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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뜻으로, 가혹하게 세금을 뜯어가는 정치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고통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다.
苛 : 가혹할 가(艹/5)
政 : 정사 정(攵/5)
猛 : 사나울 맹(犭/8)
於 : 어조사 어(方/4)
虎 : 호랑이 호(虍/2)
(유의어)
가렴주구(苛斂誅求)
가정(苛政)이란 혹독한 정치를 말하고, 이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미치는 해는 백수의 왕이라 할 만큼 사납고 무서운 범의 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 요(堯)임금 대의 이상향의 정치를 고복격양(鼓腹擊壤)으로 설명했습니다. 곧 완벽한 정치가 이루어진 시대란 정치라는 용어 자체가 무의미한 상태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실정입니다. 단지 모두가 희망과 꿈을 안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시대를 갈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시대는 간혹 엿볼 수 있을 뿐이지 대부분 일반적인 과거의 백성들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살아 왔습니다. 동양의 성인으로 일컫는 공자(孔子)가 살았던 시대 역시 극도의 혼란기라고 할 수 있는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공자의 저서인 노(魯)나라의 역사책 춘추(春秋)에서 유래한 춘추시대는 주(周)나라의 천자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고 지방의 봉건 제후들이 권력을 횡행하던 혼란기였습니다. 그렇기에 공자의 사상 가운데 특히 정치사상은 각자의 신분 위치에서 제 역할을 올바로 담당하는 명분론을 주장하면서 당시의 혼란기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명분을 잃어버린 당시의 정치 풍조로 인해 정치의 주안점이 백성들에게 있지 못하고 권력과 패권에 있는 것에 일침을 가한 일화가 바로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도 사납다는 뜻의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의 고사입니다.
孔子過泰山側, 有婦人哭於墓者而哀.
夫子式而聽之, 使子路問之, 曰, 子之哭也, 壹似重有憂者.
공자(孔子)가 태산 옆을 지나가는데 어떤 부인 하나가 무덤에서 슬피 울고 있었다. 공자는 수레 앞턱의 가로나무를 잡고 듣고 있다가 제자인 자로(子路)를 시켜 그 연유를 묻게 했다. “부인이 우는 것이 심히 깊은 근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而曰, 然. 昔者, 吾舅死於虎, 吾夫又死焉, 今吾子又死焉.
夫子問, 何爲不去也. 曰, 無苛政.
夫子曰, 小子識之, 苛政猛於虎也.
부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죽었고, 남편이 또 호랑이에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아들이 또 호랑이에게 죽었습니다.”
“왜 떠나지 않았습니까?” 하고 공자가 묻자 부인이 대답했다.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제자들아, 명심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예기(禮記) 단궁(檀弓), 공자가어(孔子家語) 정론해(正論解)에 나온다.
당나라의 문인이고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은 그의 작품 포사자설(捕蛇者說)에서 공자가 말한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땅꾼을 통해 증명하고 강조했다.
영주(永州)의 들에 기이한 뱀이 나는데 검은 바탕에 흰 점이 나 있으며, 초목에 닿으면 다 죽게 되고, 사람을 물면 이를 막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뱀을 잡아 말려 포로 만들어 약을 만들면 대풍(大風), 연원(攣踠), 누려(瘻癘)를 그치게 하고, 죽은 피부를 제거하고, 삼충(三蟲)을 죽일 수 있다.
처음, 태의(太醫)가 왕명으로 이를 모아 일 년에 두 차례 세공으로 할당해 바치면서, 유능한 땅꾼을 모집하여 (그들의)조세 수입으로 하게 했다. 영주 사람들은 (뱀을 잡으러)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장(蔣)씨라는 사람이 있어, 그 이익을 3대 동안 독차지했는데, 그에게 묻자 대답했다. "우리 할아버지도 이로 인해 돌아가셨고, 우리 아버지도 이로 인해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내가 이를 이어받아 하기를 12년이 되었는데, 죽을 뻔했던 일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 모습이 아주 슬퍼 보였다. 나는 그를 불쌍히 여겨 또 말했다. "그대는 이를 고통스럽게 여기시는가? 내가 장차 담당자에게 말해 그대의 부역을 바꾸어 그대의 조세로 회복시켜 주면 어떠하겠소?"
장씨가 크게 슬퍼하며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말했다.
그대는 장차 나를 불쌍히 여겨 살게 해 주려는 것입니까? 나의 이 부역의 불행이 내 세금으로 회복하는 불행의 심함만 같지 못합니다. 이전에 내가 이 부역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래 두고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3대가 이 마을에 거주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쌓인 것이(이 마을에 산 지) 60년입니다. 이웃 사람들의 생활은 날로 궁핍해졌고, 그 땅의 소출은 다했으며, 그 집의 수입은 없어져, 울부짖으며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배고픔과 목마름에 못 이겨 쓰러지고 넘어졌습니다. 이전에 우리 할아버지와 더불어 거주하던 사람들의 집 가운데 지금 열에 하나가 없고, 우리 아버지와 더불어 거주하던 사람들의 집 가운데 지금 열에 두셋이 없습니다.
나와 더불어 20년을 거주하던 사람들의 집 가운데 지금 열에 네다섯이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면 이사한 것입니다. 바람을 맞고,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고, 심한 병에 걸려 독기를 내뿜고, 항상 죽은 자들이 서로 포개져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뱀을 잡는 것으로써 홀로 살아남았습니다.
횡포한 관리가 우리 마을에 와서 동서로 시끄럽게 떠들고 다니고 남북으로 마구 들이닥쳐 부수고 다니는데, 왁자지껄 소란스러움에 닭이나 개조차도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단지를 보고 나의 뱀이 여전히 살아 있으면 마음을 놓고 눕습니다.
삼가 뱀을 먹이고, 때가 되면 바칩니다. 물러 나와서는 그 땅에서 난 것을 달게 먹고 나의 수명을 다합니다. 대략 일 년에 죽음을 무릅쓰는 것이 두 차례, 그 나머지는 마음을 놓고 즐깁니다. 어찌 우리 이웃의 매일같이 이와 같음이 있는 것(매일 고통을 당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지금 비록 이에 죽어도(뱀에 물려 죽어도) 내 이웃의 죽음에 비해 이후가 될 것이니 어찌 또한 감히 고통스럽다고 하겠습니까?
나는 들을수록 더욱 슬퍼졌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사납다고 하셨는데, 나는 일찍이 이에 의문을 가졌었지만 지금 장씨의 일을 보니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아! 세금을 부과하고 가혹하게 거두어 들이는 것의 폐해가 이 뱀이란 것보다 심하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므로 포사자설(捕蛇者說)을 써 민정을 시찰하는 사람이 알기를 기다린다.
대풍은 중풍을 말한다. 연원은 수족이 구부러지는 병을 말한다. 누려는 부스럼병이나 등창을 말한다. 삼충은 삼시충(三尸蟲)으로, 사람의 몸 안에 있다는 세 마리의 벌레를 말하는데, 이것이 경신(庚申)날 밤에 나와서 그 사람의 잘못을 몰래 천제(天帝)에게 알린다고 한다. 혹은 기생충을 말하기도 한다.
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자신이 젊은 시절 암행어사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보고 겪은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한시를 여러 편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중 유명한 애절양(哀絶陽)은 읽는 이로 하여금 참혹한 당시 백성들의 생활고를 뼈저리게 느끼고 국민의 공복(公僕)이어야 할 관리들이 어떠한 마음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를 강하게 인식하게 합니다.
뱃속의 아이나 죽은 사람에게 까지, 심지어 기르는 개에게 까지 세금을 물리는 당시의 혹정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 원인이 자식을 많이 낳게 만든 자신의 성기에 있다고 개탄하면서 절양(絶陽:생식기를 자름)한 남편의 성기를 부여잡고 울부짖는 아내의 절규를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하겠습니까?
시대는 변했지만 우리들도 다산의 고뇌에 찬 탄식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관리들의 양식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희망과 꿈을 지닐 수 있는 사회, 건전한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어려운 이 시대를 극복하는 지혜가 아닐까
가정맹어호가 옛말인가 하였더니!
암행어사 조영복이 전라우도 함평 땅에서 겪은 이야기이다. 어사 조영복은 가난한 백성들을 강제 수탈한 함평현감 이단장의 비리를 밝혀낸다.
1717년(숙종 43) 봄.
전라우도 암행어사 조영복은 함평만(咸平灣) 갯가에서 십리쯤 떨어진 식의동(食衣洞)이라는 마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식의동(食衣洞)은, 우리말로 옷밥골이라 불리는 이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골짜기였지만, 물 좋고 땅이 기름져 흉년이 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주민들이 옷과 밥을 걱정하지 않는 동네라 하여 옷밥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사실, 식의동뿐 아니라 함평 땅 전체가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 되는 편이었다. 특히, 쌀맛이 뛰어나고 질이 좋아 함평 쌀밥만 먹은 사람은 상여도 더 무겁더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동북 방향으로 노승산, 북쪽으로 군유산에 가로막혀, 땅 전체가 큰 굴곡 없이 완만한 평야로 이루어진 함평에서는 드물게 빼어난 경관을 갖춘 이 옷밥골에서 암행어사 조영복의 최대 관심사는 주민들이 진정 옷과 밥을 걱정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옷밥골재 주막에서 만난 사람들의 생각은 뜻밖에도 냉소적이었다. "옷과 밥을 걱정하지 않느냐고요? 허허, 그것도 다 옛날 얘기지요" "쯧쯧! 이곳도 흉년이 든 게로군요"
"흉년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남도 땅 전체가 흉년에 허덕여도 이 마을 사람들이 끼니 걱정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옷밥골이 왜 옷밥골이겠습니까?" "아니, 그러면?"
"지난해 극심한 흉년으로 굶주리고 유랑하는 백성들이 많이 생기니, 관아에서는 진휼곡을 조달한답시고 각 면에 부유한 백성을 뽑아 보고하게 하였지요. 아시다시피 이 옷밥골은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돼 어지간한 흉년에도 끼니 걱정을 안 한다 뿐이지, 땅덩이가 좁으니 큰 부자가 있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렇겠지요."
"헌데 면임(면의 일을 맡아 보는 임원)들이 기껏 부민(富民)을 뽑아 올리면 인원이 작다고 연이어 퇴짜를 놓고, 급기야 요민(饒民:넉넉한 백성)이라는 기이한 명칭까지 만들어 내서 목록을 작성하게 하니, 결국에는 땅 한 뙈기 없는 소농, 빈농까지 거기에 포함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이 옷밥골은 별난 이름값을 하느라고 마을 사람 중에 부민, 요민의 목록에 오르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허, 저런!"
"관아에서는 부민, 요민으로 뽑힌 이들에게 강제로 곡식을 내게 했는데, 부민에게는 적어도 5~6섬, 많으면 60섬까지 받아 냈고, 요민들에게는 각각 백미(白米) 1섬씩을 받아냈습니다. 안 그래도 각종 세금에 허리가 휘는 가난한 백성들이 무슨 수로 그 수량을 채우겠습니까? 각종 세간이며 그릇을 팔고, 애지중지하던 소를 팔고, 심지어 전답을 팔아 간신히 곡식을 납부한 이도 있으니, 그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허면, 그렇게 백성들을 채근하여 모은 곡식으로 진휼은 잘 하고 있습니까?"
"웬걸요? 진휼곡의 수효를 병영(兵營)에 보고할 적에 반을 뚝 잘라 보고하고는, 그 말이 새어나가자 관청의 창고가 텅 비었으니 남은 반절의 곡식으로 입본(立本:보관 중인 돈과 곡식을 대출, 운용하였다가 원래의 것을 다시 채워놓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핑계를 대더군요. 뭐, 그것도 좋다 이겁니다. 기민(飢民)이라도 공평하게 선정하여 널리 혜택을 입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헌데, 백성들이 살점을 배어내듯 힘들게 모아 준 그 곡물이 허비될세라 기민을 한 사람이라도 더 줄이려고 안달을 하고, 그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량마저 깎고 또 깎으니 실로 통분할 노릇이지요. 대체 그게 뉘 곡식인데 저희들 마음대로 줄여라 마라 한단 말입니까?"
듣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이 흥분하여 앞으로 나섰다. "호적에 없는 자들을 진휼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도 문젭니다. 아니 사람이 가축도 아니고 직업과 사세에 따라 다른 고을에 가서 살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친척이 근동에서 과수원을 하여 수박이나 복숭아 수확철마다 잠깐씩 와서 일을 돕다가, 이태 전부터 아예 가족을 데리고 이곳에 정착하였습죠. 헌데, 호적에 없는 무적자라 하여 이번 진휼 대상에서 빼버렸다 합니다. 무적자들은 그럼 굶어죽으란 말입니까?"
주막 안은 성난 사내들이 내뿜는 열기로 금세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하여간에 그 놈들은 사람도 아닙니다. 아까 수박 얘기나 나와서 말입니다만, 저희 집도 수박을 좀 하는데, 해마다 여름이면 으레 관아의 서과색(西果色:수박 수납 담당자)이 나와설랑은 관청에서 쓸 수박을 거둬가지 않습니까? 지난 여름에도 서과색이 나왔는데, 얼굴에 기미가 시커멓게 낀 게 표정이 심상치가 않더란 말입니다. 알고 보니, 원님이 휴가를 얻어 집에 갈 적마다 그 본가(本家)로 수박을 보냈는데, 6일이나 걸리는 거리라 이 수박을 운반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더랍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공금에서 수박값으로 얼마를 떼어 인편에 보내고는, 구멍 난 공금을 메우기 위해 자기 밭 몇 마지기를 팔았답니다. 그런 수박을 받아먹는 원님이나, 밭팔아 수박값을 대는 위인이나 저울로 재면 똑같은 놈들입니다. 본전 생각 날 때마다 백성들 등껍질을 벗겨낼 테니까요."
"원님이 받아 챙긴 게 어디 수박뿐이라던가? 지난해 겨울에는 관청에 소속된 장인들에게 받은 포목 수십 필을 네 차례에 걸쳐 본댁으로 실어갔다지 않은가? 한 고을의 수령이라는 자가 진휼한다는 명분으로 가난한 백성들에게 강제로 쌀과 벼를 뜯어냈으면, 포목 한 필이라도 진휼에 보탤 생각은 않고 세금으로 받은 포목을 제 집으로 실어갔다니, 이런 원통한 일이 있겠는가?"
"그뿐인 줄 아나? 지난해 아전들이 전세(田稅)를 정해진 수량보다 훨씬 많이 받아내었는데, 그걸 알고도 오히려 기뻐하며 남은 쌀과 콩의 반을 도서원(都書員) 이하 담당 색리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도서원에게는 그 공을 치하하는 상까지 주었다네. 또, 그 나머지 반절은 서울로 싣고 가서 요로 요로에 뇌물로 집어주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두루 인심을 썼다네."
"지난해 세금을 내야 할 토지를 조사하고, 8결 단위로 세금을 묶어 낸다고 그 대표를 뽑을 때도 말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토지를 신고할 기간을 고작 5일밖에 안 주고는, 손불면처럼 멀리 떨어진 마을의 백성들이 미처 신고하기도 전에 관아로 불러들여 얼렁뚱땅 토지를 조사하고 대표를 뽑으니, 그 가운데서 서원(書員: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각 관아에 배속되어 주로 행정실무를 담당한 이속吏屬)들의 농간이 얼마나 자심했겠습니까? 아차 사이에 재해 입은 전답이 멀쩡한 토지로 바뀌고, 멀쩡한 전답이 재해 입은 전답으로 뒤바뀌는데, 우리 원님은 그걸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으니 아마도 두 눈 뜬 봉사이거나 서원들과 한통속으로 해먹었거나 둘 중의 하나이겠지요." "에잇, 퉤! 더럽다, 더럽다 내 그렇게 더러운 소리는 처음일세."
사람들이 다투어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영복은 그만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함평 현감 이단장(李端章)은 숙종 35년 무렵부터 설서(說書:조선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직.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를 가르친 정7품관이다), 정언(正言:조선시대 봉박과 간쟁을 담당한 관직)을 지내다가 중앙무대에서 밀려나 함평 현감이 된 자로, 정파적으로는 노론인 조영복과는 정반대편에 서 있는 소론 일파 중의 하나였다.
조영복은 암행어사로 활동하는 이 기간만큼은 정파적 입장과 선입견에서 멀찍이 떠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조영복 자신이 김천 군수, 예천 군수를 지낸 바 있는 만큼, 지방 구실살이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과 입장의 차이를 십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함평 현감 이단장의 부패상은 차마 눈뜨고는 보아 넘기기 어려운 것이었다. 40대의 혈기방장한 조영복의 눈에 비친 이단장은 50대의 노회하고 부패한 정객에 불과했다.
그때였다. 주막 봉당에 앉아 국밥을 먹고 있던 한 선비가 옷자락을 털고 일어나며 한마디 던졌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가 옛말인가 하였더니, 참으로 함평 고을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구려!"
술청에 앉아 와글와글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사뭇 입을 다물며 사라지는 그 선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조영복만이 그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수원 일을 한다는 자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영복에게 물었다. "저 양반이 하는 소리가 무슨 소립니까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말입니다."
조영복은 술청에 앉은 사람들에게 가정맹어호란 말에 얽힌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 중국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공자(孔子)가 태산(泰山)을 지나는데 한 여인이 무덤 앞에서 슬피 울고 있더랍니다. 공자는 가까이 다가가 그 사연을 물었지요. 그 여인은 '여기는 매우 무서운 곳입니다. 일찍이 시아버님과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갔고 이번에는 자식마저 호랑이에게 죽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자가 '그러면 그대는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느냐?'고 되물었지요. 그러자, 여인은 '여기가 무섭기는 하나 가혹한 정치에 시달리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깨우쳤다고 합니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니라." "아하!"
주막의 사내들은 조영복이 들려준 이야기에 수긍이 가는지 저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라! 탐관오리가 범보다 더 무섭다는 얘기구먼. 그렇고 말고. 여태 나는 양반님네들이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했더니, 뼈 있는 소리네 그려." "아, 맞는 말이야. 정든 집 버리고 고향 떠나 화전 일구고 사는 사람들 있지 않은가! 에휴, 남 말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딱 그 심정이구만. 확 산에나 들어가 버릴까?"
"아서! 자네가 산에 들어가면 호랑이가 도망칠 걸세." "이 사람이, 호랑이가 왜 날보고 도망치나?" "그놈의 발꼬랑내를 누가 좋다고 맡고 있겠나?" "하하하!"
함평의 민심은 이미 끓어 넘치는 분노의 도가니였다. 면밀한 정보 취합을 위해 이삼일을 더 소요한 뒤, 조영복은 함평 관아에 출도했다. 현감 이단장은 개인적인 사유로 얼마간의 말미를 얻어 집에 돌아간 뒤였다.
진휼과 관련된 주요 장부까지 가지고 가버려 남은 진휼곡을 대체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행방이 묘연하였다. 조영복은 기산관(企山館)이라 불리는 객사에 들어 며칠 동안 각종 문서와 장부, 그리고 창고에 적재된 곡식과 기물의 수량을 꼼꼼히 대조하였다.
문서의 앞뒤가 맞지 않고, 문서의 수치와 창고에 있는 물건의 수량이 맞지 않으면 그 즉시 해당 아전이 불려와 심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현감과 아전들의 불법 수탈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졌다. 생각지도 못한 비리가 드러날 때마다 조영복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한 고을의 수령의 비리와 아전의 농간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었다.
석 달간의 임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 조영복은 임금께 함평 현감(咸平縣監) 이단장(李端章)의 학정(虐政)을 낱낱이 고하였고, 그의 서계를 검토한 숙종은 곧 이단장을 파직하였다.
그러나 이단장의 정치 인생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숙종이 서거한 뒤 경종 연간에 다시 복권하였으며, 조영복과는 정 반대편에서 노론과 소론의 역관계에 따라 영욕(榮辱)이 교차하는 삶을 살았다. 영조 3년 5월 승지에 오른 이단장은 결국 노론의 대반격에 밀려, 7월 5일 101인 파견사건을 끝으로 정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이 성어는 가혹한 정치의 폐해나 공직자의 양심까지도 버린 부정부패를 비유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예기(禮記) 단궁하편(檀弓下篇)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中國) 춘추시대(春秋時代) 말엽, 나라마다 기강이 어지러워져 하극상(下剋上)하는 자들이 많았다. 노(魯)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부(大夫)벼슬을 하는 계손자(季孫子) 같은 자는 백성(百姓)들에게서 세금(稅金)을 가혹(苛酷)하게 거두어들여 엄청난 부(富)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그 나라 군주(君主)보다 부(富)가 많았다.
하루는 공자(孔子)가 제자들과 함께 태산(泰山)의 어느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데 갑자기 슬피 우는 한 부인의 소리가 들렸다. 공자는 수레에 몸을 기댄 채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제자인 자로(子路)에게 명하여 부인이 울고 있는 이유를 알아오게 하였다.
자로가 가까이 가보니 소복을 한, 한 부인이 이제 막 조성한 듯한 무덤 앞에서 매우 슬피 울고 있었다. 자로가 그 부인에게 묻기를, "부인께서 마치 슬픈 일을 거듭 당하신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 부인은 "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몇 년 전에 저의 시아버님께서 호랑이에게 화를 당했는데 작년에는 남편이, 그리고 이번에는 자식까지 호랑이에게 잡혀 먹혔답니다."
자로가 공자에게 보고하니 공자가 가까이 와서 부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서운 곳에서 왜 다른 곳으로 이사(移徙) 가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부인은 "그 이유는 그래도 이곳에 살고 있으면 무거운 세금(稅金)을 내거나 못된 벼슬아치에게 재물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지요."
공자는 이 말을 듣고 깊이 느끼는 바가 있어 제자(弟子)들에게 이렇게 일깨웠다. "너희들도 가슴에 잘 새겨두어라. 가혹(苛酷)한 정치(政治)는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보다 더욱 무섭다는 것을 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당시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시(詩) 9편을 지었는데 그 중 애절양(哀絶陽)이란 시(詩)는 가히 그 시대를 잘 조명했음을 알 수 있다.
애절양(哀絶陽) / 정약용(丁若鏞)
(양근 절단을 슬퍼하여)
蘆田少婦哭聲長, 哭向縣門號穹蒼.
갈밭마을 젊은 아낙 곡소리 길어라, 관아 문앞에서 곡하며 푸른 하늘 향해 호소하네.
夫征不復尙可有, 自古未聞男絶陽.
지아비가 출정하여 돌아오지 못할 수는 있어도, 자고로 사내가 자기 양근 자른 것은 듣지 못했네.
舅喪已縞兒未澡, 三代名簽在軍保.
시아버지 삼년상 후 흰옷 입었고 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거늘, 삼대의 이름 찌가 군적에 보인으로 올라 있어,
薄言往愬虎守閽, 里正咆哮牛去皁.
관가에 호소하려 해도 호랑이 같은 문지기 때문에 못하고, 이정이 으르렁거리며 외양간 소를 군포 대신 끌고 가니,
磨刀入房血滿席, 自恨生兒遭窘厄.
낭군이 칼을 갈아 방에 들어가더니 자리에 피가 흥건하고, 자식 낳아 군색한 꼴 당한 걸 한스러워 했어요.
蠶室淫刑豈有辜, 閩囝去勢良亦慽.
잠실의 음형 당한 사람 어찌 죄가 있었으랴, 민 땅 자식들 거세한 일도 정말 서글퍼라.
生生之理天所予, 乾道成男坤道女.
자식 낳고 또 낳음은 하늘이 부여한 이치요, 건도는 남자를 이루고 곤도는 여자를 이루기에,
騸馬豶豕猶云悲, 況乃生民思繼序.
불깐 말 불깐 돼지도 서럽다 할 것이거늘, 대 이을 생각하는 백성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豪家終歲奏管弦, 粒米寸帛無所捐.
부호들은 일 년 내내 풍악이나 연주하며, 쌀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다니.
均吾赤子何厚薄, 客窓重誦鳲鳩篇.
똑같은 이 백성을 왜 이다지 차별하나, 객지 창 아래서 거듭 시구편을 외노라.
정약용이 1803년(순조 3)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군정(軍政)의 횡포에 저항하여 장정이 자신의 양근을 자른 일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시이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이 시를 지은 동기에 대해 "이 시는 가경(嘉慶) 계해(癸亥, 1803) 가을 내가 강진에서 지은 것이다. 그때 갈밭마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3일 만에 그 아이가 군보(軍保)에 올라 이정(里正)이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 가자 남편이 칼을 뽑아 자신의 남근을 잘라 버리면서 '나는 이 물건 때문에 이런 곤액을 받는구나'고 하였다. 그 아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가지고 관가에 가서 울면서 호소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 버렸다. 내가 이를 듣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7언 20구로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4에 수록되어 있다. '절양(絶陽)'은 남성의 생식기를 자른다는 것이다. 이 시는 이 같은 비극적 사건을 슬퍼하는 작자의 심경을 읊은 것이다.
1~4구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사건인 자신의 양근을 자른 사건과 그것에 목 놓아 우는 아낙의 모습을 그렸다. 5~10구에서는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전말인 죽은 시아버지와 갓 낳은 자식이 군적(軍籍)에 올라 있는 기막힌 현실을 고발하였다.
11~16구에서는 양근을 자른 일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를 다시 객관화시켜 따져 묻고 있다. 소나 돼지가 그런 일을 당해도 측은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런 일을 스스로 행한 슬픔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17~20구에서는 백성들은 세금을 견디다 못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현실에 처해 있다. 그러나 양반 부호들은 오히려 일 년 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한 톨의 세금도 내지 않는 사회적 모순을 다시 고발하고 있다.
당시 군적에 오른 사람은 병역을 대신하여 군포(軍布)를 내게 되는데, 관리들이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이미 죽은 사람과 갓난아이의 이름을 군적에 올려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군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기막힌 현실을 두고 노래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부패한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에 기인하는 참담한 정경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애절양(哀絶陽)은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켜 백성을 사지로 모는 당나라 지배층을 비판하고 군역을 면하기 위해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자른 비극을 '절비옹(折臂翁)'이란 작품을 통해 비판한 현실주의적 시세계를 보여준 백거이(白居易)의 시정신과 맥락이 닿아 있는 시이다.
조선 초기 관리들의 수탈에 못 이겨 매화나무를 쪼개 버리는 현실을 목도하고, 그 참담함 정경을 노래했던 어무적(魚無迹)의 '작매부(斫梅賦)'와 함께 극적인 상황을 포착하여 당시 피지배층이 당하던 질고와 탐학무도한 정치를 고발한 대표적 작품이다.
당시의 관리들은 뱃속의 아이, 죽은 사람, 심지어는 기르는 개에게까지 세금을 물리는 혹정(酷政)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식을 많이 낳아 무거운 세금을 바치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개탄하면서 절양(絶陽; 자식을 많이 낳은 자책으로 자신의 성기를 자르는 행위)한 남편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아내의 절규는 이 시대 정치가 만들어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학정의 시대상을 시로 풍자한 유명한 춘향전의 어사 이몽룡의 시를 보자.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
금 동이에 담긴 맛난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盤嘉肴萬姓膏(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燭漏落時民漏落(촉루낙시민루낙)
초의 눔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드높도다.
조선왕조는 후기 들어 임오군란, 동학혁명 등, 지방수령과 아전들의 지독한 세금 탈취와 가혹한 백성탄압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 받은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 새로운 지도자 등 많은 변화가 이 땅에 뿌리 내렸건만 정치적 변화만은 아직 옛 그대로이다.
아직도 권력을 이용하여 아랫사람을 무시하고 가혹하게 대하는 이른바 '갑질'과 '반목(反目)'만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위정자들은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요즈음은 조선시대 가혹한 세금보다 더한 '세금폭탄' 시대라고 한다. 말로는 항상 '국민을 위하여'라고 하지만 실제는 권력을 즐기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정치행태가 안타까울 뿐이고, 그 속에서 고통 받는 백성들은 원망할 여력조차 잃어버린 세월이 오래되어 이제는 포기와 절망과 한숨으로 살아가는 듯하다.
국민들이여! 엷은 단물에 현혹되어 중요한 결단을 잘못 행사하면 고통 속의 신음은 계속될 것이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는 맹수보다 무섭다.
오늘날까지 칭송받는 공자(孔子)는 춘추시대 말엽 노나라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공자가 나이 들어 제자들을 데리고 천하를 유람하며 학문을 유세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제자들과 태산(泰山) 기슭을 지나고 있는데 공자의 귀에 한 여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여긴 공자의 일행은 발길을 멈추고 울음이 나는 곳을 살폈다. 길가 풀숲에 무덤이 셋이 있는데 그 앞에서 한 여인이 통곡하고 있었다. 이를 본 공자는 자로(子路)에게 여인이 우는 사연을 알아보라고 했다.
자로가 그 여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부인, 무슨 일로 이토록 슬프게 우시는 겁니까?”
부인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더니 대답했다. “몇 년 전에는 저의 시아버님이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는데 작년에는 남편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이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습니다. 이 세 무덤은 바로 그 세 사람의 무덤이랍니다.”
이에 지로가 여인에게 다시 말했다. “그런데 어찌 이곳을 떠나지 않으시는지요?” “이곳은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당하거나 못된 관리들에게 재물을 빼앗길 일은 없습니다.”
자로가 돌아가 공자에게 이 사실을 소상히 전했다. 자로의 이야기를 듣고 난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잘 알아두거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也).”
孔子 過泰山 側有婦人 哭於墓者 而哀夫子式而聽之 使子路問之 日子之哭也 壹似重有憂者 而日然昔者 吾舅死於虎 吳夫又死焉 今吾子又死焉 夫子曰 何爲不去也 曰 無苛政夫子曰 小子識之 苛政猛於虎也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가혹한 세금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말해준다. 호랑이는 피할 수도 있지만, 가렴주구의 가혹한 세금은 피할 길도 없다. 그러기에 차라리 가혹한 세금이 있는 마을에 사는 것보다, 호랑이가 무섭지만, 첩첩산중에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가혹한 세금은 가혹한 정치가 원인이다.
춘추시대 말엽 공자의 고국인 노나라의 정치는 엉망이었다. 대부(大夫) 계손자(季孫子)가 실권을 장악하여 왕을 좌지우지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정 농단이었다. 계손자는 권력을 이용하여 재물을 모으고 왕을 넘어서는 행사를 하였고 향락과 사치를 일삼았다. 그러다 보니 계손자는 많은 재물이 필요했고 그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렸다. 그러니 조정과 지방의 관리들도 자기들 몫을 덧붙여 세금을 부과하는 바람에 백성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그래서 공자는 계손자(季孫子)를 예를 무너뜨린 인물로 평가하며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구제하려면 계손자(季孫子)가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계손자의 폐해가 첩첩산중의 가난한 백성에게까지 미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었다.
삶을 가혹하게 하는 것은 직접 가하는 채찍이나 무력만이 아니다. 간접적으로 가하는 채찍과 무력은 더 은근하게 삶을 가혹하게 한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가혹한 세금이다. 그것은 생존 자체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여 소출을 내어도 대부분을 세금으로 빼앗긴다면 삶은 비참해진다. 옛날 수많은 민란은 과다한 세금과 탐관오리들의 가혹한 수탈이 원인이기도 했다. 가혹한 세금은 현대에서도 국민의 불만을 자극하는 요인이 된다. 그런데 삶을 어렵게 하는 것은 가혹한 세금만 아니다. 지나치게 높은 물가 또한 서민의 삶을 가혹하게 한다. 수입은 고정되어 있는데 물가가 높으면 살기는 어려워진다. 특히 식료품에 대한 높은 물가는 생존을 위협한다.
코로나 19가 덮치자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한때 슈퍼마켓에서 사재기 경쟁이 발생하였고 가판대에 휴지와 식품 등 생필품이 동난 적이 있었다. 코로나로 봉쇄된 중국의 도시에서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 휴대전화나 다른 귀중품을 식품 등 생필품과 교환하기도 했다. 식료품 등 생필품은 도덕과 귀중품 등을 우선한다. 먹고 살 만할 때는 도덕과 귀중품이 통하지만 먹고 살기 어려울 때는 그 도덕성과 귀중품도 헐값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그 생필품을 구하기 어렵게 하는 것은 생산이나 유통 등에 의한 공급 부족도 있지만 치솟는 물가도 있다. 물가가 치솟으면 특히 힘들어지는 것은 서민이다. 그래서 치솟는 물가는 서민에게 세금 못지않게 삶을 옥죄는 것이 된다.
며칠 전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옆좌석에서 식사하는 세 여인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다는 것은 도의적으로는 어긋나는 일이라지만, 식당에서 식사 중 옆 좌석에서 거리낌 없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이야기들은 그냥 흘려 버릴 때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세 여인의 나이는 줄잡아 70은 되어 보였다. 그들은 연금이 반 토막이 났다는 것이었다. 다른데 특별히 돈을 쓰는 데도 없는데, 전보다 지갑이 비어가는데 이유를 보니 시장 물가가 너무 올라서 그렇다고 하면서 적어도 연금의 30% 이상은 도둑질당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들을 들으며 ‘연금 생활자도 저런데 서민의 삶은 오죽하랴. 지나친 물가는 세금 못지않게 서민의 삶을 옥죄는 준조세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가혹한 세금과 높은 물가는 말할 것도 없이 서민의 삶을 무너뜨린다. 그런데 세금이 가혹해지고 물가가 높아지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정치적 불안이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불안이 닥치면 국민의 삶을 돌보는 것은 팽개치고 정쟁과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된다. 통치자들은 국가재정을 구실삼아 정권 유지를 위한 곳간을 채우기 위해 가혹하게 세금을 부과한다. 관리들은 부정축재를 일삼고 서민을 수탈한다. 그런 과정에서 사장 질서는 무너지고 물가는 춤추게 된다. 우리나라 동학혁명 역시 가혹한 세금과 수탈이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선의 망국을 가져온 것도 모두 정치적 불안과 관리들의 수탈이 부른 결과였다.
둘째, 잘못된 정책이다. 이를테면 옛날 어떤 왕들은 엄청난 국책 사업을 벌이는 경우가 있었다. 그 국책 사업을 진행하다 보면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고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다. 그 세금은 굳이 돈만 아니라 노역도 포함되었다. 국가사업에 나가 노역을 하다 보니 생업에 종사할 수 없어 가족들의 생계는 묘연해진다. 그뿐 아니다. 과도한 국책 사업에 들어가는 돈과 물자로 인해 시장 질서가 무너진다. 그러면 서민의 삶은 더욱 어려워진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은 실권을 장악하자 왕실의 권위를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건립한 경복궁(임진왜란 때 선조가 백성과 한양을 버리고 피난하자 분노한 백성들이 불을 질러 소실됨)을 재건하고자 백성들에게 막대한 기부금을 부과하고 기부금 액수에 따라 공로를 인정하고 벼슬과 상을 내리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이로 인해 매관매직이 더욱 기승을 부렸고 매관매직한 관리들의 수탈은 더욱 성행하여 백성의 삶은 더욱 처참해졌다. 대원군은 그래도 재정이 모자라자 ‘당백전’이란 돈을 발행하여 나라의 재정 질서를 파괴하였다. 이 때문에 서민의 삶은 처참해지고 관리들의 수탈은 점점 늘어갔다. 우린 지금 복원된 경복궁을 관람하면서 그 아름다움에 취하지만 말고 경복궁에 얽힌 역사의 아픔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만리장성에 올라 그 웅장함에 경탄하지만 우린 거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이 스며 있는지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셋째, 지도자의 편향된 정치철학과 고집의 정치 때문이기도 하다. 지도자의 편향된 정치철학과 고집의 정치는 정치적 불안과 잘못된 업적 주의에 기인한다. 그것은 독선과 독재의 길을 걷게도 한다.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것이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자행한 일들이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의 소득주도 성장도 편향된 정치철학과 고집 정치의 한 범주에 해당할 수 있다. 한 국가의 안정과 성장은 산업이 육성되어야 일자리가 늘어나며 소득이 늘어나고 공급이 원활해야 물가도 안정되는데 소득주도 성장은 기업 규제와 분배에 중점을 두다 보니 조세 부담은 늘고 기업 활동은 위축되고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국민 세금으로 해결하는 공공일자리만 늘렸다. 복지 확대를 이유로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였고 잘못된 주택 정책은 26차례 이상의 대책을 발표하였으나 무용지물이 되고 서울을 중심으로 집값을 폭등시켰다. 온갖 비판이 있었음에도 정책을 수정하지 않고 고집하였으며, 그 집값을 잡겠다고 더 강력한 조세정책을 썼다. 세금으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는 있다지만, 세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만큼 어리석은 정책이 없는데도 그것을 끝까지 고집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중 경제론을 부르짖었으나 모순을 수정할 줄 알았는데 문재인 정부는 끝까지 자기 정책에 집착했다. 터키의 고물가로 인한 국민의 반감과 시위도 정치적 불안에 의한 편향된 정치철학과 고집의 정치에서 기인한 결과라고 보여 진다.
위와 같은 정치적 불안과 잘못된 정책, 편향된 정치철학과 고집의 정치 등은 나라의 정치, 경제, 국방 등 모든 질서를 흔들고 물가 불안을 가져온다. 물가 불안은 고물가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고물가는 결국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고물가가 닥치면 경기 둔화와 고용불안을 가져오기 쉽다. 그러면 가장 어려워지는 것은 서민의 삶이다. 가장 위협받는 것이 밥상 불안이다. 따라서 높은 물가는 가혹한 세금처럼 서민의 삶을 위협하는 준조세가 된다.
고물가의 지속은 나라를 망하게 하거나 독재정권을 부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엄청난 고물가에 시달리던 독일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불러들였다. 당시 독일 국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나치를 지지하였고 90%가 넘는 지지율의 나치는 엄청난 범죄의 정치를 자행하였다. 고물가는 가혹한 세금 못지않게 국민의 삶을 위협하고 결국 독재나 파쇼, 독선의 정권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세금(직접세뿐 아니라 건강보험료, 종합소득세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이 계속 올랐다. 거기다가 물가도 계속 오르고 있다. 온 세계가 인플레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지난달 전년 동월 대비 물가상승률이 미국에선 8.5%, 영국에선 7%를 기록했다. 50년 전 수준이란다. 우리 나라의 경우 한국소비자원 가격정보에 의하면, 2022년 4월 서울지역 냉면 1인분 가격이 10192원이었다. 이는 작년(9,308원)대비 9.5% 인상이었다. 아이들 과자값도 10% 이상 올랐다고 한다. 금리도 계속 오르고 밥상 물가도 연일 오르고 있다. 국밥 한그릇에 10,000원이 넘은 지가 오래되었다고 난리다. 서민의 삶은 점점 팍팍해진다. 높은 물가도 높은 세금 못지않게 국민의 삶을 옥죄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정치적 불안에서 기인한다. 정치적 불안은 도가 넘치는 정쟁과 편향된 정치철학과 고집의 정치, 그리고 독점적 권력에서 탄생한다. 4대 60년간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나 고려의 무신정권 같은 특정 세력의 독점적 권력 지배는 나라를 형편없이 만들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정쟁과 특정 정치 세력의 독점적인 권력 지배는 정치적 불안과 권력적 부패와 독선을 가져와 국민의 삶을 어렵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고용의 불안과 물가 불안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경기 불안과 고용불안, 높은 물가, 높은 금리 등은 세금 못지않게 무서운 국민의 삶을 옥죄는 것이 된다. 그 모든 열쇠는 정치가 쥐고 있다.
공자가 말하는 苛政猛於虎(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란 말에서 가혹한 정치는 가혹한 세금을 한 예로 들었지만, 세금만 아니다. 민생을 최우선에 두지 않는 모든 권력과 정쟁과 정치 불안, 잘못된 정치와 정책, 정치적 고집 등이 가져온 물가 불안, 국방 불안 등을 통칭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정치인이 권력보다 민생을 우선하여 마음을 합하고 지혜를 모은다면 어떤 난관도 헤져나갈 수 있다.
이제 윤석열 새 정부가 들어섰다. 민생을 최우선에 둔다니 두고 볼 일이다. 그것이 구호가 아니라 진정으로 민생을 우선하려면 정치적 화해와 국민통합을 이루고 산업을 육성하여 일자리를 늘리고 소득을 증대하며 세금을 낮추고 물가를 바로 잡는 일이다. 나아가 사회질서를 바로 잡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야 할 일이다. 국민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모든 정치는 가혹한 정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국민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호랑이보다 무서운 가혹한 정치이다. 위정자들은 공자가 말한 苛政猛於虎(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길 바란다.
▶️ 苛(가혹할 가)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풀, 풀의 싹)部와 음을 나타내는 可(가)가 합하여 '독하다', '까다롭다'의 뜻을 가졌다. 그래서 苛(가)는 ①가혹하다(苛酷--), 모질다 ②까다롭다 ③번거롭다 ④꾸짖다, 책망하다(責望--) ⑤가렵다 ⑥앓다 ⑦위중하다(危重--) ⑧어지럽히다 ⑨서두르다 ⑩병(病) ⑪옴(옴진드기가 기생하여 일으키는 전염 피부병) ⑫풀,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참혹할 참(慘), 사나울 포(暴), 독 독(毒), 심할 심(甚), 모질 학(虐), 심할 혹(酷) 등이다. 용례로는 매우 혹독함을 가혹(苛酷), 조세 등을 가혹하게 징수함을 가렴(苛斂), 가혹하게 학대함을 가학(苛虐), 매우 힘이 드는 일을 가역(苛役), 가혹한 정치를 가정(苛政), 엄격하고 혹독함을 가급(苛急), 가혹한 법령 또는 너무 엄한 법률을 가법(苛法), 매우 중한 병을 가질(苛疾), 가혹한 비평을 가평(苛評), 까다로운 예절을 가례(苛禮), 무자비하고 가혹한 관리를 가리(苛吏), 주로 경기나 전투나 투쟁 따위가 가혹하고도 맹렬함을 가열(苛烈), 매우 모질며 박정함 또는 가혹하고 각박함을 가각(苛刻), 혹독한 재난을 가앙(苛殃), 가혹하게 매긴 세금을 가세(苛稅), 가혹하고 엄격함을 가엄(苛嚴), 가혹하고 부담이 무거움을 가중(苛重), 가혹하게 요구함을 가구(苛求), 몹시 가혹함을 가준(苛峻), 엄하게 금함을 가금(苛禁), 호되게 물음이나 노엽게 물음을 가문(苛問), 성질이 까다롭고 잚을 가세(苛細), 썩 작음을 가소(苛小), 까다로울 만큼 자세히 따져 살핌을 가찰(苛察), 가혹하게 책망함이나 모질게 꾸짖음을 가책(苛責), 가혹하고 사나움을 가폭(苛暴), 가혹한 명령이나 법령을 가령(苛令), 몹시 악랄함을 가랄(苛辣), 매우 모질고 사나움을 가려(苛厲), 자질구레하고 번거로움을 세가(細苛), 법 따위가너무 복잡하고 엄함을 번가(繁苛), 번거롭고 까다로움을 번가(煩苛),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음을 일컫는 말을 가렴주구(苛斂誅求),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 보다 더 사납다는 뜻으로 가혹한 정치의 폐해를 비유하는 말을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하게 억지로 거두어 들이는 여러 가지 세금을 일컫는 말을 가렴잡세(苛斂雜稅) 등에 쓰인다.
▶️ 政(정사 정/칠 정)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등글월 문(攵=攴; 일을 하다, 회초리로 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正(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등글월 문(攵=攴)部는 막대기를 손에 쥐다, 물건을 치는 일을 뜻하고, 등글월문(攵=攴)部가 붙는 한자는 '~하다', '~시키다'의 뜻을 나타낸다. 음(音)을 나타내는 正(정)은 征(정)과 통하여 적을 치는 일, 政(정)은 무력으로 상대방을 지배하는 일, 나중에 正(정)은 바른 일, 政(정)은 부정한 것을 바로 잡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정치는 부정을 바로잡고 정치가는 먼저 몸을 바로 가지면 세상도 자연히 다스려진다고 설명된다. ❷회의문자로 政자는 '다스리다'나 '정사(政事)'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政자는 正(바를 정)자와 攵(칠 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正자는 성(城)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바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正자에 攵자가 결합한 政자는 '바르게 잡는다'라는 의미에서 '다스리다'나 '정사'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政(정)은 ①정사(政事), 나라를 다스리는 일 ②구실(온갖 세납을 통틀어 이르던 말), 조세(租稅) ③법(法), 법규(法規), 정사(政事)를 행하는 규칙(規則) ④부역(負役), 노역(勞役) ⑤벼슬아치의 직무(職務)나 관직(官職) ⑥정사(政事)를 행하는 사람, 임금, 관리(官吏) ⑦가르침 ⑧확실히, 틀림없이, 정말로 ⑨바루다, 부정(不正)을 바로잡다 ⑩치다, 정벌(征伐)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스릴 치(治)이다. 용례로는 국가를 다스리는 기관을 정부(政府),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꾀하는 방법을 정책(政策), 국가의 주권자가 국가 권력을 행사하여 그 영토와 국민을 다스리는 일을 정치(政治), 정치의 국면을 정국(政局), 정치 상으로 의견이 달라 반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정적(政敵), 정치 상의 의견이나 정치에 관한 식견을 정견(政見), 정치 상의 명령 또는 법령을 정령(政令), 정치 상의 사무를 정무(政務), 나라의 정사를 국정(國政), 정치나 사무를 행함을 행정(行政), 헌법에 따라 하는 정치를 헌정(憲政), 백성을 괴롭히는 나쁜 정치를 악정(惡政), 포악한 정치를 폭정(暴政), 가혹한 정치를 가정(苛政), 백성에게 심히 구는 포학한 정치를 학정(虐政), 백성을 잘 다스림 또는 바르고 착하게 다스리는 정치를 선정(善政), 너그럽게 다스리는 정치를 관정(寬政), 둘 이상의 정당 대표들로 조직되는 정부를 연정(聯政), 정치의 방법을 그르침 또는 잘못된 정치를 실정(失政), 나라의 정무를 맡아봄 또는 그 관직이나 사람을 집정(執政), 정치에 참여함을 참정(參政), 두 나라의 정치가 서로 비슷함을 이르는 말을 정여노위(政如魯衛), 정이라는 글자의 본뜻은 나라를 바르게 한다는 것임을 이르는 말을 정자정야(政者正也), 문외한이 정치에 관하여 아는 체하는 사람이 많음을 이르는 말을 정출다문(政出多門), 코 밑에 닥친 일에 관한 정사라는 뜻으로 하루하루를 겨우 먹고 살아가는 일을 일컫는 말을 비하정사(鼻下政事), 저마다 스스로 정치를 한다는 뜻으로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전체와의 조화나 타인과의 협력을 생각하기 어렵게 된다는 말을 각자위정(各自爲政), 여러 가지 정치 상의 폐단을 말끔히 고쳐 새롭게 한다는 말을 서정쇄신(庶政刷新), 새로운 정치를 베풀어 얼마 되지 아니한 때라는 말을 신정지초(新政之初), 남의 나라 안 정치에 관하여 간섭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내정간섭(內政干涉), 대화합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화합하면 이기고 그렇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을 태화위정(太和爲政) 등에 쓰인다.
▶️ 猛(사나울 맹)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개사슴록변(犭=犬; 개)部와 음을 나타내는 孟(맹)으로 이루어졌다. 힘센 개의 뜻이 전(轉)하여 '사납다'는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猛자는 '사납다'나 '용맹스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猛자는 犬(개 견)자와 孟(맏 맹)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孟자는 아이를 대야에 씻기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맏이'나 '우두머리'라는 뜻을 갖고 있다. 猛자는 이렇게 '우두머리'를 뜻하는 孟자에 犬자를 결합한 것으로 '개(犬)들의 우두머리(孟)'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는 굳세고 용맹스러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猛자는 '강하다'나 '엄격하다'와 같은 뜻으로 쓰였었지만, 후에 '사납다'나 '잔혹하다'와 같이 무리를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의 다른 면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래서 猛(맹)은 어떤 명사(名詞) 앞에 쓰이어 아주 맹렬(猛烈)한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 ①사납다 ②굳세고 용맹(勇猛)스럽다 ③건장(健壯)하다 ④날래다 ⑤세차다, 맹렬(猛烈)하다 ⑥굳고 강(強)하다 ⑦엄격(嚴格)하다, 준엄(峻嚴)하다 ⑧잔혹(殘酷)하다 ⑨갑자기 ⑩사나운 개,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기세가 몹시 사납고 세참을 맹렬(猛烈), 육식을 주로 하는 매우 사나운 짐승을 맹수(猛獸), 맹렬한 위세를 맹위(猛威), 사나운 범을 맹호(猛虎), 사나운 개를 맹견(猛犬), 사나운 적을 맹적(猛敵), 심한 독기를 맹독(猛毒), 몹시 세게 때리거나 침을 맹타(猛打), 맹렬하게 부는 바람을 맹풍(猛風), 깊이 반성함을 맹성(猛省), 사납고 세찬 기세를 맹세(猛勢), 매나 독수리들 같이 성질이 사납고 몸이 굳센 날짐승을 맹금(猛禽), 거센 흐름으로 세차게 밀어 닥치는 조수를 맹조(猛潮), 세차게 타오르는 불꽃을 맹염(猛炎), 사납고 굳센 장수를 맹장(猛將), 매우 사나운 기질을 맹기(猛氣), 매우 세차게 나아감을 맹진(猛進), 날래고 사나움을 용맹(勇猛), 몹시 사나움을 흉맹(凶猛), 몹시 사나움을 극맹(劇猛), 매우 굳세고 사나움을 강맹(强猛), 빼어나게 용맹함을 영맹(英猛), 모질고 사나움을 영맹(獰猛), 풀밭에 엎드려 있는 범이란 뜻으로 영웅은 일시적으로는 숨어 있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세상에 드러난다는 말을 맹호복초(猛虎伏草), 사나운 호랑이가 숲속에서 나옴의 뜻으로 용맹하고 성급한 성격의 사람을 일컫는 말을 맹호출림(猛虎出林), 범도 위엄을 잃게 되면 쥐와 같다는 뜻으로 군주도 권위를 잃게 되면 신하에게 제압을 당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맹호위서(猛虎爲鼠), 개가 사나우면 술이 시어진다는 뜻으로 한 나라에 간신배가 있으면 어진 신하가 모이지 않음을 비유한 말을 구맹주산(狗猛酒酸), 위엄이 있으면서도 무섭지 않고 부드러움을 일컫는 말을 위이불맹(威而不猛), 용맹스럽게 힘써 나아감을 일컫는 말을 용맹정진(勇猛精進),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 보다 더 사납다는 뜻으로 가혹한 정치의 폐해를 비유하는 말을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등에 쓰인다.
▶️ 於(어조사 어, 탄식할 오)는 ❶상형문자로 扵(어)의 본자(本字), 于(어)는 간자(簡字)이고, 烏(까마귀 오)의 옛 글자의 약자이다. 까마귀의 모양을 본떠, 음을 빌어 감탄사, 관계, 비교를 나타내는 어조사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於자는 '~에'나 '~에서'와 같은 어조사로 쓰이는 글자이다. 於자는 方(모 방)자와 仒(구결자 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仒자는 한문 문장에 구두점을 찍는 용도로 쓰이는 글자로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게다가 於자는 方자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於자의 금문을 보면 烏(까마귀 오)자에 仒자가 결합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於자는 본래 까마귀가 내는 소리에 빗대어 '아아'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였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는 얼마 쓰이지 않은 채 지금은 다양한 '어조사'로만 쓰이고 있다. 烏자는 해서에서부터 方자로 바뀌었다. 그래서 於(어)는 (1)한문 투의 문장에서 장소를 표시하는 말이 얹히어에서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어조사(~에, ~에서) ②기대다, 의지하다 ③따르다 ④가다 ⑤있다, 존재하다 그리고 ⓐ탄식하다(오) ⓑ아아(감탄사)(오) ⓒ까마귀(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까마귀 오(烏)이다. 용례로는 이제야 또는 여기에 있어라는 어시호(於是乎), 마음속 또는 주로 ∼에 꼴로 쓰이는 어심(於心), 벌써나 어느새는 어언(於焉), 가운데가 되는 정도라는 어중(於中), 바둑판에서 배꼽점을 중심으로 한 부분을 어복(於腹), 거의 중간쯤 되는 데를 일컫는 말을 어중간(於中間), 부인이 예장할 때 머리에 얹는 다리로 만든 커다란 머리를 일컫는 말을 어유미(於由味),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뜻으로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말하기에 따라 사뭇 달라짐을 일컫는 말을 어이아이(於異阿異),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어쨌든을 일컫는 말을 어차어피(於此於彼),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는 동안에를 일컫는 말을 어사지간(於斯之間), 썩 흡족함을 일컫는 말을 어량족의(於良足矣), 자기 분수에 만족함을 일컫는 말을 어분족의(於分足矣), 온갖 일을 일컫는 말을 어천만사(於千萬事), 그때를 한창으로 함을 이르는 말을 어사위성(於斯爲盛), 그것으로 만족함을 일컫는 말을 어사족의(於斯足矣), 알지 못하는 동안에 어느덧을 일컫는 말을 어언지간(於焉之間), 푸른 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은 것을 비유하는 말을 청출어람(靑出於藍),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라는 뜻으로 약한 자가 강한 자들 사이에 끼여 괴로움을 받음을 이르는 말을 간어제초(間於齊楚), 가마솥 속에서 논다는 뜻으로 생명이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이르는 말을 유어부중(游於釜中),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람은 최고의 선에 도달하여 그 상태를 유지함을 이상으로 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지어지선(止於至善), 즐거움은 언제나 걱정하는데서 나온다는 말을 낙생어우(樂生於憂), 뭍에서 배를 민다는 뜻으로 고집으로 무리하게 밀고 나가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추주어륙(推舟於陸), 혀가 칼보다 날카롭다는 뜻으로 논봉의 날카로움을 이르는 말을 설망어검(舌芒於劍), 백성은 신의가 있을 때에 안정된다는 뜻으로 백성은 신의에 의해서만 잘 다스려진다는 말을 민보어신(民保於信), 먼저 곽외부터 시작하라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말한 사람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선시어외(先始於隗), 스스로 목매어 도랑에 익사한다는 뜻으로 개죽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경어구독(經於溝瀆) 등에 쓰인다.
▶️ 虎(범 호)는 ❶상형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갑골문의 호(虎)자는 머리는 위로 향하고 꼬리는 아래로 향하며 몸에는 무늬가 있다. 중국인들은 호랑이의 머리에 왕(王)자가 크게 쓰여 있어서 호랑이가 바로 동물의 왕이라고 생각하였다. ❷상형문자로 虎자는 '호랑이'나 '용맹스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호랑이는 예나 지금이나 용맹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신비의 영물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문자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虎자가 쓰인 글자 대부분은 '용맹함'이나 '두려움'이 반영되어 있다. 갑골문에 나온 虎자를 보면 호랑이의 몸집과 얼룩무늬가 그대로 표현되어있었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획이 변형되면서 지금의 虎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참고로 虎자는 폰트에 따라 다리 부분이 儿자나 几자가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虎(호)는 虍(범호 엄)부수로 ①범, 호랑이 ②용맹스럽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범의 꼬리를 호미(虎尾), 용맹스러운 장수를 호장(虎將), 호랑이와 이리를 호랑(虎狼), 털이 붙은 범의 가죽이라는 호피(虎皮), 범에게 당하는 재앙을 호환(虎患), 범의 위세란 뜻으로 권세 있는 사람의 위력을 호위(虎威), 매우 용맹스러운 병사를 호병(虎兵), 범과 같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 봄을 호시(虎視), 사나운 범을 맹호(猛虎), 큰 호랑이를 대호(大虎), 엎드려 앉은 범을 복호(伏虎), 다른 산에서 온 호랑이를 객호(客虎), 용맹스럽고 날래다는 비유를 비호(飛虎), 소금처럼 흰 눈으로 만든 호랑이를 염호(鹽虎), 범이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도 죽은 뒤에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말을 호사유피(虎死留皮), 범이 먹이를 노린다는 뜻으로 기회를 노리며 형세를 살핌을 비유하는 말을 호시탐탐(虎視眈眈), 용이 도사리고 범이 웅크리고 앉았다는 뜻으로 웅장한 산세를 이르는 말을 호거용반(虎踞龍盤), 범과 용이 맞잡고 친다는 뜻으로 영웅끼리 다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호척용나(虎擲龍拏), 범에게 고기 달라기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어림도 없는 일을 하려고 함을 이르는 말을 호전걸육(虎前乞肉), 구사 일생으로 살아 남은 목숨을 일컫는 말을 호구여생(虎口餘生), 잡았던 범의 꼬리를 놓기가 어렵다는 뜻에서 위험성이 있는 일을 비롯한 바에 그대로 나가기도 어렵고 그만두기도 어려움을 가리키는 말을 호미난방(虎尾難放), 범의 꼬리와 봄에 어는 얼음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험한 지경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호미춘빙(虎尾春氷),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의 새끼를 잡는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지 큰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큰 수확을 얻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호혈호자(虎穴虎子), 호랑이같이 예리하고 무섭게 사물을 보고 소같이 신중하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함을 이르는 말을 호시우보(虎視牛步), 매우 위험한 참언이라는 뜻으로 남을 궁지에 몰아넣는 고자질이나 헐뜯는 말을 이르는 말을 호구참언(虎口讒言),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는 뜻으로 비슷한 상대끼리 맹렬히 다투는 것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용양호박(龍攘虎搏)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