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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줄은 하나님의 손안에
출 7: 14-25
사고가 많은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특히 교통신호를 잘 지켜야지요. 신호등을 잘 보아야지요. 신호를 받고 있는데 옆에 장로님의 차가 섰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장로님 안전운행 하십시오. 차를 보내면서 속으로 주여 장로님의 차와 함께 하옵소서.묵상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상모교회 장로님의 차가 사고나면 장로님도 부끄럽고 가족들이 미안하고 교회는 질책의 소리가 들리고 목사는 기도하지 못한 죄송함이 온 성도 보기가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가 없는 것입니다.애굽 바로왕에게 하나님의 빨간 신호등이 왔으나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질주하였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경고의 신호등을 보는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자신의 손에들고 있는 신호등을 무시하는 바로를 그냥 둘 수 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생명줄은 하나님 자신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방해가 되는 바로에게 재앙이 비로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진행에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바로 왕에게 애걸하고 하나님의 종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드디어 하나님께 부끄럽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재앙으로 나일 강물을 피로 물들인 피 재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의 생명줄이자 숭배의 대상이였던 나일 강이 피로 물들임으로서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며 복을 주고 있습니다고 믿고있는 나일 강의 허무함을 다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1. 하루의 일과를 기도와 말씀으로 시작하십시요. (15)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보내 달라고 바로에게 말하기 위해서 아침에 하숫가에 나가야만 되었습니다. 바로가 아침에 나일 강으로 나간 것은 나일 강을 관장한다는 '크놈(Khnum)'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바로는 매일 아침 애굽의 풍요를 가져다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앙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하루의 일과를 신에게 맡긴다는 믿음을 보라. 그에게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헛된 우상을 섬기는 바로도 자신이 섬기는 신에게 이러한 믿음과 헌신을 보이는데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한가요? 여러분은 오늘 누구를 만나며 어떤 일을 할것인가를 확인하고 시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건강해야 하므로 운동하고 시작하지는 않습니까? 주머니에 돈이 있는지 확인하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일과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하루의 일과를 시작함에 확인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도 나의 삶이 의에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부탁해야 한다. 여러분은 하루의 일과를 무엇으로 시작하십니까?
여러분의 주머니에 돈이 있습니다고 하루를 믿지마시기 바랍니다.
바쁘게 하루의 일과가 짜여있습니다고 기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운동했습니다고 건강에 자신을 갖지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루를 승리케 해주지 못합니다. 돈이 안정된 일터가 육체의 건강이 짜여진 스케줄이 나를 안정되게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말 여러분의 삶을 책임질 수 있고 평안을 보장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여러분은 매일 아침 삶을 시작할 때 이런 하나님께 묵상합니까? 그분의 말씀과 그분께 기도를 드리므로 하루를 시작해 보십시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시작하십시요.
그 하나님께 의뢰함으로 시작하면 여러분의 매일은 결코 실패함이나 불행이 없을 것이며 평안과 승리로 가득차게 해 줄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59:16에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란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2.바로앞에 나갈때는 지팡이를 손에 쥐고 나가라.(15)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모세는 지난날 자신의 지팡이 뱀이 바로의 지팡이 뱀을 삼킨 그 지팡이를 손에 쥐고 바로 앞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이긴 하지만 이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 습니다. 바로가 제사를 드리는 곳에는 바로의 많은 신하와 군사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재앙을 선포하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고 그래도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의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지팡이는 사명을 받을 때 뱀이되게 하시었고 또 이 표적이 내가 너와 함께 하는 증거라고 말씀 하셨다. 지팡이는 나약한 모세에게 믿음을 주었다. 또 용기를 주었습니다. 확신을 주었습니다. 자신은 비록 연약한 인간에 불과 하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위대하시고 능력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함으로 바로앞에 담대히 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바로앞에 선 모세처럼 우리가 넘지 못할 고난과 위기를 만나기도 한다. 그때 여러분의 손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지팡이를 꼭 쥐어 있기 바란다. 모세의 지팡이가 되어 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들의 지팡이가되어 험하고 어두운 길에 여러분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간 내 마음에 주님이 계심을 확인하십시요.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라. 분명히 승리할 것을 믿으시라.
시23: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3 아멘은 최상의 투자이지만 불순종은 엄청난 손해이다. (17)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를 보내면 진행되고 잇는 공사는 누가 할 것이며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를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태양의 아들로 섬긴받는 자신이 눈에 보이지도 않은 신 앞에 초라한모세가 전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니 일언지하에 노(NO) 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아멘 하지 아니하고 노 한 바로에게 첫 번째 재앙이 내리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있는 모든 물이 피로 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순간적인 이익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자존심도 버려야 합니다. 내 머리로 따지는 계산서는 도리어 엄청난 손해를 가지고 올 수 있습니다. 무엇이 여러분에게 아멘하지 못하게 하는가? 머리로 따져보니 손해가 되는가? 체면 때문에 앞장서지 못합십니까?
여러분의 중심에 아멘하지 않으면서 재물, 건강, 체면지키면 그것은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것을 빼앗아 갑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과 아멘하십시요.
여러분의 가진 것이 안전할 것이며 하나님은 더 많은 것으로 풍족하게 해 줄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위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17)
"내가 내 손의 지창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지팡이로 하수를 친 것은 모세와 아론인데 하나님이 직접 하신 것처럼 말씀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언제나 자신의 권위로 종들의 권위를 세워 주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바 없는 죄인이라고 할 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그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에도 하나님께 직접 소명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 사역자들도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어 주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교인들이 자신보다 부족한 사람이라고 존경하거나 순종하려고 하지 아니하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식면이나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그들을 섬기려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만의 무시가 아니라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인간적으로 부족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겸손돠 순종하는 마음이 있으면 결코 주님이 가만히 있지 않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현실의 교회 가운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교회에서 가장 겸손히 차량을 안내합니다, 아니면 대문에서 인사를 한다 새신자를 담당한다는 그래서 온 교인으로 하여금 존경받는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히13:17에"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십시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게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5.말씀을 거부하고 자신을 믿는자의 종말은 비극적인 멸망 뿐이다.(17-8)
하수를 치면 피로 변한다는 하수는 나일 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애굽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이 강이 그들의 생명줄이기 때문이었다. 식수로 사용했고 비옥한 땅을 허락하여 많은 수학을 거두어 먹고살았으며 애굽을 왕래하는 중요한 교통 수단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강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강은 신이 주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강을 피로 물들여 물을 먹을 수 없게되고 모든 강의 고기는 죽게 만들고 죽은 고기는 물위로 떠올랐고 집집마다 물그릇 물동이에 물은 피로 변하였으니 엄청난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애굽 온천지의 모든 사람들은 엄청난 시련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아니 생애속에 풍성한 축복과 은헤를 베푼 것은 나일 강이 아니라 모세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바로를 비롯한 애굽인들은 그 강에 엎드려 복을 달라고 기도했고 또 그강이 그들의 생명줄로 알고 섬겨왔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만에 쌓여있는 자들의 종말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신앙관을 다시 새롭게 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떤 경우라도 우상을 섬기거나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모두는 하나님만을 존귀한 나의 생명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상으로 섬기며 그들의 생명줄인 나일 강을 치셨는가하면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임을 아르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나일강은 무엇이가요?
재물인가요?
명예인가요?
지식인가요?
가족인가요?
건강인가요?
무엇에 여러분의 생명을 걸고 있습니까?
주님이 그 강을 치시기 전에 빨리 포기하고 하나님을 존귀한 자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분이 나에게 참된 행복과 기쁨을 주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사랑하십시요. 사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눈에 들보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갑시다.
19절에 와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자가 아무도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의 누구 집에는 재앙이 오고 누구 집에는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애굽 온 천지에 다 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마지막날에 심판의 대상자가 되지 말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이 심판은 오늘 당장 여러분에게 임할 수도 있으니 말씀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손에 주의 임재하심의 증거인 지팡이를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여러분은 자만심과 교만한 마음을 절대로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상에 생명을 걸지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아멘하여 승리의 기적을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열 가지 재앙과 하나님의 의도
출 7: 14-25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 라는 파워게임은 삶의 많은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히 남자들 세계에서 이 파워게임은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주도권의 싸움이 가장 치열한 곳이 정치현장이지요. 정치문제는 바로 이 주도권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인 이회창씨의 아들 이정현씨의 병역문제를 두고 주도권 싸움이 치열합니다. 어떻게 보면 목숨을 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검찰 수사의 결과에 따라 아마 정치권은 지각변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가정에서도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는 문제로 부부싸움을 합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 주도권싸움입니다. 그러다가 40대쯤 되면 더 이상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일방적으로 한쪽에서 이 싸움을 포기합니다. 아마 남자들이 포기하는 것 같지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 주도권싸움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오히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까? 오래 교회 다녔다, 혹은 성경의 지식이 많다라는 것이 믿음의 척도는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이 믿음이 없습니까? 여전히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열 가지 재앙의 원인
우리가 출애굽의 사건을 보면서 이 부분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 일에 전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일은 사실 모세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에는 모세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론이 아무리 말을 잘해도 그 말 잘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단지 하나님께 쓰임 받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시는 일에 주도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왜 바로왕에게 진노하셨습니까? 열 가지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속한 백성, 자기의 통치 안에 있는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누군데 내 백성을 내보내라고 말하느냐? 라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 백성을 내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도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바로 왕이 이것 때문에 대결을 벌입니다. 14절을 한번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냅니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주권을 인정하려하지 않습니다. 바로 왕은 자기 힘을 믿었습니다. 군사력을 믿었고, 나라의 권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얼마나 힘든 노동을 하는가가 아니었습니다. 벽돌을 몇 개나 구워야하는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진정한 문제는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에서 모세를 보내어서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섬겨야 한다’ 그러나 바로왕은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다. 여호와가 누군데 보내주겠느냐 안된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을 보내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이스라엘이 누구의 백성인지를 애굽 땅에서 분명히 드러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싸움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요즘 세상이 그렇습니다. 과학이 좀 발달하고 의학이 발달하게 되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상대화하려고 합니다. 흥미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애굽 땅에 내린 첫 번째 재앙이 물이 변하여 피가 되는 것입니다. 애굽의 하수가 다 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7:22에 보면 애굽의 술객들도 똑같이 했습니다. 그러자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집니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는 너희들이 말하는 하나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큰 소리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주위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연 질서의 일부를 알아내고는 마치 인간이 하나님이 된 것처럼 교만해 있습니다. 시험관아기, 복제인간 등을 말하면서 생명의 창조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과학의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해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과학만 발달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지식과 과학의 힘으로 하나님의 영역을 조금 알아냈다고 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이 변하여 피가 된 재앙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재앙은 그것 하나 만이 아닙니다. 열 가지 재앙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바로와 애굽 땅에 나머지 재앙들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애굽 사람들은 바로왕의 교만함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실 물이 없어서 하수가를 두루 파야 했습니다. 바로의 교만 때문에 애굽 사람들의 고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사건은 우리 시대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요즘 유전자 분야의 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습니다. 게놈지도를 만들어 유전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유전자를 조작해서 굉장한 품종을 만들어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유전자 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획기적인 길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벗어난 것은 오히려 인간에게 재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일어난 무서운 재앙중의 하나가 바로 광우병입니다. 광우병이란 그 병에 걸린 소가 마치 미친 듯이 계속 사지를 떨다가 죽는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 병의 원인은 동물성 사료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를 초식동물로 만들었습니다. 풀만 먹고 살도록 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주권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소를 더 빨리 더 크게 자라게 해서 돈을 벌 목적으로 동물성 사료를 먹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것이 광우병의 원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우병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하고 자기 힘, 자기 고집, 자기 생각대로 사는 인간들에게 주는 하나의 경고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 가지 재앙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바로 왕과 애굽 땅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열가지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리셨습니다. 출7-11장에 보면 이 열 가지 재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열 가지 재앙은 그냥 우연히 아무렇게나 행하여 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그리고 애굽 땅에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열 가지 재앙을 행하신 것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이 열 가지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의지하고 살았던 애굽의 신들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온 땅의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애굽 땅에 있는 거짓 신들을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깨뜨리셨습니다.
하나 하나 살펴보십시다. 첫 번째 재앙은 피 재앙(출7:14-25)입니다. 나일 강의 하수를 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나일 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나일강은 애굽 사람들에겐 생명의 젖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일 강을 보호하는 신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중에 ‘하피’라는 남신과 ‘이시스’라는 여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일 강을 피로 만드시면서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의지했던 신들이 아무 것도 아님을 드러내 버렸습니다.
두 번째 재앙은 개구리 재앙(출8:1-15)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개구리는 생식력이 좋기 때문에 다신을 하고, 여인들의 출산을 돕는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개구리 모양의 신을 그들은 ‘헤케드’ 라고 했는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백만이다’ ‘무지무지하게 많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구리 재앙은 그들이 그렇게 의지했던 신들이 오히려 자기들을 괴롭힌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그 일 때문에 도리어 망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심판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재앙은 이 재앙입니다.(출8:16-19) 요즘 세대사람들은 이를 잘 모르지만 연세가 많은 분들은 알고 계시지요. 밤늦도록 손톱으로 눌러서 이를 잡은 기억이 납니다. 손톱이 새빨갛게 되지요. 그러고도 그 손으로 세수도 안하고 밥 먹고 뭐 그랬습니다. 모세가 땅을 티끌을 치니까 이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가 온 애굽 사람과 짐승들을 괴롭혔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 중에 ‘세트’라는 신이 있는데 이것은 땅의 신입니다. 사막은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지키는 소중한 땅이지요. 그런데 그 땅의 티끌들이 이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히게 됩니다. ‘세트’라는 신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무력화 된 것이지요.
네 번째 재앙은 파리 재앙입니다.(출8:20-32) 애굽 사람들은 날아다니는 파리가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사단을 “바알세불”이라고 했는데 바알세불은 ‘파리의 왕’이란 말입니다. 애굽 땅에서는 이 파리 신을 ‘우앗치트’라고 불렀습니다. 파리 모양으로 된 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숭배하고 있던 파리가 그들을 공격하게 함으로 파리신이 오히려 그들에게 고통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다섯 번째 재앙은 악질 재앙입니다.(출9:1-7) 생축과 가축들에게 악질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생축은 애굽 사람들의 재산 중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중에 ‘하토르’라는 신이 있는데 암소 머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또 ‘아피스’라고 신은 수소신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가축을 귀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재앙이 가축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소들이 죽어갔습니다. 생축들에게 재앙이 임했는데 그들이 섬기던 하토르신, 아피스 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섯 번째 재앙이 독종의 재앙입니다.(출9:8-12) 이 독종이 애굽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덮쳤습니다. 심지어 애굽의 술객들에게도 붙었습니다. 술객들도 그 독종으로 인해 죽어갔습니다. 원래 애굽의 술객들은 치료자들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술객들과 함께 ‘새크멘트’라는 치유의 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자 치료자 술객들도 독종에 들어 병들게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던 신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일곱 번째 재앙은 우박재앙입니다.(출9:13-35) 우박이 쏟아지자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어두워졌고, 다른 하나는 땅의 채소와 나무가 다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고 있던 ‘누트’라는 신과 ‘오리시스’라는 신을 꺾는 것이었습니다. 누트신은 하늘의 여신이고 오리시스는 수확을 지키는 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이 신들이 다 무력했다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재앙은 메뚜기 재앙입니다.(출10:1-20) 메뚜기로 인해 우박 피해를 겨우 피한 농작물이 다 전멸해 버렸습니다. 이 메뚜기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농작물을 보호하는 신으로 믿었던 ‘세라피스’라는 신을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아홉 번째 재앙은 흑암의 재앙입니다.(출10:21-29) 애굽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신이 태양신 ‘라’였습니다. 애굽의 여러 신들 중에 최고의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어두워졌는데도 ‘라’ 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이 믿는 태양신을 심판해 버린 것입니다.
참 많지요! 오늘 우리들에겐 이런 우상들이 없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들, 돈, 권력, 지식, 직장, 아들, 인간관계 등등. 계속해서 보십시다.
열 번 째 재앙은 죽음의 재앙이었습니다.(출11-12장) 애굽 사람들은 바로를 신으로 믿었습니다. 바로의 왕좌를 이어갈 왕자도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의 장자를 죽였습니다. 바로의 장자만이 아니라 온 애굽 땅의 장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애굽의 문화와 바로를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우상들을 남김없이 무너뜨림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주재권을 온 애굽 땅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바로는 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의 결과
이 열 가지 재앙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성경에서 두 가지를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애굽 온 땅에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는 동안 이 모든 재앙에서 제외된 한 지역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한 고센 땅입니다. 하나님은 고센 땅에 재앙이 임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모든 재앙에서 지켜주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똑같이 병들고 똑같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려움 때문에 망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불신자에겐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어려움은 오히려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재앙과 아무 관계없습니다. 어떤 저주도, 어떤 사술과 복술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운명과 저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롬8:2)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언젠가 제가 간증한 적이 있지요.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시골교회에 아주 신실한 집사님 내외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방앗간을 하고 있었는데, 그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동네 뒤에 흐르는 시냇물이 불어나게 되자 그만 제방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모래와 함께 동네를 덮쳤는데, 참 그것이 이상하게도 믿음이 좋은 집사님 방앗간을 덮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방앗간은 온데 간데 없고 모래더미만 쌓였습니다. 반면 동네 사람들의 집은 멀쩡하게 된 것이지요. 거꾸로 되어야 참 은혜가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동네에 시냇물과 모래가 덮치고 집사님 집은 멀쩡했더라 라고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자 동네사람들은 큰 소리쳤습니다. “예수 믿어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 하나님이 계신다면 저럴 수 있느냐?”라고 한마디씩 했습니다.
이 집사님 내외분도 시험에 빠질 뻔 했지요. 그런데 비가 그치고 수해복구를 하면서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모래더미를 파내고 있었는데, 참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포크레인 기사가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집사님의 방앗간 밑에 금광맥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노다지’를 발견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 분들이 방앗간을 잃었지만 오히려 금맥을 발견하고 큰 부자가 되었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믿음 좋은 집사님을 축복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대의 축복은 금맥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난리가 날 때 방앗간을 덮쳤던 것이지요. 그래야 땅밑을 파낼 것이고 금맥을 발견할 것이 아닙니까? 물 난리난 것이 축복의 기회가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고센 땅을 재앙에서 지킨 것처럼 그렇게 지키실 것입니다.
재앙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가 눈여겨 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애굽 땅을 심판하실 때에 바로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반응은 참 흥미 있습니다. 바로의 반응은 네 가지 단계로 나타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도록 내 백성을 내 보내라’는 것입니다. 재앙이 계속되자 바로가 반응한 첫 번째 단계는 그러면 ‘이 땅 여기에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가긴 가는데 멀리 가지 말고 이 땅에서 내가 통치하고 있는 이 영역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바로의 반응은 악한 사단의 전략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할 때 악한 사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기는 믿어 하지만 이 세상을 떠나려고는 하지마 그냥 이 안에서 믿어” “성경 어디에 술마시지 말라고 했나 술취하지 말라고 했지, 아니 성경 어디에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한곳이 있어 그냥 옛날 하던 그대로 생활 습관을 바꾸려고는 하지 말고 그냥 교회만 다녀”그런데 바로 이것이 사단의 첫 번째 전략입니다.
바로의 두 번째 반응은 출8:28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바로는 “너희는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계속해서 아니다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려야 된다라고 하자 바로는 그러면 “내 땅을 떠나도 되긴 되는데 너무 멀리는 가지마라”라고 말한 것이지요. 사단의 전략도 같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예수 믿으려고 하면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한마디씩 합니다. “예수 믿는 것 좋지 그러나 너무 깊이는 들어가지 말라구” “깊이는 빠지지마” 이런 소리는 다 악한 사단의 소리입니다.
바로의 세 번째 반응은 출10:9-10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계속되자 바로는 “멀리가도 좋다. 그런데 어린 것들, 네 자녀들은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의미심장합니다. 사단은 동일하게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믿으려면 너만 믿고 나한테 예수 믿으라고 하지 말라, 너만 열심히 믿고 애들은 데리고 갈 생각하지 말라” 바로가 누구를 데리고 나가지 말라고 하는지 잘 봐야 합니다. 이것은 사단의 전략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후대를 잃어버리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사단의 전략은 분명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잘믿는데 자녀들은 믿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사단을 꺾어야 합니다. 자기들 믿음이라고요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의 네 번째 반응은 출10:24에 나옵니다. 마지막 재앙직전에 바로는 이렇게 타협합니다. 참 끈질기지요. 그냥 항복하면 되는데 바로는 마지막까지 발악을 합니다. 바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다 가도 좋다 애들도 데리고 가라 그러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가라” 바로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늘어졌던 것이 바로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재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단이 마지막까지 공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시간을 바쳐라 열심히 교회다녀도 좋다 그러나 물질은 바치지 말라 살아가자면 제일 필요한 게 돈이 아니냐 늙으면 돈이 있어야 돼. 머니 머니해도 머니가 최고야’ 사단의 전략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집착하고 애착을 갖는 것이 물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물질에서 자유하지 않으면 애굽을 온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의 헌신은 진정한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질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겐 백만원이 한달 생활비 전부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겐 용돈 정도일 수 있습니다. 물질의 양은 개인마다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물질의 주재권도 하나님에게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속에 있는 삶
오늘 우리가 애굽 땅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의 분명한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출9:16에 보면 그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온 땅의 주인이며 유일한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애굽 땅의 우상들을 하나 하나 무너뜨리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리석은 바로 왕은 자기의 힘을 믿고 하나님의 주재권,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망했습니다. 애굽 사람들도 헛된 우상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속은 것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돈이 좀 있다고 세상의 권력이 좀 있고, 지식이 좀 있다고 하나님 앞에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과학이 발달해서 하나님의 영역을 조금 손대기 시작했다고 큰 소리쳐서도 안됩니다. 온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거짓 것들이 우리 주위에 있어도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온갖 거짓 구원자들이 일어나도 우리에겐 오직 예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에게 삶의 주도권을 넘겨드리고 주님만 의지하는 축복의 삶이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손을 드시면
출 7: 14-25
요즘 들어 상수원이 오염되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공장들에선 산업폐수들을 여과 없이 흘려보내고, 가정에서는 세제를 남용하여 하수로 보내고 있으며, 농촌에서는 가축 분뇨들이 여과 없이 버려지는 상황이 전국적인 현상이고, 농사를 위해 지하수를 뽑아 올리느라고 여기저기에 파이프우물을 뚫고는, 나중에 비가 오면 그 관정을 덮지 아니하고 그대로 방치하기 때문에 땅위의 오염된 물이 맑은 지하수 속으로 흘러들어서 지하수마저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폐비닐이나 깡통, 은박지 알미늄 캔 등이 여기저기에 버려져 쌓이고 농약병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지며 무서운 수은과 납 등이 든 건전지가 아무데나 버리는 바람에 이것들이 땅과 물과 하늘의 공기까지 무차별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산성비와 그보다 더 무서운 산성 눈이 내리고, 쇠가 삭아들고 나무들이 고사하며 물고기가 기형이 되거나 떼죽음을 하고, 삼림이 훼손되며, 강물과 지하수가 죽은 물이 되어 모든 사람들은 서서히 병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수자원 오염은 우리의 미래를 망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디서든지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해서 앞장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질오염사건이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애굽에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내라 하셨지만 그들이 듣지 아니하자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 끝으로 강물을 건드리게 하셨고, 애굽의 모든 강물과 샘물은 피가 되고 말았습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내 손을 들어 친 후에야 그들이 너희를 내보내리라.” 고 하셨는데, 그 말씀처럼 하나님이 드디어 당신의 손을 애굽 사람들 위에 높이 드셨습니다. 그것은 재앙이 시작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지팡이를 주면서 "이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하수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위에 펴라"고 명령 하였습니다.
아론이 그렇게 하자 애굽의 온 강물들이 피가 되어 비린내가 나고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내린 첫 번째 재앙이었습니다. 그들이 물을 먹으려고 떠 입에 대면 시뻘건 피가 되어있었고, 손을 씻으려고 물을 뜨면 시뻘건 피였으며, 세탁을 하려고 빨래를 담가놓으면 핏물에 담근 것이 되었으니 애굽 사람들이 얼마나 겁에 질렸겠습니까?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사람이 자랑했던 것이 재앙거리가 됩니다.
애굽의 나일 강물은 애굽 사람이 자랑하며 신성시 하는 물입니다. 그 나일 강은 풍요의 상징이었고, 애굽 사람들의 생명의 젖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일 강에 제사를 드리며 그 강에 풍요를 달라고 빌었고 강을 신처럼 섬겼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신성시했던 강인데, 하나님이 애굽의 사람들을 싫어하시고 진노하시자 그들이 섬기던 강이 그들을 괴롭히는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날마다 마시던 물이 마실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이 자랑하던 물이 그들을 두렵게 하였으며, 보기조차도 무서운 물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 사람을 찾아와서 화목하게 만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모독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싫어하시면,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시면, 그 사람이 자랑하던 그것이 그 사람을 해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 사람이 자랑하던 건강이 그를 실망시키고, 그 사람이 자랑하던 돈이 그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고 그 사람이 자랑하던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패망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자랑하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인데, 받은 것을 좋아하느라고 주신 하나님을 등지니, 하나님께서 그로 정신을 차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과연 중요하고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가 자랑하던 것이 그 사람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자존심을 갖게 해 주고,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게 만들어 주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지금 돈이 남보다 넉넉해서 자랑스럽고 교만할 근거가 되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돈을 좋아하고 사랑하여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싫어하실 것이고, 그럴 경우 그동안 내게 자랑거리였던 돈이 나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재앙이 되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자랑거리입니까? 남보다 빨리 회전하는 머리가 자랑거리요 자만의 원인입니까? 당신의 직장과 가문이 자랑거리입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없거나, 더디 순종하게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것을 의지하느라고 하나님을 덜 의지했다면, 그것을 자랑하느라고 하나님을 자랑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의 자세는 더욱 아닙니다.
자신의 미모나 인기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중단시켰고, 하나님앞에서 멀리 떠나게 했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의지하고 내가 자랑하는 그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등지게 만드는 그것을 치시는 분이고, 하나님이 치시면 그것은 더 이상 나의 자랑이나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진절 머리가 나도록 나를 괴롭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얕잡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평안하고 자랑할 것 있을 때, 그것을 주신 하나님 앞으로 다가서시기 바랍니다.
오늘 너무 평안하고 풍요해서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처럼 생각될 지라도, 내 생각이 아무리 옳고 정확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이 필요 없는 것 같을 지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와 환경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이 교만해진 나를 더 이상 사랑하시지 않고, 용서하지 않기로 작정하신다면, 하나님이 내게 대하여 분노하신다면 그렇게 자랑스럽고 좋았던 것들이 나에게 무서운 재앙이 되며 진절머리의 원인이 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백성과 바로 왕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섬겼던 나일 강물이 그들에게 절망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재앙입니다.
그때 바로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바로는 즉시 자기의 생각이 악했고 하나님앞에서 교만했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살했습니다. 바로는 자기의 마술사들을 불렀고, 그들도 한 컵의 물을 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무릎을 쳤을 것입니다. “아하, 물이 피가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모세의 술법에 불과하구나.” 바로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모세의 말과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을 아주 시시하게 생각하고는 모세를 더 이상 거들떠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재앙과 인간의 술법을 분간 못한 바로는, 더욱 큰 재앙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금년가을에는 미국 동남부에 강력한 태풍이 불어와 뉴올리온즈라는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지난달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진도 7.8의 강진이 발생해서 근 8만 명이 숨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지난해 말에는 태국과 인도네시아에 쓰나미라는 지진해일이 일어나 15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남아시아 전역을 초토화시킨 이 참사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지각판중에서 인도ㆍ호주판이 유라시아판의 아래쪽을 파고들면서 규모 9.0의 강력한 해저 지진을 일으켜 거대한 해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주일날 교회가지 않고 휴양지로 휴가 갔다가 참변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유명한 목사님이 이번 쓰나미는 하나님의 재앙이었다고 말했다가 네티즌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입니다. 쓰나미의 피해를 본 지역은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 인도 등인데, ‘세계 종교의 자유 보고서 2004’를 보면 최대 피해지역인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은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법인 샤리아에 의해 통치되고 있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곳이고, 스리랑카도 목사를 구타하거나 교회를 방화할 정도로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드센 곳이며, 인도의 상당수 주에서는 아예 법적으로 기독교 개종이 금지되어 있고, 태국 푸켓의 경우 이슬람교뿐 아니라 중국계 무속 등 미신이 팽배하여 기독교 선교가 어려운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입니다. 암3:2하에 “그런즉 내가 너희의 모든 불법으로 인하여 너희를 벌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지진과 자연재해가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그냥 자연의 활동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요 심판이라는 말을 하면, 비난을 면치 못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모세 시대 바로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도 우연발생이거나 환경을 잘 못 다스린 결과라는 식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하나님을 일부러 잊으려는 태도입니다.
벧후 3:5에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부러 잊으려 한다고 기록하였고, 마 24:38-39에는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둔감하리라는 예고입니다.
바로의 생각에는 나일강물이 피가 된 재앙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모세가 마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이것이 모세가 믿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지라도, 그 능력이란 자기나라의 술객들도 모방할 수 있는 정도의 시시한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마술이나 모세가 믿는 신의 능력이 과연 어느 정도나 되겠느냐고 생각하면서 한번 버텨보자고 모세의 말을 묵살 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 배웠다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만사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우연으로 돌려서 묵살하는 사람도 많고, 사람들이 꾸민 일로 간주해버리고 매도하기까지 하는 경우도 많이 있으며, 혹은 신에게서 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도대체 신이 나를 어쩌겠느냐 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되는 것일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움으로 순종하거나, 거역하거나 묵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선 악간에 그대로 심판하십니다. 전 12:14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 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왜 하나님을 향하여 대항할 생각을 할까요?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과학은 알고 사회는 알지만, 과학과 사회의 바탕인 이 세상의 자연법칙과 도덕률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위에서 살면서 그분의 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제 눈에 하나님의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어리석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내가 대 제국의 황제인데 누가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는 바로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도 내가 대학을 나왔는데, 내가 학위를 받았는데, 내가 내 힘으로 세상을 오십년 살아왔는데, 나도 주관이 있고 생각이 있는데 누가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하는 어리석은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심각한 무식이요, 최악의 자존심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은 그런 교만이 아니라, 생명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순종하지 아니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동안 애굽에서 수백년 동안 온갖 궂은일을 다 해주었는데, 만약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스라엘을 모두 석방시키면 앞으로 누가 그들의 궂은일을 담당해 주겠습니까? 바로는 자기나라의 이익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가 없기도 했을 것입니다.
오늘 한국의 3D업종은 거의 외국 근로자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엊그제는 그들을 단속하여 강제출국 시키자 그들이 일하던 회사가 모두 가동이 중단되고 사장들이 데모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들이 어떤 이유 때문에 한꺼번에 한국을 떠나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공장들이 마비되지 않겠습니까?
단 몇 년 동안 외국인들이 궂은일을 해준 한국도 그러한데, 수 백년 애굽의 모든 궂은일을 도맡았던 이스라엘이 다 떠나면, 애굽의 궂은일은 누가 해내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나라의 통치자인 바로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을 내 보낼 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할지라도 내게 물질이나 어떤 것에 손해가 올 것이라고 예상되면 우리는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23절에,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 관념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바로는 하나님의 뜻을 일부러 모르는 척 해보려고 하는 태도가 보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나를 향하여 다가오는 하나님의 섭리가 보일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당장 유익하지 않은 명령이면 우리는 일부러 외면하려고 해봅니다. 뻔히 알면서도 고개를 돌립니다. 전도와 선교의 명령을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을 알만큼 알지만 그것이 내게는 힘만 들고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개를 돌립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지만 그것을 실행하면 경제적인 손해가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그의 명령은 언제나 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분명하다면, 사람은 자기에게 싫고 좋고 간에 그 섭리와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명과 환경의 주인이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명령과 재앙을 외면했습니다. 자존심을 앞세우고 고집을 부리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견뎌 냈습니까? 온통 피가 된 강에서 먹을 물을 구해보려고 아무리 고생을 했지만 노력은 허사였습니다. 어디서도 맑은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물 한모금도 만들어 마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공기 한 모금도, 물 한 모금도, 양식 한 톨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마실 수가 없고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누구나 살아남지 못합니다. 인간끼리는 자존심 싸움도 가능하고, 버티기도 가능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고, 버티고 외면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다만 순종만 가능합니다.
바로가 정말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려면, 술객들을 시켜서 모세가 만든 피가 된 강을 다시 정화시키는 일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술객들은 모세의 기적을 무효화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컵의 물을 피처럼 되게 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모세처럼 강물 전체를 피가 되게 하지는 못했고, 모세가 만든 핏물을 정화시키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항하려고 하지만 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말로는 저항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입을 막으시고 몸을 마비시키고 생명을 거두시는 창조주 이십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은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지당하실 분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누구라도 저지하지 못하고, 그분의 계획은 선하시기 때문에 중단되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저항하고 외면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며, 우리의 생각을 돌이켜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끝내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다음 재앙을 자초하였습니다. 바로의 어리석은 외면과 반항 때문에 그들이 만나지 않았어도 되는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재앙, 온역재앙, 피부병재앙, 우박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재앙, 그리고 애굽의 모든 장자가 다 죽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까지 열 번의 재앙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지도자의 불신앙과 교만이 자기 백성들을 그렇게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미련퉁이가 어디 또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명령과 징계는 저항하고 외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시면, 사람이 외면하고 저항한다고 해서 중단하는 분이 아닙니다.
둑을 아무리 높이 막아도 강물은 흘러갑니다. 물은 잠시는 막히지만 제방을 넘고 둑을 무너뜨리고 댐을 헐면서 흐르고 흘러서 바다로 가고야 맙니다. 강물도 사람의 힘으로 막지 못하는데 하나님을 막을 수 있을까요? 바로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함부로 대항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역사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경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만큼 알면서도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거역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순종하지 못하고 미적거리거나 거부해 보려고 하다가 손해보고 채찍 맞고 후회 한 일이 어디 한 두 번입니까?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당장에 움직이지 않습니다. 미적거리고 회피하고 못들은 척 하고, 거부해 봅니다. 이 시대의 바로들이 동네마다 교회마다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눈에 보이면, 즉시 순종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입시다. 우리를 부르시고 권유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하려는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배와 그물을 그냥 버려두고 즉시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세관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마태도 주님이 나를 따르라 하시자 일하던 책상을 박차고 즉시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바나바는 교회에 구제할 것이 많아지자 자기의 밭을 다 팔아서 바쳐버렸습니다. 그들은 손해 같았지만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나는 주님이 명령하실 때 하던 일 즉시 멈추고, 일어서서 따라나설 수 있습니까? 주님이 필요하다 하시면 그 무엇이라도 즉시 주님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습니까? 주님을 거역하다가 징계와 재앙의 손길을 만나지 말고, 주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다가 인도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만 만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