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안위, 유익을 내 필요, 내 안위, 내 유익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려면 나의 필요가 이미 채워졌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 배가 고파 죽겠는데 하나 남은 떡을 남에게 주는 것은 거의 극기 훈련이지, 우러나는 사랑은 아닐 테니까요.
미미한 차이인 듯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들을 돌보면 하나님이 내 필요를 채워주시겠지"라고 믿는 것은 종교적인 생각입니다. 기브앤 테이크의 저주입니다. (관련 영상 여기) "하나님,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그에 해당하는 댓가를 주세요!" 이것은 종교지 신앙이 아닙니다. (종교는 내가 신을 감동시켜 원하는 것을 얻어 내겠다는 것이라면 신앙은 말 그대로 이미 채워졌음을 믿고(신) 알기에 주님을 바라보는 것(앙)입니다)
"하나님이 내 필요를 이미 다 채워 주셨으니, 나는 도움이 필요한 저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입니다. Give and Take가 아니라 내 잔이 차고 넘쳐 저절로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생각하려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다 공급해 놓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또 "그분은 왜 나에게 이미 주셨나?"에 대한 정답은, 내가 뭔가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셔서.’라는 것도 알아야합니다.
제가 사역자로서 항상 조심하는 것은 사역을 책임과 의무로 보는 것입니다. 사역은 하나님께 무한한 사랑을 받았기에 그것에 감동하여 나에게 차고 넘쳐서 주변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이 되고 나의 의무와 책임이 된다면 지치고 힘들어집니다. 이것은 비단 사역자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엄마로서, 남편을 돕는 아내로서,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으로서, 모두가 하나님께 먼저 받고 그분이 이미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이지, 나에게는 없지만 마른 수건까지 짜서라도 남에게 줘야 하는 것은 철인 3종 경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요 3:16). 물론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다는 구절도 있지만(요일 3:8) 그 이유 또한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괴롭히는 존재에 대한 증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남의 유익을 내 유익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주님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마 12:33).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내리지 못하고서는 이타심이라는 열매를 맺기 힘듭니다. 행동은 억지로 몇 번 할 수 있겠지만 그것 또한 극기 훈련이 될 것입니다.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저 의인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자신들이 했던 선행도 잊어버렸지 않습니까? 그것이 자연스런 열매였기 때문에 "제가 언제 주님을 섬겼나요?"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바라던 "신앙이 삶이 된 것"이지요.
최근 추석 연휴 때 여러 만남이 있었을 텐데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행동을 해서 자책하고 계십니까? 앞으로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자제(절제)하면 좋겠지만 너무 자책하지는 마십시오. 그 모든 부족함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용서와 은혜를 받아 회복하시되, 열매인 말과 행동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뿌리인 마음을 고쳐 달라고 기도합시다. 내가 그 말을 했다는 것 보다 그 말을 한 이유가 중요하고 내가 그 행동을 했다는 것 보다 그 행동을 한 이유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가지고 나가다 보면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저는 육아를 해 본 적이 없지만 엄마들이 먼저 밥을 먹고 나중에 애들을 먹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항상 했습니다. 자기가 먼저 먹고 배가 불러야 남을 먹이는 일이 즐겁겠지요. 내 배가 부르니 이제 남의 허기도 채워줄 생각이 나니까요. 내 배는 고파 죽겠는데 남을 먼저 먹이면서, ‘이렇게 남을 먹이다 보면 언젠가 나도 밥을 주겠지?’ 한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으며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이 선하신 하나님을 심히 오해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아, 나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렇게 배가 부르고 만족스러운데 주리고 목마른 저 영혼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실까! 내가 생명의 양식을 전해 주자!’ = 이것이 바른 순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