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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4 - 헤라클레이온 항구를 보고는 방파제를 걸어서 베네치아 요새에 가다!
2024년 4월 27일 그리스 미코노스 공항 Mykonos Airport 에서 비행기로 아테네
Athens 공항에서 환승해 14시 20분에 크레타섬의 헤라클레이온 Heraklion
(니코스 카잔차키스 ) 공항에 내려 시내버스로 엘레프타리아스 광장에 도착합니다.
차량이 다니지 않고 명품숍이 즐비한 걷기 좋은 다달루 거리 Dadalou St. 를 걸어서
2블록 헤라클레이온 Heraklion 의 중심부 베니젤로 광장 Plateria
Venizelou 에 도착하여 엘 그레코 호텔 El Greco Hotel 에 체크인후 다시 나옵니다.
베니젤로 광장 중앙에 위치한 모로시니 분수대 Morosini Fountain 는 수천명의 주민들에게
매일 식수를 공급해 주었으니, 라이온스 광장(Lions Square) 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400년전 중앙 수조를 지탱하는 네 마리 사자의 입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 입니다.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오디세이” 에서 “크레타라는 나라가 있다. 포도주 처럼 검붉은 바다 한복판에
있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이다. 주변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마을이 아흔개나 된다. 언어가 다르지만 서로
섞여 살고있는데 크노소스는 큰 성도로 미노스왕은 9년동안 왕위에서 제우스신의 법령을 베풀었다고 한다.”
성 마르크 바실리카 Saint Mark's Basillica 는 헤라클리온시의 아트 갤러리로 1239년에 지어져 성당 역할
을 했으나 듀크왕시대에는 왕의 묘지가 되었으며 2006년 국제 컨퍼런스장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건축물인 시청 City Hall : Heraklion Loggia 은 1628년에 도리아와 이오니아
양식으로 베네치아가 세운 로기아이니 사자와 문장의 부조등이 볼만한데,
아름다운 아치들은 밤이 되면 안쪽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와 더 매혹적이라고 합니다.
성 티투스 교회 Church of Saint Titus 는 크레타 독립후 961년에 세워졌으며 후기 비잔틴 시대에
크레타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는데, 화재로 소실돤후 터키 통치시 회교 첨탑을 세웠답니다.
우린 8월 25일 거리 25th Avgoa Stou 를 북쪽으로 걸어 엘 그레코 공원 El Greco Park 을 지나.....
완만한 언덕길을 내려가니 Leof. Nearchou 거리이고 그 앞에 헤라클레이온 항구가 나타나는데
미국이나 유럽의 항구들에는 예외 없이 이디에서나 보트와 요트가 꽉 들어차고 크루즈
유람선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을 보는데.... 요트들의 마스트가 숲을 이룬 모습은 참으로 볼만합니다.
이리클리온시의 큰 항구인 베네치아 항구 Old Venetian Harbor 는 400년간 이리클리온
(헤라크레이온)을 지켜온 곳으로 그리스의 여러 섬으로 떠나는 배들이 연일 드나들며
레스토랑과 상점과 관광안내소가 자리한 관광의 중심지로 알룩달룩한 어선들도
떠다니고 아스날리라고 부르는 구조물은 수리를 위해 정박한 배들이 머누르던 곳입니다.
크레타 역사박물관 Historical Museum Crete 은 크레타 역사를 전시하는 곳으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통솔 아래 1913년에 이룬 통일을 전시하고 도서관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의 자료들이 있으며 1층 11번 전시실에는 엘그레코의 “그리스도의 세례” 등이 볼만하다고 합니다.
방파제를 걸으니 육중하고 견고해 보이는 베네치아 성채 Koules Ventian Fortress & Walls
로 구항구 입구에 있으며 매일 18시까지 개방한다는데, 요새화된 헤라클리온은
중세풍 성곽에 둘러쌓여 있는데 1층에 군인 숙소와 식량, 무기고로 사용된 26개 방이 있고
2층에 성 마르코의 상징인 사자상이 나오며 항구와 요트, 베네치안 건물들이 장관을 이룹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새‘Koules Fortress’ 는 이라클리온에서는 “도시를 수호하는 사자의 이빨” 로 불리는데
16세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세운 요새로, 도시를 수호하는 방어벽이자 힘과 번영의 상징으로서,
당시 모습이 아름답게 남아 있는 요새에서는 군인들이 사용하던 방과 무기고, 감옥과 대포 등을 볼수 있습니다.
저 요새 ‘Koules Fortress’ 에서는 베네치아의 상징인 성 마가의 사자가 조각된 대리석 부조도
볼수 있으며, 높은 곳에서는 항구 너머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바다 풍경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입장료 2유로를 내고 베네치아 요새로 들어가는데 마눌이 뒤로 쳐지는
것은.... 울 마눌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입장료가 비싸면 비싸다고
안들어 가려고 하고 싸면, 별 볼것이 없을 것이니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주의입니다.
그래도 이 머나먼 곳 까지 왔는데.... 베네치아가 이 섬을 수중에 넣은후 이런 요새를
쌓고 이슬람 오스만투르크의 서진으로부터 유럽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던
유적들이니.... 요금을 떠나 볼 가치가 있다고 설득해서 함께 입장해서 둘러봅니다.
이탈리아 북동부에 작은 도시국가인 베네치아가 어떻게 해서 이 머나먼 에게해 남쪽의 섬인 크레타를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는데.... 로마제국이 동서로마로 갈라진후 훈족이 동유럽을 침범
하니 견디지 못한 게르만족들이 서쪽과 남쪽으로 달아나면서 로마제국의 국경을 넘어 쏟아져 들어옵니다.
서로마제국이 심한 피해를 입었으니 훈족과 게르만 고트족을 피해 도망치던 파두아, 아퀼레이아,
콘코르디아, 트레비소, 알티노사람들은 이탈리아 동북부에 얕은 바다인 석호 안으로
달아 났으니, 저 섬들은 토르첼로Torcello, 이에솔로Iesolo, 말라모코Malamocco 등 이었습니다.
섬 전체가 습지대였기 때문에 주거 환경이 열악했고, 지대가 물러서 제대로된 건물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고트족이 떠날 때까지 몇년만 머물 곳으로 여겼지만
고트족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는 이탈리아에 정착하니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피난민들은 어쩔수 없이 기한없이 머물만한 영구 정착지를 늪지대 위에 건설해야 했으니 물컹한
토층 아래 단단한 층까지 닿는 기다란 말뚝을 수직으로 섬 전체에 빼곡히
박는 것이었는데....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비로소 건물을 지어올릴 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몇년전에 보름간 러시아 배낭여행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이르쿠츠크에
내려 배이칼호수를 보고는 다시 모스크바를 구경한후 밤기차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내려 카잔성당을
보는데... 여기도 해안가라 지층이 무르니 말뚝 수만개를 박아 땅을 다져 사원등을 지었다던게 떠오릅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일대를 수복했을 때는 라벤나 총독부를 두어 통치했는데, 베네치아와 라벤나
는 바닷길로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독자적으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이 때 게르만 랑고바르드족을 피해 온 난민들이 오랜 기간동안 더 유입되었는데.... 최초의
중앙 상임통치위원회 tribuni maiores 는 568년 시작되었으니, 이 시기에
말라모코와 토르첼로 등 새로운 항구들이 건설되었고 점차 베네치아공화국으로 발전합니다.
중세 시대에 동방무역에 나선 유럽 도시국가들이 있었으니 이탈리아 서부에 제노바와 피사에 아말피이고
동부에 베네치아이며 크로아티아 서남부에 라구사라 불리웠던 두브로브니크니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베이루트등의 레반트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과 흑해지방과 무역합니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해 이스탄불이라 부르며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장악하자
저 5개 도시국가는 기독교세계에서는 원수로 이교도라 부르는 이슬람인들과 교역을 하게 되니 자연히
유럽인들의 질시와 로마 교황청의 눈총을 받게되면서... 세나라는 탈락하고 제노바와 베네치아만 남습니다.
이때 두 나라는 십자군전쟁의 와중에서도 동방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바다나 동방
의 도시에서 만나게 되면 상대방 배를 공격해 선원들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는
해적질을 하면서 네차례나 큰 전쟁을 벌였으니.... 약 20회에 달하는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제1차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예루살렘왕국등 5개의 기독교왕국이 세워진후
1144년 에데사 백국이 모술의 이슬람 태수 장기에게 점령되자 1145년에
프랑스왕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 콘라트 3세 가 이끄는
제 2차 십자군이 일어났으나.... 터키 땅에서 격파당하고 다마스크스성 공략에도 실패합니다.
1187년 7월 예루살렘왕이 이슬람 살라딘군에 하틴의 뿔 전투에서 패배하고 성지 예루살렘성이 점령
당하자 제3차 십자군이 결성되는데, 현지 십자군에 유럽에서 도착한 십자군이 합세헤 아코성을
공격하는 중에 영국왕 리처드와 프랑스왕 필리프가 가세하니 성을 점령한 후에 필리프왕은 귀국합니다.
3차 십자군 2만명은 영국왕 리처드 1세가 비용과 지휘를 책임지게 되면서 남하해 1191년 9월
7일 아르수프 전투에서 이슬람 살라딘의 4만 군대를 격파하고 야파(텔아비브) 마저
점령하고는 1192년 6월 7일 예루살렘을 공격했지만 공략이 쉽지 않았고 이집트를 치는
것도 어려운데다가 동생 존이 왕위를 노린다니 1192년 9월 2일 휴전협정을 맺고 귀국합니다.
살라딘은 야파에서 티레까지 이어진 십자군 영토를 존중하기로 했으며 또한 기독교도들의
순례를 보장했으니 트리폴리와 안티오키아 영주들도 참여할수 있었고 대신
리처드는 아슈켈론의 성벽을 모두 허문 후에 살라딘에게 돌려주니 십자군 기사들은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 예수의 성묘를 찾아 참배했고... 이후 순례자들도 참배가 허용됩니다.
이후 제4차 십자군이 일어나게 되는데.... 오늘날 크로아티아 서북쪽 아드리아해의 항구 도시
자다르는 예전에 로마시대에 기원을 둔 도시로 원래는 "자라" 라고 불리었는데
베네치아가 해상무역으로 성장하면서 영향하에 들어갔으나 1200년경에 남진해온
헝가리에 점령당하니.... 베네치아는 해상무역 루트의 중심 자라를 잃게되어 속앓이를 합니다.
이 무렵인 1198년에 프랑스왕 필립 오귀스트의 조카로 상파뉴 백작인 22세의 청년 티보 성주가
상파뉴에서 마상 창시합을 주관하니... 당시 프랑스 상파뉴 마상 창시합에는 많은 귀족들이
참가 했는데 영국왕 리차드의 조카로 블루아 백작인 27세 청년 루이(리처드 조카) 도 있었습니다.
이 마상 창시합 대회에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가 보낸 수도승 이 나타나서 성지
예루살렘 수복을 위한 "제4차 십자군" 을 제창하니... 귀족들은 분위기 탓이었는지
아님 체면 때문이었는지 모두 젊은 혈기로 분기탱천해서 십자군 참가를 맹세 합니다.
해서 베네치아는 십자군 수송 계약에 따라 엄청난 숫자의 배를 새로 건조 했지만... 준비 도중
에 주장인 상파뉴 백작이 27세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으면서 베네치아에 집결한
4차 십자군의 숫자는 예정 인원의 3분지 1에 불과하니 심각한 “재정문제” 가 발생하니
티보 성주가 죽으면서 나눠준 재산을 받은 기사 조차 참가하지 않은 자가 적지 않았답니다?
이에 노회한 베네치아의 도제 단돌로는 제4차 십자군이 배 운임을 지불하지 못하는
것을 약점으로 잡아 우선 아드리아해 의 헝가리 도시 자라를
점령해 주면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 삯을 탕감해 주겠다고 십자군을 유혹하게 됩니다.
프랑스 십자군은 베네치아 도제 엔리코 단돌로를 따라 같은 기독교 국가인 달마티아의 자라를 침략해 도시를
함락하니 교황청이 진노해 파문을 당하자 프랑스 십자군은 사죄 사절을 로마로 보내 간신히 용서를
받지만 .... 이미 “정교분리” 로 대응해 온 베네치아는 로마 교황청의 파문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베네치아의 도제 단돌로는 이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이집트를 공격하기 전에
쫃겨난 비잔틴 황태자를 복위시키기 위해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전리품을 서로 나눈 후에..... 새 비잔틴국의 지원으로 이집트를 공격하자고 십자군 지휘부를 꼬드깁니다.
배 삯인 돈이 떨어진 몽펠라토 후작, 플랑드르 백작, 블루아 백작, 생폴 백작 등
십자군 지도부는 비잔틴 함락 후에는 로마 교황청이 수백년간
간절히 바랐던 "그리스 정교를 로마 카톨릭" 으로 합친다는 유혹 에 넘어 갑니다.
이제 베네치아의 늙은 원수 단돌로는 십자군 수뇌부를 꾀어 이집트로 가기 전에
몇년 전에 삼촌의 반란으로 왕좌에서 쫃겨난 비잔틴 황자 알렉시우스 를
복위시키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해 함락시키니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천도한 이래 9백년 가까이 이어져온... 동로마 비잔틴제국은 무느집니다.
십자군들은 비잔틴 제국을 점령해 왕이 되고 제후가 되어 넓은 땅을 얻었으니 등따시고 배부른데
십자군 따위야? 이렇게 십자군이 소멸하니 화장실 갈 때와 돌아올 때는 다르다고 했던가요?
베네치아도 자기 몫을 배분받았으니 콘스탄티노플 상권은 물론이고 크레타등 영토를 차지합니다.
1203년 6월 24일, 십자군 - 베네치아 대함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앞 마르마라 해에 도달해 금각만
너머의 갈라타를 공략하자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3세는 바다와 강 사이에
쳐 놓은 쇠사슬을 지키기 위해 애썼지만 실패하니 금각만을 차지한 십자군이 성을 공격해 옵니다.
7월 17일 2차 총공격이 감행되자 알렉시오스 3세가 직접 지휘하는 등 공방전은 격렬했는데 난공
불락의 성벽과 방어자로서 이점을 가진 동로마 측의 수비력이 공격군을 능가하자
베네치아 단돌로의 격려로 25개 망루를 점령 하기도 했으나 바랑인 친위대가 투입되니 퇴각합니다.
하지만 연합군이 퇴각하면서 지른 불이 대화재로 번지면서 시민들이 황제를 비난하자 악화된 여론과
전력의 부족을 통감한 알렉시오스 3세 황제는 외부에서 지원을 끌어오기 위해 정예병과
돈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니 시민들은 과거 황제였지만 맹인이 되어버린
이사키오스 2세와 십자군이 내세운 아들 알렉시오스 4세 부자를 공동 황제로 올리기로 합의합니다.
십자군이 보상금을 내라고 닦달하자 알렉시오스가 돈을 가지고 떠난뒤로 금고가 비었으니 황제는 시민들
에게 세금을 추가로 물리고 황실의 보물과 성물을 팔고 교회의 재산을 징발하여 돈을 긁어
모으자 시민들에게서 불만이 터져나왔고, 교회는 로마교회로 통합에 대한 밀약까지 듣게되니 분개합니다.
게다가 아들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에 의해서 황제가 된 만큼 십자군이 물러나면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십자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그들에게 돈을 추가로 약속하며 자신의 호위
까지 맡겼고, 그를 통해 베네치아인이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니 귀족과 시민들은 더욱 분노합니다.
폭동이 터져서 수도에 거주하던 라틴인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분노한 십자군이 보복에 나서 무슬림
뿐만 아니라 정교회인들까지 연합군에게 학살되자 시민들은 연합해 민병대로 반격에 나서자 열세에 몰린
십자군은 도망치기 위해 불을 질렀고, 또 대화재로 번져 수일간 도시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해 적의가 감돕니다.
이에 황제 경호대장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부자를 구금하는 와중에 이사키오스
2세가 미심쩍은 죽음을 맞았고 결국 2월 초에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스스로를 알렉시오스
5세 황제로 선포한후 군대를 모집해 십자군을 공격했지만...... 별 성과가 없는 중에
십자군이 옹립한 알렉시오스 4세가 교살되자 분기탱천한 십자군과 베네치아는 재공격에 나섭니다.
베네치아측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십자군과 연합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전리품 분배와 사후
계획을 논의하는데..... 4차 십자군은 돈도 못 받고 성지 구경도 못하게 된
판이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전리품을 얻고 빚도 갚자는 의견이 대세가 됩니다.
베네치아는 비잔틴령의 주요한 도시와 섬, 항구 등을 가지게 되면 각종 상품을 독점적으로 취급할 수
있었고, 동방 항로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며 게다가 당장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
시키면 경쟁 상대인 제노바를 동로마에서 쫓아내고 흑해 무역을 독점할 수 있다는데 결심을 굳힙니다.
알렉시오스 5세 황제가 직접 지휘하고 시민들과 바랑인 친위대가 투입되는 등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으나,
한번 함락된 성벽은 1차 공격 때 만큼의 역할을 못 했으니 4월 12일 십자군은 성벽을 점령해 교두보
를 확보하자 황제는 전의를 잃고 황도를 빠져나갔으며..... 9백년을 이어져 오던 동로마의 찬란한
유산을 담은 성지이자 제 2의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사상 최초로 기독교인의 손에 의하여 함락됩니다.
4월 13일 약탈에 굶주리고 악에 받혀 동로마인들을 증오하는 2만명 십자군과 베네치아 병사
들은 관례 대로 3일간의 약탈을 요구했으니.... 십자군 지휘부 역시 보상금을 완불
하지 못한 동로마를 증오하며 그들도 약탈을 강하게 바랬으니 대약탈이 시작되었습니다.
눈에 띄고 손에 닿는 모든 것들에 대해 파괴, 약탈, 방화가 벌어졌으니.... 교황의 사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성소 역시 오물이 갈겨지고 파괴되며 불살라졌고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남녀노소, 귀족, 성직자들을 가리지 않고 폭행, 살해, 강감, 납치가 가해져 소녀,
처녀, 유부녀는 물론 고귀한 귀족 여성들에 수녀들까지 끌려나와 십자군에게 능욕을 당했습니다.
고대 로마 때부터 전해 내려온 예술품, 유물, 성물도 마찬가지였으며 판토크라토 수도원의 묘역에 있는 황제의
능이 파헤쳐져 관이 끄집어 내져 부장품들이 약탈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유골에 햅도몬 궁전에
안장되어 있던 바실리오스 2세의 묘역도 파헤쳐지고, 시신은 길거리에 질질 끌려 다녀지다가 내버려졌습니다.
소위 기독교 십자군의 면모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이 었으니.... 천여년을 이어 오던 성당의 많은 성화들도
이교도(로마 교회에서 동방정교를...) 가 그렸다고 파괴되고 손상됐으며 그리고 새롭게 가톨릭 화가가
그린 성화로 채워졌다가..... 오랜 후에 도시를 탈환한 동로마인들이 이를 다시 지우고 새로 그려야 했습니다.
3일간의 지옥 끝에, 십자군은 은 90만 마르크에 달하는 전리품을 약탈해 본전을 넘어선
큰 수익을 벌었으며..... 남은 것은 거리에 수십만의 시신과 난민, 폐허만 남은
도시였으니 가장 부유하고 유서 깊은 황제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그렇게 몰락했습니다.
십자군 기사들은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에서 글 쓰는 흉내를 내면서 동로마인들을 조롱했는데, 동로마인들이
글쓰는 데에만 골몰해 나약하다고 비웃는 퍼포먼스였으니 당시 서유럽에서 글을 쓸줄
아는 사람들은 성직자 같은 극히 소수의 지식인 뿐이었고, 기사들은 문맹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글자는 나약한 자나 쓰는 것이니 모르는게 자랑이라? 300년이 지난 16세기 잉카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등 스페인 정복자들도 글을 쓸줄 몰라 자기 이름을 미리 새겨놓은 금속판을 대고 문서에 서명해야
했으니 조선 선비들을 나약하다고 생각한 중세 일본 사무라이들과 사고방식이 너무나도 유사한데 놀랍니다?
베네치아 측에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영토 3/8 을 분배하고 나서, 나머지 5/8 의 영토에는
"로마 땅의 제국(Imperium Romaniae)" 이 들어섰으니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도가 되었으며, 테살로니키,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이 왕국과 공국으로 배분되었습니다.
라틴 제국 :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시오가 제위를 바랐으나 꺼려한 베네치아는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6세
를 미니 5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치러 보두앵 1세가 되었지만 황제는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에 패사하였고 이후 니케아 제국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아테네 공국 : 프랑스 기사 오토 드 라 로슈가 다른 참가자와 함께 동로마의 영토를 나누어
아테네를 차지하면서 생기는데, 이후 1311년 해고된 카탈루냐 용병대가
아테네 공 발터가 이끄는 군대를 공격해 전멸시키고 1390년까지 아테네 공국을 지배합니다.
아카이아 공국 :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이 테살로니카 왕국의 지원을 받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세운 나라
인데 코운투라스의 올리브 숲 전투에서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이끄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군대를 격퇴했고, 테오도로스 주교등이 이끄는 동로마 잔존 세력을 토벌하여 향후 200년 동안 존속합니다.
테살로니카 왕국 : 베네치아의 반대로 라틴 제국의 황제가 되지 못한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초가 라틴
제국으로 부터 독립하여 세운 왕국으로 아테네 공국과 아카이아 공국을 봉신으로 삼았으나,
건국 초부터 불가리아 차르국의 침공에 시달렸고 20년 만에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침공으로 멸망합니다.
니케아 제국 : 라스카리스 가문의 테오도로스 1세가 니케아로 탈출해 세운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잔존국이며,
테오도로스 1세와 요안니스 3세라는 걸출한 명군이 등장하여 십자군 국가들과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여 로마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하는데 훗날 1453년에 오스만 투크크에 멸망당합니다.
트라페준타 제국 : 옛 콤니노스 왕조 출신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 알렉시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 공격받자 차지한 근거지인 트레비존드에서 자립, 알렉시오스 1세로 칭제했지만 니케아
제국에 막혀 서쪽으로 더 세력을 키우지 못한 채 지역 소국에 머물렀고 훗날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합니다.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 옛 앙겔로스 왕조 출신으로 두카스 왕조의 외손인 미하일 1세가 이피로스
에서 자립하여 세운 잔존국으로 초기에는 라틴 제국의 황제 피에르 1세를 생포해 옥사
시키고 보니파시오 1세를 전사시켰으며 테살로니카 왕국을 멸한 뒤 '테살로니카 제국' 을 칭한후
아드리아노플까지 점령해 제국의 재건 직전까지 갔으나 불가리아 제2 제국에게 크게 패해버립니다.
큰 이익을 본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드리아해의 여왕' 정도가 아니라 동지중해의 여왕이 되었으니 제 4차
십자군 전쟁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해상제국으로 변모한 기점이 되었으니아드리아 해에 접한
코르푸, 케팔로니아 섬에, 에게해에 있는 크레타를 필두로 하는 수많은 섬들에다가 육지의
주요한 여러 항구 및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하는 갈리오폴리스 까지 획득하여 흑해 무역을 독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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