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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로마서 14:17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어느 목사님께서 미국에서 공부하실 때, 세계 여러 나라 학생들이 자기나라의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International Food Festival’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김치와 김을 가지고 갔는데 다른 학생들이 목사님에게 “넌 왜 (검은)종이를 먹느냐”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은 다른 나라 음식 맛을 보는데, 인도사람이 먹는 카레는 냄새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카레는 우리나라 사람 입맛에 맞게 바뀐 것입니다. 다른 음식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구약성경에서 금하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무 음식이나 다 먹으니까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이방인 교인들이 먹는 고기에 대해 정죄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고기를 먹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고기의 대부분은 우상에게 제사할 때 사용되었던 것들이었습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고기도 우상의 제단에 올랐다가 다시 시장에서 거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하게 정결한 음식을 가려 먹는다는 것은 사실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먹는 문제로 교회 안에서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오늘 설교를 들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2주 전 주일예배 설교에서 성경을 꿰뚫는 가장 강력한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드렸고,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개념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설교는 본문을 중심으로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국가 구성의 3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입니다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세 가지 개념으로는 왕권과 백성과 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가는 영원한 천국이 하나님 나라의 영토입니다. 하지만 천국만이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거기가 하나님 나라의 영토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집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집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학교나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나의 왕이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법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면 거기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설교는 하나님의 통치의 중요한 증거 중에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입니다. 형제 사랑! 오늘 설교는 제가 평상시 했던 스타일의 설교가 아닙니다. 좀 지루하더라도 잘 들으시고 사랑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먹는 것 때문에 형제를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즉 먹는 것도 사랑으로 하고 먹는 문제 때문에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형제를 비판하는 문제를 다루다가 조금 더 발전해서 형제를 거리끼게 하지 말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두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날의 문제였고 또 하나는 음식의 문제였습니다.
날의 문제는 주일을 토요일에 지켜야 하느냐 일요일에 지켜야 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롬 14: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어떤 사람은 토요일을 주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모든 날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보내야 하니 모든 날이 주일과 같은 개념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일요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삼고 모든 날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모든 날을 주일처럼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반면에 토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유대교인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토요일을 주일로 지킵니다. 안식교에서도 토요일을 주일로 지킵니다.
사도 바울의 날의 개념은 저와 같았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모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강론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일요일을 주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날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기에 모든 날을 주일처럼 살았습니다.
고전 16:2입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바울은 매주 첫날의 모임과 연보를 말했습니다. 매주 첫날은 일요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드렸고 하나님께 헌금을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가끔 일요일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매주 모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먹는 문제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딤전 4:4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바울은 먹는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든 것이 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하므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롬 14:20입니다.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이 깨끗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일 문제나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행했습니다.
롬 14:6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바울은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나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나 주를 위하여 한다고 보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특정 음식을 먹는 자나 먹지 않는 자나 주를 위하여 한다고 보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사랑의 가슴으로 모두를 포용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제사 음식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바울의 견해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입니다. 비록 하늘과 땅에 신이라고 불리는 자가 많아도 진짜 신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그런 확신에 찬 행동 때문에 실족하는 자가 있다면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고전 8:13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지만 형제를 실족시켜서는 안 된다. 역시 이것도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날의 문제나 먹는 문제를 구원과 연결시켜서 주장한다면 문제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 구원 받을 수 없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일을 지키느냐 안식일을 지키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이 무엇을 먹느냐 안 먹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동인(動因)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을 사랑하셔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요 13:34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이 새 계명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윤대영 목사님의 “사랑할 사람만 있으면 산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90세가 다 된 할아버지가 삶의 의욕을 잃고 홀로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서울에서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데리고 내려왔다. 방안에 들어서지도 않고, “아버지, 손자 며칠만 데리고 계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그냥 떠나갔다. 그날부터 할아버지는 손자를 위해 하루 세끼 밥을 짓고, 반찬을 하고 땔감을 모아 불을 지피고, 씨를 뿌리고, 채소를 가꾸고, 장을 담그고, 집수리까지 했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할아버지도 모른다. 이젠 손자를 위해 돈도 필요했다. 열심히 농작물을 가꾸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그래야 손자의 학비를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역할이 바뀌고부터 젊어진 기분이다. 시간은 번개처럼 흘렀다.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갔다. 어언 삼년이 흘렀다. 어느 날 서울의 아들이 다시 왔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두툼한 봉투를 내어 놓았다. 그날 밤, 아들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드리고 다음날 새벽, 손자와 함께 서울로 떠났다.
그날부터 할아버지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끼니도 거르는 채 마냥 방에 누워만 있었다. 2주일이 지난 후 할아버지는 영면(永眠)하고 말았다. 사랑할 사람이 떠나자 삶의 의욕을 상실한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한다. 사랑받지 못해 소외되어서 자살을 한다고 말이다. 아니다.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죽고 싶다. 사랑할 사람만 있으면 죽을 이유가 없다. 사랑해야 하니까! 십자가만 있으면 삶의 의욕이 생겨난다. 사랑할 사람이 많아 죽었다가도 살아나신 예수님이 아니시던가.” 이 글을 읽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은 결국 자기를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구나!
사랑이 중요한 이유를 요한사도를 통해서 주신 말씀으로 알아봅시다. 요일 3:23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예수님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인 믿음과 사랑으로 살면 두 가지 결과가 주어집니다. 먼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께 받습니다. 풍성한 기도 응답의 약속입니다. 요일 3:22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께 받습니다. 조건은 우리가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일 2:10입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기도 응답을 누리는데 있어서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 아주 중요한 조건입니다. 요일 3:21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2:10에서 말한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믿음과 사랑의 계명으로 살면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요일 3:22에 나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사랑의 게명을 지키면 기도응답을 풍성하게 받습니다.
계명을 지킨 또 하나의 결과는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일 3:24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지키면 주 안에 거하고 주님은 그 사람 안에 성령으로 거하십니다.
사랑은 생명의 조건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영원한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요일 3:10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분별하는 증거가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의와 형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는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인 증거는 의를 행하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누구도 예외 없이 사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태어날 때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영적인 면에서는 사망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이 사망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숙제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비밀을 알려주고 믿게 하고 그래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책입니다. 요 5:39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성경을 통해서 영생을 얻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요 20:31에서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그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요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요 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는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성경은 계속적으로 생명의 조건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와 상충되게 보이는 주장도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요일 3:14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제가 성경을 가지고 지금까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했는데, 여기서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충격적인 것은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해석이 중요합니다. 잘못해석하면 구원의 조건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형제 사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은 구원과 구원의 누림으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은 것 맞습니다. 영생을 얻은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구원을 누리는 것은 좀 다른 차원입니다.
아버지가 대학에 다니는 두 아들에게 자동차를 한 대씩 선물했습니다. 아버지가 선물한 자동차는 두 아들의 소유죠. 그런데 운전면허가 있는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받은 자동차를 바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자동차를 타고 학교에 가고, 쇼핑도 하고, 친구도 만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작은 아들은 운전면허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준 선물을 누릴 수 없습니다. 주차장에 두고 구경만해야 합니다. 그 자동차를 타고 학교에 갈 수도 없고, 쇼핑하러 갈 수도 없고, 친구를 만나러 갈 수도 없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빠가 선물로 준 자동차를 누리려면 운전면허를 따야 합니다.
여기서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은 자동차를 영생이라고 가정해봅시다.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신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적인 위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복음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의 자동차, 영생의 자동차를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선물 받은 후에는 이 세상에서 구원과 영생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을 누리는 방법이 형제 사랑입니다.
영생과 사랑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얻습니다. 요 17:3입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무슨 의미죠?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경험은 어떤 경험일까요? 기도하는데 3만 볼트의 전기가 임했다. 환상을 보고 표적을 보았다. 아닙니다. 형제 사랑입니다.
요일 4:7-8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아멘합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이죠? 증거가 바로 형제 사랑입니다. 요일 4:20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형제를 사랑합시다. 형제 사랑을 위하여 몇 가지 팁을 드리겠습니다.
①역지사지(易地思之)합시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사자와 소의 사랑 이야기를 아시나요? 사자와 소가 뜨겁게 사랑을 했습니다. 소를 사랑한 사자는 매일 매일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를 소에게 공급해 주었고, 사자를 사랑한 소는 매일 매일 자기가 좋아하는 풀을 사자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에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불만이 극에 달한 사자와 소는 결국엔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해 주는데 무엇이 불만이냐?”고 서로 달려들었습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자기식의 해석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진짜 사랑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날 때 시작 되는 것입니다. 역지사지하십시오.
②상대를 인정합시다. 한 기업에서 사내 기혼 남성들과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는 사람 100명을 대상으로 ‘삶 속에서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가’를 묻는 설문을 했습니다. 그 결과 1위 응답률을 보인 것은 ‘배우자나 애인으로부터 인정받을 때’였습니다. 자신의 배우자나 애인으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이 다른 사람들 천명, 만 명의 인정과 칭찬보다 훨씬 낫다는 겁니다.
장점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모든 사람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노력을 합시다. 며칠 전에 제 큰 아들 모세가 어떤 일 때문에 엄마에게 “엄마 참 멋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루가 지난 후에 제 아내가 저에게 “모세가 엄마 멋있어요”라고 말했다면 좋아하더군요.
③소속감과 책임감을 가집시다. 조류학자들은 뉴기니의 바우어새(Bowerbird)를 ‘장식품을 만드는 유일한 조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우어새 수컷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둥지 안에 아름다운 장식품을 만듭니다. 나뭇가지와 잎사귀, 꽃과 열매로 화려한 집을 건축합니다. 심지어 각종 열매의 즙을 이용해 장식품에 형형색색의 채색을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노래로 암컷을 유혹합니다. 암컷은 아름다운 저택과 화려한 장식품에 현혹되어 둥지에 정착합니다. 그런데 암컷의 비극은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수컷은 암컷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후부터 전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틈만 나면 암컷을 부리로 쪼아댑니다. 부드러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종종 폭군으로 돌변해 암컷을 공격합니다. 새끼를 낳아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제멋대로 날아다닙니다. 새끼의 양육을 오로지 암컷의 몫으로 돌립니다. 우리 주변에도 바우어새와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오랜 시간 사람들의 사랑의 감정을 연구해온 심리학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랑의 유효기간은 짧으면 6개월 길면 30개월이라고 합니다. 길어도 30개월이 지나면 상대방을 향한 환상은 산산조각나고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상대에게서 많은 불완전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의 온기가 30개월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친밀함’과 ‘책임’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동반자적인 사랑’이라고 명명하면서 서로에게 친밀함과 책임이 있을 때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성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내가 속한 단체 그리고 가족과 관련된 사람들을 감정적인 사랑으로만 대면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도 있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소속감과 책임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교회생활을 소속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하셨으면 합니다. 내 교회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짐을 져야 합니다. 가정생활이나 기타 모든 관계도 소속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④기도해줍시다. 상대와 멀어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 틀렸다, 저것 틀렸다”고 자꾸 지적하면 멀어집니다. 사람들은 “내가 널 좋아해서, 아껴서, 사랑해서 하는 말인데 …”라고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너나 잘해라’라고 합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만나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하면서 자꾸 조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B는 다른 사라에게 “저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지적질하네.”라고 말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그 목사님을 아는 이가 “목사님, 제가 교회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목사님을 사랑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라고 말하는데, 그 목사님은 “사랑한다면 말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사랑한다면 밥이나 사주세요.”라고 하더군요.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바꾸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맡기시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쉬운 일이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⑤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좋은 게 좋다고 모든 것을 얼렁뚱땅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지만 진리의 경계선은 분명해야 하고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신자든 불신자든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죄를 범할 수는 없습니다. 얼굴 붉히지 말자고 죄에 동참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결혼은 경계선이 확실해야 합니다. 가인계열과 셋계열이 하나 되는 것이 홍수의 원인이었습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청년들은 좋은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기를 축복합니다.
⑥사랑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인천 부광교회를 담임하시는 김상현 목사은 목회를 하면서 몇 번 사역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었답니다. 그중 한 번은 부산에서 목회할 때였습니다. 교인 가운데 한 분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밉기까지 했습니다. 그분이 하는 모든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목회의 장애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그런 미움을 갖고 목회를 계속한다는 것은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사역을 중단하고 유학을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심으로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목회를 하게 됐습니다. 주님께서는 목사님에게 교인을 미움의 눈으로 보지 말고 사랑의 눈으로 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밉게 보이는 것은 그가 미운 행동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미움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처음에는 그 말씀을 이해하고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때 주님은 목사님에게 “내가 너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목사님은 “주님은 저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는 나에게 사랑스러운 행동을 하였느냐?” 목사님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또 주님은 “내가 너를 보는 그 눈으로 너의 성도들을 볼 수 있을 때 네 목회는 나의 목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목사님은 주님의 사랑의 눈으로 성도들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며 삽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삽시다. 가정생활도 사랑으로 하고, 교회 생활도 사랑으로 합시다. 사회생활도 진리 안에서 사랑하며 합시다.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부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