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군(敍川郡) 이야기
나는 서천군(敍川郡)을 처음 와 본다. 요번에 서천(敍川)을 들리게 된 것도 솔직히 말해서 서산군(瑞山郡)과 서천군(敍川郡)을 혼동해서 이번 기회에 삼존마애3존불상(三尊磨崖釋佛像)을 보고 온 곳이 서산이 아닌 서천이었다.
서산(瑞山)은 명산 가야산(678m)이나 무학대사가 세웠다는 간월도의 간월암(看月庵), 천주교의 순교지 해미읍성(海美邑城), 안면도(安眠島) 등으로 유명한 서산(瑞山)이 더 익숙하여 혼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혼동 덕분에 처음 보는 서천(敍川)의 이모저모로 견문을 넓혀 마음에 간직하게 된 것이 서산에 간 것보다 더 기쁘다. 오는 교통편은 롯데 관광버스를 이용하였는데 일행 41명들은 부부는 없었고 대개 우리 KCCA 회원들처럼 같은 취미나 또래들의 중년 이상 남녀들의 모임들이었다.
서천군은 충청남도 서남부에 위치해 있는 군(郡)으로 동쪽에 부여군, 서쪽에 황해, 남쪽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전라북도 군산시와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보령시와 접하고 있는 인구 78,073명(1999년 12월현재), 면적 357.67㎢인 군으로 옛날에는 백제 땅이었던 곳이다.
서천은 충청도(忠淸道)란 이름에 걸맞은 충렬(忠烈)의 고장이기도 하여 고려 충신 이색(李穡)과 일제 강점기에 독립투사 월남 이상재(李상宰) 선생을 를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다.
*. 춘장대(春長臺)해수욕장
우리들(KCCA 영상모임)이 서천에 와서 제일 처음 들린 곳이 '춘장대해수욕장'(서천5경)이었다.
춘장대 해수욕장은 '서천 10경중 5경'으로 바다는 1.5도의 완만한 경사로 멀리 홍원항과 마량포구를 바라보며 은빛 모래 해변이 전개되는 이 해수욕장을 둘러싼 울창한 해송과 어울린 천해의 해수욕장이다.
지금보다 이전에 서천에서 가장 가장 유명했던 해수욕장은 '동백정해수욕장'이었으나, 1980년대 초 서천화력발전소가 설립되어 해수욕장이 폐쇄되는 바람에 새롭게 부각된 곳이 춘장대해수욕장이었다. 그런데 춘장대(春長臺)란 무슨 뜻일까?
옛날 이 근처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백이, 평원, 뒷개라고 부르던 곳이었으나 이 일대의 부지는 민씨(閔氏)의 민간사유지로 그는 이 곳에다 서너 개의 방갈로를 만들면서 자기의 호(號)인 춘장(春長)을 따서 춘장대(春長臺)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서천군에서는 해마다 증가하는 피서인파로 그 개발을 하고자 하나 사유지에다가 소유주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로 애로가 많은 모양이다.
점심 시간이어서 금강산도 식후경(金剛山食後景)이라 우리는 서산시장으로 간다.
서산시장에서 제일 크다는 이 어시장은 노량진어시장 같이 1층에서는 요즈음 한창인 전어(錢魚), 대하(大鰕), 게, 회(膾)와 조개 등을 팔고 2층은 거기서 사서 떠온 고기에 술과 양념값을 치르고 먹는 곳인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황해 바닷가 근처인데도 어패류 값이 서울보다 싼 것 같지가 않다.
서천을 찾는 관광객들이 다시 서천을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라면 지금보다는 수산물 값을 조정하여야겠다는 생각이다. 부자들이라도 쌈직한 곳을 찾아 다니는 세상이어서 하는 말이다.
*. 문헌서원(文獻書院)
문헌서원(文獻書院, 충남문화재제125호, 서천6경)은. 고려의 대학자인 가정 이곡(稼亭 李穀)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牧隱 李穡) 선생 등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사원이다.
이색은 한산면(韓山面)이 고향으로 한산 이씨(韓山 李氏)다. 고려말 우왕(禑王)을 도우면서 문하에 권근, 김종직, 변계량, 정도전 등을 배출하여 성리학를 이어가게 하였다. 원(元) 나라에도 수차례 가서 원(元)의 과거시험 회시(會試)와 전시(殿試)에 1, 2 등을 하여 원 나라의 한림원 등 벼슬 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그를 불렀을 때 "망국의 대부에게는 앉을 자리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귀양살이를 사서 하다가 여강(驪江) 나루에서 독주를 마시고 목숨을 거둔 고려말 충신이다.
우리들은 목은 이색을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여말 삼은(麗末三隱)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중 이색은 고등학교 고전교과서에 다음의 시조의 지은이로 널리 알려진 분인 것을 보면 '인생은 짧고 예술이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말을 실감하게 한다. .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이셔 갈 곳 몰라하노라.
위 시조에서 백설은 고려 중신들이요, 구름은 조선 초 신흥 세력들이고, 반가운 매화는 고려 유신에 대한 은유요, 석양은 고려의 멸망을 상징하는 것이다.
서천군은 인구 8만 이외에 이동 인구가 적은 곳인 데다가 충청도에서도 땅 덩어리마저 작은 군이다. 충청도에서도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데다가 이렇다 내세울 광광 자원마저 빈약한 곳이다.
게다가 60년대 세워진 서천군민의 자랑인 제련소와 화력발전소는 아황산가스를 내뿜어 농산물이나 바닷고기에 피해가 막대하여서 서천군민에게는 덕보다 해가 더큰 모양이다.
문헌서원(文獻書院)의 그림 '1' '홍문살문'을 오르기 전에 좌측에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이 문헌서원 '시우(時雨)'로 예약 손님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옥민박촌이다.
홍살문을 지나다 보면 멋진 좌측에 '3' 정자가 있는 '2' '연지(蓮池)'가 보인다. 거기서 직진하여 서원의 입구인 '4' '진수문'을 들어서면 왼쪽 건물이 서재인 '5' '서척재'요, 오른족이 '6' '존양재'로 유생들이 거쳐하며 공부하는 기숙사다.
유생들이 모여 강학이나 강화를 하던 '7' 진수당'을 지나 중앙 계단으로 '8' 신문이라 불리는 '경현문'을 지나면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9' '효정사'가 보인다.
이색의 영정(보물 제 1215호) 초상화는 '11' '목은 이색선 영당'에 모셔있다. 영당 좌측에는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어 천년 전의 이색 선생의 충렬을 기리는 것 같다.
배롱남란 목백일홍이라고도 하는 백일 동안 꽃이 지고 피는 나무로 그 수피를 긁으면 잎이 흔들린다 하여 '간지럼나무'라고 부르기도 하는 나무다.
이색 선생의 묘에 참배하고자 하는 사람은 '19' '천년 마중 솔바람길'로 오르면 기린산 중턱에 '18' '목은 이색 선생의 묘'가 있다. 이 묘자리는 명당 자리로서 무학대사가 정해 준 곳이라 한다.
향교(鄕校)가 시골에 있는 문묘(文廟)와 거기에 부속된 국가 기관에 해당하는 옛날 학교라면, 서원(書院)은 선현(先賢)의 뜻을 기리는 제사(祭祀)의 공간이면서 학교, 도서관, 출판의 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곳이니 문헌서원에 와서는 옛날 우리들의 조상들이 다니던 학교 구경을 하는 마음으로 견학할 일이다.
*. 신성리 갈배 밭
'아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 고복수가 불렀다는' 짝사랑' 노래와 육여사 서거 5년 후 장모님 팔순 생신날에 박정희 전대통령이 불렀던 '으악새'란 무슨새인가.
사전에는 "으악새: 억새의 방언. 왜가리의 방언"으로 새[鳥]로, 억새로도 나오는데 '으악새 우는'이란 가을에 억새가 바람에 흔들려 서걱서걱 소리나는 것을 운다고 인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혼동 되는 것이 억새와 갈대다. 모습도 비슷하거니와 피는 시기도 가을이기 때문이요, 둘 다 볏과에 속하는 여러해 살이 풀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둘을 비교하여 말한다면 억새는 산에서, 갈대는 축축한 곳이나 물가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억새 잎은 지붕을 잇거나 소와 양의 먹이로 쓰이고, 갈대는 삿갓이나 삿자리(갈대로 엮은 자리) 재료로 쓰인다.
서천 8경중 4경이라는'신성리 갈대밭'은 금강(錦江) 가에 있다. 그래서 신성리 억새밭이 아니라 신성리 갈대밭인 것이다. 서울 난지도의 가을 볼거리가 갈대밭이 아니라 억새밭인 것 같이.
신성리 갈대밭은 아직 한창이 아니어서인지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았지만 곳곳에 이곳이 영화 '추노', '공동구역' 등의 촬영 배경지임을 알리는 사진 등이 보인다. 우리들은 영화 촬영 배경지이기 때문에 유명한 신성일갈대밭이 아니라, 신성갈대밭이 아름답기에 촬영소 장소가 된 것이라는 것을 착각하지 말기를-.
우리 KCCA일행은 그 갈대밭 속에 마련된 의자에 모여 소곡주를 먹으며 서천여행을 즐겼다. 우리는 낭만과, 추억,그리고 힐링이 살아 숨쉬는 고장 서천의 명승지 신성리 갈대 밭에서 살아 있다는 기념을 남기기 위해서 소곡주(小麯酒)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소곡주(小麯酒) 이야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주는 무엇일까. 충남 무형문화재 제 3호라는 소곡주(
小麯酒)다. 소국주의 원래 이름은 소국주(小麴酒)였다. 그 소국주가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 오다 보니 '소국주'보다 발음하기 편한 '소곡주'로 발음이 정착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를 국어학에서는 음편현상(音便現象)이라고 한다.
소곡주를 한자로 小麯酒(소곡주)라고 하는 것은 누룩의 한자어가 '麴'과 '麯'이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소국주'만 나온다. '소곡주'는 변한말 아니면 방언으로 취급하는 것 같다.
소국주: 찹쌀로 밑을 하여서 썩 잘 담근 막걸리의 한 가지로 충청도 한산에서 나는 소국주가 특히 유명하다.(小麴酒, 少麴酒) - 우리말큰사전 한글학회)
소국주(小麴酒)란 한자의 뜻은 누룩을 적게 넣어 만든 술이라는 뜻인데 누룩을 적게 사용하면 술빛깔이 맑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향기를 간직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국주는 약리 효과도 있어 말초혈관을 확장하고 혈압강화 작용이 있어 고혈압 방지에 좋다 한다.
좋은 경치나 물건에는 이에 따른 멋진 이야기가 전하는 법이다.
- 옛날에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선비가 한산의 주막에 들렀다. 컬컬하던 참에 소곡주에 궁합이 딱 맞는다는 미나리 무침을 안주로 하여 찰찰 넘치게 한 잔을 기울이니 맛이 천하 일품이었다. 이에 선비는 보짐을 풀어 놓고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한 잔 두산 마셨다. 달이 뜨니 취흥에 겨워 시로 음풍농월하며 낮이 되면 잠들고-. 그러다가 그만 과거 날짜를 놓쳐서 과거를 포기하고 집으로 내려갔다 하여 그후로는 '앉은뱅이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호암리는 백제때부터 명주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어 이 마을을 소곡주 마을, 또는 앉은 뱅이 마을이라 하였다 하니 이 술의 역사가 1,500년이 되는 것 같다.
-시집와서 소곡주 담그는 법을 전수 받은 어느 며느리가 술맛을 보느라고 젓가락으로 찍어 먹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취하여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은뱅이처럼 엉금엉금 기어다녔다 하여 소곡주를 '앉은뱅이술'이라고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소곡주의 알콜 돗수가 소주와 비슷한 알코올 농도가 16도이기 때문이었다.
-백제가 멸망 된 후 그 한을 달래기 위하여 한산 건지산 주류성에서 백제 유민들이 소곡주를 빚어 미시며 그 한을 달랜 술이 소곡주다.
*. 서천군민(敍川郡民)에게 드리고 싶은 말
처음 온 서천을 떠나면서 거기서 수집한 지도를 놓고 살펴 보니 서천군은 군(郡) 북쪽 보령시의 대천해수욕장은 서천 해수욕장보다 더 교통이 좋으며 유명합니다. 동쪽 부여군에는 명승지 낙화암과 백마강이 있고, 남쪽으로는 금강 건너가 대도시 군산(群山)이니 서천시는 충청도에서도 변두리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낙후될 수밖에 없는 지역인 것 같습니다.
서천군에서 제일 인구가 많다는 장항항도 와서 보니 군산항에 눌리어 그 보조 역할을 하는 항으로 전락된 것 같았구요, 서천시에는 이렇다 내세울 문화재도 별로 없구나 생각했구요. 위에서 말한 문헌서원 이외에 비인면의 '오층석탑'(보물 224호), 한산면의 '건지산성'(사적 60호), 서면 '마량리의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169호)가 고작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쪽의 황해에 인접한 리아스시식 해안선의 길이가 70km나 된다지만, 서천에 큰 어향이 없는 것을 보면 수산업도 군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서천군은 대부분의 지역이 전통적인 농어촌 지역으로 지금은 잃어버린 시골 인심이 아직도 남아 있는 순수한 고장이 서천이로구나 했습니다.
전통이란 새로 창조하는 것보다 과거의 것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한산모시'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유산이고, 명주 '소곡주'는 대량생산하여 널리 보급하여 알려지게 되면 크게 서천의 발전에 기여할 문화유산인데, 서천에 관광 온 우리들마저 한산모시는 구경도 못하였고, 술꾼인 우리들도 소곡주를 찾아 서천 곳곳을 찾아다녀야만 했습니다. 소곡주를 파는 곳도 찾아 다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시장을 활성화 시키기 위해서는 서울 노량진 시장보다 더 비싸다는 인식을 서천에서는 불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오늘 점심으로 먹은 서천시장의 전어 회나 왕세우 대하의 값이 서울과 같거나 비싸다는 것이 소문나면 누가 있어 서천을 찾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서천에서 태어나 고향을 열심히 사는 문화해설사를 만났습니다. 그분의 열성 어린 해설 속에는 서천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한 노력이 있었고, 그분의 얼굴 속에는 서천에 대한 깊은 애향심이 넘쳐 있었고, 그분의 마음 속에서 우리는 서천 발전을 위한 간절한 희망과 함께 서천을 다시 찾게 하는 간절한 소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서천군민의 마음이 이 분 같아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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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정의 여행이라서 서천8경 중 세 곳만 둘러 보고 우리는 서울을 향한다.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하여도, 내 갈 곳은 나를 기다리는 아내가 사는 작은 아파드뿐~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