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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선묘조 호종공신 선공감참봉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선관 이성국지문 상지이십이년 을유 명정, 고종 22년(1885).
중수기는 오른쪽편에 걸려있다. 2017년 9월 사진.
이 현판은 발문(跋文)에 해당한다. 2017년 9월 사진.
鳳洲李公忠孝行蹟
公諱誠國 號梅軒又號鳳洲 宣祖朝官 承政院左承旨而有原從之勳公之忠孝出於天賦 七歲而父病吮疽 九歲而母病斷指侍湯 日母思雉肉則登山號泣求之不已 至暮還家雉入鷄塒取以供之乃淂(得)其痊 居廬之日墓木枯於毒蟲則呑蟲戒告滿山毒蟲一夜倒掛而死 朝野奇異日至孝所感及宣廟龍蛇之亂(壬辰倭亂을 말한다) 聞大駕播越北向 痛哭誓以身殉 晝伏夜行陪駕龍灣以公文章之煥燁筆力之湧動三次通誘於敵陣先鋒金忠善使之歸化 上嘉之以錦袍玉帶賜下深寵而擢拜陞秩之官則公以正其義不謀利之哀陳䟽(疏)乞歸至忠州 鳳凰山下 默玩經義以終餘年 墓在忠州 老隱面水龍里 世稱名墓 三道儒林䟽(疏)請 設院享祀 故光武乙酉命旌忠孝于三陽洞 公之實蹟載在國乘及慕華堂集 --- 蘂城春秋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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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洲公忠孝旌序文
歲寒知松栢之貞 世亂知忠臣之節 疾風知勁草之堅板蕩識賢臣之志眞古人之格言也 鳳洲公諱誠國 牙城君七代孫也 官扈聖功臣 繕工監參奉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生而得卓異之稟 幼而抱夙達之智 不好嬉遊日就穎悟藻思有進聰明無比公於是時孔融謝尙忠孝出天誠敬神年纔 七歲父病吮疽又及九歲母病斷指侍湯 母思雉肉雉入鷄塒因以供進 公於是時黔婁王祥及其居廬之日虫害墓木則吞虫戒告枯木復生公於是時王裒孟宗 朝廷聞其至孝特除繕工監參奉 終不就職退居于忠州鳳川自號曰鳳洲公於是時淵明董生文兼唐宋之詞藻筆得晉蜀之體格文章之煥燁字畫之遒健聳動一世屏障揮灑遍于當 時家家寶藏傳至于令公於是時李白逸少文行弁進累擧公車之業仍登上庠振動一世之名公於是 時韓愈李賀 宣廟朝時扈 駕跋涉備經艱險謹愼周密公於是時寗(寧)兪 安世及其回駕錄扈聖衛聖原從功臣印賜錄卷特 除軍資監參奉公又辭不受公於是時魯連賀監歸夙鳳川樓心於林泉寓樂於水雲架上書琴閑爲聖 人之珉江頭釣漁或唱漁父之詞公於是時嚴陵志和盖公之貞忠大義尤著於扈聖之日淸趣高標亦 見於辭爵之時則此非歲寒松栢疾風勁草乎 宜稱頹波之砥柱而曰舎章可貞或從壬事無成有終者非謂是耶 正其義不謀利明其道不計功固仁人之心矣
風聲樹立乃有三道儒生之䟽至德攸傳且有累世雲仍之蕃世代稍遠口碑不磨朝家褒賞旌閭始業公之忠孝若不聞則已聞之則不可無一言之頌故雖不文志拙謹題于三陽縣楣
乙酉建甲月望後日 承政院 左承旨 安東 金洛鎭 謹書
‐‐‐ 蘂城春秋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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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洲李公旌閭重修記
蘂江之陽 冠峰之下(蘂江은 南漢江을, 陽은 江의 北쪽을 말한다. 漢陽, 密陽 等. 冠峰은 엄정면 원곡리에 있는 갈미봉을 말한다. 한자로 冠帽峰으로 쓴다. 엄정면 원곡리 뒷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소태면 동막리를 감싸고 있다)雲山錯綜 林壑迊繞 一區洞天
中闢朗塏頗有腥塵中乾淨之像而翠甍彤桶嵬然
放村上者故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官春秋館事 李公諱誠國之閭也
公以牙城望族生
有羨質孝親之誠出於天然盖為父吮疽而疽愈為
母断指而病差皆就傅前事也 廬墓呑蟲而枯木復生 母思雉炙而雉入鷄塒 皆弱冠前事也
隣里鄕邦驚異傳誦以為出天誠孝 能感神明及長聰明頴悟絕出等夷文行之美筆翰之華足以羽儀士林主盟
詞垣蓮桂金緋朝夕且至而不屑屑於進取 除有
繕工之命而不就
宣廟龍蛇之役竭忠扈 駕録衛聖之勳而特除
軍資之職又不就 翺翔林泉歌詠烟月世之清標高
蹈之流無不欽誦而向慕焉 朝廷因章甫之齊籲特
命植楔之典是君上獎其忠孝也 子姓蕃衍至累世
而以孝友為家計是君上天降以錫類之報也 君上之
獎上天之報如是公之於世無復有憾矣 閼世既久
垣宇傾圮舟艧漫泗公之諸孫詢謀改修乎来之役
不日告成工旣歇尸之者顯中允一甫戒余記允一
畏友也 余雖人微敢下不敢負 畏友之言遂執筆
而歎曰 今此二儀草昧九有腥羶凡林林葱葱於兩
間者緩免黄口聞知者工工商商之事見習者雀躍
羝觸之行而吾人所謂君臣父子之道漠乎先天矣
使時人觀之反不謖其淀事於無事之事乎 允一曰
我族之急急為此者盖念世道如此來生蠢蠢倫陷
胥溺無可拯救故槻有事放此使知尊祖因尊祖之心
使知忠孝實為人道之大也 其計不幾放近乎 余
曰賻乎 允一誠知道者也 聖人不云乎 人之秉彛極
天天罔墜有有血氣則雖蔽錮剝傷之中不能無天界之根也 因其根而感之以在先至誠之道則如潜陽
初動源泉始達者 豈無其理乎 非惟一家子弟二有望鄕里之觀感者不無其基也 且易之王格有廟乃爲濟復之道則挽回世敎之術孰知不在此乎 余日
望其如此而並記答問之辭以諗于有知者
永曆五乙亥梧月上澣 平原后 李正奎 書
詩
忠孝兼全出自天蒙旌已
近六禩年嵬然翠閣
重修日 俚恨孫鮮學祖賢
九代孫 顯中 羹墻拜題
--- 효자각에 걸려있는 중수기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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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文
公牙城人 寔我
中廟朝靖國功臣牙城君諱碩番之
七世孫也 公之誠孝出於天賦 七歲
而父病吮疽 九歲而母病 斷指侍湯
之日 母思雉肉 則有雉飛入鷄塒 居
廬之日 墓木枯於毒蟲 則吞蟲誠告
枯木復生
朝廷以其孝能感飛雉惡蟲 特除繕
工監參奉 終不就職 退居于忠州之
鳳川 故自號曰鳳洲也 登 萬曆己
酉司馬硏道守分 恬淡自娛 會當
宣廟朝龍蛇之亂 聞 大駕播越北向
痛哭誓以身殉 倭奴充斥 道路不通
布衣草屨晝伏夜行 陪駕於松都
以至于龍灣 其備經艱險道出於忠
心回 駕後 以原從功臣 除軍資
監參奉 而公又辭謝 不受 後以其子
壽爵追 贈承政院左承旨 而以公
卓異之行 尚不蒙
旌褒之典 士林至今冤之公之七世支
孫協寅 處寅 佐寅 日寅 弼寅 正寅 五
六員 繼先人未遂之志怩悵出謀蔽
慮命其族子南植 鳴號冤始蒙恩典 豈不嘉哉 余始信其有其行而無其褒者且古人所謂求忠臣
必於孝子之門者 不其然乎 又從而
詩曰 忠能貫日孝根天 遺蹟猶傳數
百年徹 上蒙 旌光乃祖 故家孫子
亦云賢
本年 至月 上澣 末裔 完山 李徹宇 謹識
--- 효자각에 걸려있는 현판에서 옮겼다.
<표점>
鳳洲李公忠孝行蹟 (봉주이공충효행적)
公諱誠國,號梅軒,又號鳳洲。宣祖朝官承政院左承旨,而有原從之勳。公之忠孝出於天賦:七歲而父病,吮疽;九歲而母病,斷指侍湯。日母思雉肉,則登山號泣求之不已,至暮還家,雉入鷄塒,取以供之,乃得其痊。居廬之日,墓木枯於毒蟲,則吞蟲戒告,滿山毒蟲一夜倒掛而死,朝野奇異,日至孝所感。
及宣廟龍蛇之亂,聞大駕播越北向,痛哭誓以身殉。晝伏夜行,陪駕龍灣。以公文章之煥燁、筆力之湧動,三次通誘於敵陣先鋒金忠善,使之歸化。上嘉之,以錦袍玉帶賜下深寵,而擢拜陞秩之官,則公以「正其義不謀利」之哀,陳疏乞歸,至忠州鳳凰山下,默玩經義以終餘年。
墓在忠州老隱面水龍里,世稱名墓。三道儒林疏請設院享祀,故光武乙酉,命旌忠孝于三陽洞。公之實蹟,載在國乘及《慕華堂集》。
<蘂城春秋에서 옮김>
鳳洲公忠孝旌序文 (봉주공충효정서문)
歲寒知松栢之貞,世亂知忠臣之節,疾風知勁草之堅,板蕩識賢臣之志,眞古人之格言也。
鳳洲公諱誠國,牙城君七代孫也。官扈聖功臣、繕工監參奉,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生而得卓異之稟,幼而抱夙達之智,不好嬉遊,日就穎悟,藻思有進,聰明無比。公於是時,孔融、謝尚。忠孝出天,誠敬神年。纔七歲,父病吮疽;又及九歲,母病斷指侍湯。母思雉肉,雉入鷄塒,因以供進。公於是時,黔婁、王祥。及其居廬之日,虫害墓木,則吞虫戒告,枯木復生。公於是時,王裒、孟宗。朝廷聞其至孝,特除繕工監參奉,終不就職,退居于忠州鳳川,自號曰鳳洲。公於是時,淵明、董生。
文兼唐宋之詞藻,筆得晉蜀之體格,文章之煥燁,字畫之遒健,聳動一世。屏障揮灑,遍于當時,家家寶藏,傳至于今。公於是時,李白、逸少。文行弁進,累舉公車之業,仍登上庠,振動一世之名。公於是時,韓愈、李賀。
宣廟朝時,扈駕跋涉,備經艱險,謹愼周密。公於是時,甯兪、安世。及其回駕,錄扈聖衛聖原從功臣,印賜錄卷,特除軍資監參奉,公又辭不受。公於是時,魯連、賀監。歸夙鳳川,樓心於林泉,寓樂於水雲。架上書琴,閑爲聖人之珉;江頭釣漁,或唱漁父之詞。公於是時,嚴陵、志和。
盖公之貞忠大義,尤著於扈聖之日;清趣高標,亦見於辭爵之時。則此非歲寒松栢、疾風勁草乎?宜稱頹波之砥柱,而曰「舎章可貞」,或從「壬事無成有終」者,非謂是耶?正其義不謀利,明其道不計功,固仁人之心矣。
風聲樹立,乃有三道儒生之疏;至德攸傳,且有累世雲仍之蕃。世代稍遠,口碑不磨。朝家褒賞,旌閭始業。公之忠孝,若不聞則已,聞之則不可無一言之頌。故雖不文志拙,謹題于三陽縣楣。
乙酉建甲月望後日,承政院左承旨安東金洛鎭謹書。<蘂城春秋>에서 옮김.
鳳洲李公旌閭重修記 (봉주이공정려중수기)
蘂江之陽,冠峰之下,雲山錯綜,林壑迊繞,一區洞天,中闢朗塏,頗有腥塵中乾淨之像。而翠甍彤桶,嵬然放村上者,故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官、春秋館事李公諱誠國之閭也。
公以牙城望族,生有羨質,孝親之誠,出於天然。盖為父吮疽而疽愈,為母断指而病差,皆就傅前事也。廬墓呑蟲而枯木復生,母思雉炙而雉入鷄塒,皆弱冠前事也。隣里鄕邦,驚異傳誦,以為出天誠孝,能感神明。及長,聰明頴悟,絕出等夷。文行之美,筆翰之華,足以羽儀士林,主盟詞垣。蓮桂金緋,朝夕且至,而不屑屑於進取。除有繕工之命,而不就。宣廟龍蛇之役,竭忠扈駕,録衛聖之勳,而特除軍資之職,又不就。翺翔林泉,歌詠烟月,世之清標高蹈之流,無不欽誦而向慕焉。
朝廷因章甫之齊籲,特命植楔之典,是君上獎其忠孝也。子姓蕃衍,至累世而以孝友為家計,是君上天降以錫類之報也。君上之獎,上天之報,如是,公之於世無復有憾矣。
閼世既久,垣宇傾圮,舟艧漫泗。公之諸孫,詢謀改修。乎來之役,不日告成。工旣歇,尸之者顯中、允一。甫戒余記,允一,畏友也。余雖人微,敢下不敢負畏友之言,遂執筆而歎曰:「今此二儀草昧,九有腥羶,凡林林葱葱於兩間者,緩免黄口,聞知者工工商商之事,見習者雀躍羝觸之行,而吾人所謂君臣父子之道,漠乎先天矣。使時人觀之,反不謖其淀事於無事之事乎?」
允一曰:「我族之急急為此者,盖念世道如此,來生蠢蠢,倫陷胥溺,無可拯救。故槻有事放此,使知尊祖。因尊祖之心,使知忠孝實為人道之大也。其計不幾放近乎?」
余曰:「賻乎!允一誠知道者也。聖人不云乎?人之秉彛,極天天罔墜。有有血氣,則雖蔽錮剝傷之中,不能無天界之根也。因其根而感之以在先至誠之道,則如潜陽初動,源泉始達者,豈無其理乎?非惟一家子弟,二有望鄕里之觀感者,不無其基也。且《易》之『王格有廟』,乃爲濟復之道,則挽回世敎之術,孰知不在此乎?」
余日望其如此,並記答問之辭,以諗于有知者。
永曆五乙亥梧月上澣,平原后李正奎書。
【詩】
忠孝兼全出自天,蒙旌已近六禩年。
嵬然翠閣重修日,俚恨孫鮮學祖賢。
九代孫顯中羹墻拜題。
발문
公,牙城人,寔我中廟朝靖國功臣牙城君諱碩番之七世孫也。公之誠孝,出於天賦。七歲而父病 吮疽;九歲而母病,斷指侍湯之日,母思雉肉,則有雉飛入鷄塒。居廬之日,墓木枯於毒蟲,則吞蟲誠告,枯木復生。朝廷以其孝能感飛雉惡蟲,特除繕工監參奉,終不就職,退居于忠州之鳳川,故自號曰鳳洲也。
登萬曆己酉司馬,硏道守分,恬淡自娛。會當宣廟朝龍蛇之亂,聞大駕播越北向,痛哭誓以身殉。倭奴充斥,道路不通,布衣草屨,晝伏夜行,陪駕於松都,以至于龍灣。其備經艱險,道出於忠心。回駕後,以原從功臣除軍資監參奉,而公又辭謝不受。後以其子壽爵,追贈承政院左承旨。而以公卓異之行,尚不蒙旌褒之典,士林至今冤之。
公之七世支孫協寅、處寅、佐寅、日寅、弼寅、正寅五六員,繼先人未遂之志,怩悵出謀蔽慮,命其族子南植鳴號冤,始蒙恩典,豈不嘉哉!余始信其有其行, 而無無其褒者。且古人所謂「求忠臣必於孝子之門」者,不其然乎?
又從而詩曰:
忠能貫日孝根天,遺蹟猶傳數百年。
徹上蒙旌光乃祖,故家孫子亦云賢。
本年至月上澣,末裔完山李徹宇謹識。
<번역>
정려각 현판 기록 (명정)
효자이자 선조(宣祖, 묘조) 때의 호종공신(扈從功臣)인 선공감 참봉(繕工監參奉)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추증되신 이성국(李誠國)의 정문(지문, 旌門)이다. 상지(上之, 고종 임금) 22년인 을유년(1885년)에 명정(임금이 정려를 내림)되었다.
봉주이공 충효행적 (鳳洲李公忠孝行蹟)
공(公)의 이름은 성국(誠國)이고, 호는 매헌(梅軒) 또는 봉주(鳳洲)이다. 선조(宣祖) 조에 관직이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렀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의 훈공이 있었다.
공의 충성과 효성은 타고난 천성에서 나왔다. 7세 때 아버지가 병이 들자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었고, 9세 때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드리며 약탕을 받들어 모셨다. 어느 날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산에 올라가 소리 내어 울며 구하기를 마지않았다. 저물녘에 집에 돌아와 보니 꿩 한 마리가 닭장에 들어와 있으므로, 이를 잡아 공양하니 마침내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부모의 3년 상을 치르며 무덤가 여막에 살 때, 무덤의 나무들이 독충 때문에 시들어 가자, 공이 그 독충을 삼키며 (신령에게) 경계하여 고하니, 온 산의 독충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 조정과 민간에서 이를 기이하게 여겼으니,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바였다.
선조 조에 임진왜란(龍蛇之亂)이 일어나 임금의 수레가 의주로 피난(播越)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목숨을 바쳐 순국할 것을 맹세하였다.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의주(龍灣)까지 임금의 수레를 모셨다. 공의 빛나는 문장과 역동적인 필력으로 적진의 선봉장인 김충선(金忠善, 사야가)에게 세 차례나 글을 보내 귀화하도록 타일렀다. 임금(선조)께서 이를 가련히 여겨 비단 도포와 옥대를 내리며 깊이 총애하셨고, 관직을 높여 발탁하려 하셨다. 그러나 공은 "의로움을 바르게 할 뿐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다(正其義不謀利)"는 간곡한 마음으로 상소를 올려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충주(忠州) 봉황산(鳳凰山) 아래에 이르러 묵묵히 경전의 뜻을 완미하며 남은 평생을 마쳤다.
묘소는 충주 노은면 수용리에 있으며, 세상에서 명당이라 일컫는다. 삼도(충청·경상·전라도)의 유림들이 상소를 올려 서원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를 청하였으므로, 광무(光武) 을유년(1905년)에 삼양동(三陽洞)에 충효의 정려를 내리도록 명하셨다. 공의 실제 행적은 나라의 역사 기록(국승)과 《모화당집(慕華堂集)》에 실려 있다.
<蘂城春秋>에서 옮김.
봉주공 충효정서문 (鳳洲公忠孝旌序文)
- 승정원 좌승지 안동 김낙진(金洛鎭) 지음 (1885년)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고, 세상이 어지러워진 뒤에야 충신의 절개를 알며, 모진 바람이 불어야 강한 풀의 단단함을 알고, 나라가 뒤흔들려야 현명한 신하의 뜻을 식별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옛사람의 격언이다.
봉주공의 이름은 성국(誠國)이니, 아성군(牙城君)의 7대손이다. 관직은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선공감 참봉을 지냈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추증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탁월하고 기이한 품성을 얻었고, 어릴 때부터 일찍 철이 드는 지혜를 품었다.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날마다 총명함과 깨달음으로 나아가니, 문장과 생각이 날로 진취되어 총명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공은 이때에 마치 옛날의 공융(孔融)이나 사상(謝尚) 같았다.
충성과 효성이 천성에서 나와 그 정성이 신령을 감동하게 하였으니, 나이 겨우 7세에 아버지가 병들자 종기를 빨았고, 또 9세에 이르러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며 탕약을 받들었다. 어머니가 꿩고기를 생각하자 꿩이 닭장에 날아들어 그것을 이바지하여 올렸다. 공은 이때에 옛 효자인 검루(黔婁)나 왕상(王祥) 같았다. 그가 무덤가 여막에 살 때 벌레가 무덤의 나무를 해치자 벌레를 삼키며 경계하여 고하니 마른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 공은 이때에 왕부(王裒)나 맹종(孟宗) 같았다. 조정에서 그 지극한 효성을 듣고 특별히 선공감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충주 봉천(鳳川)으로 물러가 살며 스스로 호를 '봉주(鳳洲)'라 하였다. 공은 이때에 도연명(陶淵明)이나 동중서(董仲舒) 같았다.
문장은 당나라와 송나라의 사조(詞藻)를 겸비하였고, 필체는 진나라와 촉나라의 체격을 얻어, 문장의 빛남과 글씨의 힘참이 한 세상을 들썩이게 했다. 병풍에 휘두른 글씨들이 당시에 널리 퍼져 집집마다 보물처럼 감추어 두고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공은 이때에 이백(李白)이나 왕희지(逸少) 같았다. 문장과 품행이 모두 뛰어나 여러 번 과거(공차)에 응시하여 마침내 성균관(상상)에 올라 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공은 이때에 한유(韓愈)나 이하(李賀) 같았다.
선조 조 당시에 임금의 수레를 호종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온갖 간고함과 험난함을 겪으면서도 공손하고 신중하며 주밀하였다. 공은 이때에 영유(甯兪)나 안세(安世) 같았다. 임금의 수레가 환궁한 뒤, 호성(扈聖)·위성(衛聖) 원종공신에 녹훈되어 공신 녹권을 하사받고 특별히 군자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공은 이때에 노중련(魯仲連)이나 하지장(賀監) 같았다.
일찍이 봉천으로 돌아와 수풀과 샘물(임천)에 마음을 두고 물과 구름 사이에서 즐거움을 붙였다. 시선반 위에는 책과 거문고가 있어 한가로이 성인의 옥(珉)을 만졌고, 강가에서 낚시질하며 때로는 어부의 노래를 불렀다. 공은 이때에 엄자릉(嚴陵)이나 장지화(志和) 같았다.
대개 공의 곧은 충성과 큰 의리는 임금을 호종하던 날에 더욱 뚜렷이 드러났고, 맑은 취향과 높은 고표는 벼슬을 사양할 때 또한 볼 수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추운 겨울의 소나무와 잣나무', '모진 바람 속의 강한 풀'이 아니겠는가! 마땅히 무너지는 물결을 버티는 '지주(砥柱)'라 일컬을 만하다. "아름다움을 간직하여 바르게 한다"거나 "임진왜란의 일에 따랐으나 이룬 것 없이 마침내 종말을 아름답게 지켰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 의로움을 바르게 하고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 도리를 밝히고 공로를 계산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어진 사람(仁人)의 마음이다.
그 훌륭한 명성(풍성)이 우뚝 서니 마침내 삼도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고, 지극한 덕이 전해져 또 여러 대를 거치며 후손(雲仍)들이 번성하였다. 세월은 다소 멀어졌으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칭송(구비)은 닳지 않아, 조정에서 포상하여 정려를 세우는 일을 비로소 시작하게 되었다. 공의 충성과 효성은 듣지 못했다면 그만이거니와, 이미 들은 이상 한마디 칭송의 글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글재주가 없고 뜻이 졸렬하지만, 삼양현의 정문 가로목(楣)에 삼가 이 글을 쓴다.
고종 22년(1885, 을유) 11월(건갑월) 보름 지나서, 승정원 좌승지 안동 김낙진 삼가 쓰다.
<蘂城春秋>에서 옮김.
봉주이공 정려중수기 (鳳洲李公旌閭重修記)
- 이정규(李正奎) 지음 (1905년)
예강(蘂江, 충주 남한강)의 북쪽, 관봉(冠峰)의 아래는 구름과 산이 뒤섞이고 숲과 골짜기가 둘러싸고 있어, 한 구역의 별천지(洞天)를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에 밝고 높은 터가 열려 있어 참으로 탁한 세상 먼지 속에서도 깨끗한 형상을 지니고 있는데, 푸른 기와와 붉은 단청의 정려각이 우뚝하게 마을 위에 솟아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옛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관 춘추관사 이공(諱 성국)의 정려이다.
공은 아성(牙城)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태어나면서부터 훌륭한 바탕을 가졌으며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는 정성이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대개 아버지를 위해 종기를 빨아 아버지가 나았고, 어머니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의 병이 나은 것은 모두 스승에게 나아가기 전(어릴 때)의 일이다. 무덤을 지키며 벌레를 삼켜 시든 나무가 다시 살아나고, 어머니가 꿩구이를 생각하자 꿩이 닭장에 들어온 것은 모두 약관(20세) 전의 일이다. 이웃 마을과 온 고을이 경이롭게 여기며 전하여 송축하기를 "하늘에서 난 정성과 효성이 능히 신명을 감동하게 했다"고 하였다.
자라서는 총명하고 뛰어남이 무리 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품행의 아름다움과 글씨의 화려함은 족히 문사들의 모임(사림)에서 모범이 되고 문단을 주도할 만했다.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얻는 일(蓮桂金緋)이 조만간 다가올 상황이었으나, 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나아가는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선공감의 관직 임명이 있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선조조(선 임진왜란(龍蛇之役) 때에는 충성을 다해 임금의 수레를 호종하여 위성(衛聖)의 공훈에 녹훈되었으나, 특별히 군자감의 직책을 내려주어도 또 취임하지 않았다. 자연(임천)을 넘나들고 안개와 달을 노래하니, 세상의 청렴하고 고결한 선비들이 흠모하고 송축하며 우러러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유생들(章甫)의 일제히 올린 탄원에 따라 특별히 정려를 세우는 법전(植楔之典)을 명하셨으니, 이는 임금께서 그 충성과 효성을 장려하신 것이다. 자손들이 번성하여 여러 대에 이르기까지 효도와 우애로써 가업을 삼으니, 이는 하늘이 착한 이에게 보답을 내려준 것이다. 임금의 장려와 하늘의 보답이 이와 같으니, 공은 세상에 다시 유한이 없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정려의 담장과 집우가 무너지고 단청이 바랬다. 공의 여러 후손들이 서로 상의하여 고쳐 짓기를 도모하였다. 역사가 시작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공사가 완성되었다. 공사가 다 끝나자 이 일을 주관한 이들은 현중(顯中)과 윤일(允一) 형제였다. 윤일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으라고 당부하였는데, 윤일은 나의 경외하는 벗이다. 내가 비록 식견이 얕으나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벗의 말을 저버릴 수 없어, 마침내 붓을 잡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지금 이 세상은 천지가 혼탁하고 온 천하가 비린내로 가득 차서, 이 세상에 자라나는 아이들이나 글을 배워 아는 자들이나 하는 짓이 모두 장사꾼들의 이익 다툼과 같고, 보고 배우는 짓들이 날뛰며 들이받는 짐승의 행동과 같으니, 우리 인류가 말하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리는 아득히 먼 옛날 일이 되어버렸네. 지금 사람들이 이 정려를 본다면 오히려 아무 일도 없는 곳에 부질없는 짓을 한다고 비웃지 않겠는가?"
윤일이 말하였다.
"우리 가문이 급히 이 일을 하는 것은 대개 세상의 도리가 이와 같아서, 앞으로 태어날 세대들이 어리석어 인륜이 무너지고 다 함께 빠져죽게 되어도 건져낼 길이 없음을 염려하기 때문이네. 그러므로 이 정려를 중수하여 조상을 공경할 줄 알게 하고,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충성과 효성이 실로 사람의 큰 도리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네. 이 계획이 사람들을 올바름에 가깝게 이끄는 방책이 아니겠는가?"
내가 말하였다.
"훌륭하도다! 윤일은 참으로 도리를 아는 자로다.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지닌 떳떳한 천성(秉彛)은 지극히 하늘과 같아서 하늘이 망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셨네. 피와 기운이 있는 자라면 비록 가려지고 상처 입은 장막 속에서도 하늘이 준 본성의 뿌리(天界之根)가 없을 수 없네. 그 뿌리로 인하여 선조들의 지극한 정성의 도리에 감동을 받게 된다면, 이는 마치 겨울철 숨어 있던 양기가 처음 움직이고 샘물이 비로소 솟구쳐 오르는 것과 같으니, 어찌 그러한 이치가 없겠는가? 비단 한 가문의 자제들뿐만 아니라, 이 고을 향리에서 보고 느끼는 자들에게도 좋은 바탕이 될 것이네. 또한 《주역》에 '왕이 종묘에 지극히 이른다(王格有廟)'고 한 것은 세상을 구제하고 회복하는 도리가 되니, 무너진 세상의 교화를挽回(만회)하는 술책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다고 하겠는가?"
나는 날마다 세상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아울러 묻고 답한 말을 기록하여 지각이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노라.
대한제국 광무 9년(1905, 영력 5년 을해) 5월(오월) 초순, 평원 후인 이정규(李正奎) 씀.
[시 (詩)]
충성과 효성을 모두 온전히 함이 하늘에서 나왔으니,
정려를 입은 지 이미 대략 육십 년(또는 수십 년)이 되었네.
우뚝 솟은 푸른 정려각을 다시 고쳐 짓는 날에,
못난 후손이 조상의 현명함을 배우지 못했음이 부끄럽구나.
- 9대손 현중(顯中)이 조상을 사모하며 절하고 짓다.
발문 (跋文)
- 후손 완산 이철우(李徹宇) 삼가 지음
공은 아성(牙城) 사람으로, 바로 우리 중종(中廟) 조의 정국공신(靖國功臣) 아성군(牙城君) 휘(諱) 석번(碩番)의 7세손이다. 공의 지극한 효성은 타고난 천성에서 나왔다. 7세 때 아버지가 병들자 종기를 입으로 빨았고, 9세 때 어머니가 병들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며 약탕을 받들던 날, 어머니가 꿩고기를 생각하자 꿩이 닭장으로 날아들었다. 무덤가 여막에 살 때, 무덤의 나무들이 독충 때문에 시들어 가자, 벌레를 삼키며 정성으로 고하니 시든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
조정에서는 그 효성이 날아다니는 꿩과 징그러운 벌레까지 감동하게 하였으므로 특별히 선공감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고, 충주의 봉천(鳳川)으로 물러가 살았으므로 스스로 호를 '봉주(鳳洲)'라 하였다. 만력 기유년(1609년) 사마시(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도리를 연구하고 분수를 지키며 맑고 담박하게 스스로 즐겼다. 마침 선조 조에 임진왜란(龍蛇之亂)을 당하여 임금의 수레가 의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목숨을 바쳐 순국할 것을 맹세하였다. 왜적들이 가득 차서 길이 통하지 않자, 베옷과 짚신 차림으로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개성(송도)에서 의주(용만)까지 임금의 수레를 모셨다. 그 온갖 간고함과 험난함을 겪은 도리는 오직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임금의 수레가 환궁한 뒤 원종공신으로서 군자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훗날 그 아들(이수작)의 노인직 벼슬(수작) 덕분에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공의 탁월하고 기이한 행적에 비해 여전히 나라에서 내려주는 정려와 포상의 특전(旌褒之典)을 입지 못했으므로, 사림(士林)에서는 지금까지도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
공의 7세 방계 자손들인 협인(協寅), 처인(處寅), 좌인(佐寅), 일인(日寅), 필인(弼寅), 정인(正寅) 등 다섯여섯 명이 선조의 미처 이루지 못한 뜻을 이어받아, 안타까워하며 계책을 내고 지혜를 모았다. 그리하여 족자(가문 조카)인 남식(南植)에게 명하여 원통함을 나라에 부르짖게 하니, 마침내 비로소 조정의 은혜로운 포상(명정)을 입게 되었다. 이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내가 비로소 그에게 그러한 행실이 있었다는 것은 믿었으나, 그를 찬양하고 포상해 주는 조치가 세상에 없음을 안타까워했는데(余始信其有其行而無其褒者), 마침내 정려를 받았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또한 옛사람이 말한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 것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이에 이어 다음과 같이 시를 읊는다.
충성은 능히 해를 꿰뚫고 효성은 하늘에 뿌리를 두었으니,
남겨진 자취가 오히려 수백 년을 전해 오네.
임금께 상달되어 정려를 입어 선조를 빛내었으니,
대를 이어온 가문의 자손들 또한 현명하다 하리로다.
- 본년 11월(지월) 초순, 말손 완산 이철우 삼가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