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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2
#주기도문 #용서
12 우리가 우리에게 罪 지은 者를 赦하여 준 것 같이 우리 罪를 赦하여 주시옵고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et dimitte nobis debita nostra, sicut et nos dimittimus debitoribus nostris.
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ήκα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주님께서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한 것으로 우리 죄가 주님께 용서를 받는 조건인 것처럼 기도를 가르쳐주신 이유는, 정말로 그래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죄 용서가 어떤 것인지를 더욱 깊게 되새기게 하시려는 반어법적인 표현인 것이다. 본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영원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죽기까지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을 흔쾌히 기꺼이 용서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용서 행위를 조건으로 삼듯이 주님께 죄 용서를 간구하게 될 때 우리는 주님 앞에 더욱 민망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하고 내가 상대에게 지은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은 결국 감정과 자존심의 문제여서 아름다운 음녀의 성적인 유혹을 참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불가능에 가까운 행위다. 상대가 나에게 용서를 구할때는 그동안 내가 받았던 피해와 괴로움의 대가를 생각하게 되고, 내가 상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때에는 내가 그렇게까지 상대에게 잘못한 것인가 하는 마음이거나 내 자존심을 구기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설령 여러가지 상황과 주변의 시선 등으로 인해서 내키지는 않더라도 표면적으로라도 상대를 용서한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분노와 손해 감정이 남아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 상대에게 용서를 구한다 하더라도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존심을 구겼다는 수치심과 이정도면 할만큼 했다는 식으로 당당해진다. 그래서 용서를 하는 것이나 용서를 구하는 것이나 나 자신만의 능력으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고 오직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상대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억지로나 강압적으로나 마지못해서 어쩔수없이 표면적으로라도 용서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약간의 질고를 통해서 마땅히 해야 할 용서를 생각나게 하기도 하시고, 때로는 오랫동안 묵은 마음의 앙금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눈녹듯이 풀어주시기도 하신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으로 상대에게 죄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나의 행위가 상대에게 참으로 해롭고 괴로움을 끼치는 것이었음을 마음 깊이 느끼게 하고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도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셔서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놓고 어떻게든 용서를 구할 방법을 찾게 하시는 것이다.
탁월한 용서의 모범을 보이는 성경의 인물로는 야곱의 형 에서와, 음녀 고멜의 남편인 선지자 호세아를 들 수 있다. 에서는 한그릇 음식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망령된 짓과 하나님께서 그를 미워하셨다고 하신 말씀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자라는 취급을 당하지만, 그가 야곱에게 보인 용서와 야곱을 위해 수십년간 일군 자신의 삶의 터전을 흔쾌히 내어주고 떠난 배려와 호의를 봤을 때 그를 과연 구원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자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될 정도이다. 에서가 야곱을 용서한 것을 전날 야곱이 예수님과 밤새 씨름한 것에 대한 갑작스러운 응답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그래야만 에서가 구원받지 못한 버림받은 자라는 주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에서가 믿지 않는 자로서 급작스럽게 보복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했다가 꿈에서 주님께 혼이 난 바로나 아비멜렉, 그리고 도피한 야곱을 추격하다가 꿈에서 주님께 책망을 받은 라반처럼 진정성 없는 형식적인 용서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서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서 마음속 깊이 오래전부터 이미 야곱을 진정으로 용서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데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서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의 용서인 것이다. 만약에 에서를 버림받은 자라고 정죄한다면 그 신자는 적어도 최소한 에서만큼의 용서를 행해야 할 것이고 그러지 않는다면 그 또한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선지자 호세아는 여호와 그리스도께로부터 계시와 명령을 받아 미혼일 때부터 여러 남자들과 성적으로 문란하고 난잡한 관계를 가졌던 여인인 고멜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게다가 호세아는 고멜이 자신과 결혼한 후에도 다른 남자와의 간음으로 낳은 세 아이들을 자신의 자녀들로 받아들였고 심지어 자신과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다른 남자에게로 가버린 고멜을 찾아가서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데려오기까지 한다. 이러한 호세아의 행동은 단순히 여호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고 따르고자 하는 열심만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호세아에게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고멜이라는 여자이자 아내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을 것이고 호세아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깊은 사랑의 마음으로써 고멜의 반복되는 간음을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멜을 품는 호세아의 모습과 성품은 그리스도인인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어디까지 얼마나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이 된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인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라고 가르친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설령 아내의 악행으로 목숨을 잃을 지경에 놓이게 되더라도 아내를 내치거나 보복하려 하지 말고 차라리 목숨을 잃기까지 아내의 악행을 용서로 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 남편이 아내의 악행에 이렇게 행동한다면 세상에서는 어리석고 미련한 놈이라는 조롱과 비방을 듣겠지만, 주님께로부터는 거룩하고 경건한 순교자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절대적으로 헌신적인 사랑은 어느 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혼인하게 된 시점으로부터 매일매일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거나 버림받은 인물은 명시되지는 않지만, 여러 정황들을 살펴볼 때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그랬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복음서는 삭개오에 대해서 굳이 그의 키가 작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통상적으로 남들보다 약간 작았다는 것이 아니라 난장이로 취급될 정도로, 즉 장애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작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삭개오는 아마도 날 때부터 부모에게서 제대로 양육을 받지 못하고 지속적인 멸시와 학대를 당했을 것이고 마을사람들로부터도 측은지심보다는 조롱과 비방과 괴롭힘을 당해왔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마음속 깊이 마을 사람들과 부모와 가족들에 대해 지옥불과도 같은 증오심을 가지고 마을과 집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의 두뇌만큼은 작은 키를 보상이라도 하듯이 특별히 수리적인 셈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로마 정부의 인정을 받아 세리장이 되었고 세리장으로서의 지위와 명석한 두뇌와 마을사람들을 비롯한 가족과 부모에 대한 끝없는 증오심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고향에서 가정맹어호 같은 가렴주구로써 철저히 보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복수를 하면 할수록 커지는 것은 공허함과 더불어 계속 복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혐오감 뿐이어서 삭개오도 이에 극심하게 시달렸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진정으로 회심하게 되면서 그제서야 자신을 학대한 부모와 가족과 마을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를 거두고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그가 보복하기 위해 그들에게 저질렀던 잘못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가서 갈취했던 것을 전부 돌려주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부모가 자신들에게 저지른 자녀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그래도 어느정도 가능하지만, 반대로 자녀가 자신들에게 저지른 부모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부모에게서 제대로 양육을 받지 못하고 학대를 당해온데다가 커서도 부모가 뻔뻔하게 생활비를 과다하게 요구해 온다 하더라도 하늘의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부모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한다.
만약에 성도가 누군가에게서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정도로 전재산을 강탈 또는 사기를 당했다거나, 심각한 장애를 입어 불구가 된다거나, 사랑하는 배우자나 자녀가 괴롭힘이나 폭행이나 강간이나 살해를 당했다거나 하는 잔인하고 끔찍한 범죄를 당하게 된다면 과연 어디까지 용서를 해야하는지 솔직히 나로서는 확답을 내릴 수 없다. 더군다나 성도에게 그런 범죄를 저지른 자가 용서를 구하기는 커녕 도리어 뻔뻔하게 나오고 성도를 조롱하고 비방한다면 과연 성도는 그런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이 타당한지도 잘 모르겠다.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와 사도 바울의 예를 본다면 그런 악랄한 자들에게조차도 용서를 베푸는 것이 이상적인 신앙의 수준이겠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너무나 두려울뿐이다. 더군다나 이 세상의 법규는 너무나 불합리한 부분이 많아서 범죄를 저지른 악인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경우 지식적으로는 사적인 보복을 해서는 안되고 주님께 모든 심판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으로는 억울함과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어떻게든 당한 것의 몇배에 해당하는 보복을 사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솟아오른다. 그저 단지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간구함과 동시에, 주님께서는 성도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나 고난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모든 고난에는 반드시 피할 길을 내신다는 말씀을 믿고 그러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용서의 마음을 달라고 미리미리 간구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교회와 성도가 용서해서는 안되는 자들은 고의적으로 성경을 왜곡하고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목사, 이런저런 불법과 불의와 범죄로써 교회를 해치고 버리는 목사, 교회를 이용해서 자기의 탐심을 채우는 목사들이다.
#20211022
#신명기 #Deuteonomy 34:7-8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모세 시대에 120세 까지 정정하게 산다는 것은 통상적인 수명이 아니라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4,5백여 년 전 그들의 조상인 야곱은 147세까지 살았었고 요셉은 110세까지 살았었다. 야곱의 아비 이삭은 180세 까지 살았으나 그는 100세 정도부터 거의 장님처럼 살아야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을 날이 가까워 올 수록 몸이 쇠약해져서 병상에서 임종을 맞아야만 했었다. 따라서 모세가 120세 까지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던 것은 마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90세가 되어서도 젊은 왕들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움이 유지되었던 것처럼 전적으로 여호와의 특별한 돌보심 덕분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께로부터 120세라는 긴 수명과 더불어 육신의 건강을 받은 것은 그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게 해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인도해야 하는 아주 특별한 사명을 해나갈 수 있게 하시려고 부여하신 것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욥은 대략 60세 정도에 환난을 당하고 그 후에 140세까지 또는 140년을 더 살고 200세까지 살았는데 이는 그가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사탄에 의해 까닭없는 고난을 당한 것에 대한 여호와의 상급과도 같은 것이었다. 만약에 욥이 별다른 환난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100년을 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었다. 유다 왕조의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는 130세 까지 장수했는데 이는 악녀 황후 아달랴의 손에서 왕자 요아스를 살려내고 즉위시키며 그와 더불어 신앙개혁을 이루는데 쓰임받기 위해서 여호와께서 남들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인생의 연수를 부여하신 것이었다. 다윗의 충성스러운 용사 브나야는 다윗이 죽은 후 노년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을 섬겨 군대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었는데 이는 그렇게 여호와께 쓰임받기 위해서 특별한 건강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사도 요한은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거의 90세 넘어서까지 살았는데 이는 그가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라기 보다는 모든 사도들이 삶을 마친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으로 견고하게 세우고 예수님의 최후의 계시를 기록하는 거룩한 사명 때문에 육신의 생명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육신의 관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어떤 성경의 위인들이 누린 특별한 무병장수를 부러워하지만, 실상 그 인물들의 삶을 조금만 면밀히 들여다본다면 차라리 그렇게 오래 안살고 일찍 죽는게 낫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될 것이다. 야곱은 스스로 자기의 130년의 인생이 실로 험악했다고 고백하였고 모세는 40세 까지는 애굽의 왕궁에서 온갖 시기와 질투와 위협을 받고 80세 까지는 범죄자가 되어 도망하여 삶의 별다른 의미도 없이 무료한 목동으로서 살았으며 120세 까지는 매순간 끊임없이 배은망덕한 백성들의 반역 때문에 한순간도 평안을 누릴 수 없었다. 욥은 비록 새로운 재산과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었어도 그 140년 동안 자기보다 먼저 죽은 자녀들과 자기를 떠난 전처에 대한 안타까움을 간직하며 살아야 했다. 여호야다는 노년을 대제사장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만 지키며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으나 유다 왕가를 보존하기 위해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험악한 길을 자처하였다. 용사 브나야는 노장으로서 대우를 받으며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으나 군주 다윗과 솔로몬을 위해 군대장관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았다. 사도 요한은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복음 사역을 해왔던 동료 사도들을 하나씩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과 공감대를 나눌만한 동료가 없는 고독함과 최고 연장자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를 사랑으로 돌봐야 하는 막중한 의무와 인생의 마지막을 홀로 밧모 섬에 유배된 처량함을 맛봐야만 했다.
이처럼 성경의 위인들의 삶을 살펴봤을 때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인들처럼 육신의 무병장수를 바란다거나, 교회와 복음에 대한 헌신을 빌미로 바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전자는 아무런 목적없는 육체의 소욕을 위한 것이고 후자는 신앙을 빙자한 교묘한 탐욕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오래 살든지 일찍 죽든지 자기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주권에 맡기며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데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는 비단 무병장수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부귀영화는 물론이거니와 교회에서의 성령의 특별한 은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자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교회를 위해 사용하겠으니 남들보다 특별한 부귀영화나 성령의 은사를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특별하고 탁월한 부귀영화나 성령의 은사를 받은 신자들은 그것으로 자랑하거나 교만하거나 자만해서는 안되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겸손히 그리스도의 교회와 복음을 위해 선하게 베풀며 사용해야만 한다.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성경에는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데 이는 아마도 모세와 같이 그들의 겸손함이 작용했을수도 있다.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크게 세움받고 쓰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무익한 종이라 여겨 자기들의 치적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중 몇몇의 죽음에 대해서는 성경이 아니라 유대 전승이나 교회사를 통해서 간간이 전해질 뿐이다. 물론 그들의 숭고한 죽음을 알게 되면 우리도 어느 정도의 경건한 숙연함을 가질수는 있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죽음으로써 지켜내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죽음만 기리고 본질적인 것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한낱 우상숭배로 전락해버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중세시대 위대한 신앙개혁가들도 자신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는 개혁주의에서조차도 마치 로마카톨릭이 여러 성인들을 숭상하는 것처럼 신앙개혁가들을 비롯한 위인들의 형상을 만들고 탄생일과 사망일을 기리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모세를 위해 30일을 애곡한 이후로 모세에 대한 애도를 반복했다는 기록을 전혀 살펴볼 수 없으므로 이런저런 잡다한 이유와 빌미를 가지고 신앙개혁가 등을 추모하는 것은 단호하게 중단해야만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스라엘의 산당처럼 근절이 불가능할 정도로 끈질기게 자행되는 우상숭배는 성탄절이나 부활절과 같은 소위 예수님에 대한 기념일들을 지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성경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는데도 우상숭배자들은 일부러 이방종교신의 축제일을 예수님의 탄신일로 둔갑시켜서 마치 짐승이 사람들에게 짐승의 형상에게 절하고 숭배하라 하듯이 성탄절을 지키라 강요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매 주일마다 주님의 사역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되새길 신앙의 의무를 남기셨는데도 불구하고 용의 짐승은 일년에 단 한차례만 떠올리면 된다면서 사순절이니 부활절이니 성령강림절이니 하는 가증스러운 절기를 지키도록 미혹하였다. 그래서 짐승의 표를 받은 교회와 교인들은 이것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도 못한채 그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예인줄 착각하고 미혹되어 오늘날까지도 열심히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
교회가 죽은 자를 추모하는데 조심해야 할 것은 선대 목사가 죽어 장례를 치른 후에도 해마다 선대 목사를 기리는 예식을 행하는 것이다. 아무리 목사라 하더라도 죽은 이후에 해마다 추모하는 것은 가족들 차원에서 이뤄져야지 그것이 교회차원으로 확장되면 예배를 빙자한 우상숭배가 되어버리고 만다.
#20191022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1장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그리스도께서 첫 사람에게 주신 복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본떠서 그들을 지으신 것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정복하는 것과, 바다와 하늘과 땅의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는 것과, 채소와 나무 열매를 먹을 것으로 주신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신묘막측한 하나님만의 신비이다. 어떻게 남녀의 씨앗 세포가 만나서 하나의 수정체를 이루고, 또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단세포에서 세포분열이 일어나서 28주라는 기간을 여자 뱃속에 있다가 때가 되면 출산하게 되는지, 과학자들은 각 단계의 현상만을 관찰하고 수많은 경험치를 가지고 대응하는 정도일 뿐, 여전히 어떻게 왜 그렇게 될 수 있는지는 수많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의 생육 방식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진화론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생육을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 수컷과 암컷이라는 서로 다른 개체가 만나야 된다. 또한 그 사이에서 잉태된 배아는 일정 기간 여자와 암컷의 체내에서 자라야 한다. 임신 기간이 다다르면 여자와 암컷은 출산이라는 생명을 걸 정도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출산 된 태아와 새끼는 즉각적으로 자립할 수 없고 오랜 기간 부모의 양육을 받아야 한다. 인간의 경우에는 그 기간이 20년 내외로 걸린다. 게다가 자녀와 새끼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 생명도 내어 줄 정도인 부모의 사랑은 얼마나 눈물겹고 아름다우며 지극정성인가. 과연 이러한 현상들 중 어느 하나라도 진화론으로 명쾌하게 설명이 가능한 것이 있는가. 진화론이 맞다면, 서로 다른 개체가 만나는 것 보다는 각 개체가 자가복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자기 몸의 불편함과 생명을 위협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체내 임신과 출산보다는 체외 임신과 출산의 형태로 진화해야 하지 않는가. 인간의 경우 20년이라는 자녀 양육 기간은 진화론 입장에서는 얼마나 비효율적이며 소모적인가. 진화론대로라면 양육 기간은 점점 짧아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진화론에 따른다면 자녀와 새끼가 위협에 처하면 일단 부모가 희생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죽더라도 자기들이 살아야 또 다른 생육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왜 모성애, 부성애라는 불필요하고 낭비적인 본능으로 자녀와 새끼를 목숨걸고 지키려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진화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생육과 번성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이라고 하셨다. 물론 첫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임신과 출산에는 큰 고통이 있게 되었지만 그 고통마저도 인간을 겸손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복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부모는 서로 사랑하여 만나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그 모든 것이 비록 남들 다 하는 평범한 과정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지으시고 처음 주신 복을 받아 명령을 잘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에 충만하여 정복하고 바다와 땅과 하늘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주신 명령을 타락한 인류는 왜곡하여 자연 만물을 자기 유익에 따라 폭군처럼 함부로 해도 되는 것처럼 악하게 해석하였다. 그 결과 인류는 문명이 발전하는 만큼 지구 환경을 급속도로 파괴하게 되었고 동물들을 함부로 잡아들여 어떤 것은 멸종시키기도 하였다. 급기야 오늘날은 그런 자연 파괴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은 그런 폭압적인 것이 아니다. 만유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 까지도 아끼시듯이, 들의 백합화 한 송이도 입히시듯이 성심성의껏 잘 돌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삼으셔서 이 땅을 다스리게 하셨고 모든 생물들보다 인간을 높이신 것이다. 신체적 조건만 따지고 본다면 인간은 여러 동물들에 비해서 생존에 열등하고 뒤처질 수 밖에 없다. 진화론적으로 따진다면 당연히 인류는 생물의 최고점이 아니라 낮고 낮은 위치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류는 그런 열악한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물의 최고점에서 다스리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아니고서는 인간 스스로는 절대 불가한 일이다. 한가지 인간이 동물들에 대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애완동물에 대한 태도이다. 오늘날에는 1인 가구 등의 이유로 해서 소위 '반려동물'이라 하는 애완동물들을 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기들이 키우는 동물들에 지나친 애정을 쏟다보니 그런 동물들을 사람보다 더 높이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우스개 소리로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집사'라고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가 되었는데, 아무리 애완동물이 사랑스럽더라도 주인이 스스로를 동물을 섬기는 집사라고 칭하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인간과 동물 간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부적절한 표현이므로 매우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성경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적지 않은 부유한 교인들 중에는 애완동물을 위한 예배나 세례나 안수, 축복, 심지어는 장례까지 주관해 줄 것을 교회 목사에게 요청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요청을 받은 교회와 목사는 이것이 아무리 비성경적이라 하더라도 교회에 큰 이익을 주는 부유한 교인을 잃지 않기 위해서 들어준다. 이런 것들은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던져 주는 것보다 더 괴랄한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큰 복 중의 하나는 채소와 나무 열매를 먹거리로 주신 것이다. 물론 첫 사람의 범죄 이후에는 인간은 땀흘려 노력하지 않고서는 먹을 것을 얻기 힘들게 되었지만 태초에는 그들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풍부하였다.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우리는 수많은 채소들과 풍성한 열매들을 먹을 수 있는데, 태초의 동산에는 그것들이 얼마나 더 크고 탐스럽고 아름다웠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식도락이라는 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이므로, 그리스도인이라 하여 먹는 즐거움을 지나치게 죄악시하여 극도로 제한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걷어차는 불경한 일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먹는 즐거움을 탐하지도 말고 거부하지도 말며 각자의 형편에 따라 적절히 먹는 즐거움을 추구하며 누리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사실 오늘날에는 이 적절한 식도락을 누리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소위 '먹방'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을 조장하고, 음식 트렌드는 은근한 맛 보다는 점점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비주얼과 맛이 인기를 끌며, 이와는 반대급부로 인형 같은 가녀린 외모를 위해 거식증 수준의 극단적인 다이어트 방법이 활개를 치고 있다. 자기 주관보다는 남들의 시선과 과시욕, 돈벌이 수단 등으로 인해 먹는 것으로 자기 몸을 자기도 모르게 혹사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폭식, 거식, 편식 등 비정상적인 식습관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