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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6. 묵상글 (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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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
오늘 독서는 창세기의 시작으로 하느님의 창조를 얘기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는 얘기인데
그 결과는 단지 치유에 그치지 않고 구원까지 발생합니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그러니 오늘 독서와 복음을 합치면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주제를 묵상하니 자연 <연중시기 공통 감사송 3>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를 창조하셨듯이
또한 인자로이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은
창조와 구원 사이에 인간이 비 구원 상태에 있었음을 전제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창조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구원할 필요가 없겠지요.
예를 들어 아이를 낳았는데 정상적인 아이를 낳았다면 치유가 필요 없듯이.
그런데 낳기는 정상적으로 낳았는데 아이가 크게 다치거나 불치병이 들면
치유가 필요하듯 하느님의 창조는 정상적이었는데 인류가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영적으로 병이 들었다면 치유가 필요하고,
그중에서도 영적으로 병들었다면, 곧 죄를 지었다면 구원이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창세기는 하느님의 창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원하시는 대로 잘 되었고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잘 창조된 인류와 피조물이 인간의 죄로 비 구원 상태에 놓이고,
비 구원 상태에 있는 인류와 세상 구원을 위해 파견된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노래하며 감사하는 것이 <연중시기 공통 감사송 3>입니다.
저는 이 감사 기도를 바칠 때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 인간의 포기하는 사랑과 비교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는 애를 낳고는 내버리는 사람도 있잖습니까?
며칠 전 아이를 팽개치고 놀던 엄마 때문에 아이가 굶어 죽은 사건이 있었고,
그런 뉴스가 요즘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또 죄지은 사람을 몇 번 사랑으로 충고하고는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랑을 포기하여 구원을 포기하는 데 비해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고 끝까지 구원하시지요.
그러므로 오늘 창세기에서는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되었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복음에서는 환자들을 예수께 데려오려고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이웃의 사랑을 마음에 같이 간직하는 오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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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오늘 <독서>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이고,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의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곧 ‘믿음’으로 창조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민수 15,37-41 참조)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먼저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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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손이 되어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 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할머니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삼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도 환영받지 못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받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긴 과거 때문에 미래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게 한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사람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야고5,15).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모셔다 놓아진 이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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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과달루페 성지순례 마지막 날에 ‘나눔’이 있었습니다. 한 자매님은 작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신앙으로는 아들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하느님의 품으로 옮겨감이라는 것을 믿지만, 현실에서는 아들이 너무나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다들 이번 순례가 얼마나 좋았는지, 이번 순례를 통해서 많은 것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마지막에 저의 차례가 있었습니다. 보통은 다들 수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순례에서는 지난 2020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당시에는 코로나 팬데믹이 심했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서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뉴욕에서 기도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나눔을 하면서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모든 어머니가 그런 것처럼 저를 무척이나 사랑하였고, 자랑스러워하였던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생각에 감정이 복받쳐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런 저의 마음을 보듬어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천국에서 저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생각이 들었고, 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번 성지 순례를 통해서 따뜻함, 순수함, 사랑, 너그러움을 마음에 담아 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빛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해와 달, 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 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들을 하고도,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광개토왕비, 진흥왕 순수비’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명예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잘못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잘못들은 다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뉘우치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 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 갰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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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년 넘게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12월, 몸의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3~4시면 저절로 일어났는데, 그 시간에 눈은 떠지지만 ‘조금만 더’를 마음속으로 대뇌이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면 아침 6시입니다. 사실 새벽에 하는 것이 많기에, 이렇게 늦게 일어나면 바빠집니다. 그러면서 20년 넘게 유지하고 있었던 새벽 기상이 왜 이렇게 힘들어졌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12월에 외부 강의가 많아서 피곤하다는 이유로 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많은 거리를 걷고 또 헬스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을 피곤하다며 쉬다 보니 일어나는 힘도 줄어든 것입니다. 하긴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정신력은 체력과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의지력이라고 말하는 추상적 능력의 출처는 바로 체력에 있다는 것입니다.
피곤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운동하지 않아 체력이 떨어지면서 의지력을 비롯한 정신의 힘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피곤하다고 또 시간이 없다고 줄였던 운동이었는데, 사실은 나의 피곤을 없애고 또 시간도 벌어주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요?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피곤해서 쉰다고 그리고 바빠서 쉰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쉰다고 해서 피곤과 바쁨이 실제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과 함께하면서 세상일에 대한 피곤을 줄이고, 더 맑고 건강한 정신으로 시간을 벌어 더 많은 일을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신앙생활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과 만남의 끈을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사람들은 청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과 함께해야 한다고, 어떻게든 예수님과 만남의 끈을 연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받았습니다.
피곤하다고, 바쁘다고, 너무 고통스럽다고 그 밖의 이유를 들어 주님에게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삶은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빠도 운동을 해야 더 많은 일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 안에서 더 많은 일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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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는 ‘여기’에 있으면 ‘거기’ 있길 바라거나, 또는 현재에 있으면서 미래에 있길 바라기 때문에 생깁니다. 이 괴리감 때문에 당신의 마음이 갈라지게 됩니다(에크하르트 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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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향歸鄕
귀가歸家의 여정
-예수님이 참고향故鄕이시다-
오늘 2월5일은 성 바오로 미키를 비롯한 26명의 신자들이 일본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날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시 이들의 영웅적 순교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이들중 예수회 사제였던 성 바오로 미키는 예수님과 같은 나이 33세에 순교하였고 성 바오로 미키를 비롯한 26명 순교자들은 일본인들과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 회원들, 즉 일본인들과 유럽인들이었습니다.
특히 감동적인 것은 성 바오로 미키와 23명의 체포된 그리스도인 동료들이 1597년 1월 3일부터 2월5일까지 27일 동안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1000km 걸어가 모두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걸어가는 동안 교회의 찬양과 감사의 찬송가인 테데움을 불렀습니다. 다른 동료들 25명과 함께 십자가 달려 순교 직전 성 바오로 미키는 당당한 얼굴로 모여있던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했고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을 기원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고, 그의 스승 예수님처럼 사형집행자들을 용서했습니다.
참으로 이들의 영웅적 신앙이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이들은 순교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향임을 믿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영웅적 순교의 죽음도 가능했음을 봅니다. 성 바오로 미키의 영웅적 순교 모습에서 우리의 첫 순교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이 떠오릅니다.
저는 믿는 이들의 삶을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의 여정이라 일컫곤 합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아버지 계신 본향집으로 귀향이라는 것이지요. 고향을 찾는 원초적 본능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바로 이렇게 고향을 찾는 귀향본능에 따라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자매들의 이구동성의 고백은 친정집을 찾는 느낌이고 많은 분들 역시 고향집을 찾는 느낌이라 말합니다.
어제 저를 찾았던 ‘혼인주례 1호 부부’와의 만남도 참 행복했습니다. 고향집을 찾듯이 수도원을 찾은 부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부부가 떠나기 전 성덕聖德 점수를 각자 매겨 보도록 했습니다. 100점 만점에 기본점수 20점, 진복팔단 8개 항목 각각 10점 만점에 80점, 그리고 예수님 보너스 점수 10점으로 했습니다. 각자 후하게 점수를 주라 했습니다. 점수를 확인해 보니 자매님은 99점, 형제님은 94점이었습니다.
“99점, 94점 놀랍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성인부부입니다. 오늘 2월5일은 두 성인부부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격찬의 덕담과 더불어 크게 웃었습니다. 완전히 주님의 한가족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제 저는 본기도 서두중 “주님의 가족”인 저희를 자애로이 지켜주십사라는 말마디에서 은혜 받았다 고백했습니다. 특히 영성체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체성가 177장을 부를 때는 주님의 한 가족이 된 느낌을 지니곤 합니다.
제가 산티아고 800km 2000리 순례 여정중 성전聖殿에 들릴 때마다 느낌은 꼭 고향집처럼 편안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수도원이 완전 고향집처럼 느껴져 휴가의 필요성을 잊고 지낸지 수십년이 됩니다. 특히 성체성가 177장 2절은 늘 불러도 새롭고 위로와 힘이 됩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내 주님 계신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가사도 곡도 은혜롭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신 곳, 바로 거기가 외딴곳이자 고향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원고향입니다. 주님의 한 가족이 되어 예수님을 모실 때 비로소 온전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영문 주석에서 얻은 통찰이요 그대로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구원된(were healed)’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에소존토(esozonto)’는 단지 육체적 치유 이상의 뜻을 함축한다. 초대교회 어휘중 그 말은 구원의 전적 체험을 묘사한다. 그말은 단지 ‘복지(wellness)’가 아니라, ‘온전함(wholeness)’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귀향(coming home)’이다.”
바로 예수님께 귀향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동창회나 특정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과정을 수료한 뒤에 모이는 모임을 가리키는 표현도 홈커밍, 귀향입니다. 고향집인 예수님께 돌아와 만날 때 비로소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미사는 귀향의, 커밍홈의 실현이요 구원의 체험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의 고향을 잃어 병든 이들 원고향, 본향집인 예수님께 돌아와 만나니 모두 치유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 청했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6,56).
그대로 예수님께 귀향하여 치유 구원받는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오늘부터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말씀으로의 창조과정을 통해 사람이 살 수 있는 보금자리 집을 마련해 주시는 과정이 참 인상적입니다. 창조과정이 일정한 틀에 따라 반복적으로 이뤄집니다. 한 대목만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부르셨다-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이런 틀로 계속되는 창세기 창조과정은 내일까지 계속됩니다. 뚜렷이 경계를 지어가며 참으로 인간이 살 수 있는 보금 자리 가정 집의 품으로 만들어 주는 과정이 은혜롭고 인상적입니다.
더불어 예전 수차례 인용했던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라는 괴테의 말도 생각납니다. 한계없이 끝없는 욕망대로 살 때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반대도 그대로 성립됩니다. “천국에는 한계가 있다”입니다. 한계가 없는 혼돈 상태를 점차 뚜렷한 경계를 지어 천국같은 살집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참 섬세한 배려의 창조과정입니다.
그래서 한계限界와 경계境界를 뚜렷이 지어주는 수도원 자연 환경, 삶의 한계를 지어주는 관례서, 하루 삶의 일과표의 균형과 조화가 무질서의 혼돈이 아닌 질서잡힌 지상천국을 살게 합니다. 이래서 참 자유로운 삶을 위해 한계에 익숙해지는 자발적 선택의 ‘한계의 훈련’이 정주생활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귀가의 여정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고향입니다. 원고향, 본향집인 예수님께 귀향하여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얻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예수님께 귀향하여 한계와 경계가 분명한 균형과 조화의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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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 구절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주님께 많은 사람이 병자들을 데리고 옵니다. 그 병자들은 모두 가족이며 친척이며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근방에 오셨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매고, 업고, 끌며 왔을 것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매달리고 또 매달려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옷자락의 술에라도 손을 대려는 간절함을 가져 보셨나요?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그것에 손을 댄 사람은 구원받았다고요.
간절함이 기적을 만듭니다. 주님만을 믿음으로 따르는 이들에게 기적은 함께합니다.
기적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꼬마 아이는 부모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모는 큰 아이의 수술비가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기적만이 큰 아이를 구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꼬마 아이는 자신의 저금통을 들고 근처 약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약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저금통에 들어 있는 돈으로 기적을 사고 싶습니다.
약사는 꼬마에게
기적은 비싸단다. 그런데 왜 기적을 사려고 하니? 라고 물었습니다. 꼬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형이 아픈데요. 기적만이 형을 살릴 수 있다고 엄마, 아빠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국에는 약사의 친구의 소아과 의사가 있었고, 그 의사는 마침 돈이 없어 수술할 수 없는 아이들을 돕는 후원회를 창설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기적은 이렇게 찾아옵니다.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설 때 우리도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헹거가 망가졌습니다.
저는 청소도 빨래도 제 손으로 합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성지의 이런저런 일정에 치여서 빨래를 제때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빨래는 모이고 모입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세탁기에 모아 놓은 빨래를 가득 넣고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헹거위에 촘촘히 널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달이 났습니다. 헹거가 무너져버렸습니다.
아마 물에 젖은 빨래가 무거웠던 모양입니다. 헹거에게 미안했습니다.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웠기 때문에 헹거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마음에 너무 무거운 짐들을 한꺼번에 올려놓으면 우리 마음도 무너지고 망가질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은 그렇지 않고 망가져 있을 수 있지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짐을 내 마음에 올려놓지 말아 주세요. 마음이 지치지 않게 잘 조절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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