녀님들의
기도와 동료 신부님들의 격려, 긜고 유쿠하시성당의 신자 분들의 많은 기도와 배려를 기억합니다. 기도의 ㅅ힘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의사 선생님이 놀랄 정도로 저의 회복이 빨랐던 것은 산속에서의 기도와 쉼의 시간, 그리고 많은 분들의 정성 어린 기도 덕분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유쿠하시로 복귀한 후의 시간은 그 전보다 더 큰 은총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본당에서 새 부부가 탄생하는 기쁨을 나누었고, 주님 성탄을 맞이하는 시기엔 유쿠하시역 앞에서 시민들을 위해 성탄 라이브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본당 신자들은 자주적으로 모여 본당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 나눔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 나약한 사람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크고 많은 일을 직접 해 나가셨습니다. 제스스로 무언가를 이루고자 발버둥칠 때 저는 결국 무너져 버리지만, 이 작은 사람을 통ㅅ해 주님께서 직접 무언가를 하고자 하실 때엔 항상 더 크게 이루신다는 것을 체험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게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어쩌면 복음 선교라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중에 지금 또다시 산의 생기와 쉼을 잊고 살아가는 삭막한 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기도하며 주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기 보다는 사람의 일을 위해 스스로가 해내고자 발버둥치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뜨끔합니다.
주님께서는 심호홉을 잊고 살아온 저에게 일침을 주시고자 이 나눔의 시간을 마련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처럼 언제나 나보다 더 깊이 저를 아시고 언제나 저의 가장 높은 곳보다 더 높이 계시는 하느님께("interir intimo meo et superior summo meo") 부족한 저를 의탁하며 앞으로도 주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는 도구로서의 삶을 앗숨(ad sum)하며 걸어가고 싶습니다.
글. 이한웅 사도 요한 신부 / 후쿠오카교구 선교 사목
2024년 8월호 월간 빛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