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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2)
시편 1편 1-6절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3.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시편 기자는 1절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오만한 자를 싫어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한 초등학교에서 가난하고 모든 일에 뒤처지는 학생에게 동급생이 소리쳤다.
“야! 더러워! 저리 가!”
그때 선생님이 소리친 동급생을 크게 야단쳤다.
자녀가 그런 오만한 모습을 보이면 부모는 크게 야단쳐야 한다.
그것이 자녀를 위하는 길이다.
친구를 무시하는 자녀는 미래가 없다.
오만한 사람을 멀리하라.
가까이하면 같이 다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시려고 했는데
자기보다 조금 못하다고 사람을 무시하면 얼마나 잘못된 태도인가?
왜 요즘 사람들이 정치를 혐오하는가?
정치란 약자의 눈물을 씻어주는 것인데 요즘은 자기 위치를 높이고 이익을 얻으려는 수단으로
정치를 악용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나쁜 정치가 교회 안에도 있다.
한 교회에서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여전도사가 사모가 너무 나선다고 험담하고 다녔다.
그 험담은 사모의 권위를 무너뜨리는데 쓰이는 가장 흔한 말이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목회에 있어서 사모의 중요성을 간과한 매우 정치적인 발언이다.
교회에서 사모의 중요성과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
25년을 목사를 보필하며 교회의 궂은일을 다 했던 사모가 부임한지 얼마 안 된 전도사보다
나서지 못할 이유는 없다.
목사 곁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나서는 것은 괜찮고
목사 곁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나서는 것은 안 된다는 사고는 고쳐야 한다.
사모는 목사의 평생동역자 이다
사례도 받지 않고 주로 음지에서 헌신하기에 목사나 교인은 더욱 사모의 생각 및 활동을 힘써 존중해야 한다.
정치적 발언은 희생과 헌신이 없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으려는 몸짓이다.
사람들은 행실을 본다. 중요한 자리는 정치적 발언을 많이 하는 사람보다 희생과 헌신을 많이 하는
4.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
복 있는 사람은 나쁜 일을 하지 말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무엇을 제일 잘해야 하는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2절).
복 있는 사람은 월드(the world, 세상)보다 워드(the Word, 말씀)를 더 사랑한다.
어떤 사람은 말씀에서 ‘속박’을 느끼지만 어떤 사람은 말씀에서 ‘자유’를 느낀다.
비행기는 항로를 따를 때 안전하듯이 사람은 말씀대로 살 때 가장 행복하게 된다.
하나님은 성도의 행복을 위해 말씀을 주셨다.
말씀대로 살면 불편한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그것이 행복의 길이다.
누가복음 5장에는 베드로가 말씀에 순종해서 많은 고기를 잡는 장면이 나온다.
말씀 속에 사업 성공과 풍성한 삶을 누리는 길도 있다.
언뜻 보면 자본이 있는 사람이 승리할 것 같지만 최종 승리는 말씀이 있는 사람의 것이다.
참된 복을 원하면 말씀을 힘써 가까이하라.
심은 대로 거둔다.
의의 씨를 심으면 의의 열매를 거두고 악의 씨를 심으면 악의 열매를 거둔다.
인생은 찬스(chance)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초이스(choice)에 따라 결정된다.
즉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축복의 폭과 크기도 결정된다.
선택된 작은 행동이나 언어 한 마디가 인생과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성품을 거두고 성품을 심으면 운명을 거둔다.
하나님은 성도의 선택에 따라 축복하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하신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한다(6절).
무엇이 의인의 길이고 악인의 길인가?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길을 좌우하는 관건이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
복 있는 사람(이필재 목사)
시편 1: 1~6
시편 1편은 설교자들이 매우 즐겨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으로는 제가 본 교회에서 처음 설교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라고 하는 개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좋은 것, 옳은 것, 최상의 것, 기쁜 것, 아름다운 것, 유쾌하고 풍성한 것 등의 뜻이 있고 이 모든 말을 다 포함하는 말로 “행복한 것, 이것이 바로 복이다.”라고 풀이됩니다.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오복이라는 것이 있어 왔습니다. “오래 살고 부하게 살고 또 귀하게 여김을 받고 아들 많이 낳고 평안하고 나중에 잘 죽는 것이다.” 이런 것도 큰 복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복이 있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다 노력을 해서 실력을 만들어 가는데 “어떤 사람이 과연 이런 복을 누릴 수 있는 실력 있는 자냐? 우리가 노력할 수 있는 게 뭐냐?”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지식이 있는 자를 당할 자가 없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식 축적을 위해서 좋은 학교를 선택하고 학문을 연구해 지식을 통한 복을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많은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은 지혜 있는 자가 훨씬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지혜롭게 사용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지혜 있는 사람이 더 실력 있는 사람이다.” 어떤 때 보면 초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이 대학 교수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지혜 때문입니다. 특별히 공부를 못하고 초등학교, 중학교도 못나왔는데 우리나라 기업 최고의 재벌 총수가 된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사업의 지혜가 남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자가 실력 있는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 있는 자보다도 더 실력 있는 사람이 있는데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식이나 지혜는 자칫 잘못하면 자기 하나만을 위한 이기주의적 무기가 될 수 있는데 비해서 덕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데 필요하니까 덕 있는 사람이 제일 존경받을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지식도 지혜도 덕도 없는데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용맹스러운 사람은 용기 하나로 세상을 호령하고 정복해 나가는 실력 있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에는 이 모든 것보다도 가장 큰 실력 소유자가 나타나는데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 보호가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 사람을 당해낼 수 있는 실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실력이 있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이 제일 실력 있고 정말 복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복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 복 있는 사람이 줄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우리에게 그 방향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세 가지로 구분해 볼 때 어떤 사람이 제일 행복에 반대되는 사람인가를 정리하면 자연히 복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일 불행한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오늘 말씀이 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열심히 하다가 잘 안되고 오히려 더 큰 고난이 닥쳤을 때에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복도 지질이 없어!” 열심히 노력해도 복이 없기 때문에 내가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고생고생 하다가 이제 좀 살만해 졌는데 병들어서 죽게 되었단 말입니다. 이제 행복하게 누리고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복이 없어서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수없이 봤습니다. “이제 숨 좀 돌리자. 지금까지는 정말 생활이 각박해서 나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이제 그런 시간은 다 지나갔으니까 지금부터 세계 여행도 좀 다니고 행복하게 좀 살자.” 그래서 친구들 몇 명이 부부 동반해서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나기로 다 약속이 되었는데 그 전날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단 말입니다. “아이고! 나는 복이 지질이 없어! 계획해도 안 돼!” 그럴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좋은 초대받을 때마다 배탈 나는 사람이 있고, 놀러가는 가는 날에 꼭 비가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 청년들이 축구 시합하는 날 구경하러 온 집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나는 스포츠 광입니다. 스포츠 보는 재미로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아주 열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습니다. 내가 응원하러 나가면 우리 편이 반드시 집니다. 가야할까 말아야 할까 이게 항상 고민됩니다.” 그런데 그날 나오셔서 제가 “그러면 오늘도 우리가 지겠네요?” 그랬더니 정말 졌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문제 하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축복관이란 어떤 것인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 고백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이 지은 죄나 그 선을 기준으로 하나님이 복과 벌을 내리신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겠습니까? 다 죄인이기 때문에 다 벌을 받아서 벌써 심판을 받아야 되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복이 와 있다는 것은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복의 개념과 또 하나는 성경에 사람이 복 받을 일을 함으로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그에게 내리시는 복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축복관은 이 두 가지를 다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하는 일로는 복을 누리고 살만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아주 많은 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복된 일을 열심히 했더니 과연 하나님이 그와 그 후손을 복되게 하신다는 이런 두 가지 경우를 우리가 성경과 우리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 말씀에 복 받을 일이라고 명시해주신 이 말씀을 믿고 일을 열심히 하면 복 받는 자가 된다는 것을 시편이 우리들에게 방향 제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복이 이미 내게 왔습니다. 그런데도 그 복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생각하는 복이 있는데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며 자기 불행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 같은 목사가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만약 목사가 안 되고 사업가가 되었다면 훨씬 더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때 내가 행복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여기 ‘내가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차라리 더 행복했을 것을…. 내가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 다른 나라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을…. 이 시대가 아니고 1800년대 태어났거나 아니면 22세기에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이미 나와는 거리가 멀어진 다른 여건을 생각하면서 현재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어버리는 불행한 습관이 우리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죄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출애굽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 뭐라고 합니까? “되돌아갑시다. 애굽에 그냥 있었더라면 더 행복했을 것을!” 이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이미 나와는 거리가 멀어진,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의 나를 보면서 이제는 소유할 수 없는 다른 상황과 비교하면서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습관! 이런 사람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민 생활을 오래 했는데,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에 살 때는 한국이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짜증스러워서 이민을 왔다는 겁니다. “이 정치하는 놈들은 다 죽일 놈들이고 공무원들은 다 도둑놈들이고 불친절하고 사기꾼이고 복잡하고 공기 나쁘고 가짜 많고 진절머리가 나!” 그러면 이민 왔으면 “아! 이제 행복하다!” 그런 말을 해야 맞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불평을 더 많이 합니다. 미국 놈들 다 죽일 놈들이라 그러고 흑인들을 보고는 연탄장수라 하고 흑석동이라고 합니다. “이것들 다 꼴도 보기 싫고 이놈의 나라는 어떻게 놀 시간도 없고 날마다 일하다 병들어 죽겠다!” 이런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봄이 되면 노근해서 싫고 여름이 되면 더워서 싫고 가을은 쓸쓸해서 싫고 겨울은 추워서 싫습니다. 신앙생활도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신앙에 도움이 되는 교회를 정해서 그 교회의 좋은 점을 감사하면서 몸 바칠 수 있는 분야에 헌신하면서 즐겁고 복되게 살아가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작은 교회는 작아서 틀렸다고 하고 큰 교회는 커서 틀렸다고 합니다. 또 상가에서 건물 빌려 예배드리는 교회도 많잖아요? “이 교인들은 잘 살면서 교회 건축도 안 해?” 그렇게 또 막 비판하다가 실제로 건축을 하게 되면 “교회가 집만 짓느냐? 예수님 직업이 목수라서 그러냐?” 그런 소리도 하고 뜨거운 분위기 교회는 소란해서 싫고 경건한 분위기는 초상집 같아서 싫고 본문 설교를 하면 딱딱하다고 하고 예화 중심 설교를 하면 세상 이야기 많이 하느냐고 하고…. 맞출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항상 다른 여건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자기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죄입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 와서도 무슨 불만이 있는지 찬송 시간에는 찬송도 안합니다. 입을 꽉 다물고 가만히 있고 자리에 앉는 것도 목사 얼굴 안 보이는 기둥 뒤만 찾아다니고 그럽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어느 교회에 가도 괜찮습니다. 대한민국 어느 교회를 가도 교인이 15명밖에 안 모이는 그런 교회를 가도 ‘아! 이 교회가 이렇게 15명의 형제, 자매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든지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은혜 받을 수 있고 아무리 실력 없는 목사의 설교를 들을지라도 ‘이야! 저 목사님 저렇게 어눌한 언어를 가지고 저런 실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저렇게 몸을 바쳤으니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가?’ 이렇게 생각이 되고 다 좋은 점으로만 보입니다.
건강한 사람을 보세요. 아무거나 먹어도 아무 탈이 없습니다. 모두 맛있게 먹습니다. 그런데 병든 사람은 어떤 음식도 짜증만 내지 맛있다는 말을 안 하잖아요? 내게 이미 복이 많이 와 있는데 모르고 있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복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은 더 불행하다는 겁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골자는 그것을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가지고 잘못 사용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네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왜 그러셨습니까? 열두 제자의 축복을 주셨잖아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직계 제자가 되는 열두 명의 영광에 자기가 들었잖아요? 하늘나라 열두 보좌의 그림자요,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숫자에 자기가 들었잖아요?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런데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차라리 나지 말 것을!” 예수님이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보면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춘기 아이들의 부모들이 항상 걱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춘기 시절 경험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는 감수성이 아주 민감해서 친구 하나를 잘못 사귀어서 며칠만 잘못 돌아다녀도 일생을 돌이킬 수 없는 나쁜 길로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와 함께 만나는가? 그런 자리에 가지 않아야 될 텐데….’ 이렇게 아이들 걱정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학교를 찾는 것이요 좋은 친구들을 사귀게 하고 환경이 좋은 동네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울은 하나님이 주신 한 나라의 통치권인 왕이라고 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복을 잘못 처리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이 그의 모든 주변을 비참하게 헐어버리는 재앙을 받았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잘못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저주가 내렸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 말미암아 야곱에게 믿음의 조상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바리새인, 대제사장, 서기관들 다 믿음의 직분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잘못 사용함으로 메시야를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복을 계산할 사람은 여러분들 자신입니다. 건강도 가정도 부모도 자녀도 재물도 믿음도 지혜도 은사도 교회도 직분도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내가 어느 분야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재물을 주셨더니 예수 믿은 지 십년이 지나도 십일조를 결정 못하고 쓸데없는데 허비하고 잘못 사용합니다. 건강의 복을 주셨는데 마약을 먹고 술을 많이 먹어서 건강을 해칩니다. 좋은 머리를 주셨는데 그것 가지고 나쁘게 사용해서 사기꾼과 문제아가 되어 버립니다. 주신 복을 잘못 사용함으로 복이 떠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고” 이것은 “주신 복을 잘 사용하라! 그러면 그 복이 오래 갈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요셉을 예수님의 모형으로 해석합니다. 왜 그렇게 해석하는가? 그는 어떤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복을 발견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17살에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팔려간 팔자를 한탄하는 말이 한마디도 안 나옵니다. 팔아먹은 형제를 원망하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었습니다. 노예가 되었다는 신세 한탄을 한마디도 안합니다. 오히려 그 일을 얼마나 즐겁게 했는지 그 집 주인이 돈 쓰는 문제까지 그에게 다 맡겨주는 가정 총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해서 누명을 썼잖아요? 감옥에 들어앉아서 집의 가정 평안을 위해 변명을 한마디도 안 합니다. ‘내가 죄를 짓고 여기 들어왔다면 그렇지만 나는 죄가 없으니까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의 무슨 섭리가 있겠지!’ 그리고 그 감옥 안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모든 죄수를 통솔하는 권한을 맡겼잖아요? 감옥에 갔을 때도 인생이 끝났다고 절망하는 말을 한마디도 안하고 자기를 그렇게 만든 보디발의 아내를 절대로 원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주어진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영적 능력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그러더니 마침내 때가 되니까 죄수에서 한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는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 그의 아름다웠던 통치 기간의 역사는 애굽과 유대 나라 양쪽 역사에 다 기록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은 일이라도 극대화해서 열심히 하는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작은 일은 시시해서 안하고, 할 수 없는 화려한 일만 생각하고 앉아있는 사람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 내게 와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남의 복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제 이 사람은 자기가 사는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나님께 소속된 소속의 기쁨을 영광으로 돌리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법 안에 존재하는 자신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월남이 패망했을 때 쫓기는 백성들이 배에 타고 바다에 떠서 보트 피플(boat people)이라는 단어가 생겼잖아요? 태평양에 떠있을 때 미국이 그 사람들을 다 받아들여서 지금 오렌지카운티에 가면 베트남인지 미국인지 모를 만큼 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미국 땅에 내렸을 때 신문 기자들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지금의 심정을 말해보세요.” “조국 땅을 버리고 떠나온 슬픔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소속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미국 땅에서 살 수 있는 희망의 기쁨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소속이 생기는 기쁨을 말합니다. 결국 인간은 어디엔가 끊을 수 없는 소속감을 가질 때 행복하게 되어 있는데 나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보호막! ‘나는 하나님의 자녀야! 그 안에 내가 있어!’ 이때 사람은 비로소 복을 누리고 그 복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것을 심방 가서 봤습니다. 처녀, 총각 때 연애편지 주고받던 것을 하나도 안 버리고 다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옛날 그 순결하고 아름다웠던 때를 기억하자고 가끔 그것을 꺼내서 보고 그때를 기억하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았나 다시 되돌아보는 그런 교인이 있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내주신 이 사랑의 편지를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것은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어서 나를 향해서 주시는 그 말씀이 너무 복이 있어서 그 기쁨을 항상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 말씀대로 한다면 여러분이 오늘 교회 나오셔서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믿음의 고백을 하셔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항상 내가 하나님의 말씀 선포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사람도 전해 듣는 사람도 다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일날이 되면 내가 나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이민 목회를 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목회 생활이 좀 어려워졌습니다. 교인들이 20~30명도 안 모이는데 작은 교회일수록 목회자에 대한 비판이 생깁니다. “목사님이 설교도 잘 못하고 심방은 또 어떻고….” 날마다 비판해서 아주 괴롭습니다. 그러니까 사모님도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괴롭고 교회는 잘 안되고 자녀로는 딸이 있었는데 딸이 어느 날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버지는 내용으로 봐서 장사하시면 더 잘하실 거예요. 목회 되지도 않는데 하지 말고 우리 장사하면서 살아요. 우리도 도와드릴게요.” 그러니까 이 목사님이 아주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 인생을 한번 바꿔보자!” 목회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자본을 가지고 미국에 조그만 가게 하나를 사서 내복도 팔고 양말도 파는 일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잘 됩니다. 목회할 때는 아무것도 안 보이더니 가게가 너무 잘 되서 가게를 또 사고 또 사고 해서 5개나 샀습니다. 부자가 되고 몇 년 만에 좋은 집을 사고 사모님과 딸들은 “그거 봐요. 일이 이렇게 잘 되잖아요!” 이 친구가 그러는 바람에 목회하던 다른 목사들도 ‘나도 그럴까?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그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부자가 됐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날 찾아왔습니다. 날 찾아와서 나에게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눈물을 흘리며 “이 목사! 나 어떡해?” “뭐 어떡해? 부자 됐잖아?” “맞아! 부자는 됐어! 그런데 나는 주일마다 울어. 나는 오늘 어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되나? 내가 누구인가? 내가 20대 초반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신학 공부를 하고 일평생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다고 서약하고 목사 안수 받았잖아? 그런데 지금 내가 뭐하는 거야? 나 어디 가서 예배드리느냐 말이야? 나 설교하고 싶어! 내가 왜 그 작은 고난에 교회를 버리고 이렇게 되었나? 나는 주일날마다 울어!” 가족들은 무척 좋아하는데 이 목사는 주일마다 슬퍼서 우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미국 교회 모퉁이에 가서 가만히 앉았다 오니 “이 목사! 나 어떻게 살아?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이제 나는 뭐야?” 우리 목사 된 자는 목사의 복을 고백해야 되고 교인들은 교인된 기쁨의 고백을 하면서 말씀 가운데 우리가 전하고 듣는 가운데 있는 것을 복으로 알 때에 오늘 시편 1편에서 그런 삶의 방향 제시를 하는 겁니다.
우리 갈보리교회 교인들은 ‘아! 내가 갈보리교회 교인된 것 참 기쁘다! 행복하다!’ 저도 ‘갈보리교회 담임목사된 것 참 행복하다!’ 제가 ‘뭐, 이런 교회가 다 있어? 다른 교회 갔다면 더 좋은 대우 받을 텐데!’ 이러면 되겠습니까? 교인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교회는 무엇도 하고 무엇도 하고….” 제일 빠른 길은 그 교회로 가는 겁니다. ‘나는 은사가 다른 사람인데 다더러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런 교인들 많습니다. 주신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와는 거리가 멀어진 상황을 항상 생각하면서 나를 불행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거기에 따른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환경이 닥쳐도 그 환경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개척교회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제가 살아온 생활에서 많이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형교회에서 목회하는 것도 기쁘지만 나 때문에 세상에 교회 하나가 생겨서 한 사람, 두 사람씩 들어올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복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 젊어서는 젊은이다운 열매가 있고 늙어서는 더 성숙한 열매가 있고 부자로 살 때는 부자다운 열매가 있고 가난할 때는 더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어떤 경우에도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여건이 나에게 주어져야만 그때 내가 무엇을 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더 안합니다. 로스앤젤레스와 라스베이거스는 가까워서 주말에 놀라가는 교인들이 참 많았습니다. 주말에 놀러가니까 나한테 미안한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내가 가서 대박 벌면 모두 건축 헌금하겠습니다.” 나는 기도를 반대로 합니다. “제발 대박 터지지 말게 해주십시오.” 그런 사람이 대박 터지면 건축헌금 또 안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찾아야 합니다.
주중에 샘물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왔습니다. 교인들이 가득하게 나왔습니다. 피랍되었던 사람들이 오늘 아침에 다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고생은 무슨 뜻이 있는가? 저는 샘물교회에 가서 “복 받았습니다.”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뭐가 복이냐? 보십시오. 오늘 그 사람들이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하늘이 달라 보였을 겁니다. ‘억류 생활 44일 만에 자유가 이렇게 좋은 것인가? 자유의 땅에서 교회에 나가서 내 집에서 사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가?’ 비로소 알게 된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일평생 이번에 겪었던 고난의 경험을 생각하면서 내가 주어진 자유와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을 생각하면서 풍성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고난을 겪었지만 복 받은 겁니다.
그러면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는 죽었는데 저주 받은 것인가? 그들은 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정한 사람만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죽고 싶다고 어디 가서 마음대로 죽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은 겁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젊은이의 뜨거운 피를 쏟아버린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피를 통해서 앞으로 분명히 역사하실 계획이 있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니까 그들은 순교의 복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복의 임재가 내게 있는 크리스천 자녀가 된 본질을 발견할 수 있을 때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오늘 말씀에 “복 있는 사람은 돈이 많아야 하느니라. 권세가 있어야 하느니라. 일류 대학을 나와야 하느니라. 아이큐가 높아야 하느니라.” 이런 말이 있습니까? 악을 꾸미는 자리에는 가지 않고 죄인의 길에 동행하지 않으며 조소를 꾸미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그리고 여호와의 주신 복을 낙으로 삼아 그 법을 주야로 되새기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약속 하나가 주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 말을 히브리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막히지 아니하도다.” 공동 번역 성경에는 이 형통이라는 말을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시편 1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영적 진리와 교훈을 잘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말씀대로 평생을 살면서 형통의 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주간도 약속된 모든 저희들의 개인적인 사역에 주님이 형통의 복을 내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