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유대인과 집시들의 왼쪽팔에 개인 식별을 위한 ID 번호를 새기게 하고 IBM의 홀러리스 천공카드 시스템을 사용하여 왼팔의 문신 ID 번호들을 관리하고 홀로코스트에 사용했습니다.
2차대전 때 히틀러와 나치가 유대인과 집시들을 대학살한 홀로코스트는 3차대전(대환란) 때 일어날 야곱의 환란의 모형입니다.
나치가 수감자들의 왼팔에 새긴 문신 ID는 666 짐승의 표의 모형이며,
「국가란 이름의 학살자
1933년에 이미 독일에는 다하우(Dachau)를 비롯한 50개의 수용소가 건설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점령지가 확대됨에 따라 수용소는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 수용소들과 동유럽의 숲 속에서 학살된 유대인은 대략 600만 명으로 추산되지요.
많은 사람들은 나치 독일이 벌인 이 끔찍한 학살극을 그저 히틀러라는 미치광이와 그를 둘러싼 몇 명의 극렬한 동조자들에 의해 벌어진 일회적이고 지극히 예외적인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소수에 의한 광란의 잔치였다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완벽한 시스템의 승리라 할 수 있습니다.
2001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윈 블랙(Edwin Black)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책 《IBM과 홀로코스트(IBM and the Holocaust)》를 출간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치가 유대인들을 색출하여 분류하고, 강제 추방하고, 수용소에서 학살하는 것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의 최신 기술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IBM의 독일 자회사인 데마호그가 판매한 이 최신 기계들은 엄청난 숫자의 유대인들을 분류하여 단시간 내에 처리하는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독일 내에서만 약 2,000 대가, 독일에게 점령당한 유럽 전역에서 역시 수천 대가 활용된 이 기계의 역할은 엄청났습니다.
유대인들을 수용한 주요 강제수용소마다 빠짐없이 설치되어, 히틀러 이전의 수많은 군주들이 계획했었지만 결국 실패했던 유대인 청소의 과업(?)을 실현하는 데 최고 공신 노릇을 한 것입니다.
에드윈 블랙은 IBM이 단순히 기계를 만들어 판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치의 요구에 따라 기계들을 특별히 제작해주고, 유지, 보수해주었으며, 기계를 사용할 나치 장교들을 훈련시켰다고 폭로했습니다.
심지어 강제수용소 안에 설치된 기계들까지도 다달이 애프터 서비스 점검을 받았다고 합니다.
IBM은 1896년 독일계 미국인 발명가인 허만 홀레리스(Herman Hollerith)에 의해 설립되어 주로 인구 센서스에 필요한 기계를 만들며 성장한 기업입니다.
홀레리스는 1879년 19세의 나이에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인구조사청, 특허청에서 일하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공학도였습니다.
한때는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1884년에서 1890년의 기간 동안 그는 인구 센서스에 쓰일 기계를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종이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해 많은 양의 정보를 집계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데 성공하여 인구 센서스에 활용되도록 하지요.
1890년 미국 인구조사청이 센서스에 활용할 기계를 공모하였을 때 그의 펀치 카드 시스템은 다른 발명품들을 압도적으로 제치고 선택되었으며, 1890년 한 해 동안에만 인구조사청이 약 500만 달러를 절약하는 데 기여합니다.
10년에 한 번씩 행해지는 인구 센서스에만 목을 매달 수 없었던 홀레리스는 자신의 발명품을 다양화하면서 동시에 그의 특허가 모방되는 것을 막고자 기계를 임대만 하는 전략을 세웁니다.
기계를 판매하지 않고 임대만 하는 IBM의 정책은 이후에도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덕분에 IBM은 나치가 범한 홀로코스트에까지 깊숙이 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요.
나중에 이스라엘 비밀첩보부 모사드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 : 1962년 이스라엘에서 교수형 당한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 책임자)은 "오스트리아 합병 몇 주 전 오스트리아에 도착했을 때,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엄청난 분량의 카드 분류 작업에 매달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 라고 증언합니다.
1938년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독일의 인구 센서스는 합병된 오스트리아와 함께 분류를 마치기 위해 연기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전 작업을 통해 순식간에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을 청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인구 센서스의 종료와 함께, 크리스탈 나하트(Kristallnacht, 수정의 밤)라 불리는 본격적인 유대인 탄압이 시작된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홀로코스트를 공부하는 학자들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행위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할 때 보통 독일과 유럽 전역을 잇는 열차 운용의 예를 듭니다.
<쉰들러 리스트>를 비롯한 영화를 보면서 우리들이 주로 관심을 갖는 것은, 수백 명이 열차 한 칸에 짐짝처럼 태워져, 앉을 공간도 없이, 먹을 것도 없이, 화장실도 없이 이동하는 가운데 굶주림과 열기 때문에 죽어간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고통 못지않게 '수백만 명이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이동할 수 있었던 시스템' 에 주목합니다.
지금도 당시 독일 점령지역의 열차 운행기록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컴퓨터도 없던 그 시절에 분 단위, 초 단위로 어김없이 기차들이 운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이렇게 철저하게 운행되던 기차 이야기를 하면서 독일 사람들의 특성이 반영된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곤 했습니다만, 이제는 그것도 모두 IBM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또한 에드윈 블랙은 IBM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솔루션(Solution)' 이라는 표현이 나치 독일이 유대인 학살계획의 암호명으로 사용했던 '최종 해결책(The Final Solution)' 과 무관하지 않다는 데 착안하여 과연 IBM이 얼마나 많은 솔루션을 독일 측에 제공했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 흩어진 단편들을 모아 IBM이 홀로코스트에서 얼마나 엄청난 역할을 했는지를 밝혀내지요.
많은 강제수용소 수용자들이 자신들은 수용소 안에서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숫자라기보다는 IBM이 만들어낸 펀치 카드 한 장에 가까웠습니다.
그 한 장의 카드에 그들의 출신국가, 생년월일, 결혼 여부, 자녀 수, 수용 이유, 신체의 특징, 노동 기술 등이 모두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죽어 나가는 생명들도 이들 카드에서는 그저 통계를 내고 관리해야 할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IBM뿐만 아니라 독일이라고 하는 국가 전체가 컴퓨터처럼 착착 손발을 맞춰 작동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법률가는 법률가대로, 의사는 의사대로,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군인은 군인대로, 철도원은 철도원대로,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법률과 행정 시스템에 철저한 신뢰를 가졌던 독일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정신지체인들을 안락사시킬 때는 반드시 법원에서 허가서를 발부받아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거기에 서명한 판사들은 훗날 그것이 안락사에 악용될 줄은 모르고 서명했노라고 변명했지만, 그들이 적어도 묵시적으로는 정신지체인들의 안락사에 동참하고 있었음을 의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컴퓨터처럼 잘 조직되어 운영된 나치 독일의 이야기는 국가가 우리에게 얼마만큼 위험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어떤 개인의 범죄도, 어떤 깡패조직의 범죄도, 국가가 괴물로 돌변하는 순간 만들어낼 수 있는 참극과는 경쟁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전 국민을 한 장의 펀치 카드에 입력한 후 그들을 통제하고 살해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대량학살을 고안해 낸 사람은 주로 제3제국의 인구정책을 수립하는 데 관여했던 독일 지식인 집단의 기술 관료였다.
또한 기본적으로 기회주의적 속성을 지닌 학자이자 유능한 관료로서, '근대화' 를 신봉함과 동시에 나치의 유럽 '신질서 New Order' 라는 구상에 협조하여 입신양명을 꾀한 사람들이었다..
이 끔찍스러운 살해기구는 고도로 조직된 관료화된 사회가 아니었더라면, 곧 살해 업무에 대한 책임성을 의도적으로 분산시키고 그것을 타성에 젖게 만드는 체계적이고 완벽주의적이며 동시에 철저히 '근대적인' 사회가 아니었더라면 작동될 수 없었다.
이 일관 공정의 학살 방식이 특히 근대적이었음은 또한 제3제국이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유대인을 체포하고 그들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며, '최종 해결' 과정에서 최신식의 펀치카드 방식을 도입했고, 유대인이 겪는 고통의 정도를 통계화할 정도로 체계적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에드윈 블랙이 밝혀낸 것처럼, 독일인이 열차수송 조직 및 강제수용소 기록은 물론이고, 인구조사표, 주민등록표, 호적등본을 통해 유대인 신원을 확인하는 데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성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IBM의 소비자 관리기술 덕분이었다.
(Edwin Black, IBM and the Holocaust. The Strategic Alliance between Nazi Germany and America's Most Powerful Corporation, 2001 - 에드윈 블랙, IBM과 홀로코스트, 나치 독일과 미국의 가장 강력한 회사와의 전략적 동맹)
소위 T4 작전(이 명칭은 중앙사무소가 베를린 티르가르텐가 4번지에 소재한 데서 유래했다)은 히틀러가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헨리 프리들랜더가 지적한 대로, "안락사 정책의 성공으로 인해 나치 지도부는 대량학살이 기술적으로 실행 가능하다는 것, 보통 사람들도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는 데 기꺼이 참여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유례없는 작업에 관료제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는 점들을 확신하게 되었다."
T4 작전이 장애인들을 살해하는 것임을 숨기기 위해 이용되었던 끔찍한 방법들이 나치의 학살수용소에 다시 그대로 등장할 것이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을 때, 세계는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봤지만, IBM은 나치를 좋은 교역 상대로 보았다.
최근에 발견된 나치 문서들과 폴란드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IBM과 나치의 동맹은 독일의 IBM 지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란 사실이 밝혀졌다.
왓슨은 정부가 시민들을 일일이 감시하는 것은 IBM에게는 좋은 뉴스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IBM에 관련된 수천 개의 문서를 보면, 나치 시장에서 IBM의 독점을 유지하고, 경쟁자들을 배척하고 판매 쿼터를 맞추기 위해 계약을 늘리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IBM의 독일 지사는 Deutsche Hollerith Maschinen Gesellschaft 인데, Dehomag 로 알려져 있다.
기계를 팔지 않고 임대만 주었다.
IBM의 새로운 폴란드 회사는 Watson Business Machines 라고 불렸다.
히믈러의 보안 서비스 SD의 장인 Reinhard Heydrich 는 1939년 9월 21일의 “점령지에서의 유태인 문제” 라는 제하의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39년에 뉴욕타임스는 “나치가 폴란드의 유태인들을 숙청하려 한다” 는 헤드라인을 냈다.
동유럽 전역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의 이송을 수량화하고, 조직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인가?
중요한 Watson Business Machines 고객 사이트인 크라쿠프의 22 Pawia Street에 위치한 폴란드 철도의 Hollerith 사무실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15명의 폴란드 여자들이 카드를 펀치하고 소터에 올려놨다.
IBM 의 대변인인 Carol Makovich 는 1년 전에 그녀가 말한 공식적인 발언을 반복했다: “IBM은 이 시기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IBM의 맞춤용 철도 경영 프로그램과 바르사바 게토의 IBM의 6개의 Rymarska 인쇄소에서 프린트 된 수백만의 고객맞춤 펀치카드들과 철도에 리스된 컴퓨터들은 독일 지사 소속이 아니고, 바르사바에 있는 뉴욕이 통제하는 지사 소속이었다.
그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유일한 생존자인 폴란드인 Krzemieniecki 는 “그것은 독일 기계들이 아니었다. 라벨들은 다 영어로 쓰여 있었다. 기계를 유지 보수하는 사람들은 가끔 다이어그램을 펼쳤는데, 그 기계에 대한 다이어그램들의 언어는 전부 다 영어로 쓰여졌다.”
왓슨은 여러 나라들에 자신의 이름을 딴 IBM 지사들을 만들었는데, 각 나라에 오직 하나였다.
500명의 펀치를 하고 표를 만드는 피고용인들과 수십 개의 컴퓨터를 가진 Kraków의 24 Murnerstrasse에 있는 Hollerith 통계 센터는 폴란드의 철도 사무실에 비해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베를린에 있는 the Central Office for Foreign Statistics and Foreign Country Research가 새롭게 발견되었는데, 이는 Kraków의 통계 사무실로부터 계속적으로 상세한 통계 자료를 받았다.
IBM NY은 나치 통계 컴퓨터들을 설치했는데, 규모가 워낙 컸음으로 Hollerith 분과(Department)가 아니고 Hollerith Gruppe으로 불렸다.
1941년 12월 10일에 미국이 전쟁을 선포하자, 제3제국은 IBM에 종사하는 나치인 Hermann Fellinger를 적국 재산 관리인으로 임명하였다.
「홀로코스트 피해자 "IBM 부분적 책임있다" 소송
IBM의 홀로코스트 책임론은 나치가 데이터 처리에 사용한 데호마그(Dehomag · IBM의 독일 내 자회사)사의 제작 기기가 미국 내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에도 전시됨으로써 수십 년 전부터 제기돼 왔지만 소송으로까지 비화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소송은 미국 작가 에드윈 블랙이 쓴 'IBM과 홀로코스트' 의 12일 출간에 맞춰 이뤄진 것.
이들은 소장에서 "나치가 홀로코스트에 IBM의 데이터 처리기술을 이용했으며 IBM측은 이 기술이 박해와 학살에 이용될 것이란 점을 알면서도 제공했다" 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IBM은 장비를 임대해 지속적으로 기술지원을 하는 시장전략을 택했기 때문에 IBM의 기술이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 지를 알고 있었다" 면서 "국제법을 위반하며 벌어들인 이윤을 피해자 보상에 사용하고 과거의 전력을 낱낱이 공개하라" 고 요구했다.
에드윈 블랙은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 출간된 저서에서 컴퓨터의 시초가 된 IBM의 펀치카드 분류기가 유럽 내 독일군 점령지역에서 유대인 분류와 강제수용소 운영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이용됐다고 주장했다.
〈뉴욕 연합〉동아일보 (2001.02.12)」
한 집시 단체가 IBM을 상대로 과거 나치가 홀로코스트(Holocaust)를 자행하는 데 협조했다는 혐의로 소송을 냈다.
중부 및 동유럽에 거주한 약 60만명의 집시들은 홀로코스트 동안 나치와 그 동맹군들에게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송을 제기한 집시 단체(Gypsy International Recognition and Compensation Action)의 파스토르 메이 비텔 회장은 "우리는 보상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소송을 제기했다" 고 주장했다.
이 집시 단체가 제기한 소송의 주요 근거는 에드윈 블랙이 지난 2001년 펴낸 `IBM과 홀로코스트 : 나치와 미국의 거대기업간 전략적 동맹` 이라는 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세계2차대전 동안 IBM은 나치가 유태인과 유럽의 집시들의 학살을 도모하는 데 사용된 펀치카드와 초기형 컴퓨터를 제공했으며, 나치를 돕기 위해 제네바에 사무실도 운영했다.
비텔 회장은 "IBM은 이 시스템들이 홀로코스트를 자행하는 데 사용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나치를 위해 시스템을 고안했다" 고 주장했다.
한편, IBM은 "이번 소송이 가치가 없는 일" 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 출처 : 박정연기자, 디지털타임스」
「IBM에서 만든 펀치카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집시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생체실험을 한 후 가스실에서 죽였다.
2002년 2월 4일, 세계 최고의 컴퓨터 기업 IBM을 상대로 유럽의 집시단체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한편 IBM측에서는 "이번 소송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나치와 IBM
에드윈 블랙은 2002년 'IBM과 홀로코스트, 나치와 미국의 거대기업 간 전략적 동맹' 이라는 책을 펴냈다.
'IBM과 홀로코스트' 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세계적인 컴퓨터 기업인 IBM이 제네바에서 사무실을 운영하며 나치가 유태인과 집시들을 학살하는 데 사용한 펀치 카드와 초기형 컴퓨터를 제공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IBM의 설립자인 토머스 왓슨은 1937년에 히틀러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진주만 공습 이후에도 미국 기업인 IBM은 나치 정권의 지원하에 유럽에서 지속적인 이윤을 얻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럽 거주 집시의 수는 약 60만명 정도로 추정되지만, 집시단체에서는 100만명을 상회할 것으로 보고 있다.
50개국 600만명의 집시를 대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GIRCA측은, "IBM 유럽본부의 소재지이자 2차 대전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활용된 장비들이 제공된 장소이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소송에 착수한 것" 이라며 "우리는 보상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소송을 제기했다." 고 밝혔다.」
「2002년 에드윈 블랙(Edwin Black)은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하는 <IBM and the HOLOCAUST> 를 출판한다.
블랙의 책에 의하면 홀로코스트 당시 히틀러는 유럽 전역의 유태인을 보다 체계적으로 학살할 수 있는 방안에 찾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한다.
설마 IBM이 그 기술이 대량학살에 사용될 것을 예측했을까?
1941년 3월에 IBM사의 매니저 한 사람은 “유럽의 전쟁지역에서 독일 정부는 우리 기계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독일군은 현재 가능한 모든 목적에 이것을 사용하고 있다” 고 전보를 친 기록이 있다.
종전 후 뉘른베르크의 전범재판에서 프랑스의 한 소송 의뢰인은 “강제수용소 ‘부헨발트’ 는 ‘홀러리트’ 를 위해 노동력을 공급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주간동아 2001 년 03 월 08 일 (274 호) 56 ~ 57 쪽)
나치 피해자들은 IBM이 나치 정권을 위해 유대인 신원 확인과 집단노동수용소 운영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며 에드윈 블랙의 저서 출간에 맞춰 뉴욕 연방지방법원에 IBM을 대상으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은 미국의 정보 거대기업 IBM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처럼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치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변호사인 마이클 하우스펠드는 주장한다.
하우스펠드 변호사는 IBM 경영진도 자사의 기기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캠프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문제의 기기 대여 및 유지 비용 등 수백만 달러의 수입 때문에 이를 묵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소장에서 IBM의 보관 문서 공개와 함께 IBM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불법적으로 취득한, 1940년 당시 액수로 1천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이익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워싱턴ㆍ바르샤바 APㆍAFP/연합뉴스)」
「IBM이 나치의 협력자였다고?
전쟁 중 유대인 강제노역에 동원됐던 올드리히 스트란스키와 5명의 유대계 체코인들은 2월 중순 IBM사의 전쟁 범죄 혐의를 담은 광범위한 기소장을 뉴욕의 지방법원에 제출했다.
담당 변호사 하우스펠트는 배상문제 전문가로 지난해 나치 강제노동 배상문제와 관련해 독일정부 및 기업들과의 협상에 참가한 인물.
IBM사가 받고 있는 전범의 혐의 내용은, 소송과 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출간된 ‘IBM과 홀로코스트’ 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치 정권 시절 IBM사는 독일에 지사를 설립하고, 데이터의 자동처리기인 이른바 홀러리트 구멍카드(펀치카드) 처리기를 생산-관리해왔다.
1930년대 히틀러가 등장해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무렵, 독일에서는 정보의 자동처리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독일 홀러리트 기계회사(Dehomag), 즉 IBM 독일지사의 기술자와 당시 이 회사의 최대 고객이었던 나치정권은 손으로 작성된 등록서류가 구멍카드 기계에서 처리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낸다.
이후 독일 내의 모든 자료는 홀러리트 시스템의 기술적 처리에 부응하도록 작성되어야 했으며 IBM 독일지사는 구멍카드 처리기에 알맞은 서류 작성방법을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인구조사 업무를 위탁받은 IBM 독일지사는 1939년 5월 75만명의 인구 조사원을 고용한다.
히틀러 정권은 경찰과 근위 기병대에 총력을 기울여 이들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릴 만큼 인구조사에 열성적이었다.
문제는 이를 토대로 이루어진 독일 전역의 가구조사였다.
이후 나치가 점령한 지역에는 어디에나 이 홀러리트 시스템이 가동됐다.
이는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을 색출해 집단수용소로 끌어가는 데 효율적이었을 뿐 아니라 수감자 관리에도 유용했다.
심지어 수감자들을 16개 카테고리로 분류해 특별한 학대방법이나 처형방법의 규정도 이 시스템에 의해 관리됐다.
그렇다면 IBM사는 나치가 자신들의 기계를 ‘범죄’ 에 사용하고 있음을 몰랐던 것일까.
하지만 ‘IBM과 홀로코스트’ 의 저자 에드윈 블랙의 조사는 오히려 그에 대한 답이 ‘정반대’ 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1941년 이후 IBM 독일지사는 독일의 강제관리를 받게 된다.
당시 심의회는 뉴욕 본사와의 대화상대로 SS(친위대) 여단장인 나치 열성당원 베젠마이어를 선택했다.
미국 내에서도 IBM사의 이런 처세를 고운 눈으로 볼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나치제국의 몰락이 분명해지자 IBM은 신속하게 다른 표정을 짓는다.
“미국의 다른 기업들도 ‘홀로코스트’ 에 관련이 되었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IBM에 대한 소송은 IBM사뿐만 아니라 나치시절 독일에 지부를 두고 나치와 거래했던 다른 50여 개 미국 기업들에도 심리적 압박을 주고 있다.
- 출처 : 강여규 하이델베르크 통신원, 주간 동아」
「홀로코스트 당시 IBM(미국)은 나치에 유대인 관리 기술을 제공했다.
현재 IBM은 최신 마이크로칩과 컴퓨터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취급하였지만, 1930년대 IBM 기술의 절정은 다섯자리 홀러리스 숫자와 천공카드였다.
탐사보도기자 에드윈 블랙은 2001년에 독창적인 책 <IBM과 홀로코스트>를 통해, 어떻게 나치 정권이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유대인과 유대인 자산을 집계하여 수많은 유대인과 집시들을 강제수용소로 이동시킬 수 있었는지 폭로했다.
나치 정권은 IBM 독일 지사의 도움으로 홀러리스 숫자와 천공카드 그리고 기타 최신 기술을 이용하여 집단학살과 테러작전을 자동화하여 수행할 수 있었다.
IBM이 천공카드 기계 2000 대 이상을 강제수용소에 제공하였고 나치는 천공카드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 숫자는 강제노동시스템에서 이동할 때 흔적이 남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IBM 독일 지사가 나치 정권에 기계를 판 것 이상으로 도움을 준 사실을 뉴욕 본사도 알고 있었다.
독일 지사는 고객맞춤시스템을 설계했으며 나치장교들을 훈련시켰고 나치가 사용하도록 1년에 15억 개에 달하는 천공카드를 생산했다.
기술 대다수는 도덕적으로 중립이다.
나치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IBM의 기술을 이용한 사실이 직접적으로 IBM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IBM이 나치 독일에서 한 역할을 생각해볼 때, IBM의 표어 '작은 지구를 위한 솔루션'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아이러니다.
- 출처 : 세계를 속인 200가지 비밀과 거짓말」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 Corporation)은 세계 컴퓨터 시장의 약 50%를 지배하며, 거액의 연구개발비(총수입의 10% 이상), 탁월한 영업정책, 강력한 노무관리로 전세계 164개국에 진출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이다.
- 출처 : 엔싸이버」
「이 사람들은 쉰들러 리스트 영화에서 본 것처럼 밀폐된 화물열차에 움직일 틈도 없이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밀어 넣어진 상태로 식료품도 없이 7~10일 간의 긴 여행끝에 오시비엥침 화물역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SS(나찌 독일 친위대)장교와 SS 의사인 요제프 멩겔레 박사와 마주치게 된다.
이렇게 분류된 뒤,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일하면 자유로워 진다" 라는 기만적인 글자가 아치형으로 걸쳐져 있는 문을 통하여 수용소로 들어갔고,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분류된 자들은 목욕탕으로 위장된 가스실로 바로 보내졌다.
가스실로 보내질 유태인들은 가능한 한 조용하게 남녀가 분리된 채로 끌려갔다.
안심한 유태인들이 들어가는 가스실은 정말로 샤워장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샤워기에서 나오는 것은 독가스였다.
죽음을 선고 받은 사람들은 도착하자마자 명부에 등록도 하지 않고 곧바로 죽음을 당했기에 현재까지도 정확한 희생자 수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용되었던 사람들도 감금, 총살, 교수형, 강제노동, 질병, 굶주림, 고문, 인체실험 등의 여러가지 방법에 의해 학살당했다.
각국에서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약 15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세계 2차대전이 끝날 즈음에 약 600만 명의 유태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희생자들은 친위대원들의 따가운 감시아래 가스실로 향한 뒤 연기로 변해 하늘을 그을렸다.
작업조로 뽑힌 사람들은 머리를 깎이고, 왼쪽 팔뚝에 죄수번호를 문신했으며, 제복과 밥그릇 · 스푼을 지급받은 뒤 막사로 내몰렸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으로 알려진 프리모 레비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그래서 1987년 그가 자살했을 때, 모두가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레비의 무덤은 토리노 공동묘지의 일각을 차지한 유대인묘지 구획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의 묘비명에는 그의 성명과 생몰년 이외에 '174517' 이라는 여섯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것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그의 팔에 문신된 수인번호였다.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직접 고쳐 만든 성(姓)이 새겨진 무덤, 죽은 자의 이름을 잘못 적은 무덤, 수인번호를 적은 무덤 ······.
- 출처 : 난민과 국민 사이」
나치가 사람들의 왼팔에 개인 ID를 새긴 것은 강제수용소의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사람들의 오른손(팔)과 이마에 바코드 마이크로칩으로 개인 ID를 넣는 것은 의료용이나 납치 방지용 등 여러가지 말을 하지만 결국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짐승 적그리스도에 의해 사용되게 될 것입니다.
「멩겔레의 쌍둥이 실험
의사이자 과학자로 ‘죽음의 천사’ 라는 별명을 갖게 된 멩겔레(Josef Mengele)가 수행한 실험은 나치 의사의 냉혈적 속성과 살인적인 잔인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32세에 아우슈비츠로 온 멩겔레는 수감자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다.
해부실 옆에는 일하는 방이 있었는데 14명의 집시쌍둥이들이 심하게 울며 대기하고 있었다.
멩겔레는 세 쌍의 쌍둥이가 눈 색깔이 달라서 흥미로워 했다.
멩겔레의 쌍둥이 실험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에바 모제스-코르는 멩겔레의 비르케나우 실험실에서는 인간은 단지 과학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재료에 지나지 않았다고 회상하였다.
에바가 수용되었던 막사에는 한살 반부터 13살까지의 쌍둥이들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멩겔레가 만든 일과표가 걸려 있었다.
19세난 소년 쌍둥이는 “소년을 소녀로 만들고 소녀를 소년으로 만들기 위한” 실험에서 혈액을 교차 수혈하는 데 사용되었다.
에바는 쌍둥이 자매 미리암과 더불어 살아남았지만 그들은 평생 정신적, 신체적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 진보평론 제26호 (김옥주,황상익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교실)」
「야드 바? 홀로코스트박물관 (Yad Vashem Holocaust History Museum)
나치스에 의해 학살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세운 추모 박물관.
설립연도 : 2005년, 소재지 : 예루살렘, 규모 : 면적 4,200㎡
정식 명칭은 홀로코스트역사박물관이다.
뒤에 21세기에도 계속 홀로코스트(대학살)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고, 다시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확장 공사를 시작해, 10년의 공사 끝에 2005년 3월 15일 재개관하였다.
새로 개관한 박물관은 기존 기념관의 4배 규모로, 면적은 4,200㎡이다.
나치스에 학살된 600만 유대인의 위령탑과 희생자들의 유물 및 사진, 생존자들의 증언 자료, 희생자들이 수용소 안에서 그린 그림 등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 외에도 세계 각국에는 곳곳에 홀로코스트박물관 및 추모관들이 세워져 있다.
야드 바? 홀로코스트박물관은 세계 각국에 있는 이들 홀로코스트 관련 박물관과 추모관들의 본부 역할을 한다.
2005년 3월 15일 개관식 때 이스라엘 정부는 국제연합 사무총장을 비롯해 세계 40개국 지도자들을 초청하였다.
「내가 이스라엘에 살면서 몇 차례 "야드바셈"(대학살 박물관)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
또 한 곳에는 욥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바코드(Bar Code)’ 의 경우에는 우드랜드라는 개발자가 처음 그 아이디어에 착안을 한 뒤 IBM에 의해 사업화가 되기까지 20년이 넘게 걸렸다.
「바코드란 컴퓨터가 정보를 읽기 쉽도록 하기 위해 굵기가 다른 검은 막대와 하얀 막대를 조합시켜 문자나 숫자를 코드화한 것입니다.
바코드의 특허권은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인 IBM사가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EANA(European Article Numbering Association)로부터 국가코드를 부여받아 한국유통정보센터에서 각 제조업체 코드를 등록하여 상품에 바코드 심볼을 부착하고 있습니다.」
「다박사와 함께하는 생활과학 '바코드'
'0'과 '1' 이진법의 마술.
어떻게 읽는 것일까.
바코드는 표준형 13자리와 단축형 8자리의 두 가지가 있는데, 주로 표준형 13가지를 사용한다.
전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바코드의 특허권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
- 출처 : 김병인 박사, 부산과학기술협의회 교육연구팀, 부산과학기술협의회」
「짐승의 수 666
징조
실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 때’ 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바코드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25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이 바코드는 666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666 표와의 연관성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직장 신분증과 학생증에 바코드가 찍힐 때, 사람들은 바코드를 편리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통합 카드가 등장한 후에는 사람에게 직접 바코드를 이식하는 방법이 등장할 것이다.
이를테면 편리성을 이유로 주민등록증에 바코드 시스템이 도입되고, 주민등록증 하나에 의료보험증과 여러 신용카드들을 통합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는 결국 사람이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위치측정시스템) 통제 시스템 속에 갇히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몸 안에 바코드를 심는 것을 사람의 건강문제와 직결시킬 경우, 아주 유용한 수단이라고 세계인에게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코드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국가가 그렇게 하도록 해서 어쩔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이 표를 받지 않으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한 개인의 모든 경제적 수단이 정지되기 때문이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3 : 16, 17)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 (계 13 : 18)
바코드 시스템과 666 표와의 연관성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그런데 바코드를 읽기 위해서 왜 666 시스템을 써야만 할까?
실제 바코드 시스템에서 가느다란 두 줄만이 6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다른 조합으로도 6을 나타낼 수가 있다.
이를 개발한 사람은 정확성과 최소화라는 극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666 시스템을 채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은 대부분 의미를 가지고 있다.
666은 6이 셋 모인 것인데,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다는 것으로, 적그리스도가 사람으로서 사단에게 권세를 받아 하나님처럼 되어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현재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있는 EC 본부에는 BEAST(짐승)라는 이름의 초대형 컴퓨터가 있다.
휴거 이전에 666 짐승의 표인 바코드 마이크로칩으로써 교인들이 배교하는 일이 먼저 오게 되고(살후 2장 3), 휴거 이전에 짐승의 표를 받는 자들을 일정기간 먼저 체질하여 가려내고 난 다음 휴거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이크로칩은 제2의 선악과이며, 선악과를 먹는지 안먹는지로 아담과 하와가 체질받았고 분별받았듯, 마지막 때 666 짐승의 표인 바코드 마이크로칩을 받는지 안받는지로 교인들을 먼저 체질하고 분별하게 됩니다.
일정기간 마이크로칩으로써 교인들을 체질하고 난 다음 휴거가 일어나게 되며, 휴거 이후에 후 3년 반의 대환란이 오게 됩니다.
666 짐승의 표인 바코드 마이크로칩을 받은 자들은 휴거되지 못하고 짐승이 다스리는 후 3년 반의 대환란에 남아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심판을 그대로 다 받게 되고, 결국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IBM and the Holocaust
Nazi tattoos on Jews
IBM and the Holocaust (Punch card)
Next Future Human Emotional Microchip Target
MTV spot next past future; civil terrorist... Think...
The Holocaust Happened To People Like Us.
The Nazi Punch Card
히틀러와 홀러리스 기계의 펀치카드가 660 이라는 숫자와 관계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적그리스도의 모형인 히틀러는 660 이라는 자신의 수를 사람들의 왼팔에 문신 ID 로써 새긴 것이 되며,
히틀러가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에게 왼팔에 문신으로 새긴 개인 ID 번호는 장차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의 오른손(팔)과 이마에 마이크로칩으로 개인 ID 번호를 새기게 될 것의 모형이며, 바코드 마이크로칩이 666 짐승의 표입니다.
Adolf Hitler = 660
A = 6
H = 48
6 + 24 + 90 + 72 + 36 + 48 + 54 + 120 + 72 + 30 + 108 = 660
R = 108
108 + 6 + 114 + 114 + 30 + 84 + 6 + 78 + 120 = 660
Tabulator
T = 120
120 + 6 + 12 + 126 + 72 + 6 + 120 + 90 + 108 = 660
히틀러의 수와 수감자들의 왼팔에 새긴 문신 ID를 위한 장치들의 수는 짐승과 짐승의 표의 모형이므로 660 이 됩니다.
C = 18
18 + 90 + 78 + 96 + 126 + 120 + 30 + 108 = 666
컴퓨터(Computer)는 짐승 적그리스도가 사용하게 될 실재 짐승의 표를 위한 장치가 될 것이기 때문에 666 이 됩니다.
「히틀러의 출생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저녁 6시 반 경에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의 국경을 이루는 인 강변에 있는 소도시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로 짐작되는 게오르크 히틀러는 시골 출신 마리아와 결혼했다.
알로이스는 결혼 후에도 어머니 성을 따르고 있었으며, 게오르크의 동생 집에서 자랐다.
알로이스의 첫번째 결혼은 불행했으며, 상처 후에 젊은 여자와 재혼을 했다.
- 출처 : 히틀러, 한길사」
ID Cards - A Lesson from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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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oulforever 원문보기 글쓴이: soulforever
첫댓글 샬롬!.......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